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서화 장편소설 '레드'-1
  • <39> 오해


    “문상원 기자 기억하시죠?”
    “물론 기억하지. 가만! 왜, 재국 씨가 피워놓은 연막이 기대만큼 효과가 없었어?”
    “아니요. 그건 선배의 말처럼 현재까지 뚫렸다는 이상 징후를 어디에서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럼?”
    “문 기자의 불행한 가족사에 대해서도 기억하세요?”
    “어부였던 아버지와 봉제공장에 다니던 누나의 불행한 죽음?”
    “예, 팀장님의 말씀을 듣고 난 뒤 무언가 찜찜하잖아요. 그래서 다시 한 번 가족관계와 문동섭의 사망 당시 강원 지역 신문자료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아주 뜻밖의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뜻밖의 사실이 형평성을 잃은 문 기자의 신문기사와 관련이 있는 건가?”
    “아마도 그런 것 같습니다.”
    “얼마나 충격적인 사실인데?”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문동섭의 죽음은 자연사가 아닌 자살이었습니다.”
    “자살! 그럼 채 피지도 못하고 죽은 딸에 대한 슬픔 때문에 자살을 했다는 건가?”
    “아닙니다.”
    “그러면 무슨 이유로 자살을?”
    “문동섭이 1975년 겨울에 실수로 월선(越線)을 해 북측 수역을 침범했던 적이 있답니다.”
    “월선! 그럼 나포(拿捕)됐다는 소리잖아?”
    “예, 동해는 난류와 한류가 교차하는 곳으로 70년대 당시에는 봄과 여름에 정어리·꽁치·멸치·고등어 등 난류성 어종이, 가을과 겨울에는 한류성 어종인 명태·가재미·홍어류·도루메기 등이 깊은 바다의 밑층에서 연안으로 나와 많이 잡혔답니다.”
    “그런데?”
    “75년 당시에 유독 겨울이 따뜻했답니다. 그래서 고성군 거진읍 북동쪽 8㎞(약 5마일) 해상에서 어군을 형성하던 한류성 어종이 제대로 남쪽으로 내려오지 못하고 북방한계선(NLL)을 중심으로 남북 영해에 걸쳐 있었던 모양입니다. 물론 문동섭이 선장으로 있던 동해호도 주로 명태 조업을 했답니다.”
    “그러니까 뭐야. 그 명태 조업을 하다 본의 아니게 어로한계선을 넘었다는 소리로군.”
    “맞습니다. 당시 북방한계선(NLL) 남쪽 2.7㎞(1.7마일) 지점에서 투망작업을 하던 10t짜리 동해호가 높은 파도에 떠밀려 그만 북방한계선을 넘은 모양입니다. 나포 사실을 알고 동해 1함대사령부가 초계함(PCC)과 고속정(PKM)을 사고해역으로 급파했지만 납북을 막지는 못했답니다.”
    “추후 밝혀진 사실관계는?”
    “고의가 아닌 단순한 운항과실로 처리됐습니다. 하긴 그때만 하더라도 지금의 위성항법장치(GPS)나 전자해도는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시절이었잖습니까. 더구나 기상청에 확인한 결과 당시 바다에는 해무(海霧)까지도 약간 끼었었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문상원 기자가 지역발전에 냉소적인 것에 대한 설명으로는 다소 미흡한 것 같은데.”
    “그 부분에 대한 설명은 문동섭이 북한에서 귀환한 후에 발생했습니다. 문동섭과 동해호의 선원 5명이 예상보다 빨리 돌아온 것에 대해 지역보안대가 의심을 품고 개별적으로 수사를 진행했나 봅니다.”
    “지역보안대가?”
    “그것도 가족과 변호인의 접견을 철저히 차단한 채 한 달 가까이나 말입니다. 심지어 영장도 없는 불법 구금상태로 문동섭에게 심한 고문과 폭행 등 가혹행위까지 가했답니다.”
    “흠! 문동섭의 자백에 전적으로 의존했다는 사실은 나포와 관련해 별 다른 물증이 없었다는 소린데. 그나저나 지역보안대는 민간인에 대한 수사권이 없잖아? 수사권이 없는 수사의 경우 형법 제123조 타인의 권리행사방해죄(직권남용죄)에 해당할 텐데.”
    “엄연한 불법입니다. 그리고 피해자에 대한 불법구금은 형법 제124조 불법체포감금죄에 해당됩니다.”
    “지역보안대가 그러한 사실을 모를 리 없잖아?”
    “그래서 그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지역보안대가 당시 안기부 수사관 명의로 수사서류까지 일부 조작한 모양입니다.”
    “지역보안대가 서류까지도 조작했다면 그건 범죄잖아. 그렇다면 형사적 책임을 물으면 되고.”
    “그런데 지역보안대의 행위가 당시 고첩(고정간첩) 색출 활동계획에 따라 행해진 것이라는 데 문제의 핵심이 있습니다. 즉 보안대의 과오에 대해 실무자의 형사적 책임을 물을 수가 없답니다.”
    “그야말로 국가권력을 함부로 사용한 공권력 남용의 전형이로군!”
    “맞습니다. 거기다가 문동섭 건은 의도적으로 조작한 정황도 여러 곳에서 포착됐습니다.”
    “그 이유는?”
    “강원 지역 내 납북귀환어부에 대한 동향을 내사 중이던 지역보안대가 단지 실적을 올리기 위해 그렇게 했답니다.”
    “그게 아마 1968년 11월이었을 거야. 내무부에서 어선들이 어로한계선과 군사분계선을 넘으면 수산업법과 반공법을 적용해 모두 구속한다는 방침을 정한 것이 말이야.”
    “맞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내무부 판단에도 설득력은 있잖습니까?”
    “그것도 맞아. 북한에 나포된 선원들이 지형, 지물, 해안경비초소의 위치 등 국가기밀을 북한에 제공하면 결국 무장공비의 침투를 도와주는 꼴이 되니까.”
    “하여간 문동섭은 그런 내무부의 방침에 따라 반공법과 수산업법 위반 등으로 두 차례나 처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가족들은 간첩가족을 둔 죄인이라는 주위의 따가운 시선과 냉소까지 견뎌야 했습니다.”
    “자기 한 사람 억울한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죄 없는 자식과 친인척들까지 말 못할 고통을 받았겠군!”
    “그런데 문제는 가족같이 지내던 당시의 동네 주민들이 문동섭을 적극적으로 옹호해주기는커녕 오히려 그가 가까이 오는 것을 심하게 꺼려했답니다. 심지어 허위사실까지 보안대에 보고하는 이도 있었답니다.”
    “배신감이 무척 컸겠군.”
    “아무튼 어린 시절의 그 배신감이 문상원 기자의 뇌리에 깊이 각인된 것 같습니다.”
    정원은 안타까움을 긴 한숨으로 표현했다. 국가적인 재난처럼 외부로부터 닥친 시련은 그러한 역사를 짊어지고 가는 집단이나 그 구성원 개개인에게 분명한 목표의식을 만들어준다. 그런데 그 목표의식이 개인과 집단 간에 정확히 일치해 문제의식이 발생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 반대인 경우도 있다. 그럴 경우 개인보다 집단의 목표를 우선시 하는 것이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사회의식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사고의 다양성과 개인의 자유가 일정 부분 희생되는 측면도 있었다.
    “유진아, 사무실 분위기가 왜 이렇게 눅눅해? 무슨 일이 또 터진 거야?”
    “새롭게 드러난 문상원 기자의 가족사 때문이에요.”
    “그 개코 문 기자의 가족사가 왜?”
    “아버지 문동섭의 죽음이 자살로 밝혀졌거든요. 거기다가 간첩 취급까지 당하다 억울함을 안고 생을 마감했고요. 그런데 재국 선배는 오전 내내 어디에 갔다 오는 거예요? 아무리 찾아도 없던데.”
    “내가 찾아낸 게 보물지도가 맞나 확인하려고 마약분석실에 있었어.”
    “마약분석실이라. 아, 알았다! 리재경의 몸에서 검출된 헤로인에 대해 알아보려고 간 거 맞죠? 아까 얼핏 보니까 재국 선배 책상 위에 말레이시아 경찰에서 보내온 마약성분 검사자료가 있던데.”
    “재국 씨, 마약프로파일링(Drug Profiling·마약지문감정기법) 검사결과는? 난해한 그림퍼즐을 맞출 수 있는 마지막 조각이라도 찾았어?”
    “그랬으면 보시는 바와 같이 제 얼굴이 이렇게 누렇게 떴겠습니까. 오히려 고대 상형문자를 마주한 것처럼 머릿속만 더 복잡해졌습니다. 검사결과를 한 번 보시죠.”
    “…….”
    “재국 선배, 이건 우리의 처음 예상과는 전혀 다른 결과네요?”
    “그러게 말이야. 리재경의 혈액에서 검출된 불순물의 구조확인을 통해 얻은 건 헤로인이 엉뚱하게도 미얀마산이라는 거야.”
    “그렇다면 우리가 애쓴 보람도 없이 리재경의 피살사건에 북한과 마에다 유주루가 개입하지 않았다는 확실한 물증만 확보하게 된 셈이네요.”
    “어쩌겠어. 마약분석실의 검사결과가 그렇다면 우리로선 믿어야지.”
    “미얀마산이라, 흠.”
    “이제 어쩌죠. 팀장님? 아무래도 저희가 헛다리를 짚은 것 같은데요.”
    “유진 씨, 실망할 것 없어. 그 반대니까.”
    “뭐가 말입니까?”
    “리재경의 피살사건과 관련해 우리가 추측한 것이 정확히 맞았다는 소리야. 더구나 재국 씨의 수고 덕분에 확실한 물증까지도 확보하게 됐고.”
    “예? 그게 무슨 말씀인지 전 도통.”
    “마에다 유주루가 일본 공안조사청의 그린리스트(Green list·사전예방이 필요한 범죄자)에 오른 가장 큰 이유가 바로 마약 때문이었거든.”
    “마약요?”
    “응, 그것도 마약의 재배에서 판매까지 전 과정에 걸쳐 직간접적으로 참여해 불법자금을 마련하지. 그리고 그 자금이 잉그리드 베탕쿠르(Ingrid Betancourt) 사건 이후 재건을 노리는 콜롬비아 무장혁명군(FARC) 등 각국 테러단체에 지원되고. 추정하건데 전문 나코-테러리스트(Narco-Terrorist·국제테러범)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거야.”
    “팀장님, 그게 사실이라면 본업이 아주 지저분한 국제테러범이네요?”
    “맞아! 공안조사청의 키시카와(岸川) 조사 제2과장의 말에 의하면 아마도 일본 내 마약거래 총량의 약 10% 정도가 바로 마에다 유주루의 손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하더라고.”
    “히~유! 그 정도라면 시가로도 엄청나겠는데요?”
    “그런데 마에다 유주루의 주요 거래처가 바로 골든 트라이앵글이었어. 이제 조금씩 감이 잡혀?”
    “그러니까 팀장님은 마에다 유주루가 과거 리재경과도 어떤 형식이든 거래를 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말씀이군요. 때문에 리재경은 마에다 유주루를 신뢰했고, 북한은 역으로 그런 리재경의 심리를 이용해 마에다 유주루에게 제거공작을 맡긴 것이고요.”
    “또한 마에다 유주루는 자신이 인터폴의 철통감시를 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고모라의 롯사나 시아피노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두 사람 다 맞아.”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마에다 유주루의 최근 동향과 행적을 추적하는 일만 남은 건가요?”
    “상대가 국제적인 마약류 사범이니까 그에 걸맞게 마약프로파일링을 수사에 적극 응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수가 있지.”
    “어떻게요, 팀장님?”
    “메스암페타민(필로폰)이 제조될 때 원료나 촉매, 그리고 제조법 등에 따라 특유의 불순물이 생기는 것을 활용해 제조사범을 찾아내는 기법이 마약프로파일링이잖아. 불순물, 그러니까 최근 마에다 유주루의 마약거래로 인해 막대한 손해를 입은 일본 내 다른 마약조직들을 잘만 활용한다면 의외의 수확을 얻을 수도 있지 않을까?”
    “팀장님, 아이디어 굿입니다!”
    마약분석실에서 분석한 제조원은 보다 분명하게 사건의 개연성을 드러냈다. 그리고 주요 타깃에 대한 세 사람의 기대감을 한층 부풀렸다.

  • ‘훗! 정말 좋다. 거리엔 사람의 감성을 귀담아 들어주는 비가 내리고 실내엔 그 감정을 어루만지는 하바네라(Habanera)가 흐르고. 사랑은 들에 사는 새. 아무도 길들일 수 없어요. 거절하기로 마음먹으면 아무리 해도 안 되지요. 협박을 해도 안 되고 꾀어도 안 되지요. 말을 잘하거나 말 없는 분 중에서 말 없는 분을 택할래요. 아무 말 안 해도 저를 즐겁게 하니까. 사랑. 사랑. 사랑은 집시(Gypsy)아이. 제멋대로지요. 당신이 싫다고 해도 나는 좋아요. 정말, 정말 좋아요! 현우 씨, 훗!’

    태양은 의지와 상관없이 존재 자체만으로도 지구의 기후변화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현우가 그랬다. 현우와 관련된 아주 작은 사소한 일이 뇌리에 스쳐도 지원은 자신의 감정이 순간적으로 무채색에서 화려한 무지개색으로 변함을 느꼈다. 그것은 여명의 빛 한줄기에 활짝 펼쳐지는 꽃망울처럼 너무나 오묘하고 짜릿했다. 이젠 스스로의 몸무게조차 버거운 빗방울이 유리창에서 서서히 꼬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유리창에 펼쳐지는 세상의 풍경은 중독성이 강한 또 하나의 유혹이었다. 어느새 도심을 점령한 물방울이 세상을 불려 화려하고 가식적인 거리의 색들을 한풀씩 벗겨내기 시작했다.
    ‘이곳 사람들은 저마다 살아가는 삶의 방식과 몸짓이 모두 다른 것 같아. 모두가 똑같이 먹고, 마시고, 노동해야 행복한 것만은 아니야. 가만!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피오기 동무의 말대로 어느새 나도 자본주의의 퇴폐병에 물든 건가. 아무튼 저 빗방울 너머에 현우 씨가 있다고 생각하니까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훗! 그나저나 설마 내 부탁을 잊지는 않겠지. 현우 씨와 한 사무실을 쓴다니까 믿어도 괜찮을 거야.’
    거리를 시간으로 나누면 속도가 나온다. 하지만 지원은 이 순간 그게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현재의 시간을 의식하지 못할 만큼 지원에게 사랑의 의미는 바다처럼 컸다. 우아한 느낌의 스터드장식이 달린 잇백을 바라보는 지원의 눈빛은 더욱 반짝거렸다. 흡사 수면에 부서지는 햇살 같았다. 그때 바람이 목동(牧童)처럼 거리의 사람들을 시야 밖으로 몰아갔다. 양 떼가 된 사람들은 다급하게 아무 건물이나 가까운 곳으로 뛰어들었다. 바람이 성난 파도처럼 한차례 휩쓸고 지나간 거리는 생명체가 완전히 소멸한 황량한 행성처럼 보였다.
    ‘아참!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당신을 위해 춤을 추렵니다. 보세요. 내 주인이시여. 어떻게 제가 춤을 이끌어내는지. 거기 앉으세요. 돈 호세. 시작하겠어요. 라, 라, 라, 라. 왜요. 즐겁지 않나요? 저게 바로 제가 바라던 거예요. 악대도 없이 춤을 추는 건 슬픈 일이에요. 하늘에서 보낸 음악 만세! 라, 라, 라, 라, 라, 라…….’
    지원은 하얀 피부가 더욱 화사하고, 볼륨감 있게 보이도록 파우더를 두드렸다. 이어 왠지 어두운 느낌이 드는 아이새도우도 좀 더 가벼운 세미스모키로 바꾸었다. 그리고 이런 날 다소 침울해지기 쉬운 기분을 감안해 오렌지색 립스틱으로 입술에 생기도 불어넣었다. 이제 지원은 화사하면서도 따스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황금빛 실내조명보다 더 밝았다. 거울 속 지원은 대순환을 시작하려는 극지의 차가운 바닷물처럼 얼굴 가득 생기가 넘쳐흘렀다.

    “저 손님?”
    “!”
    “밖에 비가 제법 많이 오는데, 혹시 우산은 가지고 오셨나요?”
    “예, 여기 이렇게.”
    “어머! 들어오실 때는 몰랐는데 가까이서 보니까 너무 미인이시다! 꼭 아기 같은 얼굴이세요.”
    “훗! 정말요?”
    “질투가 날만큼요. 혹시 모델?”
    “훗! 아니요. 그냥 평범한 사람이에요.”
    “너무 아깝다. 나 같으면 연예인을 할 텐데. 그나저나 오실 분이 더 계세요?”
    “예.”
    “제가 한번 맞춰볼까요. 애인 맞죠?”
    “훗, 예.”
    “호호호, 뻔하죠! 비 오는 날 커피숍에서 창밖을 보며 행복해하는 여자들은 어김없이 똑같아요. 모두 자신이 건네준 장미꽃을 감옥에서도 간직해줄 수 있는 돈 호세(Don Jose·드라곤의 상병)를 기다리죠. 손님처럼.”
    “훗! 차는 나중에 같이 시키면 안 될까요?”
    “안 되긴요. 그렇게 하세요. 전 에스카밀로(돈 호세의 라이벌 투우사)가 되긴 싫거든요.”
    “고맙습니다.”
    “제가 오히려 고마운걸요. 이런 날 손님처럼 예쁘신 카르멘(Carmen·집시여인)이 오시면 그날은 장사가 아주 잘되거든요. 거기다가 멋있는 돈 호세까지 오시면 아마 오늘 매출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호호호.”
    비록 인사성 멘트일지라도 젊은 여주인이 밝게 웃어주어 그나마 미안함이 덜했다. 그런데 그때 아까보다 더 강한 돌풍이 거리를 한바탕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돌풍이 사라진 그 끝에서 눈에 아주 익은 사내가 우산으로 몸을 가린 채 이제 막 횡단보도에 발을 들여놓고 있었다. 지원은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무의식적으로 출입문을 향해 뛰었다.
    “혀~ㄴ…….”
    지금까지 억눌러놓았던 반가움이 빠르게 치솟아 풀잎 같은 얇은 입술을 스쳤다. 하지만 그때 지원은 화들짝 놀라 터져 나오려는 목소리를 혀로 간신히 막았다. 그리고 다시 목구멍 깊숙이 밀어 넣었다. 급히 넘긴 목소리의 압력에 의해 그동안 부풀어 오르기만 하던 환상도 한순간 펑! 하고 터진 것 같았다. 횡단보도에 들어설 때 현우는 분명 혼자였다. 그런데 누구의 저주인지 아니면 심통인지 횡단보도를 건너오는 현우의 옆에 다른 사람이 함께 우산을 쓰고 있었다. 두 사람은 너무 다정해 보였다. 거기다 여인은 전업주부의 생활냄새가 폴폴 나는 자신과 달리 커리어 우먼의 당당함까지도 갖고 있었다.
    지원은 잘못을 저지르고 창고에 숨어드는 아이처럼 도로 출입문을 천천히 닫았다. 이제 여인은 회사 현관 앞에서 현우의 타이를 고쳐 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