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서화 장편소설 '레드'-1


  • <6>파일

    그 시각 현우는 스포츠센터의 수영장을 혼자 독차지하고 있었다.
    요즘은 퇴근 후 운동하는 사람이 많아 늦은 밤이 아니면 수영장에 발 디딜 틈도 없었다.

    “푸우! 어, 정원아!”
    “현우야, 너 알고 있냐?”
    “뭘?”
    “내가 본 것만 해도 벌써 수영장을 열 바퀴나 돌았다는 사실.”
    “그럼 처음부터 본 것은 아닌가 보네?”
    “앞으로 몇 바퀴를 더 돌아야 끝나는데?”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에 잠의 전령(傳靈)이 깃들 때까지.”
    “헉! 완전히 운동중독이군. 지난번에 봤을 땐 사이클에 푹 빠져 있더니 오늘은 수영장에 있고. 넌 운동이 지겹지도 않냐?”
    “미친 듯이 한 번 휘젓고 나면 속이 뻥 뚫리잖아.”
    “이제 할 만큼 했으면 대충 씻고 나와라. 요 앞 공원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아마 기다리기 지루할 거다.”
    “후후후. 알았다. 맥주나 몇 캔 사 놓으라는 소리지?”
    “그래.”

    세상은 어느새 예언자 모세(Moses)의 열 가지 재앙 중 하나인 어둠이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 밑바닥에서 정원의 시선을 튕겨내는 도심의 야경은 그야말로 불야성이었다. 화려한 네온사인이 미친 듯 옷을 갈아입고, 질주하는 불빛들은 마릴린 먼로의 치마 속을 훔쳐보는 바람처럼 도심을 들쑤셨다.
    하지만 그게 싫어 도심에서 쫓겨난 침묵은 현우와 정원의 주위에 죄다 모여 있었다. 더구나 정원의 입가는 무슨 사정 때문인지 철저히 파괴된 도시 같았다. 하지만 그 혼돈 속에서 정원은 간혹 질서를 찾아가려 애쓰는 모습도 보였다.

    “너 무슨 일 있구나?”
    “일은 무슨, 그냥 내가 한심해서 그러지.”
    “넌 인류의 탄생 초기부터 현재까지 우리의 의식 속에 기억된 무수히 많은 개념들 중에서 가장 복잡한 게 뭐라고 생각하니?”
    “글쎄다. 아무래도 시대에 따라 인류의 생존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개념들이 아닐까? 예를 들자면 원시시대에는 거대한 몸집의 육식동물과 열악한 자연환경이고, 고대와 중세는 종교와 전쟁과 질병, 근대에는 약육강식의 식민지배와 노예제도, 그리고 현대는 핵무기와 테러 집단, 미래에는 지구온난화와 외계인의 지구 침공, 뭐 그딴 거 아닐까?”
    “난 말이다. 바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것도 ‘타인(他人)’.”
    “타인?”

    “응. 시대를 초월하여 인간이 가장 다루기 까다롭고 조심스러운 대상은 바로 자기와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는 타인인 것 같아. 때문에 다른 어떤 대상보다 사람과 관련된 개념들이 복잡하고 추상적인 게 아닐까?”
    “외부로부터의 위험이 아닌 사람이라. 꽤 재미있군.”
    “그건 수시로 변하는 자연환경보다 다른 사람의 숨겨진 의도를 정확히 파악해 자신에게 동조하도록 설득하고, 또 친구로 만드는 것이 바로 자신의 생존과 직결되기 때문이겠지. 물론 인간들은 그 결과로 다른 동물들보다 더 큰 뇌를 획득하여 진화적 우위를 점할 수 있었고 말이야.”
    “하긴 침팬지 사회에선 털 고르기가 바로 신분 상승의 열쇠라고 하더라.”

    유독 별이 많은 밤이었다. 별은 밤하늘의 작은 빛이다.
    하지만 보는 이에 따라 그 빛은 시작의 기준점이 될 수도 있고 의지하고 싶은 그 무엇이 되기도 한다. 
    오늘 현우와 똑바로 눈이 마주친 별빛은 자신의 질문에 답을 하는 영적인 존재였다.
    그때 정원이 불쑥 파일 하나를 내밀었다. 파일 겉장엔 아무런 제목도 표시도 없었다. 문구점에서 막 사온 것처럼 깨끗했다.

    “어머님은 잘 계시지?”
    “응.”
    “요즘도 미용실 계속 하시고?”
    “그렇지 뭐.”

    현우는 잠시 잊었던 현실의 무게감이 다시 느껴졌다. 하지만 현우는 현실과 맞서 처참하게 깨질지라도 굴복하고 무릎을 꿇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물론 어머님을 생각해 단 한 번 현실과 타협한 적은 있다. 그리고 그 타협의 결과 현우의 현재가 결정됐다. 하지만 그 결과에 후회한 적은 없다. 현우에게 있어 어머니보다 더 소중한 가치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산이 거기에 있어 오른다는 등산가의 말처럼 현우에게 있어 어머니는 종교적인 신앙이었다. 그리고 살아 있는 정신적 그늘이며 삶의 자전축이었다.

    “설마 이거 보증을 서달라는 건 아니지?”
    “후후후. 서줄 만큼 벌어놓기나 했고?”
    “그럼 뭔데?”
    “현우야?”
    “응?”
    “넌 지금 현실과 이상 중에서 어디를 보고 있니?”
    “현실세계를 바탕으로 이상세계를 보려고 노력 중이야. 현실만 보면 탐욕스럽고 이상만 보면 망상에 빠져 헤어나질 못하잖아.”
    “캬! 명언이다. 내 친구지만 정말 똑똑하단 말이야. 현우야?”
    “응.”
    “지금 그 파일은 방금 네가 말한 그 꿈을 이루는 데 꼭 필요한 거다. 너를 이상세계로 데려다주는 운송수단이란 소리야. 거두절미하고 현실세계를 딛고 이상세계로 날아가고 싶으면 얼른 보는 것이 좋을 거다. 펑! 하고 연기처럼 사라지기 전에.”
    “대체 이 파일 속에 뭐가 들어 있는데 그래?”
    “긴 말 필요 없고 일단 한 번 봐봐.”
    “나 원 참!”

    현우가 파일을 펼쳤다. 정원의 말대로 단순한 파일이 아니었다.
    수학적인 아름다움이 현실에서 구현된 신의 비밀코드였다. 만약 우주의 궁극적인 아름다움이 완벽한 비율과 숫자로 현실에서 구현된다면 그건 아마도 파일 속의 그녀일 것이다.
    이마에서 눈썹까지, 눈썹에서 코끝까지, 그리고 다시 코끝에서 턱까지의 비율이 정확히 1:1:0.9였다. 그리고 얼굴의 가로와 세로비율도 1:1.2였다. 심지어 눈과 입 사이의 수직거리조차 전체 얼굴길이의 36%고, 눈과 눈 사이의 수평거리도 얼굴 너비의 46%였다. 그야말로 빛과 신비감으로 완성된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주의 건축물 같았다. 그래서 보면 볼수록 신성한 종교의식에 심취한 것처럼 황홀경에 빠져들었다.

    “어때, 내 말이 맞지? 청순하고 단아해서 살아 있는 여신 같지 않아?”
    “그래. ‘미(美)는 부분의 합’이라고 한 카를로티의 말이 실감난다. 그야말로 더 보탤 것도 뺄 것도 바꿀 것도 없는 완벽한 미인이다.”
    “너 혹시 벌써 한 방에 훅! 하고 간 거 아니야?”
    “솔직히 말하면 눈빛이 마법사의 주술 같아서 조금만 더 쳐다보면 정말 그렇게 될지도 모르겠다.”
    “후후후, 사진 밑에 신원정보도 대충 정리해놓았으니까 한번 읽어봐.”
    “…….”
    “이름은 윤지수고, 나이는 스물여덟. 최근 사진이니까 실물과 거의 차이가 없을 거야. 아니지, 실제로 보면 더 환상적이다. 그런데 왜 예전엔 그렇게 트레이닝복만 줄곧 입었는지 몰라.”
    “…….”
    “하여간 십여 년 전에 단순 탈북이 아닌 중국에서 어머니와 함께 정치적 망명을 한 여성이야. 사진을 보고 너도 느꼈겠지만 북한에 있을 땐 상위 1% 안에 드는 초호화 엘리트생활을 하던 사람이고.”
    “뜻밖인데. 이런 망명자도 있다는 사실이 말이야?”
    “<북한이탈주민의 보호 및 정착지원에 관한 법률>에 따라 국정원장은 탈북한 북한 고위직 인사를 일반 탈북자와 달리 보호·관리 대상자로 결정해. 그렇게 해서 지금까지 결정된 보호·관리 대상자가 전체 탈북자의 10% 미만이야. 네가 그녀를 안다면 오히려 그것이 더 큰 문제겠지. 안 그러냐?”
    “그런가?”

    도심에는 이제 꿈은 날아가고 욕망이 변한 광기만 남아 있었다. 그것은 마치 기름 창고에서 우연히 일어난 작은 불씨가 시내로 걷잡을 수 없이 번진 로마의 대화재 같았다. 그 화염과 광기에 홀린 정원도 언제부턴가 네로의 눈빛을 닮아가기 시작했다.
    정원은 그녀가 작년에 어머니를 불의의 교통사고로 여의고 현재 화원을 혼자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설명했다. 어쨌건 지수와 함께 하는 현우의 모습은 완벽할 것 같았다. 하지만 웬일인지 현우는 폭풍이 한차례 휩쓸고 지나간 바다처럼 고요했다. 물론 현우의 침묵은 곧 상어가 먹이를 잡기 위해 돌진하는 순간의 압력파장 같은 것이었다.

    “너 요즘 투잡으로 커플매니저도 하냐?”
    “왜 싫어?”
    “글쎄. 딱히 싫은 건 아니지만…….”
    “그럼 뭔데?”
    “이런 여자가 뭐가 아쉬워 나 같은 샐러리맨을 만나겠냐?”
    “네가 뭐 어때서?”
    “내 등에 얹힌 현실의 무게를 부정할 수는 없잖아. 내가 보기에 이 아가씨는 현실보다는 꿈을 먹고 살 것 같은데.”
    “짜식, 너 원래 그렇게 소심했냐? 소심한 A형도 아니잖아.”
    “그러게 말이다. 너랑 국정원 시험 볼 때가 바로 어제 일 같은데.”
    “그때 어머님의 반대만 없으셨더라도 지금쯤 나랑 한 팀이 됐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안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아무튼 그 일로 아버지의 순직이 어머니에게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지 비로소 알게 됐다. 더불어 내가 어머니의 인생에 있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도 알게 됐고.”
    “아버지가 은행 강도의 흉기에 찔려 순직하셨다고 했지?”
    “응, 그런데 정원아?”
    “네 눈빛을 보니까 왠지 겁부터 난다. 다음 말 안 하면 안 되냐?”
    “미안하지만 해야겠다. 이 아가씨는 아무리 생각해도 나한테 너무 과분한 것 같다.”

    ‘인생이 허기지면 바다로 가라.’는 말이 있다. 현우는 일상에서 답답하고, 숨 막힐 때 지수를 찾으면 반전이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현우는 허탈한 마음으로 정원에게 파일을 돌려주었다. 그리곤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정원에게 요즘 무엇을 해도 자신이 없다며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물론 지수처럼 아름다운 여인을 행복하게 해줄 자신은 더더구나 없다고 고개를 내저었다. 이후, 두 사람 사이엔 말이 없었다. 하여간 현우가 본 사진 속 지수는 많은 스토리를 담고 있는 영화포스터 같았다. 그래서 더 신비롭고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꿈은 꿈일 뿐이라고 현우는 스스로를 다독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