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서화 장편소설 '레드'-1

  • <25> 증거

    한 주가 시작되고 다시 며칠이 지났다.
    잠자리의 날개처럼 하늘거리는 옷마다 그려진 꽃들, 그리고 천상의 불꽃처럼 화려한 색채들. 거리는 그림 속 풍경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림 밖으로 튀어나와 살아 움직이는 등장인물들 같았다. 시원한 바람이 옷과 머리칼의 흩날림을 통해 계절의 깊이까지 설명했다. 더욱이 오전이라 세속적이며 관능적인 눈빛이 아닌 원죄가 없는 성스러움으로 느껴졌다. 그때 현우도 현대문명의 배경 속에서 자신이 소망하는 빛의 세계로 발걸음을 바쁘게 옮겨가고 있었다.

    “어! 나 팀장님?”
    “김 상무님, 그동안 잘 지내셨죠?”
    “그런데 감사팀장님께서 연락도 없이 무슨 일로?”
    “왜요. 제일기획에서 입고하신 F/W시즌 셔츠에 무슨 문제라도 생겼을까 봐 걱정되세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렇습니다. 워낙 예상 밖의 손님이라서…….”
    “후후후,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기획실이나 생산관리 쪽 직원들은 수시로 오니까 저희 가족 같은데, 아무래도 감사팀은…….”
    “오늘은 이 근처에 볼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아참! 납품해주신 F/W시즌의 하프코트는 예상보다 훨씬 슬림하게 나왔다고 담당자들이 호평을 하던데요.”
    “정말입니까?”
    “예, 제가 기획실에서 실장님께 직접 들은 내용입니다.”

    누구를 배웅했는지 마침 제일기획의 영업상무가 회사 현관에 나와 있었다. 그는 사무실 한쪽에 펼쳐놓은 퍼팅매트에서 골프연습이라도 했는지 헤드가 머레이징 재질로 된 아이언클럽을 어깨에 메고 있었다. 하지만 김 상무는 필드를 걷는 것조차도 힘들어 보이는 초고도 비만이었다. 현우는 마치 도심에 나타난 킹콩과 나란히 걷는 느낌이었다. 거기다 겨드랑이를 흠뻑 적신 특유의 땀 냄새가 밀려오는 너울처럼 끊임없이 뱃멀미를 일으켰다.

    “말씀만 들어도 힘이 부쩍 납니다. 고맙습니다, 팀장님.”
    “제게 고마워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게 다 제일기획의 장인정신이 만들어낸 결과니까요.”
    “아참! 회사에 들어가시면 전무님께 정말 고맙다고 인사 좀 꼭 전해주십시오. 아, 맞다! 그러고 보니까, 며칠 전 전무님이 우리 동네로 이사를 왔다고 했지. 혹시 거기에…….”
    “전무님이 이곳으로요?”
    “왜 아직 모르고 계셨어요?”
    “예.”
    “아파트 평수도 제법 크던 걸요. 몇 평이라더라. 아, 그래! 150평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팀장님, 뭣 좀 하나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뭘 말입니까. 상무님?”
    “블라우스를 만드는 미성의 고 상무는 마님을 찾아뵈어야 한다고 하고, 베스트를 만드는 유 사장은 요즘 경기가 어려우니까 하청업체 모두 똑같이 영감님만 뵙자고 하는데 어떻게 해야 되는지.”
    “무슨 말씀이신지 저는 도통……?”
    “에~이, 다 아시면서 왜 그러십니까. 저만 무안하게.”
    “!”
    “지금까지 관행처럼 굳어졌는데, 이제 와서 갑자기 안 하기도 뭣하잖습니까?”
    “상무님은 얼마나 생각하고 계시는데요?”
    “저희야 고 상무 회사만큼 큰 회사가 아니라서 매달 영감님만 뵈었습니다. 이번에는 S/S시즌 오더도 관련되어 있으니까 이참에 체면도 세울 겸해서 두 눈 질끈 감고 마님을 찾아뵐까 합니다만.”
    “글쎄요. 제 입장에선 딱히 뭐라고 말씀드리기가…….”
    “하하, 하긴 그렇죠. 제가 괜스레……. 팀장님, 안 들은 걸로 해주십시오.”
    “아, 예.”
    “그런데 요즘 듣자하니 전무님의 외동따님이 하시는 인터넷쇼핑몰이 무척 잘된다고 하던데요.”
    “!”
    “지난달에는 청담동에 60억짜리 건물도 구입했다고 들었어요. 아무튼 아버지를 닮아서 그런지 따님 역시 사업 수완이 대단해요. 우린 이거 하루 종일 실밥을 먹어도 입에 풀칠하기가 힘든데, 하하하.”
    “전문님 외동따님은 사회과학대학 언론정보학부 출신 아닌가요?”
    “글쎄요. 거기까진 저도…….”
    “어부왈, 성인불응체어물, 이능여세추이(漁父曰, 聖人不凝滯於物, 而能與世推移·성인은 세상의 명리(名利)에 집착하지 않고, 세상의 흐름에 자신을 맡길 수 있어야 한다.).”
    “왜요, 팀장님. 저 글귀가 맘에 드세요?”
    “그냥 좀 어디서…….”
    “제가 어느 분에게 물어보니까 그냥 적당히 세상에 순응하면서 살라는 의미라고 하더라고요. 거 뭐랄까. 한마디로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뜻이랍니다. 하하하.”


    “최, 우, 수, 사, 원. 설유리 점장이.”
    “나 팀장, 나 식사하고 올게.”
    “예, 전무님.”
    외근에서 돌아온 현우가 회전문을 막 밀치며 회사 내로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마주한 뜻밖의 상황에 현우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더구나 하이힐의 또각 소리가 유리처럼 맑은 대리석 바닥에 깔리어 점점 커질 때마다 현우의 머릿속은 하얗게 공동화가 진행됐다. 두 남녀도 현우를 발견하고는 어색하면서도 불편한 눈인사를 건넸다. 설유리는 과감하게 블랙 시스루 블라우스와 타이트한 하이웨이스트 블랙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거기다 살짝만 건드려도 풍선처럼 터질 것 같은 육감적인 몸매를 앞세워 백 전무에게 과장된 눈웃음을 흘렸다. 현우의 불편한 심리상태를 잽싸게 읽은 설유리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더욱 과장된 행동을 서슴없이 했다. 불순한 의도를 갖고 있음이 명확했다. 그러나 설유리가 읽은 정보는 잘못된 정보였다. 그래서 설유리의 도발적인 몸짓은 위협이 아니라 맹수에게 사로잡힌 마지막 몸부림처럼 처절하게 느껴졌다.

    “어이! 나 팀장.”
    “!”
    “뭘 그렇게 넋을 놓고 쳐다보는 거야?”
    “아, 예. 추 이사님.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니긴, 나도 대충 짐작이 가는데. 그나저나 요즘 나 팀장의 얼굴이 너무 좋아 보여?”
    “제가요?”
    “응. 꽃처럼 확 폈어. 혹시 연애하는 거 아니야?”
    “후후후.”
    “어라! 정말인가 보네. 하긴, 나 팀장도 이제 결혼할 나이가 지났지.”

    오늘도 추 이사는 친근하게 현우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는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갔다.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현우를 향한 추 이사의 살가운 미소는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그는 직장 상사가 아니라 친형처럼 행동했다. 추 이사는 엘리베이터의 문 쪽으로 몇 발자국 걸어가서 거울을 보며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바로 잡았다. 추 이사의 얼굴엔 여유가 넘쳤다.

    “나 팀장, 자네 바다낚시 좋아하나?”
    “어려서부터 산과 들녘만 보고 자라 여태껏 한 번도 해보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해볼 생각은 없어?”
    “기회가 되면 한번 해보고는 싶습니다.”
    “그래, 그럼 내가 한 수 가르쳐주지. 나중에라도 바다낚시를 가게 되면 내 말을 기억하고 꼭 그대로 해. 알았지?”
    “예.”
    “자기보다 큰 고기를 낚으려면 우선 그 덩치에 맞는 크기의 신선한 먹잇감으로 유인하는 것이 가장 중요해. 그런데 말이야. 오래된 강태공들도 때론 그 기본을 종종 잊어버리거든. 자네는 절대 그걸 잊지 마.”
    “!”
    “한낱 정어리로 잡기엔 백상아리는 너무 큰 포식자야. 섣불리 덤볐다가는 그림자도 보기 전에 먼저 잡아먹히고 말걸. 아무튼 그 크기를 짐작조차 못했는데 자네가 위험을 무릅쓰는 바람에 비로소 알 수 있었어. 수고했어. 하지만 백상아리의 공격성을 자극했으니 언제 피냄새를 맡고 자네에게 달려들지 모르니까 항상 긴장하고 있으라고.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아듣겠지?”
    “!”
    얼굴은 웃고 있었다. 하지만 얼음처럼 차가운 말이었다. 그러나 온몸의 털들이 곤두설 정도로 현우를 긴장시킨 건 또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추 이사의 말 속에 평소 그의 언행과 달리 따스한 감정이 한 방울도 섞여 있지 않았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잔인할 정도로 무감각하게 백 전무라는 한 인간의 숨통을 끊어버렸다. 현우는 억지웃음을 지었다. 어쩌면 그동안 회사 사람들은 추 이사를 자기 임의대로 규정한 것일지도 몰랐다. 만약 방금 한 말이 추 이사의 진심이라면 그는 끝까지 치밀한 계획을 짜놓고 있음이 분명했다.


    “홍 대리, 천동해 씨”
    “예, 팀장님.”
    “하던 일 멈추고 잠깐 티룸에서 보자고.”
    “챔버 말입니까?”
    “응.”
    천동해의 입에서 ‘챔버(Chamber)’라는 특수용어가 나왔다. 동해는 해난구조대(SSU) 하사관 출신이었다. 그리고 특수부대원 출신답게 첫인상부터 강인함을 풍겼다. 그는 사내 티룸이 긴 원통형으로 디자인된 실내로 되어 있어 마치 해난구조대의 챔버와 흡사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리고 태양광이 완전히 차단된 원통형의 공간은 정숙성과 은밀성에 있어서 사내 어느 곳보다도 뛰어났다.

    “설유리 점장이 최우수사원으로 뽑혔던데. 홍 대리는 알고 있었어?”
    “저도 오늘 아침에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서 알아보니까 총무과 우 차장님의 추천이 있었답니다.”
    “우 차장님이?”
    “그것도 어제 오후 임원회의에서 갑작스럽게 결정됐답니다.”
    “아니, 대리님.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죠? 징계를 받아야 할 점장이 오히려 최우수사원으로 뽑히다니. 이게 도대체 말이 되는 소립니까?”
    “팀장님, 그래서 제가 총무과 직원에게 물어보니까 설유리 점장에 대한 징계문제는 이제껏 단 한 차례도 거론된 적이 없답니다.”
    “예~에! 아니, 우리가 작성한 보고서를 보고도 그런 소리를 한단 말입니까?”
    “그게 아니지. 어쩌면 그 사람들은 보고서의 ‘보’자도 들어보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아.”
    “그게 무슨…….”
    “틀림없어. 그랬으니까 최우수사원으로 뽑힌 거고. 안 그렇습니까 팀장님?”
    “결국 우리가 백상아리의 성질만 자극한 꼴인가.”
    “백상아리요? 그게 무슨…….”
    “아냐, 아무것도. 그냥 나 혼자 중얼거린 소리야.”
    “어찌되었건 외형상은 우 차장님이 추천을 했지만 우 차장님이 백 전무님라인이라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잖습니까. 따라서 우 차장님을 막후에서 조종한 사람은 백 전무님일 가능성이 백 퍼센트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요?”
    “현재 전개되고 있는 상황을 보면 홍 대리의 말에 일리가 있어.”
    “허면 이제 우리도 행동을 분명히 할 때가…….”
    “두 사람은 일단 설유리 점장과 관련된 일에서 거리를 두는 것이……. 어차피 책임을 져도 팀장인 내가 질 일이잖아.”
    “예~에? 팀장님, 섭섭하게 그게 무슨…….
    “그러면 팀장님은 끝까지…….”
    “역시! 전 팀장님이 이래서 좋습니다. 제가 군에 있을 때 늘 듣던 말이 바로 ‘어떤 정신 자세로 무엇을 경험하느냐에 따라 특수한 사람과 평범한 사람으로 나뉜다.’였습니다. 두려움을 극복하는 그 용기야말로 사나이가 가진 가장 무서운 무기입니다. 전 무조건 팀장님을 따라갑니다. 괜찮죠, 팀장님?”
    “그래 좋다! 나도 간다.”
    “하여간 사람들 하고는…….”

    석우와 동해는 허울을 쫓는 현실감각도 없고 처세술도 몰랐다. 하나에 꽂히면 그저 앞만 보고 내달리기만 하는 아주 단순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눈엔 자신들이 믿는 정의감으로 가득했다. 때문에 그들은 결코 스스로가 자기를 부정하는 행동을 선택하지 않았다. 현우는 그들의 그런 단순하고 순수한 눈빛이 좋았다. 그리고 그것은 현우에게도 자신의 뒷모습까지 비춰주는 거울의 방으로 작용했다. 이제 현우는 순수하고 성스러운 지하수로 몸을 씻은 듯 마음까지 새로웠다.
    “좋아! 일단 홍 대리는 전무님라인을 자세히 파악하고 대외업무상 만나는 주변 인물들도 일일이 체크해. 특히나 지점장 및 점장들과 관련된 검은 거래뿐만 아니라 스캔들까지도 빠짐없이 수집해.”
    “알겠습니다.”
    “팀장님! 그럼 저는요?”
    “천동해 씨는 전무님의 외동딸을 맡아. 현재 인터넷쇼핑몰을 한다니까 그 쇼핑몰에 대해 자세히 좀 알아봐. 그리고 얼마 전에는 청담동에 60억짜리 건물을 매입했다니까 가능하다면 매입자금 출처도 조사하고.”
    “그런데 팀장님, 전무님 딸이 청담동에 60억짜리 건물을 매입했다는 소리는 뭡니까? 제가 듣기로는 작년에 대학을 졸업한 것으로 아는데 어떻게 그 비싼 건물을…….”
    “그러게 말이야. 현재로선 나도 구체적으로 아는 바가 없어. 그래서 조사를 하는 거고.”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