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서화 장편소설 '레드'-1

  • <9> 디자이너 손비아

    가시나무처럼 솟아오르는 도심의 소음에 놀라 하늘에는 뛰어가다 멈칫한 토끼구름이 떠 있었다.
    그리고 회사 뒤쪽 작은 공원엔 이제 막 터지기 시작한 사랑의 수줍음이 있었다.
    젊은이들은 이제 막 사랑을 배웠는지 연한 새싹의 귀여움이 묻어났다. 바로 옆 벤치에 앉아 두 손을 맞잡고 있는 노부부에게선 황금빛으로 농익은 깊은 맛이 느껴졌다. 그들의 얼굴엔 누가 누구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란 꽃으로 함께 피어 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현우는 계단 창가에서 사랑의 강을 따라 무심히 흘러갔다. 그때 누군가가 계단에서 현우를 향해 미끄러지듯 걸어 내려왔다.

    “나 팀장님, 뭐하세요?”
    “아, 손비아 씨.”
    “가만! 혹시 지금……. 왜요, 나 팀장님은 여자 친구가 없으세요?”
    “…….”

    언제 봐도 도시적인 느낌이 물씬 나는 손비아였다.
    손비아는 시폰 소재로 된 아이보리색상의 민소매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그 위에 회화적인 소재의 기계로 짠 화려한 베이지 컬러의 니트를 걸쳐 입었다. 사이마다 핸드메이드 판넬을 이어 붙인 독특한 형태로 만들어진 니트였다. 손비아는 개성적이고 창의적인 디자이너로 디자인의 감성을 무척 중시했다. 그리고 영감의 대상을 독특한 시각으로 아주 미묘하게 잘 해석했다. 거기다가 패션의 흐름에 대한 이해도도 높았다.

    “아참! F/W시즌 수트 디자인은 창의적이고 깔끔한 디테일 때문에 윗분들 칭찬이 자자하던데요.”
    “정말요?”
    “예, 캐주얼처럼 밝은 색상이잖아요. 그러면서도 모던해서 와인파티같이 가벼운 모임에 입고 가면 딱이라고.”
    “고맙습니다, 팀장님. 그렇게까지 칭찬을 해주시니.”
    “저한테는 고마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전 단지 윗분들이 그렇게 말씀했다는 것만 전해드렸을 뿐이니까요.”
    “어쨌거나요, 훗!”
    “그럼, 전 할 일이 있어서. 이만…….”
    “아참! 팀장님.”
    “!”
    “제가 그만 팀장님의 칭찬에 넋을 놓고 있었네요. 사실 부탁드릴 것이 하나 있어요?”
    “저에게요?”
    “예. 다름이 아니고 피팅모델(Fitting model) 좀 해주시면 안 될까요?”
    “피팅모델이라고요?”
    “예.”
    “글쎄요. 해드리는 건 문제가 아닌데, 왜 전문모델을 안 쓰고…….”
    “이건 제 부탁이 아니고 저희 실장님의 간곡한 부탁이세요. 이번 콘셉트하고 나 팀장님의 이미지가 딱 맞아떨어진다고. 해주실 거죠?”
    “…….”

    지수의 얼굴이 고대 고전주의 건축물이라면 손비아는 중세 고딕건축물이었다. 갸름하면서도 세련되어 보이는 얼굴. 그 중심에서 개성을 날카롭게 표현하는 일직선의 코와 아치처럼 동그란 눈썹, 거기에 좁은 턱과 도톰한 뺨, 심지어 다른 색깔과 질감이 느껴지는 입술과 약간은 깊이를 알 수 없는 몽환적인 시선까지 갖고 있었다.
    현우는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괜히 승낙했다는 후회가 슬그머니 들었다. 그리고 그제야 조화롭고 아름다운 손비아의 얼굴 속 모자이크가 최면효과를 만들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제가 오늘 관상을 봤는데 점집에서 뭐랬는지 아세요?”
    “글쎄요.”
    “도화(桃花)의 향기가 강한 전형적인 도화상(桃花相)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팀장님도 조심하세요. 아셨죠? !”

    하지만 현우가 지금까지 지켜본 손비아는 결코 도발적이거나 퇴폐적이지 않았다. 더구나 상대방이 그것을 의식하도록 내버려둘 만큼 허술한 여자는 더더욱 아니었다. 아무튼 싫든 좋든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리고 회사 동료로서 서로 도울 일이 있으면 돕는 것이 당연했다. 생각의 색깔을 바꾸니 마음까지 한결 가벼웠다.
    바로 그때 전화벨이 다급하게 울렸다. 정원이었다. 그러고 보니 정원과 통화를 한 지도 벌써 일주일이 훌쩍 흐른 뒤였다.

    “오늘 오후에 시간 어떠니?”
    “수입한 원단에 약간의 문제가 생겨서 지금 성남의 물류창고에 가야 해. 하지만 네 시 이전에는 회사에 들어올 거야.”
    “좋아. 그럼 다섯 시에 만나자. 장소는 4·19국립묘지가 있는 우이동주민센터 길 건너 맞은편의 25시 편의점이야.”
    “오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