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서화 장편소설 '레드'-1

  • <13> 모란

    지수의 눈빛에는 새집에 첫발을 들여놓을 때 느끼는 그런 설렘이 있다. 그리고 지수의 이야기도 색과 맛이 다른 10겹의 캔디 같았다. 그래서 이야기를 듣다보면 각기 다른 캔디나 풍선껌이 입 안에서 터져 새로운 맛과 질감이 느껴졌다. 더구나 그 맛과 질감은 혀끝의 미묘한 움직임에도 오묘하게 바뀌었다.
    현우는 지난밤의 환상에서 좀처럼 깨어나지 못했다. 현우의 감정은 이제 지수의 지배력 범위 내로 서서히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한편 정원은 국정원의 화재대피계단에 있었다. 정원은 탈출안내판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정원의 눈빛은 잘 드는 칼처럼 어제보다 한층 더 날카롭게 날이 서 있었다.

    “말씀대로 임 위원장이 우리에게 무언가 메시지를 남기려 한 게 확실합니다.”
    “역시 그랬군.”
    “최근 국내기술로 개발되어 현재 국제특허를 심사 중인 최첨단 적외선기술을 활용한 결과라 신뢰성도 아주 높습니다.”
    “재국 씨,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해봐.”

    “가장 먼저 임 위원장이 사망하기 직전 눈의 초점이 단일지점에 머무른 시간과 그 미세한 움직임을 추적했습니다. 그런 다음 선과 점으로 매핑(Mapping·2차원의 이미지를 3차원으로 표현하는 것)을 했습니다. 이후 현장에 남아 있던 혈액의 두께와 넓이 그리고 글자를 쓴 손가락의 진행방향도 데이터화했습니다. 마지막엔 글자의 중심점을 잡고 다시 글자 전체의 혈액을 똑같은 양만큼 일일이 제거한 후에 알아낸 사실입니다.”
    “최첨단기술을 사용했다면서 뭐가 그렇게 복잡해요.”

    “야! 서유진?”
    “아유! 깜짝이야. 왜요, 재국 선배?”
    “너 여기 와 있으면 어떻게 해. 비상구에서 누가 오나 잘 살펴야지.”
    “이상 없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비상구를 완전 폐쇄했거든요. 이제 됐죠?”
    “후후후. 그 정도면 됐어. 재국 씨, 하던 이야기나 마저 하자고.”

    사실 정원은 팀장으로서 수많은 현장경험과 상황에 적절히 대응하는 전술적인 결정력도 훌륭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뛰어난 능력은 바로 통솔력이었다. 정원은 그 통솔력을 팀원들 상호 간의 호흡에서 이끌어냈다. 그에 비해 재국은 팀의 생존과 안전을 책임졌다. 재국은 한번 필(Feel)이 꽂히면 꼬리에 불붙은 황소처럼 물불을 안 가리고 달렸다. 그 저돌적인 성격 때문에 때론 보는 이들을 불안하게 만든다. 하지만 사람의 됨됨이는 말이 아닌 행동으로 더 정확히 알 수 있다. 아무튼 정원의 눈엔 진실에 접근하기 위한 재국의 노력이 충분히 보였다.

    “왼쪽에 쓰인 글자는 비교적 쉽게 ‘모’자임을 밝혀냈어. 그런데 오른쪽 글자는 혈액이 덮어 아쉽지만 최첨단기술로도 도저히 알아낼 수가 없었어. 하지만 최종적인 단어는 두 음절로 구성됐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거야.”
    “‘모’?”
    “예, 팀장님.”
    “‘모’가 뭘까? 뭐를 의미하는 걸까요. 재국 선배?”
    “글세, 아직은 나도……. 단지 두 번째 글자의 초성 제일 윗부분이 가로획으로 이루어졌음은 간신히 확인했어. 그것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ㄴ, ㅅ, ㅇ, ㅎ은 그 가능성이 매우 희박해. 어쨌든 그 문제의 ‘모’가 전체 메시지에서 가장 중요한 첫 글자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어.”
    “그렇다면 예전의 노래제목처럼 ‘모모’란 이야긴데.”
    “팀장님, 이건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죽음이 임박한 다급한 상황이잖아요?”
    “그런데, 유진 씨?”
    “그 분위기에서 메시지로 용의자의 속성이나 상태를 나타내는 형용사를 쓴다는 건 한가하다 못해 너무 무모하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서 말이에요.”
    “!”
    “더구나 진실을 밝히려고 남긴 메시지에 또다시 대명사를 쓴다는 것도 상식 밖의 일이고요. 물론 부사는 0.1퍼센트의 가능성도 희박하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남는 것은 명사와 동사?”
    “맞아요, 재국 선배. 임 위원장이 전달하려고 했던 의미가 거기에 있지 않을까요?”
    “야! 이거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우리 유진이가 제법인데!”
    “! 제 생각이 어떠세요. 팀장님?”
    “동사도 아닌 것 같아.”
    “그건 왜죠?”
    “동사가 용의자의 잔혹성은 설명할 수 있지. 하지만 결정적으로 동사가 메시지라면 그 용의자가 누군지 설명할 수는 없잖아. 안 그래, 유진 씨?”
    “그런가요.”

    화재대피계단은 특이한 공간구조 때문에 세 사람의 대화가 동굴 속에서 듣는 물방울 소리처럼 울림 또한 컸다. 더구나 지하부터 꼭대기 층까지 하나로 연결된 통층구조는 개미소리만 한 작은 소리조차도 직선으로 날아갔다. 그래서 세 사람은 자세를 더욱 낮추고 입을 손으로 가렸다. 건물 전체의 비상구를 모두 잠근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느 층에서 불쑥 불청객이 들이닥칠지 모르는 일이기도 했다. 그때 재국이 심각한 표정으로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물론 재국의 눈빛은 대화의 마침표를 찍듯 결연했다.

    “그래서 밤새 머리를 쥐어짜다 결국 국어사전을 찾아봤습니다.”
    “아, 맞다! 국어사전. 그래, 결과는요. 재국 선배?”
    “모로 시작하는 단어는 ‘옮겨심기 위하여 가꾸어 기른 어린 벼’를 의미하는 ‘모’에서 ‘어머니의 가르침’을 뜻하는 ‘모훈(母訓)’까지 총 687개였어. 그리고 그중에서 한 번에 발음할 수 있는 음절이 두 개인 단어는 ‘조각 작품을 그대로 본떠 새긴다’는 의미의 ‘모각(模刻)’에서부터 시작해 모두 256개가 있었고.”
    “그렇게나 많아요?”
    “의미상 연관성이 있어 보이는 단어들을 대충 추리면 열여섯 단어였어.”
    “그게 뭐죠?”
    “모과·모국·모단·모당·모델·모란·모래·모려·모맥·모반·모빌·모주·모집·모천·모초·모충.”

    무언가 입 안에서 미꾸라지처럼 빠져 다녔다. 하지만 정원은 안갯속에 숨은 그것의 실체에 좀처럼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 17세 소녀처럼 부끄럼을 많이 타 다가가려 하면 도망가고 쫓아가면 얼른 강을 건너 그 흔적조차 지우길 수차례. 반복되는 실패에 결국 정원은 두 사람을 남겨놓고 몸을 돌렸다. 하늘은 쪽빛세상이었다. 그 파란 하늘 한 귀퉁이에선 꽃을 피우려는지 하얀 구름이 커다란 잎사귀 하나를 만들고 있었다.

    “모과·모국·모단·모당·모델·모란. 모란!”
    “모란요?”
    “모란이라. 그래 맞아! 바로 이거야, 모란!”
    “모란이 확실한가요. 팀장님?”
    “재국 씨, CCTV 판독결과가 어떻게 나왔다고 했지?”
    “용의자가 아마조네스였다고 했습니다. 아하! 그래서 모란이라고 확신하신 거군요. 그렇죠?”
    “재국 선배, 무슨 말이에요. 전 도무지…….”

    “북한의 특수부대들 중 정찰총국 소속으로 후방에 침투해 유흥업소의 접대부로 일하면서 요인 암살과 포섭, 그리고 정보수집 등의 임무를 수행하는 여성 정찰요원들이 있어.”
    “그리고 임 위원장의 과거행적과 용의자의 살해방법. 더불어 그 파장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모란’이 가장 신빙성이 높아. 아니, 의심의 여지가 없어. 왜냐하면 북한의 특수부대들 중 여성요원을 남파시키는 곳은 ‘모란꽃소대’가 유일하잖아.”
    “그렇다면 결국 직파간첩이라는 말씀인가요?”
    “흠! 아마도. 하지만 잠입방법은 아직까지 불분명해. 김명호·동명관처럼 처음부터 공격타깃을 정하고 내려온 암살조와 원정화처럼 탈북자로 신분을 위장해 국내에 잠입한 뒤 차후 활동을 개시한 고정간첩 모두 가능성이 있어.”
    “어쨌건 팀장님, 이제 용의자의 윤곽도 대충 잡혔으니 어디에 숨어있나 그것만 찾아내면 되는 건가요?”
    “찾는다고?”
    “예, 하긴. 지난달 통일부 자료에 의하면 탈북자가 어느새 2만 5천 명에 이르렀답니다. 그러니 생각처럼 쉽지는 않겠지만 말입니다.”
    “재국 선배, 누가요?”
    “우리 팀이. 팀장님과 나, 그리고 너 서유진. 이렇게 세 명이서 말이야.”
    “도대체 무슨 권한으로 수사를 한다는 거죠?”
    “!”
    “재국 선배, 잊었어요? 우린 공식적으로 수사권이 없잖아요. 더 정확히 말하면 엄 처장님에 의해 강제로 박탈당했다고요.”
    “아참! 그랬지, 아깝다. 우리가 가진 진짜 실력을 보여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데.”

    재국의 눈빛에는 진한 아쉬움과 조직의 결정에 대한 야속함이 스며들어 있었다. 정원이 재국을 팀원으로 선택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사물의 부분이 아닌 전체를 본다는 점이었다. 때로 재국은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처럼 투박했다. 그러나 극단적인 선택보다는 언제나 그 중간을 선택했다. 그리고 세상의 어떤 독일지라도 소화시킬 수 있는 긍정적인 위도 가지고 있었다. 역시나 금방 재국의 눈빛엔 썰물이 빠져나간 갯벌처럼 검은 숨구멍들이 여기저기 나타났다. 그리고 숨구멍으로 작은 기포들이 뽀글뽀글 올라왔다. 아니, 어쩌면 재국은 포기 그 자체를 몰랐다.

    “아참! 유진 씨, 지난번에 내가 알아보라고 한 건 어떻게 됐어?”
    “어떤 거 말씀이죠?”
    “윤지수 씨 화원에서 근무하는 배달기사의 신분조회.”
    “배달기사의 신원정보는 물론이고 윤지수 씨의 화원에서 일하는 다른 화환제작 기사와 꽃꽂이 강사도 별다른 특이사항 하나 없이 깨끗했어요. 심지어 학교 다닐 때 그 흔한 결석도 하나 없습니다.”
    “그래?”
    “예. 아! 맞다. 팀장님, 내일 시간 있으시죠. 저와 함께 제주도에 가실 수 있죠?”
    “제주도?”
    “예.”
    “유진 씨, 뜬금없이 지금 무슨 소리야?”
    “항공기티켓은 제가 구매했으니까 팀장님은 몸만 가시면 돼요. 훗!”
    “!”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유진은 곧장 강화철근빔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하지만 남겨진 두 사람은 너무도 갑작스런 일이라 뜻밖의 상황에 몹시 당황스러웠다. 물론 일찍이 경험한 적이 없어 적절한 대처방법도 몰랐다. 아무튼 지금 보인 유진의 부드러운 감성화법은 평소의 그녀와 거리감이 있었다. 그런데 그 거리감은 흥미를 자극했는지 재국이 사뭇 재미있어 했다.


    “팀장님?”
    “으, 응.”
    “뭐하세요, 얼른 따라가지 않고.”
    “왜?”
    “모르시겠어요?”
    “뭘?”
    “지금 유진이가 작업벨을 울리고 있잖습니까.”
    “작업벨? 난 못 들었는데.”
    “이거야 원. 무턱대고 작업벨부터 울린 유진이가 한심한 건지 작업벨이 뭔지도 모르는 순진남이 한심한 건지 나도 잘 모르겠다.”
    “혹시 나를?”
    “그럼 지금 유진이가 저를 향해 작업벨을 울렸겠습니까. 팀장님, 혹시 말입니다. 연애 한 번도 안 해보셨습니까?”
    “재국 씨는 내 마음도 읽어?”
    “팀장님. 혹시 여자가 남자를 좋아할 때 어떤 행동을 하는지는 아세요?”
    “그거야 나도 대충은 알지. 남녀가 서로 좋아하게 되면 상대에게 연락도 자주하고 선물도 많이 하잖아.”
    “아이쿠! 범죄심리학은 박사급이시면서 연애에 있어서는 완전 순진남이시네요.”
    “내가 그 정도야?”
    “그것도 좋게 말해서요. 솔직히 말하면 문외한이고요. 아무튼 ‘여자는 눈빛으로 말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건 여자가 본능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눈빛이나 표정을 통해서 표현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즉 여자의 직감적인 감성은 남자의 논리적인 이성과 마찬가지로 여자가 가진 원초적인 본능이라는 겁니다. 팀장님, 어서요!”
    “그, 그래. 재국 씨, 알았어.”
    “그림 참 죽인다! 완벽해! 우리 팀장님이 조금만 더 눈치가 빨랐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지만. 어쩌면 그것도 순진남의 심벌처럼 팀장님의 매력으로 보일 수가 있지. 후후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