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의 진보는 거듭나야 합니다

    조광동 /재미 언론인

    저는 부엌에서 밥하고, 설거지하고, 빨래하고, 집 청소하고, 자녀를 돌보는 것은 아내의 몫이고,
    세상을 변화시키고, 대의를 논하고, 나라와 국민을 위해 일하는 것은 남편의 몫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내의 이러한 내조가 있어야 남편은 자질구레한 집안일에 신경 쓰지 않고 큰 뜻과 생각을 펼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집안일은 모두 아내에게 맡기고 한 때는 민주운동도 했습니다.

    많은 곡절과 좌절과 반성을 통해 저의 이런 생각이 변화를 가져왔고,
    지금은 밥도 하도, 설거지도 하고, 빨래도 하고, 집 청소도 합니다.
    설거지는 아내 보다 제가 더 즐겨하는 일과가 되었고, 아내의 옷을 빠는 일도 제 일입니다.
    물론 처음부터 이 일을 자발적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이 일에 의미를 느끼고 꽤 잘하는 편입니다. 여러 계기와 계기를 통해 변해 가면서, 저는 과거 보다 의식과 생활에서 훨씬 민주화된 남편과 아버지로 변했습니다.

    민주주의를 주장하면서 가정에서는 비 민주적인 남편, 비 민주적인 생활을 하는 것이 자기 모순인 것처럼,
    입만 열면 민주를 외치는 정치인들의 의식과 행동이 비 민주적이라면 그 언어는 위선이 됩니다.

    한국의 대통령 선거를 보면서, 특별히 문재인 후보 지지자들의 주장을 들으면서 저는 설거지 생각을 했습니다. 민주 통합 당 사람들이 설거지를 좀 많이 하고, 설거지를 하면서 자기 성찰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왜, 새누리당은 아니고 민주당 만이냐고 묻겠지만, 지금은 민주당이 더 시급한 실정입니다.
    민주당 사람들이 특히 귀가 따갑도록 민주를 외치는데 그들의 언어와 생각과 행동이 너무 비 민주적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번 한국의 대통령 선거에서 문재인 후보가 패배한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에 하나가 “민주”를 너무 많이 판 것입니다.
    가장 대표적으로 상징되는 것이 박근혜 후보 측과 차별을 “독재”와 “민주”의 구도로 대칭 시켰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략적으로도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독재와 민주의 구도는 약효가 지나도 한참 지났고, 그 인식의 출발이 잘못 되었습니다.
    시대 정신을 잘못 읽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고 낡고 퇴색한 과거의 구호를 붙들고 새로운 정치 깃발을 들겠다고 하는 인식이 너무나 후질 뿐입니다.

    특별히 박근혜가 독재자 박정희 딸이기 때문에 독재의 연장이 될 수 있고, 유신 망령이 되살아나고, 유신 독재로 회귀할 수 있다는 논리는 지독한 피해 의식이고 비 진보적입니다.

    진보적인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아버지는 아버지고 딸은 딸이라는 열린 생각과 아량이 있어야 합니다.

    미국에서 아버지 부시가 대통령을 하고, 큰 아들 부시가 또 대통령을 하고, 작은 아들 제프 부시가 대통령을 꿈꾸고, 남편 클린턴이 대통령을 하고, 아내 클린턴이 대통령이 되려했고, 그들의 외동딸 첼시 클린턴이 정치를 꿈꾸는 기색이 있어도,
    그것을 부자 세습이나 부부 세습이라고 비난하고 욕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들이 아버지나 남편의 후광을 받아 정치 무대에 서는 행운을 얻었지만,
    객관적인 자기 능력으로 경쟁하고 평가받아야 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김정일 김정은의 세습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한국 정치를 멀리서 보며 진보 세력에게 마음이 자꾸 멀어지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진보의 품격 때문입니다. 낙후된 진보의 품격을 진보시킬 생각은 하지 않고,
    아직도 과거의 망령을 붙들고, 망령을 쫓아내기 위해 신들린 사람처럼 악을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진보의 빛나는 이성을 상실하고 진보를 수구의 흙구덩이로 끌고 들어가고 있습니다.

    한국의 진보 세력과 진보 세력이 이끌려 다니는 종북 좌파 세력을 보면,
    저 사람들이 과거에 외쳤던 민주와 인권의 실체가 무엇이었고,
    저 사람들은 정말로 민주와 인권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들게 합니다.
    민주와 인권의 깃발에 피가 끓어 인권과 민주의 대열에 선 것은 용기이고 존경이지만, 너무 과거를 팔아먹으니 식상케 되는 것입니다.

    유신 저항의 상징이었던 김지하 시인이 박근혜 후보를 지지하고,
    김대중 사람들인 한광옥, 한화갑씨가 박근혜 진영으로 간 것은 변절이고,
    보수 정부에서 총리를 지낸 정운찬, 이수성씨나, 김영삼 전 대통령의 아들 김현철씨, 보수의 브레인이었던 유여준씨가 문재인 후보를 지지한 것은 용기로 평가하는 발언에 아무런 모순을 느끼지 않는 편협성으로는 균형 정치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과거의 동지가 떠나는 것이 서운하고 실망스러울 수 있어도, 각자의 판단과 선택을 존중하는 뜻으로 말을 아끼는 것이 스스로의 격을 높이는 것입니다. 독재 시대에는 탄압과 회유로 자기주장과 입장을 바꾸는 변절이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었지만, 민주시대에는 입장과 철학을 바꾸는 것이 변절이 아니라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입니다.

    한국 진보의 실종은 이렇게 낙후된 인식의 격에서 시작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진보와 좌파는 균형과 성실을 잃어 가고 있습니다. 격이 실종되었습니다.
    한국의 민주와 인권에 대해서는 그토록 민감한 사람들이 북한의 인권에 대해서는 관대한 것을 넘어서서 외면을 합니다. 이렇게 지독한 이중 잣대를 가지고 민주와 인권과 진보를 논하는 것은 민주와 인권과 진보를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인권과 민주를 외친 사람들이 북한의 탈북자를 외면하고, 정치 수용소를 외면하는 것은 자기 위선이고,
    남한의 부정과 부패, 가진 사람들의 탐욕과 타락, 빈익빈 부익부를 규탄하는 사람들이 북한 정부의 부정과 부패와 비 인간상에 침묵하는 것은 자기를 속이는 것입니다.

    초근목피로도 연명할 수 없어 탈북을 하고, 백만명이 넘는 동포가 굶어죽을 때 호화판 생활을 하는 북한 위정자의 부패에는 눈감는 사람들은 진보나 좌파가 될 자질이 없고, 인권과 민족을 외칠 자격은 더욱 없습니다.

    통일의 물꼬를 트기위해 인민의 인권에 침묵할 수밖에 없고, 화해의 길을 열기위해 북한 정부의 마음을 거슬려서는 안 된다는 주장은 과거 그들이 비판했던 유신독재가 통일과 국가 안보, 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민주주의를 유보하고, 인권을 제한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유신 정부는 그 논리가 옳고 그른 것을 떠나 분명한 국가관으로 당당할 수 있었지만,
    그것을 비판했던 민주 인권 세력이 비슷한 논리를 펴는 것은 그들의 자가당착 때문에 그 입지가 더욱 궁색하고 비굴해 집니다.

    북한의 3대 세습에 침묵하고 심지어 동조까지 하는 사람들이 박근혜를 독재자의 딸이라고 몰고 갔던
    진보 세력의 의식과 인식은  비 논리적이고 비 이성적입니다.
    북한의 세습 정치를 비판할 자신이 없으면, 차라리 박근혜가 박정희의 딸이라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최소한의 예의이고 자기 양식입니다.

    가장 수구적이고, 전 근대적인 북한 정부와 연대감을 가지는 한국의 진보나 좌파는 진보나 좌파가 아닙니다. 그들이야 말로 시대를 읽지 못하는 수구주의자들입니다. 그들은 이념의 광신자이거나, 북한 체제 지지자들이거나, 정치적 실리를 따지는 이기주의자들입니다.

    “지려고 해도 질 수 없는 선거에서 졌다”고 민주당 사람들은 한탄한다지만, 이것은 교만입니다.
    이들은 질 수 밖에 없는 방법으로 게임을 했습니다.

    전교조를 통해 젊은이들을 맹목적인 이념의 앵무새로 만들면 대세가 자기들 쪽으로 올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젊은이들이 세상에 눈이 뜰 때 이들은 좌파와 종북의 맹신에 머물지 못할 것입니다.

    이번 한국 대통령 선거는 미국의 대통령 선거와 많은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미국의 우파들도 미트 롬니가 이길 줄 알았고, “이길 수밖에 없는 게임에서 졌다”고 낙담했습니다.

    제 눈에는 오늘 한국 좌파와 미국의 우파가 어쩌면 이렇게 비슷한 현실 인식을 가지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들게 합니다. 한국의 진보와 좌파가 상실감에 빠져있는 것처럼 미국의 보수와 우파도 지금 깊은 허탈감에 빠져있습니다. 공화당이 살기위해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한다는 자기비판이 강하게 고개 들고 있습니다.

    한국의 극좌가 한국의 진보 세력을 좌지우지 했던 것처럼, 미국의 극우가 미국의 보수 세력을 주물렀습니다. 미국의 극우 세력은 티 파티(Tea Party)란 것을 급조해서 수십 명을 의회로 보내서 미국의 보수를 인질로 잡고 대통령 선거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습니다. 공화당의 롬니가 오바마에게 패배한 가장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는 극우 세력의 눈치를 너무 보면서 비위를 맞추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공화당 후보였던 롬니는 케네디 집안을 키워낸 진보의 본산 매사추세추주의 주지사를 지냈을 만큼 중도 보수주의자입니다. 그러나 공화당 예선에서 대통령 후보가 되기 위해 너무 우쪽으로 급선회 했고, 후보가 된 후 오바마와 본선에서 경쟁하려니 너무 보수 쪽으로 가 있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로 세금을 올리지 않겠다는 “선서”를 하고, 고소득층의 세금 인상을 격렬하게 반대하는 바람에 부자들 대변인으로 인식되고, 불법체류자 문제로 반 이민 이미지가 각인되고, 낙태 문제에 너무 이념적이라 낙후된 정당 사람으로 인식되었습니다. 공화당은 가난한 사람들을 천덕꾸러기로 만들어 국민 정당의 이미지를 상실했고, 반 이민 이미지로 보수성향이 있는 히스패닉과 아시안 유권자까지 외면하게 만들었고, 낙태 문제로 많은 여성표를 이탈케 했습니다.
    이것을 만회하기 위해 입장을 바꾸다 보니 롬니는 결국 “플립-플롭(Flip-Flop: 갑자기 자기 입장이나 말을 바꾸는 것)”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리더십 이미지에서도 롬니와 문재인은 유사점이 있습니다.
    미국의 롬니 후보는 능력있는 인물이었지만 이미지에서 대통령 감이 아니라 재무부 장관 타입이라는 말이 나왔던 것처럼 문재인은 리더십 이미지에서 참모형이었습니다. 그리고 롬니가 극우의 눈치를 보느라 수습하기 어려웠던 극우 정책을 표방하다가 난감했듯이, 문재인은 노무현 정신을 구현한다는 표방으로 친노의 눈치를 보고, 극좌의 비위를 맞추느라 한미 FTA(자유무역협정)이나 해군 기지, 천안함 사건에 최고 통수권자의 신뢰와 입지를 상실했습니다.

    그러나 가장 본질적인 것은 한국 진보와 좌파 세력의 품격으로 돌아갑니다.
    문재인 후보는 한국의 진보나 좌파에서는 드물게 신사적이고 성실하다는 이미지를 줍니다. 인간적인 품위가 있습니다. 미국의 롬니 후보도 독실한 몰몬 교도로 신사적이고 좋은 품성을 가지고 있으나 극우의 전략을 따라 가다보니 신사적 격을 잃고 네거티브 쪽으로 선회해서 원래 가졌던 품위를 상당 부분 실추시켰습니다.

    대부분의 미국 진보나 보수 사람들은 합리적이고, 깊은 존경을 느끼게 하는 진지함과 성실함, 인간적인 격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극단적인 좌파나 우파들에게는 이러한 격이 없습니다.
    극단적으로 갈수록 좌파든 우파든 일반적으로 인간적인 품격이 떨어집니다.
    특별히 이번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는 극우 세력, 롬니의 지원 세력이 눈살을 찌푸리게 할 정도로 품격을 잃었습니다. 한국의 좌파가 박근혜를 개인적으로 매도했던 것처럼 미국의 우파가 오바마를 개인적으로 미워하는 덫에 걸렸습니다.

    선거가 끝난 뒤 소설가 공지영씨가 트위터에 올렸다는, “아침에 한술 뜨다가 비로소 울었다… 나치 치하의 독일 지식인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유신 치하의 지식인들은? 절망은 독재자에서가 아니라 그들에게 열광하는 이웃에게서 온다. 한반도, 이 폐허를 바라보고 서 있다”는 글을 읽으면서 저는 한국 진보 세력의 의식과 품격에 다시 낙담해야 했습니다. 사이비 종교에 빠진 맹신자의 모습입니다.

    공지영이란 소설가는 자기가 쓰고 있는 화려한 언어의 의미를 소화하지 못하고 언어를 소설로 쓰고 있습니다. 공지영류의 인식이 한국 진보와 좌파의 인식과 품격이라면 진보의 장래가 암담합니다.

    미국 대통령 선거가 끝난 뒤 대표적 극우 논객으로 품위가 바닥에 속하는 솬 헤너티가 자신의 주장 가운데 이민정책에 잘못이 있었다는 것을 시인하고, “에보루션(evolution)”을 하겠다는 표현을 했습니다. 자기 사고의 일부를 수정하고 “진화”를 하겠다는 자기반성이었습니다.

    한국의 진보는 과거 독재에 항거했던 용기로 과감한 자기 개혁으로 자기모순을 허물어야 합니다.
    자기 혁신에 파격성과 혁파성을 보여야 합니다. 우선 언어를 부드럽게 다듬어야 합니다.
    민주주의는 언어에서 시작합니다. 광적이고 극단적인 언어가 아니라 부드럽고 이성적이고 예의 있는 언어에서 시작합니다.

    진보는 얼굴과 목소리에서 분노와 증오를 쫓아 버리고 미소와 관용으로 국민들 가슴으로 뛰어들어야 합니다. 극단적인 이념의 격한 언어가 아니라, 합리적인 철학으로 정제된 정책을 부드럽고 진지한 언어로 전달해야 합니다. 가장 비민주적이고 수구적인 언어인 북한 아나운서의 전투적이고 쇳소리 같은 높은 옥타브의 목소리를 한국의 진보나 좌파는 흉내 낼 것이 아니라, 극복하는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합니다.

    한마디로 이야기해서 한국의 진보나 좌파는 “시빌리티(Civility)”를 회복해야 합니다.

    시빌리티는 교양과 품위를 뜻하고, 예절과 예의 있는 언어와 태도, 경청하고 겸손한 인격, 진지하고 배려하는 모습과 절제입니다. 시빌리티가 없으면 아무리 좋은 사상과 이념과 정책을 주장해도 거기에 진정성이나 진실성, 그것에 대한 신뢰가 흔들립니다.

    민주주의는 구호나 시위, 촛불로 성취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민주주의를 만들기 위한 불씨입니다.
    민주주의는 제도와 헌법만으로 가능치가 않습니다. 한국은 이미 그 단계는 훨씬 넘어섰습니다.
    민주주의를 담을 수 있는 시민의식, 민주의식이 있어야 민주주의가 결실할 수 있습니다.
    시빌리티가 없이 시위와 촛불만 밝히면 민주주의는 오합지졸들의 격렬한 성토장이 되어 민주주의 자체가 도전 받고, 사회는 안정과 발전, 진보와 번영을 구가할 수 없습니다.  

    한국 진보의 위기는 문재인의 패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패인이 무엇인지를 착각하거나 호도하는데 있습니다. 한국의 진보가 좌파로부터 독립해서 인격과 품위를 가지고 새롭게 거듭나야 한국 정치에 변화가 올 수 있습니다.

    설거지를 여자의 몫으로만 생각하면서 민주운동을 하는 것이 위선인 것처럼,
    비민주적이고 비문명인의 인격과 의식으로 행동 하면서 민주주의와, 그것도 진보적인 민주주의를 외치는 것은 허구이고 자기기만입니다. 민주주의를 할 수 있는 의식과 인격, 품성이 배양되어야 한국 민주주의가 꽃 피울 수가 있습니다.

    한국 진보는 자기 내면을 설거지 하면서 분노와 미움을 순화시키고, 적폐 된 찌꺼기를 씻어내면서 새롭게 일신해야 합니다. 진보는 진화를 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