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서화 장편소설 '레드'-1

  • <21> 램프워킹(Lampworkig)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정원은 흡사 야간사냥을 나가는 사자 같았다. 그때 반대편 복도 끝에서 단정하게 네이비 색상의 바지정장 차림을 한 유진이 걸어왔다.
    “팀장님, 들으셨어요?”
    “중견방위산업체인 K&HA의 부사장으로 있던 마재성의 권총자살사건?”
    “예. 그런데 저는 지금까지 K&HA가 대기업 못지않은 내실과 경쟁력을 갖춘 기업으로 알고 있었는데, 그게 아닌가요?”
    “그러게, 나도 지금까지 그렇게 알고 있었거든. 그런데 오늘 방송과 신문에서는 모두 납품실패로 인해 회사가 부도 직전에 내몰리자 마재성 스스로 자살한 것으로 보도하던데.”
    “그래서 드리는 말씀이에요. 우리 군의 방호능력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는 다목적 한국형 능동방어 시스템인 Hard Kill-2를 순수 국내기술로 개발했잖아요. 그런데 왜 그런 우수한 시스템을 방위사업청에서 납품을 받아주지 않는 거죠?”
    “그건 무엇보다 Hard Kill-2의 소프트웨어가 불완전하기 때문이야. 하지만 보다 심각한 문제는 벌써 무기체계로서의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했다는 거겠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팀장님?”
    “‘모순(矛盾)’이라는 단어의 뜻 알지?”
    “창과 방패잖아요.”
    “맞아. Hard Kill-2가 방패라면 그것을 뚫기 위한 창도 존재하지.”
    “러시아의 RPG-30과 같은 신형 대전차미사일과 미국의 CKEM, 캐나다의 HEMi와 같은 초고속 운동에너지 미사일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그래. 어쩌면 현대전에 있어서는 방패의 개념보다 창이 더 효율적이고, 승리를 담보하는 최고의 전략인지도 몰라. 즉 적을 먼저 확실히 제압할 수 있다면 그것이 곧 최선의 방어가 될 테니까. 그런데 문제는 창의 파괴력이 방패의 생존력을 예상치보다 훨씬 빨리 뛰어넘고 있다는 거야.”
    “그러면 Hard Kill-2의 존재 의미도 사라지는 것 아닌가요?”
    “그래서 추가로 Hard Kill-2의 획기적인 성능 개량이 요구되고 있어. 그런데 그것이 ‘K&HA’의 자체 기술력만으로는 아무래도 무리라는 거야. 즉 성능 개량은 단순히 시스템상의 소프트웨어를 수정하는 것만으로 끝나는 게 아니거든.”
    “그럼요?”
    “우리나라의 일개 중견 방위산업체가 맨몸으로 세계무기수출시장을 움켜쥐고 있는 미국과 러시아의 거대 군산복합체를 상대로 싸워서 이겨야 한다는 걸 의미하지.”
    “그야말로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군요.”

    야생의 제1법칙은 승자가 패자의 모든 것을 차지하는 것이다. 영토전쟁에서 패한 수컷은 자신의 암컷조차 빼앗긴다. 지구촌의 경제·군사전쟁도 동물세계와 별반 다름이 없다. 바로 자본과 안보를 승자에게 저당 잡히는 것이다. 우리 민족은 그것을 역사를 통해 통절히 배웠다. 대화를 하는 사이 정원과 유진은 이미 사무실에 들어와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한여름 밤 흉가에서나 들어봄 직한 괴기스런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귀신소리의 진원지는 파티션 뒤쪽이 분명했다. 하지만 정원과 유진은 놀라기는커녕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무시했다.

    “에이! 뭐야. 재미 하나도 없네.”
    “출근시간에 이런 유치한 장난이나 하는 재국 선배를 과연 내 절친인 은서에게 소개시켜주어도 되는지 무척 고민되네요.”
    “그런데 팀장님.”
    “뭔데 재국 씨.”
    “이번 마재성 권총자살사건에서 왠지 썩은 샌드위치 냄새가 나지 않으세요?”
    “썩은 샌드위치 냄새라. 흠…….”
    “그러니까 가장 이상한 점은 자살자가 탄창에 재워진 10발을 모두 소진할 수 있는가 하는 부분입니다.”
    “맞아요, 재국 선배. 제아무리 죽음에 대한 확고한 의지와 능력을 가졌더라도 자살을 기도할 때는 최대한 고통 없이 죽기를 원하잖아요. 따라서 한두 발이면 충분한 것을 굳이…….”
    “그리고 두 번째로 K&HA는 부사장이 죽었는데도 현재까지 주식의 변동폭이 무시해도 좋을 만큼 아주 미미합니다. 그건 회사의 자금 사정이 언론보도와 달리 그렇게 나쁘지 않다는 방증(傍證)이 되잖습니까?”
    “흠!”
    “마지막으로 마재성이 직접 운영하는 칵테일바의 종업원들 진술입니다. 종업원들의 진술로 드러난 문제의 20대 여성은 지금 그 행방이 묘연합니다.”
    “아니, 왜요? CCTV를 판독하면 쉽게 확인할 수 있잖아요?”
    “내 생각도 그래. 그런데 확인결과 아직까지 경찰에선 CCTV를 확보하지 못한 모양이야.”
    “그럼 그 사이 누가 벌써 CCTV를 훼손했나요?”
    “아마 아닐 거야. CCTV를 설치할 필요성을 처음부터 아예 느끼지 못한 거지. 원래 방위산업체의 납품에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뒷거래가 많거든.”
    “그러니까 그 칵테일바가 로비장소로 이용됐을 가능성이 높다는 말씀이군요. 따라서 신분노출을 극도로 꺼리는 고위층 인사들을 위한 배려로 처음부터 CCTV를 설치하지 않았고 말입니다.”
    “맞아.”
    “히~유!”
    “자 자. 마재성의 자살사건은 경찰 측에 맡기고 우리는 우리 일이나 하자고.”
  • 현우는 요즘 자신이 무리했다는 걸 온몸으로 느꼈다. 약간의 몸살 기운이 있어 토요일임에도 불구하고 회사 일을 대충 정리한 다음 일찍 퇴근했다. 감기약을 먹고 막 침대에 누우려는 순간이었다. 침대 옆의 협탁 위에 놓아둔 휴대전화의 발신음이 들렸다. 지수였다. 현우는 통화를 마치자마자 창문부터 활짝 열었다. 그리곤 서둘러 청소기를 들고 18평 남짓한 오피스텔의 이곳저곳을 뛰어다녔다. 그러는 사이 현우는 몸살 기운이 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어버렸다. 이동식 주방 수납테이블이 들어가 있는 아일랜드식탁 청소를 마지막으로 굳은 허리를 곧게 펴자 등줄기를 타고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그 순간 반가운 손님의 방문을 알리는 초인종이 울렸다.
    “지수 씨, 혹시 집 안에서 쾨쾨한 총각냄새 나지 않나요?”
    “나는데요. 그것도 코가 막힐 정도로 엄청 강하게요.”
    “그래요? 이걸 어쩌나. 아, 맞다! 잠깐만 기다려줘요.”
    “어디 가시게요?”
    “예. 마트에 뛰어가서 방향제라도 사오게요.”
    “방향제라면 마트에 안 가도 돼요. 혹시나 해서 제가 화원에서 로즈메리를 갖고 왔거든요. 그런데 이것도 괜히 갖고 온 것 같네요. 현우 씨 집에서 나는 냄새는 로즈메리보다 더 향기로운데요.”
    “그럴 리가?”
    “정말이에요. 현우 씨의 땀 냄새가 저는 허브향보다 더 좋은데요.”
    지수는 물결 같은 긴 머리로 바람을 맞으며 조심스럽게 실내로 걸어 들어갔다. 지수는 창문에서 끊긴 빛줄기를 가져와 순식간에 집 안의 혼란스러움을 정리하고 새로운 의식세계를 펼쳐놓았다. 지수는 확실히 무언가 달랐다. 시선 한 가닥, 말 한마디, 수줍은 미소 한 자락. 심지어 가볍게 스치는 향기 한 줌도 중세의 성화 속에서 막 뛰쳐나온 것 같은 신비로움 그대로였다. 사실 현우는 오피스텔 전체를 온전히 상상력 넘치는 자신만의 공간으로 꾸몄다. 샐러리맨이라면 하나쯤 갖고 싶어 하는 그런 자신만의 숲 속 놀이터였다.
    “어머, 예뻐라! 현우 씨, 이 액세서리들은 모두 뭐예요?”
    “램프워킹(Lampworkig)이라는 유리공예작품이에요.”
    “램프워킹요?”
    “예, 주로 토치(Torch)처럼 작은 불꽃으로 소품들을 만드는 작업을 가리켜요.”
    “그럼 혹시 이거 모두 현우 씨가 직접 만드신 거예요?”
    “시간이 날 때마다 심심풀이로 만들어봤어요.”
    “이 많은 걸 다요? 대충 어림잡아도 한 이삼백 점은 되겠는데요?”
    “대학 때 교양과목으로 공예과의 유리공예강의를 들었어요. 그런데 머릿속이 복잡할 때마다 작업대에 앉아 녹이고, 늘리고, 꼬고, 붙이고 하다보면 어느 순간 머리가 맑아지면서 편해지는 기분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지금까지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만들고 있어요. 요즘엔 공예과 교수를 하는 친구에게서 불로잉(Blowing)기법도 틈틈이 배우고 있고요.”
    “그건 또 뭔가요?”
    “아마 TV에서 많이 보셨을 거예요. 녹은 유리를 쇠로 된 파이프에 묻혀 비눗방울처럼 불어서 작품을 완성하는 거요.”
    “아! 그게 바로 블로잉기법이구나.”

    지수는 진열장에서 바람개비 모양을 한 파란색 브로치와 플라워 이어링 한 쌍을 집어 들고 천진난만하게 웃어보였다. 그리곤 창문가에 세워둔 전신거울로 걸어갔다. 플라워 이어링은 지수의 순수한 이미지와 너무나 잘 어울렸다. 지수는 또 다른 자신을 만난 듯 놀라며 자신도 모르게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몇 걸음 뒤에서 지수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던 현우는 땀을 대충 훔친 다음 주방으로 가서 무선 주전자의 스위치를 눌렀다. 현우는 순간순간 변하는 지수의 얼굴을 훔쳐보며 그녀의 얼굴은 태양과 바람으로 만들어진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지수 씨, 커피 드세요. 이건 드립식 커피라서 바로 마셔야 해요. 식으면 쓰고, 떫은맛이 많아져 향미가 없거든요.”
    “음, 커피의 향과 맛이 좋은데요.”
    “실은 마트에서 산 원두가루로 내린 거예요.”
    “그럼 현우 씨랑 마셔서 그런가. 전 너무 맛있어요. 현우 씨는 커피 맛이 어때요?”
    “세계 최고급품이라는 콜로비아의 메데인에서 생산되는 커피 맛 같아요. 물론 지금까지 한 번도 마셔본 적은 없지만요. 후후후.”
    “에이, 그건 좀 심하다.”
    “정말요!”

    단맛·신맛·쓴맛·떫은맛의 조화로 얻어지는 것이 바로 커피의 오묘한 맛이다. 단맛은 쓴맛이 강하면 느끼기 어렵다. 그래서 그 자체로 단맛이 느껴지는 커피가 바로 좋은 커피다. 지수의 미소는 현우의 모든 감각을 마비시킬 만큼 달았다. 그에 비해 현우는 지수의 눈보다는 마음을 즐겁게 했다. 그래서 지수는 현우와 있을 때면 때와 장소에 상관없이 편안함을 느꼈다.

    “현우 씨, 궁금해서 그런데요. 이런 앙증맞은 소품들은 어떤 상상력으로 만드는 거예요?”
    “저도 얼마 전에야 겨우 깨달았는데요. 새로운 경험을 통해 자기의 정신세계를 한 차원 높일 때 비로소 가능하더라고요.”
    “그럼 재료와 도구는요?”
    “재료는 이 세상에서 구할 수 있는 최상의 순결한 마음이고요.”
    “소품들을 만들면서 현우 씨는 무슨 생각을 하세요?”
    “초록의 바다가 넘실대는 상상을 하죠.”
    “그렇구나!”
    “그런데 그 모든 요소를 합친 게 바로 지수 씨예요.”
    “정말로요?”
    “예, 지수 씨를 생각하면 소품을 만드는 시간이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그런데 왜 자꾸 눈물이 나려고 하죠. 창피하게.”

    현우는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해본 적 없는 낯간지러운 말을 쏟아냈다. 하지만 그런 자신이 전혀 창피하지 않았다. 물론 그 말을 듣는 지수의 얼굴은 볼가에서부터 붉게 물들더니 어느 순간 행복감으로 가득했다.
    그로부터 두 시간쯤 흘렀을 때, 길 건너 마트에서 장을 보고 나온 현우와 지수가 막 아파트의 경비실을 지나칠 무렵이었다. 지수는 물건을 담은 비닐봉투를 들고 남은 한 손으로 무의미하게 흔들리는 현우의 손을 슬그머니 잡았다. 그리곤 현우를 올려다보며 아이처럼 해맑게 웃어보였다. 지수의 길고 하얀 손가락은 아이스크림처럼 부드럽게 현우의 손가락 마디마디에 녹아들었다.

    “지수 씨.”
    “왜요, 현우 씨?”
    “제 가슴 한 번 만져볼래요.”
    “가슴을요?”
    “예, 질주본능만 남은 경주마 같지 않아요?”
    “훗! 그~래요. 현우 씨 심장이 왜 이렇게 빨리 뛰어요?”
    “전 지수 씨를 보면 이렇게 심장이 미친 듯이 빨리 뛰어요.”
    “!”

    앞서 누가 내렸는지 엘리베이터는 1층에 멈춰 서 있었다. 떨어지기 직전의 홍시처럼 발갛게 상기된 지수는 누가 볼세라 고개를 푹 숙이고는 서둘러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주변엔 두 사람 외에 아무도 없었다. 현우는 왠지 어색해서 위치표시기만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정말이지 수많은 생각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어느덧 올라가기만 하던 엘리베이터가 걸음을 멈추고 문이 열렸다. 그런데 그 순간 지수가 그림자처럼 다가와 현우의 손을 다시 꼭 잡았다. 현우는 머릿속에 가득했던 불길한 우려들이 단번에 날아가 공허함마저 느꼈다. 현우가 이미 촉촉하게 이슬을 머금고 있는 지수의 눈을 본 건 바로 그때였다.

    “현우 씨, 제 손 먼저 놓으면 안 돼요. 알았죠?”
    “물론이죠. 아직도 그 예쁜 손에서 콩당콩당 뛰는 제 심장고동이 느껴지지 않아요?”
    “훗! 느껴져요.”
    “그 느낌이 바로 저의 주체할 수 없는 행복감이에요.”
    “!”

    각자의 손에 들린 비닐봉투를 바닥에 내려놓자마자 현우와 지수는 탁한 숨을 토해냈다. 그리곤 서둘러 오피스텔 안의 공기를 들이켰다. 어떤 종류의 씨앗이 창문을 통해 날아들었는지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제법 작은 생명력까지도 느껴지는 그런 신선함이 오피스텔을 숲의 향기로 가득 채우고 있었다. 딱딱한 시멘트 바닥을 뚫고 사방에서 이름 모를 꽃들이 자라나 마치 하늘의 정원처럼 느껴지는 환상 그 자체였다. 어느새 현우는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그리고 고추장과 된장, 마늘 약간, 다진 생강과 깨소금 약간, 참기름과 올리고당을 넣어 비빔장을 만들었다. 현우가 그러는 동안 지수는 유리공예작품들을 일일이 만져보고 쓰다듬고, 어떤 것에는 뽀뽀까지 했다. 냄새가 구수했는지 순간 지수는 주방으로 눈길을 돌렸다. 하지만 현우와 눈길이 마주치자 이내 빙그레 웃어보이고는 다시 시선을 진열장으로 옮겨갔다.

    “히유!”
    “어머, 현우 씨. 이제 요리가 다 된 거예요?”
    “히~. 예.”
    “향기가 너무 좋은데요. 허브비빔밥 맞죠?”
    “가끔 입맛이 없을 때 해먹곤 하는데 지수 씨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네요.”
    “저도 엄청 좋아하거든요. 아, 배고프다. 현우 씨가 무슨 요리하는지 아까 구수한 냄새를 맡고 대충 짐작했어요. 참느라고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요. !”

    지수는 현우가 건넨 허브비빔밥을 보고는 입이 함지박만큼 벌어졌다. 그리곤 서둘러 수저를 집어 들었다. 그때 그림자처럼 살며시 다가온 현우가 어깨 너머로 무언가를 건넸다. 묵직한 느낌의 프랑스 북부 론 지방의 최고 와인으로 평가받는 코트 뒤 론 루주(Cotes du Rhone Rouge)였다. 지수는 와인을 받아들곤 다소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지수는 그런 엉뚱한 상상도 재미있어 했다. 아무튼 영어로 레드(Red)를 의미하는 루주는 지수의 입 안을 충분히 적신 다음 그 감미로움으로 부드럽게 식도를 따라 흘러내렸다. 그런데 지수의 예상과 달리 와인은 다양한 향이 나는 한국 음식과도 절묘하게 잘 어울렸다. 개성적인 고유의 본질이 미묘하지만 이질감보다는 신선한 충격으로 혀끝에 녹아들었다. 그 낯선 구성에 의외의 감동이 깊었다.

    “현우 씨, 제 소원하나 들어주면 안 돼요?”
    “뭔데요?”
    “제게 선물한 이 이어링을 현우 씨가 직접 만들었다고 생각하니까 그 모습을 꼭 한 번 보고 싶은 거 있죠.”
    “후후후, 알았어요.”
    현우는 주저 없이 지수를 데리고 베란다 한쪽에 꾸민 작업대로 갔다. 그리곤 가장 먼저 수납장에서 긴 막대처럼 생긴 유리봉과 밀레피오리라고 하는 형형색색의 유리커팅 제품들을 꺼냈다. 이어 보안경을 비롯해 유리공예를 하는 데 필요한 기본도구들이 작업대 위에 놓였다. 이제 현우가 능숙한 솜씨로 파란색 유리봉을 예쁜 불꽃 위로 가져갔다. 순간 불꽃의 혀끝에서 유리봉이 아이스크림처럼 녹기 시작했다. 현우는 그렇게 만든 파란색 유리비드에 다시 이쑤시개보다 조금 더 두꺼운 밀레피오리라고 하는 흰색 유리커팅 제품을 붙인 다음 송곳으로 조심스럽게 누르고 다듬었다. 그러자 아름다운 꽃이 한 송이 피었다. 지수는 그 모든 과정이 너무도 신기해 좀처럼 눈을 떼지 못했다. 현우는 주저 없이 꽃에 공기방울 수술을 붙이고, 다시 한 번 투명한 유리봉으로 비드 전체를 감쌌다. 그러자 감싼 투명유리가 볼록렌즈 효과를 가져와 조그맣던 꽃이 몇 배나 크고 화려하게 자랐다.

    “현우 씨, 이제 다 된 거예요?”
    “예.”
    “정말 아름다워요. 어쩜! 유리 속에 진짜 꽃이 피어 있는 것 같아요. 이 꽃 이름이 뭐예요?”
    “꽃 이름요? 그거야 당연히 지수꽃이죠.”
    “지수꽃요! 정말요?”
    순간 국립박물관에서 본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의 온화한 미소가 천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지수의 얼굴에 그대로 오버랩 됐다. 그 미소는 머릿속의 지우개처럼 현우에게서 현실을 말끔히 지우고 온전히 기쁨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