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서화 장편소설 '레드'-1

  • <7> 안부전화

    [현우니?]
    “아깐 어디 가셨었어요?”
    [아까! 그게 저, 잠깐 어디 좀 다녀왔다.]
    “어디요? 휴대전화까지 꺼놓으시고 어디에 다녀오셨는데요?”
    [얘가 오늘따라 왜 이래. 엄마는 친구도 없는 줄 아니!]
    “또 헌혈하러 갔다 오셨죠. 그렇죠?”
    [수혈 받아도 시원찮을 판에 남한테 나눠줄 피가 어디 있다고 내가 헌혈을 해.]
    “정말이죠?”
    [넌 엄마를 그렇게 못 믿니? 너 하나만을 믿고 수십 년을 살아왔는데. 왠지 좀 섭섭하다.]
    “그게 아니라 전 단지……. 몸은 좀 어떠세요?”
    [얼렁뚱땅 넘어가긴. 몸이야 건강하지. 넌?]
    “저도 괜찮아요.”
    [삼시 세끼 밥은 잘 챙겨 먹고?]
    “물론이죠.”
    [근데 현우야. 넌 이 엄마가 헌혈하는 게 그렇게 싫으냐? 어차피 죽으면 썩어질 몸인데 뭐가 그리 아까워.]
    “아까워서 그러는 게 아니라 연세는 생각지도 않으시고 헌혈을 하시니까 그렇죠.”
    [그래도 자식이라고 늙은 어미 걱정을 다하네. 암튼 고맙다!]

    현우의 어머니 정다운은 희귀한 혈액형인 RH-B형 보유자다. 그래서 어디서 무엇을 하건 늘 조심했다.
    혹시라도 다치면 희귀성 때문에 병원에서 수혈을 받지 못할 경우도 발생할 수 있었다.
    아무튼 대한적십자사 혈액원이나 대학병원에서 지정헌혈을 부탁하는 연락이 오면 정다운은 누구보다 먼저 달려갔다. 소파에 누워 TV를 보다 자막으로 흐르는 긴급공지를 봐도 마찬가지였다.
    현우는 정다운이 하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았다. 하지만 정다운의 행동이 나눔을 실천하는 아름다운 것이기에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근데 현우야, 너도 알지? 대흥슈퍼. 그 집 큰딸이 올해 대학교 2학년인데, 글쎄 급성 골수성 백혈병이라지 뭐냐. 쯔쯔쯔.]
    “그럼 먼저 골수가 일치하는 사람을 찾아야겠네요. 그래야 이식을 받을 거 아니에요.”
    “골수는 천만다행으로 동생이 일치했나 봐. 그래서 오늘 수술을 했거든. 그런데 혈액이 부족한가 봐.]
    “혈액이요?”
    [응. 글쎄 알고 보니까 그 아이도 혈액형이 RH-B형이더라고.]
    “엄마!”
    [아이고 깜짝이야. 이놈아, 귀청 떨어지겠다. 엄마에게 뭔 고함을 그렇게 질러!]
    “엄마 또 헌혈하셨죠. 그렇죠?”
    [호호호. 들켰네. 이번 딱 한 번뿐이다. 정말이야.]
    “으으으.”
    [아무튼 수술이 잘된 것 같다고 하니까 그나마 다행이다. 나 같은 늙은이야 오늘 죽어도 괜찮지만 젊은 애들은 살아서 앞으로 할 일도 많잖아. 그건 그렇고, 넌 아직까지도 사귀는 아가씨 하나 없냐?]
    “없어요.”
    [어쩜, 넌 네 아버지를 쏙 빼닮았냐. 그렇게 재주가 없어?]
    “아버지 아들이니까 그렇죠.”
    [젊은 놈이 그렇게 여자한테 인기가 없어서 사회생활은 어떻게 하는지 몰라. 정말 미~스테리야.]
    “저 다음 주에 내려갈게요.”
    [됐다. 혼자 올 거면 아예 내려올 생각도 하지마라! 홀아비로 같이 늙어가는 놈이 뭐가 좋다고. 집에 곰팡이냄새만 진동하겠다.]
    “…….”
    [현우야. 사랑은 바로 지금, 이 찰나의 순간만 있게 한단다. 그 순간이 전부처럼 느껴질 때 그게 바로 행복이란 거다. 아름다운 옷은 많지만 네게 젊음의 정열을 안겨주는 옷은 오직 한 벌뿐이다. 그 옷을 열심히 찾아봐. 알았지? 그럼 끊는다.]
    “…….”

    정다운은 스스로가 현우의 인생에 장애물이라고 생각해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현우도 그런 정다운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현우는 이불에 떨어진 별빛이 흐를세라 한쪽으로 조심스레 몰아놓고 냉장고로 달려가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입에서 새어나온 물줄기가 목을 타고 가슴에 이르자 폐부가 얼얼할 정도로 흡수율이 좋았다. 그에 비해 정신은 아직도 가로등 하나 없는 밤거리를 헤매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용기가 생기지 않을 것만 같았다.

    [현우야. 너 지금 몇 신 줄 알아?]
    “정원아. 거두절미하고. 아까 그 아가씨 나 좀 소개시켜줘라.”
    [윤지수 씨 말이야?]
    “응.”
    [마음이 갑자기 왜 변한 거니?]
    “나도 밤이 무서워서 그런다. 이제 됐냐?”
    [켁! 뭐? 푸하하하! 그래 알았다, 알았어. 그 마음 나도 충분히 이해한다.]
    “그럼 언제 전화 줄래?”
    [짜식! 완전히 번갯불에 콩 볶아 먹으려고 하는군. 일단 지수 씨 시간을 물어보고 내가 다시 전화할게. 됐지?]
    “그래, 됐다. 얼른 잠들어서 꿈속에서 지수 씨한테 물어봐. 나 같은 놈도 괜찮은지?”
    [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