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서화 장편소설 '레드'-1
  • <41> 불청객


    탐식(Gluttony), 탐욕(Greed), 나태(Sloth), 정욕(Lust), 교만(Pride), 시기(Envy) 그리고 분노(Wrath). 성서에 나오는 이 기독교적 윤리관은 비단 신학뿐만 아니라 오랜 기간 유럽을 지배했다. 하지만 7대 죄악도 시간 앞에선 여지없이 무너졌다. 그리고 21세기에 이 7대 죄악은 다시 태어났다. 탐식(貪食)은 미식(美食)으로, 탐욕(貪慾)은 성공(成功)으로, 나태(懶怠)는 여유(餘裕)로, 정욕(情慾)은 쾌락(快樂)으로, 교만(驕慢)은 개성(個性)으로, 시기(猜忌)는 이상(理想)으로, 분노(憤怒)는 진보(進步)가 됐다. 현우는 그 중심에 있었다.

    “지수 씨는 어떻게 된 거지. 분명히 홍 대리가 커피숍에서 기다린다고 했는데. 갑자기 무슨 바쁜 일이 생겼나? 오후 내내 휴대전화도 꺼져 있고.”
    “딩동!”
    “!”
    “딩동! 딩동! 딩동!”
    “혹시, 지수 씨!”

    로즈메리의 꽃말은 절조(節操)와 정절(貞節)이다. 꽃부리가 입술모양인 로즈메리가 베란다 한쪽에서 한창 꽃망울을 터트리고 있었다. 현우는 베란다에서 로즈메리를 보며 지수를 떠올렸다. 그런데 초인종 소리가 현우를 현실 속으로 강하게 잡아끌었다.

    “지수 씨, 휴대전화는 왜 꺼놨…….”
    “!!!”
    “죄송합니다, 손비아 씨. 전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고, 그만…….”
    “어쩌죠? 애타게 기다리시는 분이 아니라서.”
    “아, 아닙니다. 그런데 손비아 씨가 무슨 일로 저희 집까지?”
    “오늘까지 여러 번 피팅모델을 해주셔서 고맙단 인사를 드리려고 찾아왔어요. 물론 기획실장님 지시로요. 예전 같으면 회사에서 자주 뵈니까 아무 때나 인사를 드리면 되는데 요즘은 좀처럼 뵐 수가 없잖아요.”
    “회사일인데 도울 수 있으면 당연히 도와야죠.”
    “그런데 팀장님?”
    “!”
    “저 이렇게 복도에 계속 세워두실 건가요?”
    “예?”
    “이 비닐봉투 안 보이세요. 요 앞 슈퍼에서 잔뜩 사왔는데 양손이 끊어질 듯 아파요. 저 잠깐 들어가도 되죠?”
    “그게 저…….”
    “걱정 안 하셔도 돼요. 남자들의 생각과 달리 제 연애경험으로 볼 때 남자보단 오히려 여자가 과거를 빨리 잊어요. 그래서 휴대전화를 꺼놨을 정도라면 다시 돌아올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고 할 수 있죠.”
    “!”
    “그래도 만에 하나 기다리시는 분이 오시면 제가 회사 동료라고 잘 말씀드리고 눈치껏 빠져줄게요. 훗! 제가 직장생활에서 배운 건 눈치밖에 없거든요. 그럼 됐죠?”

    오늘 손비아의 메인컬러는 여성스러우면서도 도시적인 느낌을 주는 뉴트럴 컬러(Neutral color·중간색)였다. 하늘거리는 아이보리 컬러의 민소매 볼륨원피스에 작은 베이지 컬러의 니트를 덧입고 있었다. 목 부분이 헐렁해 한쪽이 자연스레 어깨 아래로 쳐지는 스타일이었다. 또한 자칫 단조로워질 수 있는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볼륨 있는 커다란 볼드이어링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볼드이어링에 반사된 실내등의 빛다발이 볼록렌즈처럼 오목한 어깨를 통해 모아져 고압의 압축공기가 터지듯 곧장 현우를 향해 쏟아졌다. 하지만 현우의 망설임은 결코 손비아의 장애물이 되지 못했다. 손비아는 마치 자기영역을 순찰하는 암컷표범처럼 본능에 따라 집 안 여기저기를 어슬렁거렸다.

    “와! 팀장님에게 이런 섬세한 면이 있었다니. 이 유리공예 직접 팀장님이 만드신 건가요?”
    “시간이 날 때마다 하나씩 만들다보니 어느새 집 안이 온통…….”
    “사실 저도 대학 때 부전공으로 공예를 했거든요. 물론 생활자기였지만요. 그래서 그런지 너무 반갑네요. 옛날 추억도 새롭고요. 가만! 저쪽 책상 위에 가려놓은 작품은 뭘까? 몹시 궁금한데요.”
    “저, 손비아 씨. 그건 좀…….”
    “아, 알겠다! 지금 한창 작업 중이신가 보죠?”
    “예.”
    “저도 그 정도의 매너는 있어요.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저, 여기서 맘에 드는 거 몇 개 골라 가져도 되죠?”
    “!”
    “어머! 호수 같은 에메랄드빛 좀 봐. 이 이어링 너무 예쁘다! 나한테 정말 잘 어울리겠다. 그렇죠, 팀장님?”
    “죄송합니다, 손비아 씨. 드리고 싶어도 그건 드릴 수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
    “왜요? 혹시 인터넷쇼핑몰 같은 데서 파시나요? 아니면 예약주문?”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럼요?”
    “사실은 오래전에 이미 제가 누군가에게 선물하기로 약속을 했거든요.”
    “아, 알겠다. 아까 말씀하신 바로 그 지수라는 분이군요. 제 말이 맞죠?”
    “예.”
    “질투가 엄청 많이 나네요. 한편으로는 이룰 수 없는 꿈처럼 아쉽기도 하고요.”
    “더구나 그분의 이미지를 모티브로 해서 만든 거라 화려하고 모던한 손비아 씨에게는 안 어울릴지도 모릅니다.”
    “하긴……. 그럼 나중에 저도 하나 만들어주시면 안 돼요? 오늘 제가 이렇게 장까지 봐 왔잖아요. 예~?”
  • 지수와 손비아. 똑같이 자신의 영역에 들어왔다. 하지만 현우가 두 사람에게서 느끼는 미묘한 감정의 온도차는 너무도 컸다. 지수의 행동은 인간이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달에 첫발을 내디딘 닐 암스트롱처럼 조심스러웠고 여성스러웠다. 하지만 손비아는 창조적인 일을 하는 사람답게 타인보다는 자신의 감정에 보다 충실했다. 그래서 행동 하나하나가 급진적이고 도전적이기까지 했다. 심지어 현우는 자신의 의식세계가 침입자에게 일방적으로 유린당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물론 손비아의 그런 당당함과 과감함이 디자인을 할 때 단점보다는 오히려 장점으로 더 많이 작용했다. 하지만 사적인 공간에 있을 때는 다소 부담스러운 면이 있었다.

    “아참! 팀장님. 아까 추 이사님 방에 가신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특별한 일은 아니고 그냥 신세대들의 소비패턴과 소비자들의 구매만족도에 대해 물어보셨습니다.”
    “며칠 전 영업팀에서 올린 보고서가 마음에 안 드시나 보군요. 팀장님이 보시기엔 요즘 신세대들의 의식변화가 어느 쪽으로 흐른다고 생각하세요?”
    “며칠간 현장에서 직접 보고 느낀 바로는 기획실에서 작성한 패션경향의 예상치보다 훨씬 더 급진적이고 과감하게 변하는 것 같습니다. 역할과 장르를 구분한 기능화·전문화보다는 사고의 유연성을 가져오는 개성적이고 창의적인 쪽으로 말입니다. 한마디로 요즘은 상품의 가치와 자신의 존재 의미를 동일시한다고 할까요?”
    “분명 그런 측면이 있죠. 하지만 손오공이 아무리 재주가 뛰어나도 결국 부처님 손바닥 안이잖아요?”
    “그게 무슨?”
    “신세대들의 사고방식이 제아무리 새롭고 파격적인 스타일을 원해도 결국 그것은 저 같은 디자이너가 스케치한 밑그림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에요.”
    “!”
    “심지어 그들의 새롭고 파격적인 의식조차도 어느 면에선 치밀하게 계산된 것일 수도 있죠. 소비자의 사치심리를 교묘하게 조종한다고나 할까요.”
    “마치 이브에게 사과를 건네준 뱀처럼 말인가요?”
    “어머! 나 팀장님. 문학에도 소질이 많으신가 보다. 아무튼 유행은 그 자체가 또 하나의 상품이죠.”
    “그런가요?”
    “물론이죠. 그럼 내 손도 부처님의 손이 되는 건가. 훗!”
    “…….”
    손비아는 누가 봐도 섹시하고 매력적이며 감각적이었다. 하지만 그 화려함 뒤에 사냥만을 위해 진화한 포식자의 치명적인 발톱이 숨겨져 있었다. 현우는 순간순간 자신을 강한 힘으로 움켜쥐는 그 날카로운 발톱이 단번에 피부를 꿰뚫고 즉사시킬 것 같아 매우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아참! 팀장님, 제가 선물 하나 갖고 왔어요.”
    “선물요?”
    “캐주얼재킷인데 올 여름 신상품이에요. 그런데 저에게 이어링 하나도 선물하지 않는 분에게 이걸 과연 드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호호호.”
    “…….”
    “왜요? 부담스러우세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렇습니다.”
    “제가 방금 한 말 때문에요?”
    “아니오.”
    “아, 알겠다. 이 재킷은 뇌물이 절대 아니에요. 동종업체에서 선물로 받은 거예요. 그러니까 부담 갖지 않으셔도 돼요. 어떠세요, 멋있죠?”
    “예. 하지만 괜찮다면 전 손비아 씨의 마음만 받고 싶습니다.”
    “히~유!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요. 할 수 없죠. 뭐, 팀장님의 그 청렴성을 제가 모르는 바도 아니고. 아무튼 전 정말 이 옷이 팀장님만큼 잘 어울릴 사람이 이 세상엔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렇게까지 생각해주셨다니 정말 고맙고 또 죄송합니다.”
    “미안한 마음이 있긴 있으신 건가요?”
    “물론입니다.”
    “그럼 저랑 술 한잔 하세요.”
    “술요!”
    “예. 그럼 제가 팀장님의 거절에 대한 섭섭함을 스스로 달랠게요.”
    “저희 집엔 손비아 씨가 드실 만한 술이 없는데요. 기껏해야 먹다 남은 소주밖에는…….”
    “제가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올 때 요 앞 슈퍼에서 장을 봐왔다고요. 이번엔 제 부탁 들어주실 거죠? 이것도 안 들어주시면 저 정말 섭섭해요.”
    “아직 초저녁인데요.”
    “그렇게 심각한 표정까지 지으실 필요는 없어요. 사실은 제가 상의 드릴 것이 좀 있어서 술 한잔 하자고 말씀드리는 거니까요.”
    “상의요?”
    “아까 기획실에서 제가 넌지시 이야기의 머리를 꺼냈는데 기억 못하시는구나. 그렇죠?”
    “이태리 유학 말입니까?”
    “그래요. 피~! 난 생각해서 기껏 말씀드린 건데 한참만에야 기억하시네. 팀장님이 보시기에는 제가 그렇게 매력이 없나요?”
    “아, 아닙니다. 매력이 없긴요. 오히려 매력이 너무 많아서 탈이죠.”
    “호호호, 정말요?”
    “예.”

    이미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세상은 이성보다는 감성이 과학보다는 주술이 지배했다. 그리고 먹이사냥을 나온 포식자들도 어슬렁거렸다. 그런데 사람들은 포식자하면 무의식적으로 맹수를 떠올린다. 하지만 뛰어난 변장술을 이용해 먹이를 사냥하는 또 다른 포식자가 있다. 바로 걷지도 못하는 식충식물(食蟲植物)이다. 식충식물은 매혹적인 색, 감미로운 향, 달콤한 즙이라는 속임수를 갖고 있다. 현우는 손비아의 또랑또랑한 눈망울에서 무슨 이유 때문인지 그 식충식물을 보고 있었다. 거기엔 설렘과 기대가 없었다.

    “전 욕심이 아주 많은가 봐요. 수혈하듯 외부에서 무언가를 끊임없이 계속 채워넣어야 하거든요.”
    “왜요? 유학을 떠나기가 두려우세요?”
    “글쎄요, 두려움이 전혀 없다면 그건 거짓말이겠죠. 하지만 오늘에 만족을 못하니까 가기는 가야겠는데 미래를 위해 지금 당장 희생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요.”
    “보다 낳은 미래를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의 희생과 인내도 필요한 것 아닐까요?”
    “그렇죠? 바보! 바보! 1 더하기 1처럼 너무도 당연한 건데 그걸 질문이라고 하다니. 하지만 희생하기엔 너무 아깝다는 게 문제예요. 그럼 어쩌죠?”
    “뭐가 말입니까?”
    “현실과 이상, 그 하나의 선택으로 생겨나는 아쉬움과 그 아쉬움을 치유할 수 있는 최적의 타협점 말이에요.”
    “글쎄요, 제가 보아온 손비아 씨는 능력이 있으니까 양쪽 모두를 충분히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게 정말 가능할까요? 제가 지나친 욕심을 부리는 건 아닐까요?”
    “단순히 욕심인지 아닌지는 그 사람의 노력 여하에 달려 있지 않을까요?”
    “노력에요?”
    “사과가 익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사람에겐 욕심이겠지만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따는 사람에게는 당연한 대가일 수도 있으니까 말입니다.”
    “정말 우문현답(愚問賢答)이시네요! 답답하던 마음이 한순간에 뻥 뚫리는 것 같아요.”
    “손비아 씨는 분명 세계적인 패션디자이너가 될 겁니다. 이번 S/S시즌의 디자인처럼 남들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천재적인 해답을 찾아내시잖아요.”
    “팀장님! 우리 건배 한 번 하실래요?”
    “!”
    “혼돈과 방황을 끝내게 해준 이 밤을 위하여, 건배!”

    손비아는 주변 사람들과 달리 세상을 자기만의 독특한 시각으로 바라보는 특별한 눈을 갖고 있었다. 현우가 보기에 그 눈은 총명하고 화려했으며 매우 미래지향적이고 개방적이었다. 하지만 그 창조적이고 진취적인 의식이 때론 너무 앞서나가 유리파편처럼 치명적인 위험이 될 수도 있었다. 또 손비아는 급진적인 사고방식만큼이나 자존심이 무척이나 강했다. 현우는 좀처럼 술기운이 오르지 않았다. 평소와 달리 그만큼 긴장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이제 빗줄기도 더 굵어져 있었다.

    “저, 뭐 하나 여쭈어 봐도 돼요?”
    “!”
    “유행이 디자이너의 손에 의해 만들어지듯 사회적인 출세와 성공도 자신의 의지 밖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해서요.”
    “어느 면에선 그럴지도 모르죠.”
    “사실 전 남자들이 학연·지연에 매달리고, 여자들이 성형수술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것을 충분히 이해해요. 사회 자체가 적자생존을 원하잖아요.”
    “하지만 그렇다고 저까지 그럴 수는 없죠.”
    “이해는 한다, 그러나 받아들일 수는 없다.”
    “사회의 불합리한 점과 개개인이 처한 상황은 저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그 개인이 모여 집단을 이루면 국가와 사회의 정체성이 상식을 벗어나 심각하게 왜곡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왜곡된 결과는 고스란히 사회적인 약자들에게 피해로 돌아옵니다. 결국 한 사람의 인간적인 용서가 다수의 희생을 필요로 하는 건 올바른 선택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개인의 탐욕스런 이윤추구가 결국 사회와 국가 전체의 이익을 증대시킨다고 어느 책에서 읽은 것 같은데요.”
    “그건 순수하게 타인의 이익을 침해할 정도의 부정이나 오만이 없는 경우겠죠.”
    “한마디로 부정한 방법으로는 출세하기 싫으시다 뭐, 그 말씀이로군요.”
    “…….”
    “히~유!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해졌네요. 알코올도 팀장님에겐 별 효과가 없다는 사실 말이에요.”
    “…….”

    열정과 광기로 총알처럼 질주하는 도심의 속도는 좀처럼 늦출 수 없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도심의 속도도 다소 거칠게 칠해진 안개에 발목이 잡혔다. 직선의 단순함을 없애고 은유적으로 표현된 도로, 꺼져가는 등불처럼 애처로움을 떨어뜨리는 네온사인의 깜박거림, 격정적으로 감정을 표출하는 선이 없어 오히려 도심의 질주를 막아섰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실의(失意)에 찬 천재 화가가 감성만으로 현우의 현실을 의미심장하게 모방한 작품 같았다. 그런데 어느 틈엔가 등 뒤로 돌아온 손비아가 죽음의 덫으로 현우를 옭아맸다. 현우는 본능적으로 자신이 식충식물의 덫에 걸렸음을 직감했다.

    “팀장님이 아까 그러셨잖아요. 노력 여하에 달렸다고.”
    “!”
    “만약 제게 잘못이 있다면 그건 바로 카운슬링을 잘못한 팀장님 잘못이에요. 제 말이 맞죠?”
    “하지만 손비아 씨, 전 이미…….”
    “알아요. 그분이 저보다 몇 배는 더 아름답고 매력적이라는 것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어요. 적어도 팀장님의 마음을 빼앗아 갈 정도라면 말이에요. 그런데 어쩌죠? 저도 제 꿈에 팀장님의 기쁨과 슬픔을 모두 담고 싶거든요.”
    “죄송합니다, 손비아 씨. 저는 이미 마음이 텅 비었어요. 제가 가졌던 사랑은 이제 한 톨도 남지 않았습니다.”
    “팀장님, 부탁이에요. 이대로 그냥 조금만 더 있어주세요. 네?”
    “…….”

    현우는 이제 손비아가 자신을 찾아온 목적이 선명하게 보였다. 다시 얼마간의 침묵이 흘렀다. 손비아는 정말 두 사람이 하나가 된 듯한 착각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사랑은 욕망을 넘어선 소통이라고 현우는 늘 생각해왔다. 현우는 상체만의 힘으로 거칠게 그녀의 팔을 풀었다. 손비아는 어쩔 수 없이 현우의 몸에서 떨어졌다. 그리곤 자신의 행동이 못내 부끄러운지 고개를 숙인 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하지만 누가 누구를 좋아하는 감정을 가지고 탓할 수는 없었다. 현우 역시 그 감정의 소중함을 지수에게서 배웠다.

    “손비아 씨, 이제 술 좀 깼어요?”
    “죄송해요. 제가 너무 무례했죠?”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해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까지 욕심을 내서 갖지 않은 게 없어요. 전 절대 포기 못해요. 아셨죠?”
    “!”
    “그럼 저 이만 갈게요. 오늘은 정말 고마웠습니다.”
    “손비아 씨, 대리운전이라도 부를까요?”
    “대리는 불안해요. 친구를 부르면 돼요. 걱정하지 마세요.”

    현우는 손비아가 탄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는 걸 확인하고 자신의 오피스텔로 돌아왔다. 그리고 서둘러 주방으로 달려가 빈 가스레인지를 모두 켰다. 스위치를 켜자마자 금방 히트커버링 주위로 오로라를 닮은 파란 불꽃이 동그라미를 그리며 솟아올랐다. 그제야 비로소 눅눅하던 마음이 한쪽 귀퉁이부터 천천히 마르기 시작했다. 더불어 집 안 구석구석에 스며든 찜찜함도 현우의 의식 밖으로 사라져갔다. 현우는 베란다로 나아가 창문을 닫고 볼륨을 높여 음악을 틀었다. 오디오에서 아름다운 아리아가 흘러나왔다.

    Lascia ch’io pianga
    나를 울게 하소서!
    la durasorte e che sospiri la liberta,
    잔인한 나의 운명! 나에게 자유를 주소서!
    Il duol infranga queste ritorte di’ miei martiri
    이 슬픔으로 고통의 사슬을 끊게 하소서!
    sol per pieta, di’miei martiri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sol per pieta. Lascia ch’io pianga
    나를 울게 하소서!
    la durasorte e che sospiri la liberta,
    잔인한 나의 운명! 나에게 자유를 주소서!
    e che sospiri e che sospiri, la liberta!
    나에게 자유를 주소서!
    Lascia ch’io pianga
    나를 울게 하소서!
    la durasorte e che sospiri la liberta
    잔인한 나의 운명! 나에게 자유를 주소서!

    순수를 향해 영혼을 날려버린 현우는 오피스텔에서 빈 껍질로 남았다. 그런데 현우는 창문에 들러붙어 소리 없이 흘러내리는 또 다른 불쌍한 영혼을 보지 못했다. 지원은 현우의 오피스텔 바로 맞은편 공원에서 다시 쏟아지기 시작한 빗줄기에 기대 서 있었다. 거기서 지원은 현우와 손비아 주연의 감미로운 유혹의 춤을 모두 보았다. 이제 지원은 완벽한 고립감을 느꼈다. 세상의 흐르는 모든 것은 자기 자리로 되돌아옴을 의미한다. 하지만 지원에게 있어 흐른다는 건 영원한 끊어짐, 즉 단절을 의미했다. 그래서 더욱 슬펐다.
    ‘아름답게만 보이던 꽃으로 맞아서 그런지 오늘은 더 아프네. 그러고 보니 아바지 말이 또 맞았어.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도 있다고 하셨지. 그게 바로 윤지원 내 삶이었어. 내가 왜 그걸 잊고 있었을까. 바보! 바보!’
    작은 유리눈물이 모여 지원의 눈가에서 이슬방울이 됐다. 또르르 흐른 유리눈물은 물처럼 흐르다 하나의 선으로 그 끝을 맺었다.
    ‘행복이 그만큼 컸던 거겠지. 그런데 나에겐 현우 씨에게 당당하게 보여줄 수 있는 진실이 없어. 삶도 사랑도 그 진실이 없어. 그래서 현우 씨에게 돌아갈 기회조차 없는 거야.’
    긴 호흡으로 숨 막히게 전개된 러브스토리와 달리 2막 구성의 엔딩장면은 너무도 간단했다. 지원은 떫은맛의 눈물에 갇혀 흔들리는 어둠 속으로 그렇게 사라졌다. 그런데 그때 먼발치에 있던 한 아름이 넘는 느티나무에서 한 사내가 유령처럼 빠져나왔다. 그리곤 이내 지원의 슬픔을 밟고 섰다. 분명하게 드러난 사내의 표정은 인간보다는 섬뜩한 악마에 가까웠다. 악문 어금니 사이로 갈증을 느끼는 살기와 피를 마주한 만족감이 공존하는 야수(野獸)의 그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