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서화 장편소설 '레드'-1
  • <45> 실체


    “어, 또 오셨네요?”
    “아, 예.”
    “그런데 어쩌죠. 얼마간 손비아 씨를 만나기 힘드실 것 같은데요.”
    “아니, 왜요. 어디가 많이 아픈가요?”
    “그게 아니라 유학문제로 개인적인 시간이 필요하다면서 연차휴가를 냈거든요.”
    “연차휴가를요?”
    “예, 일주일간요.”
    “…….”
    “그나저나 팀장님, 제 기억이 맞다면 오전에도 그 가먼트백을 가지고 오신 것 같은데 혹시 그거 손비아 씨에게 전해줄 물건인가요?”
    “아, 예.”
    “번거로우시면 제가 보관하고 있다가 나중에…….”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럼, 전 이만.”

    현우는 권아현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자존심이 강한 손비아가 자신 앞에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행동했지만 내심 적잖은 충격을 받은 것이 분명했다. 현우는 그것에 대한 세심한 배려를 못해준 것이 못내 아쉬웠다. 현우는 혼탁한 상념의 그물에 갇혀 힘없이 계단을 내려왔다. 그런데 물류팀이 보이는 마지막 계단을 막 내려서려는 순간 누군가 복도에서 현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동해 씨의 웃음을 보니 어째 우리의 만남이 우연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군.”
    “맞습니다. 지금 시간 어떠세요?”
    “시간?”
    “예.”
    “특별한 것은 없어. 물류팀 업무도 대충 다 끝냈거든.”
    “그럼 잘 됐습니다. 여기선 말씀 드리기가 곤란하니까 일단 길 건너 찻집으로 좀 가시죠?”
    “찻집? 우리 아지트는 어떻게 하고?”
    “챔버가 은밀성은 있지만 아무래도 사내 시설물이라 홍 대리님이 조심스럽답니다.”
    “홍 대리가?”
    “예.”
    “흠! 홍 대리가 그렇게 말한 것으로 봐서 아무래도 오늘 모임은 무척 무겁겠는걸.”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현우는 동해의 손에 이끌려 곧장 길 건너 티가든이라는 찻집으로 갔다. 도착해보니 석우가 차(茶)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여자들 틈에서 평소와 달리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현우는 석우의 모습을 보자마자 자신의 기대치가 잘못됐음을 알고 급히 수정했다. 물론 그 기대치는 조금 전보다 훨씬 더 높이 올라갔다. 일단 세 사람은 차를 시켜 마셨다. 현우가 짙은 향미(香味)와 함께 따스하게 올라오는 차향으로 흥분을 진정시킨 틈을 타 입을 열었다.

    “홍 대리, 만난다던 매장 직원이 누구야?”
    “전 천안백화점 직원이었던 김세령 씨입니다.”
    “가만! 홍 대리님. 김세령 씨라면 혹시 석정균 차장에게 뇌물을 주려다 총무팀에 적발되어 작년 겨울 강제퇴직을 당한 그 매장 직원 말씀인가요?”
    “그래 맞아.”
    “에이! 그렇다면 회사에 좋은 감정이 남아 있을 리가 없잖습니까. 언젠가 얼핏 들으니까 지금 경쟁업체로 옮겨가서 근무만 잘하고 있다던데.”
    “그럴 수도 있지.”
    “그래, 성상납과 관련해 김세령 씨가 말한 진술의 신빙성 여부는?”
    “그건 좀 더 시간을 갖고 천천히 판단해야 할 문제인 것 같습니다. 더욱이 너무 충격적이고 민감한 문제라 추가 확인이 필요한 사항들도 좀 있고 말입니다.”
    “아쉽군. 사실 기대를 많이 했었는데.”
    “하지만 제 섣부른 판단으로는 진술의 구체성으로 볼 때 신빙성이 상당히 높아 보이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진술의 구체성?”
    “예, 바로 김세령 씨가 성상납의 당사자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게 정말입니까?”
    “응, 본인이 직접 밝힌 내용이야. 더욱이 현재 다른 회사에 다닌다면 오히려 전 직장에서의 불미스러운 일은 덮으려 하는 게 보통 아닐까?”
    “그러게요. 새삼스레 굳이 들춰낼 이유는 없겠죠. 더구나 강제퇴직의 직접적인 원인 제공자는 석정균 차장님인데 백 전무를 물고 늘어질 이유도 없고요.”
    순간 테이블 위엔 달 없는 밤의 무겁고 두꺼운 침묵이 깔렸다. 그리고 세 사람의 시선은 마치 합의라도 한 듯 각자의 찻잔에서 우려진 찻잎처럼 풀어지기 시작했다.
    “홍 대리, 그럼 김세령 씨가 말한 성상납의 진실은 뭐야?”
    “팀장님, 미산(美山)이라는 산악동호회 기억하시죠?”
    “물론 기억하지.”
    “그러면 작년 인사발령에서 그 미산의 회원들이 전원 승진 내지는 직급이 상향 조정됐다는 사실도 기억하십니까?”
    “가만! 그럼 승진을 미끼로 해서 김세령 씨에게 성상납을 요구했다는 거야?”
    “정확합니다.”
    “누가요?”
    “누구긴 누구야. 바로 백 전무님이지.”
    “헉! 그게 정말입니까?”
    “그래서 아까 사실관계를 좀 더 확인해봐야 한다고 내가 미리 말했잖아.”
    “직접?”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지역점장들 회식자리나 사내 체육대회가 있을 때 은근히 뉘앙스만 풍겼답니다.”
    “뉘앙스요?”
    “그래.”
    “그건 본인이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해석될 수도 있는 부분이잖습니까?
    “그렇긴 해. 아무튼 당시 김세령 씨는 성상납과 관련해 거부의사를 분명하게 표시했고 백 전무님도 바로 농담이었다며 변명을 했답니다.”
    “에~이! 그럼 모두 잘 해결된 것 아닌가요?”
    “꼭 그렇지도 않아. 결과적으로는 그 이유 때문에 자신이 승진에서 누락됐다고 생각하니까. 그런데 그런 일이 단 한 차례로 끝난 것이 아니랍니다.”
    “좋아. 그렇다면 구체적인 물적 증거는? 아니면 사실관계를 객관적으로 진술해줄 제3의 인물이라도.”
    “문제는 그런 객관적인 증거가 없다는 것입니다. 거기다 당사자인 백 전무님이 회사의 실세로 있는 한 더더욱.”
    “최소한 퇴사를 각오해야 가능한 일이겠지.”
    “아니 제3의 인물은 그렇다 하더라도 통화기록만큼은 저장되어 있을 것 아닙니까? 더구나 본인이 성상납으로 승진에서 누락되었다고 생각한다면 나중에 문제제기를 위해서라도 기록을 저장하는 것이 상식 아닌가요?”
    “처음 한두 번은 그냥 짓궂은 농담 정도로 생각하고 별 의심 없이 넘겼다더군. 그리고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나서는 저장을 하기는 했지만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면 되지 하는 심정으로 지웠고. 물론 백 전무님도 자신의 휴대전화가 아니라 일반전화를 사용했답니다.”
    “에이! 홍 대리님. 하지만 증거가 없다면 김세령 씨의 악의적인 모함일 가능성도 있잖습니까? 그리고 더 큰 문제는 김세령 씨가 거짓말을 하더라도 우리가 그것을 증명할 수단이 없고요.”
    “흠, 그건 나도 동해 씨의 생각과 같아. 김세령 씨의 말만 믿고 상황을 판단하기에는 관련 사실이 너무도 충격적이야. 그리고 또 하나.”
    “뭔데요, 팀장님?”
    “그렇게 자기관리에 철저했던 김세령 씨가 왜 석정균 차장을 매수하기 위해 뇌물까지 주려고 했을까?”
    “그러게요.”
    “김세령 씨의 행동에는 일관성이 없어.”
    “그 뇌물수수 건은 황당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석정균 차장님이 먼저 제안을 했답니다.”
    “석정균 차장님이 직접?”
    “예. 그러니까 작년 인사발령 직후 석 차장님이 승진에서 누락된 것을 위로하면서 업무능력은 뛰어난데 동기들보다 융통성이 없어도 너무 없다고 했답니다. 그래서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으니까 회사생활도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좋은 게 좋은 거 아니냐고 했답니다.”
    “좋은 게 좋은 거요?”
    “쉽게 말해서 뇌물상납을 돌려서 말한 거지.”
    “흠…….”
    “아니 자기가 제안을 해놓고 어떻게 양심도 없이 총무팀에 제보를 합니까. 그건 상식적으로 도저히 납득이……. 더구나 승진과 관련해 성상납을 요구한 건 분명 백 전무님인데 왜 뇌물은 난데없이 석정균 차장님에게 갖다 주었죠?”
    “팀장님 생각은 어떠세요?”
    “석정균 차장이 백 전무님의 라인이라는 걸 감안하면 가능성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 하지만 이야기의 내용이 너무 주관적이고 억지로 꿰어 맞춘 것처럼 일관성이 없어.”
    “그렇죠?”
    “아무튼 홍 대리가 좀 더 사실관계를 알아봐.”
    “알겠습니다. 아참! 이것도 김세령 씨에게 들었는데요. 최근 들어 영업직원들 사이에 백 전무님과 관련된 스캔들이 떠돌고 있답니다.”
    “스캔들?”
    “확인되지 않은 루머 수준의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상대는?”
    “바로 설유리 점장입니다.”
    “설유리 점장?”
    “예.”
    “오호라! 설유리 점장의 오만함이 전혀 근거 없는 자신감은 아니었네요. 하긴 최우수사원으로 뽑힐 때 대충 짐작은 했지만요. 그래도 왠지 씁쓸한데요.”
    “최종적이고 결정적인 증거가 없다면 루머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바람일 뿐이야. 쉽진 않겠지만 홍 대리가 그쪽도 한번 조용히 알아봐.”
    “알겠습니다.”

    세 사람은 빈 마음으로 찻잔을 다시 집어 들었다. 찻잔을 통해 현우가 마주한 건 도공의 무심(無心)함이다. 그 무심함이 빚어낸 투박한 남성미가 정성을 담아내고 있었다. 그래서 차의 풍부한 맛과 향에 멋을 더했다. 차는 개운하게 씻어낸 입안에 약간의 흥분을 몰아왔다.
    “그래, 동해 씨 쪽은 뭣 좀 나온 게 있어?”
    “사실 저 요 며칠간 머리 터지는 줄 알았다니까요.”
    “공동명의자들의 공통점은?”
    “복잡하게 꼬아놓긴 했지만 의외로 아주 쉽게 풀렸습니다. 공동명의자 간의 연결고리는 예상대로 백 전무님라인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가만! 지난번에 네가 직접 말했잖아. 확인결과 그런 사람들은 없었다고.”
    “놀랍게도 회사 사람들이 아니라 친인척이었습니다.”
    “친인척?”
    “예.”
    “누구?”
    “한 사람은 총무팀 우광재 차장의 장인이고 또 한 사람은 물류팀 장윤석 부장의 처제였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두 사람은 생산팀 김웅태 과장의 매제와 대구백화점 점장의 형부로 밝혀졌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청담동 건물은 임차인과 공인중개사의 주장이 틀렸다는 소리잖아? 동시에 백 전무님이 수탁해두었을 것이라는 우리의 심증도 보기 좋게 빗나간 것이고 말이야.”
    “하지만 공동명의자들의 의심이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니야.”
    “그건 왜죠?”
    “어쨌건 그들의 친인척이 현재 백 전무님라인으로 있으니까 말이야.”
    “그럼 더 조사를 진행해볼까요?”
    “물론. 아무튼 교묘하군. 직계존비속은 모두 피해갔으니 말이야.”
    “가만! 그런데 왜 네 명이야. 공동명의자가 다섯 명 아니었어?”
    “나머지 한 명은 확인하고 또 확인해도 우리 회사와의 연관성을 좀처럼 입증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 거참 이상하군. 네 명이 백 전무님라인 쪽 사람들의 친인척이라면 나머지 한 명도 그와 유사한 인맥관계로 얽혀 있어야 상식 아닌가. 안 그렇습니까, 팀장님?”
    “그러게, 정황증거까지 포함하면 홍 대리의 판단이 합리적이지. 하여간 진실에는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어.”
    “잘 알겠습니다. 제가 착각을 했는지도 모르니까 조만간에 다시 한 번 꼼꼼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나저나 팀장님, 오늘도 그냥 헤어지는 건 아니죠?”
    “그럼?”
    “에이! 오랜만에 이렇게 셋이 모였으니 진하게 한번 말아야죠.”
    “폭탄주?”
    “당근이죠. 그동안 너무 바쁘셔서 술맛도 잊으셨을 텐데 추억을 되살리는 차원에서. 또 정기적으로 마셔줘야 내장에 낀 스트레스도 날릴 수 있고요.”
    “아! 폭탄주 소리만 들어도 벌써 술이 고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