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서화 장편소설 '레드'-1
  • <46> 마에다 유주루


    “재국 씨, 여기!”
    “오늘의 동거는 대충 끝난 건가요?”
    “응, 나머지는 경찰청 외사국 요원들이 전담하기로 했어.”
    그 시각 정원 일행은 테라스가 있는 도로변의 원두커피 전문점에 있었다. 주변의 건물은 등 뒤에서 비치는 온화한 석양에 젖어 단순하게 묘사되고 있었다. 물론 그 단순함으로 인해 건물의 윤곽은 더욱더 뚜렷하게 강조됐다. 흡사 저녁놀에 물든 서해의 작은 섬 같았다.
    “마에다 유주루가 투숙한 호텔이 이 근처의 탤런트(Talent)라고 했지?”
    “예, 지상 20층, 지하 4층으로 모두 789개의 객실을 갖춘 최고급 비즈니스호텔입니다.”
    “흠! 탤런트라. 왜 거기지?”
    “그건 아직…….”
    “이름부터가 재밌잖습니까? 연예인을 볼 수 있지는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갖게 하고 말이죠.”
    “탤런트는 속어로 대단한 능력의 도박사들을 의미하는데, 흠…….”
    “그나저나 유진아, 팀장님이 지시하신 마에다 유주루의 입국 목적은 파악됐어?”
    “국내에서의 사업 확장인지 아니면 범죄조직 간의 연계모색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테러를 위한 사전조사 차원인지 현재까지는 그 실체가 모호해요.”
    “동선은?”
    “점심 때 새로 임명된 재팬리스의 한국인 임원 두 명과 함께 호텔의 스카이라운지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점심식사를 한 게 다예요. 객실에 외부인의 출입은 물론이고 호텔로비를 벗어난 적도 없어요. 통화내역에서도 특이사항으로 의심할 만한 것은 전혀 감지되지 않았고요.”
    “엉덩이가 꽤나 무겁군! 하긴 일상이 지뢰밭이라 지켜보는 눈이 있다는 걸 야수의 본능으로 알겠지.”
    “그렇겠죠. 아무튼 정상적인 여권으로 들어왔으니 섣불리 행동하지는 않을 것 같아요.”
    “호텔 투숙객 중 또 다른 주요 인물은?”
    “일주일간의 예약손님 명단을 확보했는데 국제적으로 이슈화된 주요 인물은 없었습니다.”
    “호텔을 출입하는 사람 중에서 눈에 띄는 사람은?”
    “중국대사관에서 근무하는 리오우지아신(柳嘉欣). 한자로 읽으면 류가흔이라는 20대 후반의 여직원이 유일합니다. 하지만 둘의 접촉은 없었어요. 그리고 류가흔은 연수차 온 중국 유학생들을 만나자마자 바로 돌아갔고요.”
    “류가흔이라는 여자 혹시 MSS(Ministry of State Security·중국국가안전부) 아니야?”
    “재국 선배의 짐작대로예요. 국가안전부 제10국 대외보방정찰국 소속이에요. 공식적으로는 중국대사관에서 영사관 보호업무와 유학생들을 감시하고 있어요. 하지만 그녀의 비공식 업무는 정보담당 외교관으로서의 첩보활동입니다.”
    “아무튼 마에다 유주루의 입국 목적이 무엇이든 그가 숨겨놓은 먹이를 찾을 때까지 일거수일투족을 놓치면 안 돼.”
    “빠짐없이 체크하고 있어요.”
    “혹시 모르니까 기업형으로 성장한 토종 범죄조직의 접근도 체크하고.”
    “물론이죠.”
    “히~유! 우리나라의 조폭들이 야쿠자처럼 정치권력과 결탁한다고 생각만 해도 아찔한데요.”
    “최소한 합법적인 사업가로 위장한 한국판 야쿠자나 지하경제를 주름잡는 한국판 마피아가 현실화되는 최악의 상황은 막아야지.”
    “그게 어디 우리 힘으로 가능하겠습니까? 어쩌면 이미 양지(陽地)를 좀먹고 있을지도 모르는데요.”
    “하긴 조직폭력배를 미화해 국민의식을 왜곡시키는 저질 영화나 드라마가 문제예요. 범죄조직은 바로 그런 썩은 토양에서 기생하잖아요.”
    “팀장님, 그럼 저는 국세청의 도움을 받아 재팬리스의 자금출처만 조사하면 되는 건가요?”
    “재국 씨가 또 하게?”
    “예?”
    “내가 이미 국제거래 세원 통합분석 시스템(ICAS·International Consolidated Analysis System)까지 가동했거든.”
    “훗! 재국 선배가 한발 늦었네요.”
    “그런데 아무리 뒤져도 재팬리스의 자금출처와 외형상의 회사운영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어. 거기다 야마구치구미는 물론이고 다른 범죄조직과의 검은 거래도 서로 연계를 검증할 수 있는 어떤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고 말이야.”
    “그 말씀은 현실적으로 우리가 가진 기술로는 더 이상의 추적이 불가능하다는 말씀인가요? 아니면 회사가 그만큼 투명하다는 말씀인가요?”
    “솔직히 후자야.”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예상과 달리 자금의 운용주체가 명확했거든. 한·일 양국의 대표적인 투자증권이 합작펀드를 만들어 합법적으로 투자한 거야. 물론 자산운용방식도 한·일 동종업종의 우량기업을 비교해 기대수익이 높은 기업에 투자하는 방식이라 투명하고. 거기다가 일본 정부도 해외직접투자 지원제도를 활용해 재팬리스에 투자정보와 컨설팅, 그리고 추가 자금조달과 신용보증까지도 지원하고 있었어.”
    “쉽지는 않겠지만 마음만 먹으면 정상적인 해외투자로의 위장이야 얼마든지 가능한 것 아니겠습니까?”
    “가능성은 있지. 하지만 아주 특수한 경우라서 일본 정부가 도박을 하지 않는 경우라면 그 확률은 희박하다고 봐야겠지. 즉 그 파장이 일본 경제 전반의 신뢰도와 직결될 수 있다는 소리야. 때문에 국제적으로 일본 정부와 경단련(經團連·일본 경제단체 연합회의 약칭)의 신뢰도가 추락하더라도 그걸 감내할 수 있는 그 어떤 심각한 요인이 내부적으로 있어야 가능하다는 소리고.”
    “재국 선배, 어째 이거 약간 김이 빠지는 것 같지 않아요?”
    “그러게. 지금까지의 조사결과만 보더라도 마에다 유주루와 북한 수뇌부의 관계는 아주 특수한 관계잖아. 때문에 그의 흔적을 쫓으면 비밀자금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었는데 말이야.”
    “어쨌든 시간을 우리 편으로 만들어야 해. 그러니까 다른 각도에서 조금 더 알아보자고.”
    “그런데 팀장님, 마에다 유주루는 어떻게 처리하실 겁니까? 국제테러범을 저렇게 계속 제집 안마당 드나들듯 내버려두실 작정이십니까?”
    “재국 선배 말이 맞아요. 국제적인 불법 무기거래와 폭력, 그리고 돈세탁과 마약거래를 하는 그런 자를 가만두는 건 우리나라와 우리 국민의 자존심 문제라고요.”
    “거기다가 이젠 북한의 청부살인까지도 대행하잖습니까. 그건 정치암살에까지 활동영역이 확장됐음을 의미하는 거고요. 혹시 또 모르죠. 얼마 안 있어 우리나라에도 야쿠자의 전위대(前衛隊)가 만들어질지.”
    “위험한 인물인 건 사실이야. 하지만 문제는 현행 형법의 국외조항이 외국에서 우리 국민을 대상으로 하거나 우리 영토에서 이뤄진 외국인의 범죄만을 처벌할 수 있잖아.”
    “그야 그렇지만 그래도 명명백백한 국제테러범을 눈앞에서 그냥 보내줘야 한다는 게 어딘지 모르게…….”
    “그건 유진이 말이 맞습니다. 이건 일생에 한 번 잡을까 말까 한 로열-스트레이트-플러쉬(Royal-Straight-Flush)가 뻔히 읽히는 데도 걸 칩이 없어 죽는 것과 마찬가지라고요.”
    “알아. 하지만 우리는 게임의 룰을 만드는 디자이너가 아니야. 단지 이미 만들어진 게임의 룰에 따라 제한적으로 베팅을 해야 하는 갬블러일 뿐이라고. 그러니까 비록 지켜야 하는 게임의 법칙이 옹졸하고 편협해도 일단은 받아들이자고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정원 역시도 눈가에 진한 아쉬움이 남았다. 사람들은 가끔 눈에 보이는 현실과 자신이 괴리되어 있다는 낯선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현실의 높은 울타리에 뜨거운 열정이 갇힌 정원이 지금 버림받은 영혼처럼 그랬다. 그리고 그 괴리감은 허탈과 실의를 동반했다. 정원의 건조한 시선은 패션의 변화가 꿈틀대는 거리를 폭주기관차처럼 사납게 빠져나갔다. 그리고 다른 두 명의 의식도 빌딩숲을 방황했다.
    “아참! 재국 씨, 모사드 비밀요원들의 방한 첫날은 어땠어?”
    “공식적인 일정이라 그런지 특별히 튀는 행동은 하지 않았습니다. 오전에는 자국 대사관을 방문해 대사와 인터뷰를 했고 오후에는 제3땅굴과 도라산전망대, 민통선 내 마을인 통일촌과 전방부대 한 곳을 방문했습니다. 그 부대의 사단장과 작전참모의 인터뷰도 땄습니다. 그리고 한류의 영향 때문인지 주변 지역의 토속음식점에서 제조방법도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내일은?”
    “공식적으로는 통일부와 국방부, 그리고 외교통상부의 실무진들을 각각 한 명씩 취재하는 일정이 잡혀 있습니다. 아마도 그곳 연구원들을 만나 최근 북한의 경제·외교·수출 관련 취재를 할 모양입니다. 더불어 북한의 대중무역과 경제지원도 전반적으로 점검할 것으로 예측되고 말입니다.”
    “당연히 그 속엔 불법 무기거래나 위조지폐, 마약공급 같은 북한의 부정 금융거래 정보도 포함되겠지.”
    “그렇습니다. 그나저나 유진아! 너 이렇게 오랫동안 자리를 비워도 되는 거야?”
    “그러게.”
    “네가 없는 사이 마에다 유주루가 감시망에서 벗어날 수도 있잖아?”
    “재국 선배, 이 서유진이 그렇게 어수룩하진 않죠. 현장 요원을 통해 완벽하게 다 조치해 두었어요. 그러니까 너무 걱정 안 해도 돼요.”
    “현장 요원? 그럼 경찰이나 다른 부서에 지원을 요청했단 말이야?”
    “그건 불가능하죠. 마에다 유주루의 입국은 현재 극비사항이잖아요.”
    “그럼?”
    “훗! 마침 은서를 호텔 내 보안센터에서 만났지 뭐예요.”
    “그럼 지금 호텔에 은서 씨가 와 있단 말이야?”
    “그렇다니까요, 왜요? 너무 좋아서 달려가고 싶죠?”
    “흠! 그런데 은서 씨는 무슨 일로? 혹시 경찰청 정보과에서도 뭔가 눈치를 챈 건 아닐까?”
    “그렇진 않은 것 같았어요.”
    “확실해?”
    “예. 호텔 내 보안시스템을 통해 은서가 확인하려는 것은 고의로 부도를 내고 중국으로 도피했다가 몰래 입국한 악덕 사업자였거든요. 아무튼 산업스파이라고 둘러대고 마에다 유주루가 국내 접선자와 만나는지 감시 중이라고 했어요.”
    “자, 그럼 재국 씨는 얼른 가서 은서 씨에게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주고 유진 씨는 나와 함께 은서 씨로부터 임무를 넘겨받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