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서화 장편소설 '레드'-1
  • <32> 과오


    화원 안쪽의 작업실에서 피오기와 은혁, 그리고 홍화가 무언가 심각한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그런데 피오기가 한껏 달아올라 얼굴지형이 심하게 뒤틀리고 솟아올라 있었다. 거기다 그 변형된 얼굴조직 내부에선 금방이라도 대상만 찾으면 폭발할 것처럼 모든 구멍에서 독한 유황가스를 끊임없이 분출시켰다. 습관처럼 어금니로 입안 점막을 질겅질겅 씹는 건 여전했다. 그러다 은혁이 고개를 숙이는 순간 마침내 압력을 견디지 못한 활화산이 폭발을 일으켰다.
    “죄송합니다, 부조장 동무.”
    “동무의 그 죄송이 오늘의 실수를 만회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오?”
    “아닙니다.”
    “부조장 동무, 은혁 동무는 잘못이 없습니다. 모두가 부주의했던 제 과오입니다.”
    “과오라. 홍화 동무, 그럼 그게 성공이라고 착각했다는 소리요?”
    “할 말이 없습니다. 다시는 이런 과오가 발생하지 않도록 혁명역량을 재무장하겠습니다.”
    “아니 동무는 암호가 채워져 있는지 확인도 안 했소?”
    “분명히 임의로 세 개의 파일을 골라 그 안의 내용물을 직접 확인했습니다.”
    “내용물을 확인했는데 그때는 멀쩡하던 USB가 왜 갑자기 폭발을 하냐고! 은혁 동무, 동무가 그 이유를 한번 설명해 보시오?”
    “제가 생각하기에는 아무래도 그 멍청한 놈이 죽으면서 끝까지 발악을 한 것 같습니다.”
    “발악을 했다. 동무가 지금 어설픈 변명으로 당과 조국 그리고 나를 희롱하겠다는 거요?”
    “절대 아닙니다, 부조장 동무.”
    “그래?”
    “예. 총 마흔네 개의 파일 중 가장 중요한 연구물이 담긴 열일곱 번째의 파일에 그 반동 새끼가 양자암호를 걸어놓았을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습니다.”
    “동무는 우리 공화국이 자랑하는 기술정찰조의 해커 출신이 아니오?”
    “맞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황당한 실수를 범할 수가 있지?”
    “일개 대기업 연구원이 그렇게 최첨단 보안기술을 사용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아무튼 저의 과오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죄송! 죄송! 그 무책임한 단어 좀 이제 그만 사용하시오. 그리고 나에게 정말 미안하면 USB에 담긴 연구물을 되살릴 방법이나 찾으시오! 알겠소, 은혁 동무?”
    “부조장 동무, 안타깝지만 그건 불가능합니다. 제가 아는 한 완전히 소각된 파일자료를 복구할 수 있는 방법은 현재까지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뭐라! 해결책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왜 그 말이 은혁 동무 스스로가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즉결사살을 시켜달라는 소리로 들리지?”
    “부조장 동무!”
    “결국 적후에서 동무의 이용가치는 여기까지란 소린가. 아니 그렇소, 은혁 동무?”
    “부조장 동무가 지금 그 권총으로 나를 쏴도 그것은 바뀌지 않는 사실입니다.”
    “부조장 동무, 그동안 적후에서 은혁 동무가 많은 공작 성과를 세웠지 않았습니까. 한 번만 용서해주십시오.”
    “그래서 더 화가 나는 것 아니오. 지금까지 단 한 번의 실수도 없던 동무가 그것도 가장 중요한 시점에 결정적인 연구성과물이 담긴 USB를 잘못 만져서 폭파시키다니. 이거야말로 반동적 행위가 아니고 뭐냔 말이오. 안 그렇소?”
    “부조장 동무, 양자암호는 광자(光子)나 양자(量子)와 같은 아주 미세한 물질을 측정하려고 하면 광자와 양자가 영향을 받아 즉시 파괴됩니다. 더구나 승인을 받지 않은 사람이 파일을 열어볼 경우 하드웨어와 운영체계의 조합에 의해 작동되는 특수한 형태의 조건 전달점이 파괴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폭발이 연쇄적으로 일어나도록 설계가 되어 있었습니다.”
    “젠장할!”
    “부조장 동무, 은혁 동무의 말을 듣고 보니 이번 과오는 정말 불가항력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쾅!”
    “아니, 문 선생!”
    “이제 그만 그 권총은 치우시지요. 적후종심에서 우리끼리 이러면 좋다고 할 놈들은 바로 국정원과 남한정부입니다.”
    “손기척도 없이 언제 오셨소?”
    “조금 전에 왔습니다. 아, 밖은 내가 이미 살폈습니다. 그러니까 걱정 안 해도 됩니다.”
    “좋소! 은혁 동무. 내가 동무의 실수를 용서하는 건 이번 단 한 번뿐이오. 알겠소?”
    “고맙습니다, 부조장 동무. 다시는 이런 실수가 반복되지 않도록 보다 철저히 보안해체기술을 연구·학습하겠습니다.”

    상원은 그때까지 메고 있던 가죽가방을 어깨에서 벗어 소파에 내던졌다. 그리고 곧바로 다른 사람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주저 없이 담배를 피워 물었다. 작업실이 금방 담배연기로 뿌옇게 차올랐다. 피오기는 소파에 비스듬히 누운 채 평소와 다른 상원의 어두운 침묵을 읽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상원의 침묵은 시간이 흘러도 좀처럼 얇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무겁고 두꺼워져 피오기와 홍화의 불안감만 증폭시켰다.
    “문 선생, 무슨 일이라도 있소?”
    “훗! 언제부턴지는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내 마음속에도 과거 쓰레기라고 버린 자본주의에 대한 환상이 있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게 무슨…….”
    “젊었을 때는 주체사상과 수령님의 교시만 있으면 영예로운 사명을 다한다는 책임감만으로 굶어도 배가 불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배가 부르기는커녕 오히려 공허감만 더욱 커지니…….”
    “이 반동 새끼! 그동안 배때기에 기름이 잔뜩 끼다 못해 혁명의 투항분자로 변절했군.”
    “문 선생님, 갑자기 무엇 때문에 마음이 흔들린 겁니까?”
    “글쎄요. 원인이 너무 많다보니 다 대답할 수도 없네요. 아무튼 홍화 동무, 예상보다 빨리 위험이 점증하고 있습니다.”
    “!”
    “위험이 점증하다니요?”
    “충청 지역에서 각계각층의 광범위한 동조세력을 규합해 권력층을 포섭하는 상층공작을 담당하던 남운영 동무가 최근 체포됐습니다.”
    “뭐요! 그게 정말입니까?”
    “그렇소, 피오기 동무.”
    “그럼 우리는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몇 달 전 남운영 동무에게 공작금을 건넨 적도 있지 않습니까.”
    “!”
    “지금이라도 당장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 것이…….”
    “아니,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소. 다행스럽게도 남운영 동무에게 직접 건넨 것이 아니라 여러 단계에 걸쳐 배달서비스를 이용했소. 때문에 남운영 동무가 우리의 실체를 안다는 건 불가능하오.”
    “그런데 피오기 동무, 오늘은 사장님이 안 보이시네요?”
    “몸이 안 좋아 집에서 쉬고 있소.”


  • “탕! 탕! 탕!”
    정원은 시뮬레이션 사격장이 아닌 격발과 동시에 짜릿함을 느낄 수 있는 실탄사격장에 있었다. 정원은 먼저 20m 거리의 원형 타깃을 쏘는 완사를 했다. 그리고는 연이어 같은 거리에 놓인 사람모양 표적지의 하체를 빠른 시간 안에 맞히는 속사까지 했다. 총기 특유의 묵직함과 격발 시의 야릇한 쾌감은 금단의 땅에 들어온 것처럼 피와 아드레날린을 빠르게 순환시켰다. 그리고 차가운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이루어지는 미세한 힘의 이동을 통해 총열을 빠져나오는 맹수의 울부짖음도 들리는 것 같았다. 그 울부짖음은 근원을 알 수 없는 정의감까지도 선물했다. 거기다가 쭉 뻗은 양팔을 타고 전해지는 강한 반동은 머릿속에 찌꺼기처럼 남아 있던 잡념과 스트레스를 한 방에 날려버렸다. 뒤이어 코끝을 파고드는 메케한 화약냄새가 정원에게 다시 냉정한 현실을 안겼다.
    “짝! 짝! 짝!”
    “!”
    “팀장님, 감동이에요! 탄흔이 모두 표적 중심에 모여 탄착군을 형성하다니. 히~유! 국정원의 사신(射神)은 정말 아무나 되는 게 아닌가 봐요.”
    “유진 씨, 칭찬이 지나치면 그건 아부야. 계속 그러고 있을 거야?”
    “그럼요?”
    “사격하러 온 거 아니었어?”
    “아닌데요.”
    “그럼 뭣 때문에?”
    “시키신 일 다 끝냈다고 보고하러 왔어요. 훗.”
    “그래! 그럼 이제 더 쏠 실탄도 없으니까 그만 나갈까?”
    정원은 총기와 안전용품 일체를 반납했다. 그리곤 격발장 출입문 쪽으로 급히 몸을 돌렸다. 사격장 안에도 휴게실은 있었다. 하지만 정원의 의식은 이미 탄약고 맞은편의 외부출입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가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은 듯했다. 정원의 얼굴은 패배한 먹이사냥을 곱씹어보는 사자 같았다. 정원은 걸으면서도 강치환을 사살한 킬러의 흔적 하나하나를 떠올리고 되새기며 암시까지 걸고 있었다.
    “사실은 며칠 전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국과수 제주서부분소에 문의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훗! 팀장님 말씀이 맞았어요. 전문 킬러였습니다. 심지어 총열까지도 손을 대 회전력을 높였답니다. 그 외에 추가로 범인에 대해 밝혀진 단서는 이렇다 할 만한 게 없었습니다. 그나마 새롭게 드러난 사실은 용의자의 키가 대략 170∼175㎝ 내외일 거라는 추정치뿐입니다.”
    “그건 이미 사건현장에 찍힌 발자국과 보폭을 보고 대충 짐작하고 있었어.”
    “우와! 전 이럴 때면 팀장님의 머릿속이 정말 궁금하다니까요.”
    “유진 씨, 그 외에 다른 것은?”
    “아, 있다. 사건현장에 남아 있는 범인의 왼쪽 발자국 족흔(足痕)이 오른발보다 미미하긴 하지만 분명히 더 깊고 더 넓게 파여 있었답니다.”
    “왼발이?”
    “그건 범인이 왼손을 주로 사용한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우뇌형 인간이면 문학이나 예술 등 평소 감성적인 성향이 아주 강하겠군. 그리고 문상원 기자를 털어보니까 어때?”
    “현재 나이 만 46세. 출생과 성장 지역은 모두 강원도 속초시 동명동 바닷가입니다. 부친 문동섭의 생존 시 직업은 어업. 1남 1녀 중 둘째입니다. 한 명뿐인 누나는 문 기자가 고3 되던 해 다니던 봉제공장의 전기누전으로 인한 화재로 사망했답니다. 그리고 아버지도 그 영향 때문인지 이듬해 봄, 그러니까 문 기자가 대학 1학년 때 사망했습니다.”
    “80년대의 전형적인 보통가정이었군.”
    “현재 거주지는 마포구 서교동의 한 아파트로 홍익대에서 도보로 약 10분 거리입니다. 초·중·고 모두 속초에서 다녔으며 줄곧 전교 일등만 했습니다. 생활기록부에도 복사해서 옮긴 것처럼 한결같이 모범적인 학생으로 기록되어 있고요. 하지만 성격은 다소 내성적이고 소심했던 것 같습니다.”
    “대학은?”
    “서울에서 명문대 국문과를 나왔습니다. 그리고 다소 의외지만 부전공으로 경제학과 물리학도 이수했고요.”
    “학창시절엔 상당한 수재였나 보군.”
    “그런 것 같습니다.”
    “유진 씨, 문상원 기자가 작성한 신문기사를 분석한 결과는?”
    “사실 이 부분이 좀 의외입니다. 강원도가 고향임에도 불구하고 유독 균형적인 지역발전에 대해서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상당히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습니다.”
    “특정 정당이나 특정 이익단체와 관련이 있는 정치색은?”
    “알아본 바로는 딱히 그런 것도 없었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정말 묘한 사람이군. 양파처럼 껍질이 여러 개인가?”
    “하지만 그 이외 다른 기사들에서는 특이사항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아킬레스건과 관련해 현재까지 드러난 사실만 가지고 볼 때는 개인적인 비리도 전혀 없습니다.”
    “왜지?”
    “뭐가요?”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누구나 자기가 태어난 고향은 감싸기 마련인데. 혹시 가족과 관련된 안 좋은 기억이라도 고향에 남아 있나?”
    “그럴지도 모르죠. 더구나 청소년기에는 세상을 보는 눈이 바늘 끝처럼 예민하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