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서화 장편소설 '레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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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베일 속 인물


    유진은 입가를 장난스럽게 씰룩거렸다. 그리곤 택배상자를 테이블 밑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때 정원의 무심한 눈을 단번에 사로잡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은 겉 포장지에 쓰인 이니셜 ‘GCH’였다. ‘GCH’는 빨간 유성펜으로 낙서하듯 상자의 한쪽 귀퉁이에 작게 쓰여 있었다. 택배상자의 옆면에 써 놓아 취기가 얼마만큼 오른 유진으로선 발견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정원은 수만 볼트의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머릿속이 한순간 새까맣게 탔다. 정원은 유진의 양해를 구한 다음 거칠게 상자를 개봉했다. 하지만 상자 속에는 완충제로 사용한 하드케이스 위에 바위이끼로 감싼 제법 큰 자연산 더덕뿐이었다.

    “팀장님, 정말 더덕뿐인데요.”
    “와! 그 녀석 뿌리도 굵고 육질도 돌처럼 단단하네. 음, 거기다 더덕 특유의 향도 아주 강하고. 유진아, 향기만 맡아도 사포닌이 몸에 막 녹아드는 것 같다!”
    “보낸 사람이 강 과장님이 맞다면 왜 택배운송장의 <보내는 고객>란에 강치환이 아닌 쇼핑몰과 판매회사명이 기록되어 있겠습니까. 우연이거나 아니면 팀장님이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시는 것 아닐까요?”
    “만일 강 과장님이 직접 보냈다고 한다면 중간에 착오가 발생할 소지를 사전에 감안했다는 소리인데. 글쎄요. 비밀스럽게 보내면서 분실위험을 감수한다는 것도 어딘지 모르게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은데요.”
    “유진 씨도 같은 생각이야?”
    “예, 저도 재국 선배와 같은 생각이에요.”

    하지만 정원의 고집은 집요했다. 유진의 말이 채 끝나기가 무섭게 정원은 택배상자를 거꾸로 뒤집어 거실바닥에 내용물을 단번에 쏟았다. 그리고는 밑바닥에 고정되어 있는 하드케이스에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두드려보고, 흔들어보고, 심지어 냄새까지 맡았다. 하드케이스는 언뜻 보기에 반투명으로 속이 텅 빈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정원은 작심한 듯 이내 주먹으로 그 하드케이스를 부숴버리고 말았다. 순간 거실에는 정원의 과격함이 유리 파편처럼 튀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것은 파편들이 접착제로 고정시킨 것처럼 고스란히 제자리에 남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역시 그랬군. 반투명이 아니라, 스티로폼으로 하드케이스 안쪽을 빈틈없이 채운 거야. 강 과장님은 자기의 죽음을 미리 예견한 것이 틀림없어.”
    “아니, 어떻게…….”
    “그건 강 과장님을 필드에서 살아남게 한 무서운 본능이겠지.”
    “팀장님. 스티로폼 속에 편지가 있어요.”

    이시은 씨에게
    정말 오랜만에 국정원 후배의 전화를 받으니 반가움보다는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내가 젊은 청춘을 바친 곳이고, 또 후회 없는 시간을 보낸 곳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제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어 시은 씨가 궁금해 하는 부분만 간단히 말하겠습니다.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 직전에 국정원은 조광무역이 중국은행(홍콩)에 가지고 있던 비밀계좌로 2억 5000만 달러를 송금했습니다. 물론 이 자금은 현대가 대규모 대북사업을 독점하는 대가로 북한에 지불하기로 한 총 14억 4,200만 달러 중 일부입니다. 당시 대북비밀송금에 관여한 국정원 인사는 기조실장이던 최 모 씨와 김 모 예산관이었습니다.
    하지만 외부에 전혀 공개되지 않은 인물이 또 한 명 있습니다. 그는 청와대와 국정원, 그리고 현대의 입장을 막후에서 조율했던 인물로 당시 사용하던 직위와 이름은 ‘예산관 구인수’였습니다. 물론 가직위와 가명입니다. 따라서 시은 씨가 알고 싶어 하는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구인수란 인물이 누구인지, 그 실체를 먼저 밝혀야 합니다. 제가 아는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마지막으로 부탁하는 건 몸조심하라는 것입니다. 한 번의 실수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아무리 정의라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세상엔 그 정의를 수단으로 생각하는 세력이 분명 존재합니다.
    만일 이 편지가 시은 씨에게 전달된다면 아마 저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이 편지의 전달자나 배달지를 추적하지는 마십시오. 시간낭비일 뿐입니다. 택배운송장은 가짜이며 저를 도와준 편지함(Letterbox·메시지를 중간에서 전달하는 정보요원) 역시 시은 씨처럼 프로입니다. 저는 비록 임무와 기회는 잃었지만 국가와 조직에 대한 충성만큼은 끝까지 갖고 가겠습니다.
    그럼, 건승을 빌며. 대한민국의 미래를 책임질 젊은 국정원 후배에게 신의 가호(加護)가!
    ‘Your Eyes Only(오직 당신만)’.
    GCH

    거실에는 세 사람의 눈에서 쏟아져 나오는 분노가 활활 타올랐다. 일반적으로 정보기관에서 정보를 생산하고 그 정보를 토대로 집행하는 일련의 시스템을 정보순환체계라 부른다. 정보순환체계는 기획·수집·처리·분석과 생산·유포, 그리고 다시 환류되며 전 과정을 반복하는 방식이다. 그렇게 최종적으로 작성된 정보보고서는 유출 가능성을 최소화하기 위해 반드시 인편으로 제공된다. 물론 최고 의사결정권자에게 보고되는 탑 시크릿은 그것조차도 만들지 않는다. 즉 그냥 구두로 브리핑을 하는 페이퍼리스(Paperless·정보나 데이터를 종이에 쓰지 않고 전달하는 방식) 형태다. 강치환이 말한 ‘Your Eyes Only’는 바로 ‘오직 당신만 읽고 숙지한 다음 곧바로 파기하라’는 철저한 보안과 주의를 당부하는 말이었다. 세 사람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아니, 입을 여는 순간 앞서 간 선배의 고귀한 희생정신이 훼손될 것만 같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