• 한서화 장편소설 '레드' /북한 첩보 액션스릴러

  • <2>후계자

    “빵! 빵~! 빵~~~!”

    봄의 끝자락에 달라붙은 어느 날. 남성의류를 제조·판매하는 주식회사 나반(那般)의 3층 창가에 한 사내가 팔짱을 낀 채 있었다. 감사팀장 나현우였다.
    구두·팬츠·상의·재킷 모두 실루엣의 아름다움을 강조한 ‘이탈리안 스타일’로 코디했다.
    현우는 싸늘히 식은 자판기 커피를 들고 있었다. 그것은 생각의 그릇처럼 보였다.
    갑자기 현우가 들고 있던 커피를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아침을 혼란스럽게 만든 갈등에 마침표가 찍혔음이 분명했다.

    “동해 씨, 실사(實査)는 이번이 처음이지?”

    “예, 팀장님. 마치 군대에서 대간첩작전을 나가는 것처럼 약간 흥분도 되는데요. 히~.”

    “어느 면에선 긴장하는 것보다 흥분하는 쪽이 더 나을지도 몰라. 아무튼 홍 대리가 내리는 지시사항만 잘 따르면 별 문제는 없을 거야.”

    “옛설!”

    현우는 감사팀 대리 입사 4년차 홍석우, 그리고 신입직원 천동해와 함께 스포츠유틸리티(SUV) 차량을 타고 도심을 질주했다. 고등학교 선후배 사이인 석우와 동해는 자라온 환경이 비슷해서 그런지 모던과 클래식을 적절히 아우르는 최신형 ‘포멀 웨어’를 한껏 차려입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말투는 패셔너블한 옷차림새와 달리 다소 투박하고 정감이 넘쳤다. 그에 비해 현우는 조금 더 클래식하고 심플했다. 세 사람의 그런 부조화만큼 차 안도 어색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 ▲ 나현우 이미지~~~
    ▲ 나현우 이미지~~~

    [북한의 절대권력자 김정일. 김정일 사망 당시, 초미의 관심사는 바로 한반도 정세의 불투명성과 유동성이었습니다. 때문에 일부에선 북한 급변사태의 현실화까지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현재 그 전망은 비현실적인 판단이었음이 입증됐습니다. 물론 북한은 다시 한 번 국제사회에 ‘정보의 블랙홀’임을 확인시켰습니다. 위원장님. 가장 먼저 이토록 철저하게 폐쇄적이고, 고립된 북한의 김정일은 대체 어떤 인물이었습니까?]

    [제가 경험한 김정일은 한마디로 잔혹함과 비정함만 갖고 태어난 인간입니다. 또한 가장 야만적이고, 노련하며, 무자비했던 독재자입니다. 물론 그 절대권력은 북한 주민들을 ‘홀로도모르(Holodomor·인위적 기근에 의한 대학살)’로 내몰고 차지한 것입니다. 즉 인민 통제 시스템을 통치수단으로 적극 활용한 사람이 바로 김정일입니다.]

    [‘마음의 벽이 하얗다면 국민은 벙어리다.’라는 말이 북한 수뇌부에 꼭 필요한 말 같습니다.]

    [김정일은 조직적이고, 무자비한 국가폭력을 동원해 주민들의 무의식까지도 충성을 강요했습니다. 그리고 김일성의 혁명위업을 계승한 ‘백두혈통’으로서 자연스럽게 신격화시켰습니다. 그런데 그도 결국 죽었습니다.]

    [2010년 9월. 44년 만에 노동당대표자회가 열렸죠. 거기서 20대 후반의 ‘김정은’이 조선인민군 대장 및 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과 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됐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2011년 12월 17일 최고사령관에 올라 군권(軍權)을 손에 넣었습니다. 더구나 올 4월 11일에는 노동당의 제1비서에, 4월 13일에는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으로 추대됨으로써 외형적으로는 권력승계를 마무리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후에 북한에서 벌어진 실제상황은 예상과 많이 달랐습니다. 비교적 조용하고, 차분했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여쭙겠습니다. 현재 마카오에 머물고 있는 장남 ‘김정남’과 차남 ‘김정철’. 이렇게 정적(政敵)인 두 형과 후계자 김정은이 권력투쟁을 벌일 가능성은 없습니까. 실제로 거침없는 성격에다가 승부욕도 강하고, 정치적 야심까지 많은 김정은이 노동당의 작전부 소속 공작원들을 동원하여 오스트리아에서 김정남의 암살을 시도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친형 김정철은 권력야욕과 정책능력, 리더십이 부족합니다. 때문에 복잡하게 얽힌 국제관계 속에서 북한의 실익을 챙겨야 하는 권력의 전면에 나설 위인이 못됩니다. 오히려 그보다는 김정은의 비호 아래 권력 장악을 도와줄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하지만 이복형 김정남은 후덕한 모습의 이면에 권력을 향한 집착을 숨기고 있습니다.]

    [김정남이 중국 공산혁명 원로의 자제들 모임인 ‘태자당’과 깊은 친분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그런데 저는 개인적으로 김정남을 볼 때마다 당(唐) 고종(高宗) 이치(李治)에게 항복한 연개소문의 장남 연남생이 떠오릅니다.]

    [김정남의 행보는 스스로가 ‘주체’를 부정하고 객체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물론 중국정부도 내란이나 폭동 등 북한에서 내부혁명이 일어나면 상황에 따라 김정남을 지렛대로 활용할 생각입니다.]

    [하지만 김정남이 북한을 속국화(屬國化)하려는 중국의 헛된 망상에 동조한다면 우리로선 절대 묵인할 수 없는 일이잖습니까?]

    [중국인민군의 북한 주둔은 현실성이 매우 낮습니다. 하지만 중국 입장에서 볼 때 북한은 분명 전략적 이익을 갖고 있습니다. 때문에 현재는 김정은 후계체제가 자기들의 국익에 얼마큼 부합하는지 계산 중입니다. 아무튼 실제로 그런 상황이 발생한다면 결코 좌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민족과 역사를 보존하는 길입니다.]

    [그럼 위원장님은 국내외 언론에서 ‘형제의 난’에 대해 지속적·반복적으로 언급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건 바로 북한 내부적으로 갖고 있는 3대 세습체제의 취약성과 김정일 사후의 불확실성 및 불안정성 때문입니다. 즉 김정은의 권력승계 과정이 김정일보다 안정감이 떨어지는 데 그 근원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1974년. 당시 김정일은 김일성의 항일빨치산 혁명동지인 최현을 비롯한 혁명 1세대의 추대를 받아 후계자로 내정됐습니다. 즉 형식적인 요식행위일지라도 사전에 충분한 시간을 갖고 북한 내부에서 민주적인 절차를 거쳤다는 말씀입니다.]

    [김정은 역시 후계수업을 받지 않았나요?]

    [하지만 김정은은 김정일 생존 시 사전 공론화과정 없이 김정일 독단으로 지명한 후계자입니다. 물론 사후 공론화과정의 필요성을 인식하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그 무게감과 비중은 훨씬 떨어집니다. 또한 독단은 어떤 경우든 편견으로 치우칠 가능성이 대단히 높습니다. 더구나 김정일이 권력을 넘겨받을 당시엔 북한의 정치와 경제가 비교적 안정돼 있었습니다.]

    [그 외에 안정감을 떨어뜨리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면 무엇입니까?]

    [북한의 정치체제와 제도는 원칙적으로 절대자 1인이 절대권력을 행사하는 유일지도체제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과도기적으로 집단지도체제로서 통치를 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북한의 권력 변화와 향방(向方)을 정확하게 분석하고 예측하기가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그 말씀은 상황 변화에 따라 집단지도체제의 누군가가 김정은의 역할을 대신할 수도 있다는 의미입니까?]

    [물론 김정은 후계체제에 반기를 들고 당·정·군의 핵심세력이 쿠데타를 일으킬 가능성은 수치상으로 엄연히 존재합니다. 하지만 가장 가능성이 높은 군부조차 쿠데타가 불가능한 조직입니다.]

    [그건 왜죠?]

    [북한은 모든 일에 군(軍)을 최우선시하는 ‘선군정치’를 합니다. 그 이유는 당·정을 비롯해 그 어떤 조직보다도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는 조직이 바로 군부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절대자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그런 조직을 반드시 필요로 합니다. 때문에 그런 군부가 다른 조직보다도 월등한 힘을 갖는 건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런데 북한 군부는 냉전시대의 경직되고 폐쇄적인 사고방식을 고스란히 갖고 있습니다. 더구나 통치능력과 관련해서는 ‘까막눈’입니다.]

    [그러니까 군부의 계산과 김정은의 정치적 야심이 맞아떨어진 은밀한 거래가 바로 후계자 내정이라는 말씀이군요.]

    [맞습니다. 참고로 차후에라도 군부의 권력과 지위를 보장해주지 못하거나, 또는 군부의 신뢰를 얻지 못한다면 그 어떤 세력이나 조직도 정권을 잡을 수 없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런 이유로 외국생활을 하는 김정남을 비롯해 북한 권력층의 권력투쟁과 쿠데타도 실제가 아닌 허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상대적으로 불만이 적은 당·정·군의 핵심세력들은 그 정도로 정리하죠. 그렇지만 서방세계의 문화를 접한 북한 내 파워엘리트 계층이 주도하는 소요와 봉기는 어떻게 보십니까?]

    [중국도 북경대 학생들을 주축으로 천안문 민주화운동이 일어났잖습니까. 제아무리 ‘동토(凍土)의 땅’인 북한이라 할지라도 주민소요나 봉기의 가능성 자체를 닫아두는 건 바람직하지 않겠죠. 사실 삼남 김정은을 후계자로 지명할 당시 회의적인 반응이 가장 극렬했던 집단이 바로 김일성대 출신들입니다. 특히 자기들이 사회주의의 적으로까지 매도했던 봉건군주체제를 이제 그들 스스로 미화시켜야 하는 딜레마에 빠졌거든요.]

    [진퇴양난(進退兩難)이라는 사자성어가 가장 적절할 것 같군요.]

    [더구나 시대가 변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사고능력이 마비된 주민들이지만 자신들이 속고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이런 경우 군부가 전면에 나서 남한과의 긴장을 고조시키는 것도 주민을 통제하는 방법 중 하나입니다. 예를 들면 서해교전·연평해전·천안함사건 같은 국지도발 말입니다.]

    [갑자기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모택동의 말이 생각나는군요. 하지만 군부의 영향력 축소야말로 김정은 체제의 미래를 담보하는 초석이 되지 않을까요?]

    [일부에선 김정은이 권력기반을 구축하기 위해선 조속히 국방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혁명원로들의 견제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은밀한 후계자 내정이 증명하듯 김정은 스스로 고립무원에 빠지는 악수가 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강경한 북한의 군부와 중국의 혁명세대들은 한국전쟁을 통해 피를 나눈 ‘혈맹의 동지’로 서로를 평가합니다. 때문에 군부의 원로들이 김정은에게서 소외감을 느끼는 경우 오히려 중국의 대북한 영향력만 키워주는 역효과가 나타날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면 위원장님은 김정은이 권력기반을 확고히 다지기 위해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김정은에게 있는 또 하나의 히든카드를 활용해야 합니다.]

    [히든카드요?]

    [예. 물론 지금까지는 단 한 번도 써먹지 않고 버린 카드입니다. 바로 통제의 대상으로만 인식하고 있는 북한 주민들입니다. 지금 당장은 현실성이 거의 없지만 김정은이 장기적으로 권력자로 성공하려면 북한 주민들의 절대적인 신임을 깔고 앉아야 합니다. 그런데 신임을 얻기에 가장 좋은 방법이 김정일처럼 무력을 이용한 폭정이 아니라 극심한 경제난 해결입니다. 옛말에 ‘쌀독에서 인심 난다’라는 말도 있잖습니까. 어쨌든 북한도 변하지 않으면 결국 죽습니다. 따라서 지금의 북한은 의식의 전환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위원장님. 그런데 대다수 북한문제 전문가들이 주민들에 의한 쿠데타 가능성을 낮게 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최근의 경우만 보더라도 튀니지에서 촉발된 ‘민주화 바람’이 이집트를 넘어 리비아, 이란, 예멘 등 중동의 전 지역을 한차례 휩쓸고 지나갔지 않습니까. 그리고 또 북한에는 개혁·개방을 경험한 10%의 주민들도 있고 말입니다.]

    [첫째로 주민들의 심장이 되어줄 제2의 ‘황장엽 선생’이 없습니다. 주민들을 위해 그런 위대한 발걸음을 내디딜 만큼 사상적·정치적으로 충분한 역량을 가진 인물은 이미 모두 처형됐습니다. 둘째로 ‘반동분자’라고 낙인찍히면 그 사람의 8촌까지 멸족(滅族)을 당합니다. 그러니 불만이 있더라도 섣불리 나설 수 없죠. 셋째는 수십 년간에 걸친 지독한 세뇌교육으로 북한 주민들 대부분이 사고능력을 상실한 노동개미로 전락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군요. 마지막으로 청취자들께 당부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다면요?]

    [북한은 분명 우리가 보듬어야 할 동족입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감상적 민족주의에 빠져 북한 권력집단의 통일방법론인 ‘적화통일’ 야욕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북한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동족의 가슴에 소금을 뿌리는 야만행위를 포기한 적이 없습니다. 물론 북한이 남한을 우습게 보는 건 남한 내부의 적(敵)들 때문입니다. 위험한 의식과 행동을 가진 친북(親北)·종북(從北) 좌파세력은 이념갈등을 부추기고 분열을 조장해 북한의 오판을 불러옵니다. 하지만 그들이 입이 부르트도록 찬양하는 지상낙원이 인류역사에서 전무후무한 거대노예선이라는 사실을 직시(直視)해야 합니다. 망상에 빠져 북한 주민의 현실을 왜곡한다면 그건 사상의 자유가 아니라 인간의 영혼에 대한 잔인한 모독입니다. 또한 실낱같은 북한 주민의 희망을 무자비하게 짓밟는 폭력이며 민주주의를 저버리는 배신행위입니다. 친북·종북 좌파세력들은 북한의 주민들이 여전히 독재에 신음하며 기아(飢餓)로 죽어간다는 사실에 양심의 가책을 느껴야 합니다. 그리고 동시대를 살아가는 대한민국 국민들 역시 자유에 대한 강한 의지만이 세상의 빛이라는 걸 명심해야 합니다. 자유는 본능이며 권리입니다.]

    [지금까지 북한인권회복위원회 임권희 위원장과 함께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이제 정말 더 이상 북한 주민들이 굶주림과 힘겨운 사투를 벌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내일은 ‘일제강점기 일본군의 탄압과 그 잔인성’에 대해 다루겠습니다. 남태평양 마셜제도에 강제 동원됐던 조선인들이 일본군의 식인사건에 저항하다 무차별 학살된 밀리환초 조선인 저항사건입니다. 우리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주실 분은 대일항쟁기 강제동원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희생자 지원위원회 위원장이십니다. 지금까지 저는 아나운서 강나은이었습니다.]

    세 사람이 탄 차가 모퉁이를 돌자마자 곧장 백화점 지하주차장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차가 도착할 최종 목적지는 지하 3층의 화물선적장이었다. 배달트럭이 도착하면 화물전용엘리베이터를 통해 상품을 매장까지 이송하는 곳이다. 때문에 그 편리성을 고려해 대부분의 쇼핑몰에선 물품보관창고도 같은 층에 설치한다.

    지하로 거칠게 빨려 들어갈수록 세 사람의 얼굴에서는 핏기가 증발됐다. 지하 물품보관창고의 분위기도 로마중심부에 위치한 ‘코스메딘 산타마리아델라’ 교회의 입구 벽면에 있는 대리석 얼굴조각상처럼 알 수 없는 차가운 공포로 응집되어 있었다.

    “쾅!”

    잠시 후, 차에서 내린 현우가 구겨진 옷을 펼 사이도 없이 급히 어딘가로 전화를 했다.
    현우는 오늘따라 단답형의 짧은 질문과 대답만 했다. 현우는 통화가 끝나자마자 거칠게 휴대전화의 배터리까지 빼 바지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하지만 석우와 동해는 자신들의 예상에서 한 치도 어긋남이 없는 현우의 행동을 보고 사뭇 흡족해했다. 다시 현우가 악다문 입술로 한곳을 응시하며 눈짓을 했다. 그러자 두 사람은 그 신호의 의미를 분명히 파악하고 기다렸다는 듯 잽싸게 움직였다.

    “동해야, 장비 잘 챙기고.”

    “옛설!”

    먼저 동해가 주저 없이 차 트렁크에서 강철절단기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석우는 문과 창 따위의 틈을 벌리는 커다란 쇠지레를 꺼내들었다. 이제는 상황을 되돌릴 수 없었다.
    3층 물품창고에 도착하자 동해는 익숙한 솜씨로 자물쇠의 U자형 고리를 잘랐다. 곧이어 석우가 쇠지레를 이용해 출입문을 완전히 개방했다. 마침내 육중한 ‘판도라의 상자’가 활짝 열렸다.

    동해는 교육받은 대로 여기저기 행거에 나누어 걸린 의류를 종류별로 분류했다. 그리고 석우가 제품 상태 및 케어라벨(생산일정·혼용률·스타일 번호 등이 적혀 있는 라벨)과 태그를 꼼꼼히 확인했다. 물론 현우는 분류된 의류와 물류팀에서 보관하고 있던 입·출고 현황자료를 꼼꼼히 대조했다.

    “으, 이 먼지. 팀장님 이따가 삼겹살로 목에 낀 먼지 좀 벗겨주실 거죠?”

    “물론.”

    “그런데 내가 알고 있기로는 이곳 말고도 물류창고가 두 개 더 있거든.”

    “헉! 두 개씩이나 말입니까? 홍 대리님?”

    “응, 후후후.”

    세 개의 물품창고에 보관되어 있던 실사 품목의 수량은 막막할 정도로 엄청났다.
    하지만 그보다 실사가 더디게 진행된 이유는 제품종류별로 정리가 되어 있질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체크리스트의 내용이 반쯤 확인됐을 무렵이었다. 눈치를 보던 석우가 도저히 못 참겠는지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팔을 들어 가벼운 스트레칭으로 온몸의 근육을 이완시켰다.

    그 순간 물품보관창고의 열려진 문 뒤쪽에서 낯선 어둠덩어리가 똬리를 틀고 있었다. 어둠의 실체는 가슴라인이 깊게 파인 초미니 원피스를 입고 있어서 조금만 크게 움직여도 가슴이 훤히 드러나 보이는 30대 초반의 여점장이었다.

    “나 팀장님. 제가 아까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간곡히 부탁드렸잖아요. 자, 자. 여러분. 이러지 마시고 어서들 일어나세요. 세상에 재미난 일이 얼마나 많은데요.”

    “점장님, 저희는 여기 놀러 온 게 아닙니다.”

    “팀장님, 백화점 지하창고의 먼지가 꽤 독하죠? 호호호. 어디 가서 뭐라도 마시면서 우리 차분하게 이야기 좀 해요. 예?”

    “그런 이야기라면 나중에 듣겠습니다.”

    “사실 요즘 저희뿐만 아니라 모든 백화점이 불경기를 타잖아요. 그래서 팔고 남은 지난 시즌의 옷을 창고에 보관하다보니, 저희도 어쩔 수 없이 입·출고 수량에 다소 차이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어요. 아! 그렇다고 저희가 분실물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겠다는 건 결코 아닙니다. 인정할게요. 아니, 책임지겠습니다.”

    “책임지겠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그럼 저희가 실사를 계속 하도록 도와주십시오.”

    “나 팀장님, 정말 이러실 거예요? 저희 보고 오늘 장사 이만 접으라는 거예요 뭐예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는 판매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용히 실사를 마무리하겠습니다.”

    “본사에서 실사를 나왔는데 어떻게 매장에서 마음 편히 고객을 대하겠어요. 좋아요! 마음대로 하세요. 만약 오늘 매출이 안 오르면 모두 나 팀장님 책임입니다. 아셨죠?”

    설유리는 금방 아궁이를 불쏘시개로 헤친 것처럼 화르르 끓어올랐다.
    하지만 밖으로 뛰쳐나간 설유리는 막상 몇 발자국 걸어가지 못했다. 그리곤 이내 어둠 속으로 숨어들어 소리 없이 물류창고 밖을 서성였다. 급기야 극도의 불안감을 못 견디고 발갛게 달아올라 어딘가에 급히 전화를 걸었다. 통화목소리는 세 사람이 들으라는 듯 지하 공간에 크게 울려 퍼졌다. 하지만 그것도 별 소득이 없음을 깨닫고 발톱을 세운 채로 현우 일행을 한참 동안 째려보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