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서화 장편소설 '레드'-1
  • <28> 어부사(漁父辭)


    홍화의 예상이 적중했다. 외국의 헤드헌터에게 농락당한 연구원 변성일의 죽음이 아침부터 TV마다 메인뉴스를 장식했다. 한편 정오 무렵, 현우는 시내의 대형 백화점 숙녀복 코너에서 어머니의 선물을 한참 고르고 있었다. 요즘은 너나 할 것 없이 비슷한 계열의 색상으로 통일감을 주면서도 밝기와 순도 차이를 둬 은은하게 매치하는 팜므파탈 룩이 숙녀복의 트렌드였다. 현우도 나이에 상관없이 한층 시크해진 여성복에 감탄했다. 그런데 물결을 이루며 통로를 빠져나가는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누군가 허겁지겁 뛰어오더니 현우의 등을 가볍게 툭 치고 지나갔다. 순간 긴장감을 늦추고 있던 현우가 한쪽 어깨의 중심이 무너지며 휘청했다.

    “어! 정원아.”
    “현우 아냐. 내 손 잡아.”
    “그런데 무슨 일로 왔니?”
    “그게 저……. 왜 말 못할 사정이라도 있는 거야?”
    “후후후, 그렇진 않아. 최근 들어 예쁜 목소리의 피앙세가 매일 아침 창가에 태양을 물어오기 시작했거든.”
    “뭐! 그럼 드디어 여자친구가 생긴 거야?”
    “그래. 그런데 그 피앙세의 어머니가 오늘 점심식사를 같이하자고 하셔서.”
    “그럼 여자친구의 어머니께 드릴 선물을 사러왔구나.”
    “맞아. 그런 너는?”
    “내일이 어머님 생신이라 생일선물을 고르고 있었어.”
    “그나저나 뭘 사다드려야 좋아하실지 영 모르겠다.”
    “정원아, 저쪽 것은 어떠냐?”
    “그건 너무 화려하지 않냐? 조금 심하게 말하면 약간 퇴폐적이다.”
    “헉! 퇴폐적? 야, 임마! 저게 요즘 중년 여성들의 아이콘인 팜므파탈 룩이야.”
    “그래! 그런 게 있었어?”
    “절제된 무채색의 톤온톤 스타일은 단조로울 수 있으니까 약간 화려한 디자인의 스카프도 같이 선물을 해드려.”
    “그래! 알았어. 네가 하라는 대로 할게. 그나저나 지수 씨하고는 잘되고 있는 거야?”
    “누가 중매를 섰는데 안 되겠냐.”
    “짜식, 맘에 드는가 보구나.”
    “사실 만나기 전에는 우려스런 부분도 있었거든. 자라온 환경이 너무 다르잖아.”
    “사고방식의 차이 같은 거 말이구나?”
    “응. 그런데 군걱정이었어. 거기다가 또……, 히.”
    “말 안 해도 다 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눈부시게 아름답다고?”
    “물론 눈부시게 아름답지. 마치 바다의 신성한 물방울들이 모여 형체를 이룬 여신 같잖아.”
    “사람을 오글오글하게 만드는 것도 여러 가지다! 네 말대로라면 그게 어디 사람이냐. 고구려 창조신화에 나오는 하백(河伯)의 딸이자 물의 여신인 유화(柳花)지.”
    “맞아. 지수 씨를 건축적으로 표현하면 이용할 수 없는 공간을 의미하는 데드 스페이스가 한 뼘도 없어.”
    “헐~! 내가 이야기를 완전히 잘못 꺼냈군. 본전도 못 찾는 밑지는 장사였어. 쩝!”
    “그런데 뜬금없이 그림퍼즐처럼 의혹이 일더라?”
    “의혹! 뭔 의혹?”
    “네가 이렇게 여신 같은 아가씨를 나에게 왜 소개시켜주었을까 하고 말이다.”
    “뭐! 정말이야? 이거 어째 섭섭한데. 친구의 순수함을 그렇게 왜곡하다니.”
    “하하하, 농담이야. 그만큼 환상적이다는 소리다.”
    “히~유. 난 또. 하마터면 중매 서고 뺨 맞는 줄 알았네. 아무튼 잘 해줘. 마음고생을 많이 한 아가씨야. 너는 그렇고 지수 씨는 어떤 것 같아? 네가 맘에 드는 눈치야?”
    “자세히는 모르겠어. 하지만 적어도 싫은 표정은 아니야. 지난번에는 정치범수용소에서 비참하게 돌아가신 아버지의 최후에 대한 이야기도 해주더라고.”
    “그래! 정치범수용소에서 돌아가신 아버지 이야기를.”
    “왜 뭐가 잘못됐어? 그것도 말하면 안 되는 비밀사항이야?”
    “아니, 그렇진 않아. 단지 우리도 최근에야 안 사실이거든. 하긴 제아무리 폐쇄적인 북한일지라도 알려고 마음만 먹으면 못 알아낼 것도 없지. 밀무역을 하는 중국인들의 휴대전화를 통해서 얼마든지 내부사정을 알아볼 수 있거든. 그나저나 이제 얼추 다 산 것 같으니 나 먼저 갈게.”
    “가긴 어딜 가. 내가 이대로 너를 그냥 보낼 것 같아.”

    현우는 정원의 손목을 강제로 잡아끌었다. 그리곤 한 층을 더 올라가 나반 직영매장으로 뛰어갔다. 현우는 흠뻑 젖어 있는 정원의 흰색 드레스셔츠와 블랙 수트를 벗겼다. 그리곤 나반의 S/S시즌 최고 히트상품인 슬림한 디자인의 딥 네이비 수트와 그레이 톤의 컬러 셔츠로 정원을 변신시켰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현우는 매듭의 역삼각형에 살짝 물린 듯 넥타이의 중간부분에 딤플(Dimple·보조개)까지 만들어 한결 내추럴하고 멋스럽게 연출해주었다. 시간이 없다며 안절부절 어쩔 줄 몰라 하던 정원도 아예 포기한 듯 지켜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원의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도 귀여운 어린아이의 표정으로 바뀌었다. 이제 정원은 귀족적인 품격과 세련미가 물씬 풍기는 댄디 스타일로 업그레이드되어 있었다. 그제야 현우는 정원의 어깨를 툭툭 치며 어서 가보라는 눈짓을 했다.
    “이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고맙다. 잘 입을게!”
    “고마운 건 오히려 나야. 그러다 넘어지겠다. 앞 좀 보고 달려.”
    “그래!”
    “후후후, 짜식.”

  • 시간이 장구한 세월동안 흐르면 웅장한 역사가 된다. 현우는 강바람을 맞으며 북한강의 강줄기를 연어처럼 거슬러 올랐다. 그리고 평화로움이 찰랑거리는 양수리 카페촌의 어느 커피숍에 앉아 있었다. 하얀 블록으로 깔끔하게 지어진 그리스풍의 카페 안에선 베드르지흐 스메타나(Bedrich Smetana)의 <나의 조국> 중 두 번째 교향시인 <블타바(Vltava)>가 흘렀다.
    “멍! 멍! 멍!”
    “!”
    “현우 씨, 뭘 그렇게 넋을 놓고 쳐다보세요?”
    “햇빛의 축복을 받은 강물을 보고 있었어요.”
    “멍! 멍! 멍!”
    “우리 달래가 심심했나 보구나.”
    “저도요. 그것도 아주 많~이.”
    오랜만에 만난 달래의 황백색 털은 더욱 윤기가 흘렀고 가슴도 더 넓어져 있었다. 게다가 비록 불편한 앞발이지만 호랑이도 공격한다는 이야기가 사실로 믿겨질 만큼 유난히 크고 통통했다. 현우가 주문한 와플을 다른 접시에 덜어 주자 달래가 금방 바닥으로 내려가 정말 맛있게 먹었다. 그때까지도 지원은 깍지를 낀 손가락으로 턱을 가볍게 받치고는 슈크림처럼 부드러운 눈망울로 현우를 지그시 바라봤다.
    “현우 씨, 이거 받으세요.”
    “선물인가요?”
    “훗! 아니요.”
    “그럼?”
    “원래 현우 씨 거예요.”
    “아니, 이건.”
    “바로 저와 달래를 구해준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발레곡 <세헤라자데> CD예요.”
    “하지만 이건 제가 지수 씨에게 선물하려던 것인데요.”
    “그건 저와 달래의 고마움의 표시예요. 저와 달래는 평생 그 일을 잊지 못할 거예요.”
    “그 대신 저는 지수 씨에게서 무한한 행복을 선물 받았어요.”
    “정말요?”
    “예, 그것도 아주 많이요.”
    “! 저도 그런데…….”
    “그럼 이 CD는 선물상자에 그대로 넣어 제 마음 깊이 영원히 간직할게요. 눈부신 햇살이 창문을 두드리는 아침이 아름다운 어느 날 지수 씨와 함께 들을 때까지. 그래도 괜찮죠?”
    “예, 훗!”

    어느새 지중해풍의 실외등이 하나둘 켜졌다. 현우와 지원은 벤치 옆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조용히 마음 가는 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보호막이 되어준 어둠 때문인지 지원은 신고 있던 하이힐까지 벗어 들었다. 지원은 발바닥에서 느껴지는 미묘한 감촉에 전율하며 무척이나 재미있어 했다. 그때 현우의 휴대전화가 지금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전율을 전했다.
  • “죄송합니다, 전무님.”
    [업무상 기밀사항이라서 최고 경영진의 승인 없이는 외부노출을 절대로 할 수 없다?]
    “예. 그렇습니다.”
    [역시 나 팀장은 내 예상을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군.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감사팀장으로서는 최적의 선택이었어. 나 팀장, 하지만 세상은 자기 혼자만 깨끗하다고 해서 살아갈 수 있는 곳이 결코 아니야. 왜냐고? 깨끗하다는 건 생존전략과 전술이 없다는 의미일 수도 있거든. 아참! 내 기억이 맞는다면 자네 전공이 중문과라고 들은 것 같은데.]
    “맞습니다. 전무님.”
    [정말 다행이군! 그럼 전국시대 초나라의 시인이자 정치가인 굴원(屈原)에 대해서는 나보다 더 잘 알겠군. 『어부사(漁父辭)』에 나오는 두 인물. 그러니까 굴원과 늙은 어부. 그 두 사람 중에서 시대를 읽은 현자(賢者)는 누구였을까? 자네는 누가 시대를 뛰어넘는 현자라고 생각하나?]
    “그건 처한 시대상황과 보는 시각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 쉬운 문제는 결코 아니지. 하긴 나는 젊었을 때 굴원이 고고(孤高)한 현자라고 믿었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어느새 불혹의 나이를 지날 때쯤에서는 세상을 보는 내 눈이 180도 달라져 있었어. 그리고 그 달라진 눈에 비친 현자는 바로 늙은 어부였네. 왠지 아나?]
    “…….”
    [강한 놈이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놈이 강한 놈이기 때문이지. 하하하!]
    “!”

    순간 현우는 제일기획 김 상무의 방에서 본 편액(扁額) 속 글귀가 떠올랐다. 편액의 오른쪽 아래에 선물한 사람의 구체적인 서명 없이 그냥 “-전무가-”라고만 되어 있던 흘려 쓴 글씨도 함께 클로즈업됐다. 그 전무가 지금 현우와 통화를 하고 있는 백 전무였다. 그즈음 모래사장을 달래와 한참동안 뛰어다닌 지원이 격류(激流)처럼 혈관을 굽이쳐 흐르는 거친 숨결을 고르며 현우를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현우 씨, 저 요즘 너무 행복해요. 내일이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들 만큼이나요.”
    “저 역시 아름다운 꿈같아요.”
    “지금 제 눈에는 모든 것이 사랑스럽게 보여요. 마치 레드 와인에 흠뻑 취한 것처럼요.”
    “전 무신론자예요. 하지만 제가 지수 씨를 만난 건 신의 힘이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저도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