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서화 장편소설 '레드'-1

  • <11> 신분조회

    정원은 텅 빈 국정원 1층 로비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그때 정원의 시선을 무언가가 올가미처럼 붙들어 맸다. “情報(정보)는 國力(국력)이다.” 원훈(院訓)이었다.
    한 자씩 또박또박 읽어가던 정원의 입에서 힘 있게 마침표가 찍혔다. 그러자 맑은 종소리와 함께 비로소 출입승인이 났다. 정원이 막 빈 엘리베이터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나침반 모양으로 형상화된 국정원마크가 갑자기 바닥에서 그림자처럼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물론 그 그림자를 깨운 것은 건너편에서 정원을 향해 똑바로 걸어오는 차가운 발소리였다.

    “어, 유진 씨. 아직까지 특수기밀기록보관소에 있었어?”
    “예. 역시나 제 생각이 맞았군요. 내일 뵙자니까요.”
    “총각이잖아. 집에 들어가도 딱히 할 일이 있어야 말이지. 히~.”
    “왜 없어요. 여자 친구랑 데이트 하셔도 되잖아요?”
    “그런가?”
    “그런가? 저 일중독증.”
    “그래, 뭔데?”
    “과거 ‘국민의 정부’ 시절 저희 국정원에서 진행한 주요 해외사업들을 검토했습니다. 그 결과, 리재경의 말이 사실이었다는 걸 여러 곳에서 확인했어요. 이것이 바로 제가 찾아낸 당시 국정원의 주요 해외활동 상황입니다.”
    “하지만 이 자료들은 정황증거일 뿐 확실한 물증이 되기에는 여러 가지로 부족해 보이는데.”
    “그리고 그즈음 국정원 내의 이상기류도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상기류?”
    “예. 비밀자금을 건네는 시점을 전후해 기조실장과 예산관의 특정 국가 해외출장이 유독 잦았다는 겁니다.”
    “물론 그 특정 국가는 중국일 테고?”
    “맞습니다, 팀장님.”
    “유진 씨. 혹시, 예산집행에 있어서 납득하기 어려운 항목이나 전년에 비해 두드러지게 예산이 증액된 부분은 없었어?”
    “표면상으로는 따로 문제 삼을 만한 항목이나 증액분은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설사 예산이 증액됐다고 하더라도 그걸 찾아내기가 어디 말처럼 그리 쉬워야 말이죠.”
    “하긴 정보부서의 특정상 타 부처 예산에 은밀하게 편승시키기 때문에 기조실장이나 예산관이 아닌 제3자가 그것을 찾아내기는 사실상 불가능하겠지.”
    “맞아요, 팀장님.”
    “그렇다면 해외에서 활동하는 요원들에게 보내는 정보비와 공작비의 사용내역도 찾아내기가 힘들다는 말인데.”
    “그것 역시도 당시 기조실장 외에는 모릅니다. 더구나 사용내역은 국가기밀이라서 처음부터 아예 페이퍼를 만들지도 않으니까요.”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현재로선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 되잖아.”
    “이야긴즉 그렇습니다.”
    “흠, 아! 그래. 유진 씨. 예전 안기부에서 운영하던 수천억대의 비밀자금은?”
    “그것 역시도 기조실장 외에는…….”
    “이거 어쩐다. 금융기관의 법적 자료보존기간도 이미 한참 지난 시점인데. 그래도 혹시 자료가 남아 있을지 모르니까 의심 가는 금융권을 다시 한 번 샅샅이 뒤져봐.”
    “알겠습니다, 팀장님.”
    “땡!”
    “야! 똥개. 너 다음부턴 우리 팀에 얼씬도 하지 마. 그랬다간 그날 너 된장 바르는 날인 줄 알아.”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야 임마.”

    순간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동시에 한창 끓어오른 복도의 소음이 스스로의 폭발력으로 엘리베이터를 향해 밀려왔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 복도는 이미 도심을 탈출하는 기차역처럼 혼돈 그 자체였다. 원형복도를 탈출구로 이용한 소음의 진앙지는 복도 끝 화장실이었다. 하지만 정원과 유진은 그 소란스러움이 누구에게서 비롯된 것인지 금방 알아챘다. 그래서 정원과 유진은 못 들은 척 곧장 사무실로 들어갔다.

    “짜식! 보던 볼일이나 계속 보지. 안 씻은 손으로 잡기는 어딜 잡아. 쿠쿠쿠.”
    “재국 선배. 또 무슨 일이에요?”
    “글쎄, 자꾸만 내 휴대전화를 빼앗으려고 하는 거야.”
    “휴대전화를 왜요?”
    “나야 모르지. 저도 휴대전화가 있으면서 내 휴대전화가 그렇게 탐이 났나.”
    “재국 선배, 지금 선배의 대답엔 진실이 빠져 있다는 건 아시죠?”
    “후후후. 난 단지 서로에게 유익한 정보를 공유했을 뿐이라고. 감청팀이 요즘 왜 그렇게 난리냐고 묻길래 아는 대로 대답해주었지. 그리고 난 그것에 대한 대가로 내가 알고 싶은 것을 돌려받은 것뿐이라고. 일종의 물물교환이지.”
    “재국 선배, 처음 팀에 배치 받았을 때 선배가 저에게 해준 말 기억 안 나요?”
    “뭐였지?”
    “우리 국정원은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몰라야 하는 정도가 아니라, 엄지손가락이 하는 일도 중지가 몰라야 할 정도로 철저한 기밀유지가 생명이다.”
    “아! 그거. 국가정보대학원에서 45주 동안 하도 세뇌교육을 시켜서 무심코 내뱉은 말이야. 폼 한번 잡아보려고. 그러니까 이제 그만 잊어버려. 히!”
    “아무튼 ‘Need to know.(알 필요가 있는가 없는가)’는 국정원의 또 하나의 기둥이에요. 그게 무너지면 국가의 안전은 고사하고 개인의 안전도 보장하지 못한다고요.”

    “팀장님, 이것 좀 한 번 보시죠. 방금 입수한 아주 따끈따끈한 사진입니다.”
    “사진?”
    “예, 후후후.”
    “그럼 혹시 아까 이것 때문에 화장실에서…….”
    “빙고!”
    “가만! 휴대전화 속 이 사진은…….”
    “그래. 북한인권회복위원회 임권희 위원장의 피살 당시 현장사진이야. 현장 감식 결과로는 경동맥 2개와 기도를 아주 짧은 순간, 그것도 단번에 일직선으로 그었다고 하더라고.”
    “주저흔이 없다면 전문적인 프로의 솜씨라는 말이군요.”
    “그런데 팀장님. 더 충격적인 사실은 CCTV 판독결과 용의자는 놀랍게도 아마조네스(여전사)였답니다.”
    “아마조네스?”
    “그것도 미모의 여성 단 한 명.”
    “아마조네스라, 흠…….”
    “하하하, 제가 뭐랬습니까. 팀장님, 따끈따끈하다고 미리 말씀드렸잖습니까. 어때 유진아, 내 말이 맞지?”
    “정말 그렇긴 하네요.”

    “용의자의 인상착의는?”
    “현재까지 드러난 바로는 보기 드문 글래머러스한 몸매의 소유자였답니다. 얼굴을 모자와 마스크로 가렸지만 일부 드러난 화면만으로 추정한 나이는 대략 20대 중·후반입니다. 그리고 키는 160∼165cm 전후에, 몸무게는 50kg 정도입니다.
    “재국 선배, 복장은요?”
    “복장?”
    “예.”
    “그게 뭐라더라. 아! 맞다. 복장은 하늘색 바탕에 얼룩말의 검은 줄무늬가 들어간 스키니진 팬츠에 검정색 라이더 가죽재킷을 걸쳤다고 하더라고. 그런데 팀장님, 아무리 생각해도 쉽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뭐가 재국 씨?”
    “살해 솜씨로 봐선 의심의 여지없이 프로가 분명하잖습니까. 그런데 멘탈은 허술한 아마추어로 보이니 말입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모르는 초자가 했다고 믿기에는 수긍할 수도 없고 말입니다. 암살자 스스로가 그렇게 보이려는 이유가 뭘까요?”
    “흠! 그건 한 번의 돌팔매로 두 마리 새를 잡겠다는 뜻이 아닐까?”
    “일석이조를 노렸다는 말씀인가요?”
    “그래. 두 마리 중 한 마리는 당연히 북한에 대해 적대행위를 하는 사람들과 탈북자들이겠지. 물론 그들에게 보내는 무언의 경고 내지는 협박성 메시지가 담겨 있고 말이야.”
    “그러니까 임 위원장이 일벌백계의 희생양으로 선택된 거로군요?”
    “안타깝지만 그렇다고 봐야겠지!”

    “그럼 숨겨진 나머지 한 마리 새는 무엇인가요?”
    “사회혼란의 극대화겠지. 치안 공백을 확대·재생산해 국민들에게 공포심과 불안감을 심어주는 것이 어쩌면 국지적인 군사도발보다 더 효과적일 수 있거든.”
    “결국 대한민국 국민들의 심리적인 타격을 노렸다는 말씀이군요?”
    “맞아.”
    “그럼 팀장님은 둘 중 어느 쪽이세요?”
    “재국 선배, 아마조네스의 실체 말인가요?”
    “그래.”
    “흠! 현재까지 드러난 증거들만 가지고 판단하면 최소한 단순 친북·종북 좌파세력은 아니야.”
    “무슨 이유로 그렇게 생각하시죠?”

    “다른 무엇보다 손에 움켜쥔 이 옥수수가 그걸 암시하고 있어. 임 위원장은 죽는 순간에도 왜 옥수수를 움켜쥐고 있었을까? 거두절미하고, 우리나라에서 옥수수하면 떠오르는 지역은 누구나가 북한과 강원도일 거야. 하지만 강원도는 임 위원장과 아무런 연관성이 없어. 임 위원장의 고향은 함경북도 청진시거든. 그렇다면 나머지 하나, 바로 범인이 북한 사람이라는 것을 암시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그럼 두 번째 이유는 뭐죠?”
    “두 번째는 살해수법이야. 살해수법이 너무나 숙련된 솜씨거든. 단순하면서도 경제적이고 또 직선적이야. 즉 최소한의 기술만을 사용해서 가장 빠른 속도로 급소만 노렸다는 소리지.”
    “그러면 임 위원장의 살해범은 결국 국내 고정간첩과 북한에서 남파시킨 직파간첩, 이렇게 둘로 압축되는 겁니까?”
    “최소한 새로운 증거가 나올 때까지는.”
    “그런데 재국 선배, 갑자기 걸음걸이가 왜 그래요?”
    “걸음걸이! 아, 이거. 동기 녀석의 말에 의하면 문제의 아마조네스가 캣우먼처럼 캣워크(Cat walk)로 걸었다고 하더라고. 이렇게 무릎을 편 채로 쭉쭉 뻗으면서 말이야. 어때 요염해?”
    “컥!”

    재국이 떠는 넉살에 정원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싸늘해져 있던 유진마저 가볍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정도가 지나침은 미치지 못함만 못하다고 했던가. 재국이 두어 걸음 걸었을 무렵이었다. 갑자기 재국의 다리가 X자로 꼬이는가 싶더니 몸의 중심이 좌우로 크게 흔들렸다. 재국은 넘어지지 않기 위해 몸을 꽈배기처럼 꼬며 안간힘을 썼지만 균형 감각을 되찾으려는 본능적인 순발력도 결과를 바꾸진 못했다. 더구나 유진이 책상 위에 남겨둔 커피까지 재국의 손에 부딪혔다.

    “미안해, 유진아. 내가 깨끗하게 닦아줄게.”
    “잠깐, 재국 씨. 닦지 마!”
    “!”
    “왜요, 팀장님. 얼른 닦아야 그나마…….”
    “휴대전화 좀 다시 줘봐.”
    “휴대전화를 말입니까?”
    “그래.”

    상황이 상황인지라 유진과 재국은 정원의 돌발행동이 좀처럼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 정원의 눈은 어정쩡한 두 사람의 표정과 정반대로 반짝거렸다. 휴대전화를 황급히 건네받은 정원은 어둠 속의 고양이처럼 금방 눈에서 초록색의 레이저를 쏘아댔다. 그리곤 다시 임 위원장의 사진을 꼼꼼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왜요, 팀장님?”
    “두 사람, 사진에서 뭐 이상한 점 발견하지 못했어?”
    “이상한 점이라니요. 전 아무리 봐도…….”
    “거기 그 임 위원장의 손가락 좀 확대해 봐. 뭔가 이상하지 않아?”
    “피범벅이 되어 도대체…….”
    “혈액의 약 45%는 흔히 적혈구·백혈구·혈소판으로 부르는 혈구야. 그리고 나머지 55%는 액체성분인 혈장으로 구성되어 있지. 혈장은 90%가 물이며, 여기엔 단백질·지질·당·무기염류 등이 용해되어 있단 말이야.”
    “그런데요?”
    “문제는 바로 그 45%의 고형성분이야. 고형성분 때문에 커피의 형태와 혈액이 공기에 노출될 경우 굳는 형태가 다르다는 거지. 여기 옥수수를 움켜쥐지 않은 손 주위를 다시 한 번 잘 살펴봐.”
    “어디, 흠.”
    “팀장님, 옥수수를 움켜쥐지 않은 손 주위의 혈액이 다른 쪽보다 빈공간이 많이 형성되어 있는데요.”
    “그럼 팀장님. 혹시 임 위원장이 의도적으로 무언가를 적으려 한 것이란 말씀입니까?”
    “맞아! 산 자에게 남긴 임 위원장의 마지막 메시지일지도 몰라.”
    “세상에, 정말 그러고 보니 그러네.”
    “지금 즉시 휴대전화의 사진을 스캐닝하고, 저쪽 수사팀 모르게 은밀히 감식을 의뢰해.”
    “옛설! 아참! 팀장님. 지난번에 제가 최근 압축송수신이 자주 이루어진다는 말씀을 드렸었죠?”
    “팀장님, 요즘은 간첩도 편해져서 휴대전화를 많이 사용하지 않나요? 중국 쪽 전화연결망을 활용하면 북한과 직접 연결할 수도 있고요?”

    “물론 휴대전화가 사용에 있어 편하긴 하지. 하지만 휴대전화는 통화 즉시 정확한 전파추적은 기본이고 내용감청까지도 가능하잖아. 그것에 비해 압축송수신은 불편하긴 하지만 워낙 짧은 시간에 송수신이 이루어지거든. 때문에 우리가 발신전파를 증폭해 추적에 들어갔을 땐 이미 꼬리를 말고 도망갔을 가능성이 높지.”
    “그런데 감청팀에서 그동안의 감청결과를 비교·분석한 결과 압축송수신이 빈번하게 이루어지는 포인트가 강북구 쪽으로 좁혀진 모양입니다.”
    “강북구?”
    “예.”
    “아, 맞다! 유진 씨?”
    “또 왜요, 팀장님.”
    “윤지수 씨 화원에서 근무하는 배달기사에 대한 신분조회 좀 부탁해.”
    “신분조회요?”
    “응.”
    “히유~! 이러다 난 도대체 언제 시집을 가나?”
    “걱정도 팔자다. 우리 팀장님이 있잖아. 설마하니 그렇게 부려먹고 모른 척 하시겠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