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서화 장편소설 '레드'-2

  • <51> 게임의 규칙


    “팀장님, 단순 혐의자가 아닌 진범(眞犯)이 확실합니까?”
    “지문, 필적, 인상, DNA. 사건의 단서는 이런 법의학적 증거만 있는 게 아니야. 범죄수법이나 정황증거 역시도 무시할 수 없는 단서라고.”

    그로부터 두 시간쯤 뒤 정원과 유진은 황급히 국정원의 사무실로 들어섰다. 그런데 정원의 급진적인 추론에 홀린 사람은 비단 유진뿐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재국은 그 충격을 더 극명하게 드러냈다. 유진은 오늘 종교적인 신념이 기적을 만들 듯 정원의 의지가 이성적인 사고를 뛰어넘는 걸 보았다. 유진은 아무리 노력해도 정원의 놀라운 의식세계에 대한 이해가 불가능했다. 세상의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비상식적인 직관능력이었다. 하지만 정원의 추론은 모든 것을 관통하는 종교적 진리처럼 단순명료했다. 그래서 쉽게 거부할 수 없는 강한 흡인력까지 갖고 있었다.

    “하지만 살해수법만 가지고 마에다 유주루를 진범으로 단정하는 건 다소 성급한 결론이…….”
    “범죄수법처럼 살인욕구도 일종의 습벽(버릇)이야. 거기다 그만한 전문성과 화려한 이력을 가진 암살자는 당시 호텔에 마에다 유주루밖에 없었고.”
    “그럼 범행동기도 분명해야 되잖습니까?”
    “결론부터 말할게. 노동당 통일전선부의 지시를 받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 그 둘의 연관성은 재국 씨가 보여준 사진에 담겨 있고.”
    “전금호 말씀이군요. 그런데 무엇 때문에 통전부가 장동하 영사를…….”
    “그 질문에 대한 답으로는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정황도 있어.”
    “그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장동하 영사의 최근 행적.”
    “최근 행적에서 무슨 특이사항이라도 발견됐습니까?”
    “재국 선배, 장동하 영사가 최근 유엔 인도주의업무조정국의 담당관을 만나 대북식량지원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를 부탁했답니다.”
    “재검토? 그럼 혹시 협의내용이 대북식량지원의 축소에 관한 내용이었어?”
    “맞아요, 재국 선배. 그런데 그걸 어떻게?”
    “음, 그게 사실이라면 적어도 통전부와 외무성이 장동하 영사에게 노골적으로 적의(敵意)를 드러낸 이유만큼은 설명이 되는군.”
    “흠…….”
    “북한의 3대 권력기관 중 군부는 이미 35호실과 작전부를 흡수·통합해 자금줄을 선점했잖아. 하지만 통전부와 외무성은 자금줄의 확보에 실패했거든. 그래서 자체적으로 충성자금 마련이 불가능한 상황이야. 그런데 장동하 영사가 자금줄을 차단해 직접적으로 두 기관의 생존권을 위협했으니…….”
    “헐! 오늘따라 재국 선배까지 달리 보이는데요. 평소 제가 알던 선배와 같은 사람인가 싶을 정도예요.”
    “흠! 나도 같은 생각이야.”
    “하지만 살해방법상의 의문은 여전히 남습니다.”
    “뭐가요?”
    “나는 통전부가 마에다 유주루의 손을 빌렸다는 사실이 쉽게 이해가 안 돼. 통전부에는 직접침투과도 있잖아.”
    “듣고 보니까 그런데요. 더구나 마에다 유주루는 사건 당시 일식당에서 나가노 슈스케와 식사 중이었어요.”
    “그게 확실해?”
    “그건 팀장님도 직접 확인하신 내용이에요.”
    “그렇다면 알리바이까지 입증됐잖습니까?”
    “재국 씨, 알리바이가 존재한다고 모든 혐의가 벗겨지는 건 아니지.”
    “또한 나코-테러리스트는 자금지원만 하지 직접적인 행동은 최대한 자제하는 것이 그들만의 규칙이잖습니까?”
    “…….”
    “더구나 타국의 영사를 그것도 본국에서 직접 살해한다는 건…….”
    “일본인이라 상황에 따라 항구적인 비밀보장도 어렵고요.”
    “그 모든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통전부가 그를 선택한 이유가 분명히 있겠지.”
    “그게 뭘까요?”
    “바로 테러지원국 재지정에 대한 부담감 때문일 거야. 그런데 통전부와 마에다 유주루와의 관계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 사항은 통전부가 왜 그를 선택했느냐가 아니야.”
    “그럼요?”
    “마에다 유주루가 왜, 무슨 목적으로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통전부의 요구를 수용했는지 그 음흉한 속내야.”
    “범죄조직의 생리가 돈만 생기면 무슨 일이든 하는 집단이기 때문 아닐까요?”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그럼 한 침대에서 다른 꿈을 꾸고 있다는 말씀이세요?”
    “맞아, 이중적이야. 결론부터 말하면 마에다 유주루의 행적은 그의 의지라고 보기에 어딘지 모르게 일관성이 없어 보여.”
    “그럼 그를 조종하는 누군가가 또 있다는 말씀이군요.”
    “아마도.”
    “하지만 팀장님, 사건 당시 나가노 슈스케와의 만남은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사실 두 사람의 어울리지 않는 만남이 신경에 몹시 거슬렸거든.”
    “그럼 그의 알리바이가 치밀하게 조작됐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가능성은 충분해.”
    “조작됐다는 증거는 무엇입니까? 야쿠자와 극우파 의원의 만남 그 자체입니까?”
    “아니 그보다는 좀 더 구체적이야. 바로 유리창닦이용 곤도라와 일식당 내 특별출입구.”
    “그러니까 마에다 유주루는 범행을 저지르고 나가노 슈스케는 그의 알리바이를 만들어주었다는 말씀이군요.”
    “그렇지.”
    “팀장님의 추측이 맞는다면 아주 치밀하게 계획된 범행이네요.”
    “우리나라 경찰의 수사력에 대한 과소평가이거나.”
    “그런데 팀장님, 나가노 슈스케가 야쿠자를 위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그건 반대로 생각하면 답이 나오지 않을까?”
    “반대로 생각한다고요?”
    “그래. 나가노 슈스케의 기이한 행동은 마에다 유주루가 야쿠자나 나노-테러리스트가 아니라는 걸 의미하고 있거든.”
    “팀장님, 그럼 마에다 유주루의 진짜 정체가 뭘까요?”
    “최소한 혼자 술 마실 때 불러낼 수 있을 만큼 순수한 친구는 아니야.”
    “그럼 팀장님은 가면을 벗은 그의 실체를 보셨단 말입니까. 가만! 혹시.”
    “처음 목적은 그게 아니었어.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회피할 수 없는 치명적인 진실을 본 건 사실이야.”
    “마에다 유주루의 실체가 그렇게 충격적이었단 말씀입니까?”
    “솔직히 그 이상이야. 그의 이력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그림자를 보았거든.”
    “그럼 그의 설명할 수 없는 급진적인 신상변화가 이제 확실해진 건가요.”
    “그런데 보다 심각한 문제는 그게 다가 아니라는 거야.”
    “그럼 또 뭐가 있다는 말씀입니까?”
    “재편된 내각정보조사실 산하에는 지금까지도 베일에 가려진 어둠의 비밀조직이 있어.”
    “혹시 우리나라 키스(KSS·Korea Secret Service·국가비밀국을 가리키는 은어)와 유사한 특수팀인가요?”
    “아니, 거기는 비밀암살조직이야.”
    “예~에?”
    “일명 다테노카이라고 하는…….”
    “일본이 국가정보기관에 비밀암살조직을 두었다는 말씀입니까?”
    “그래. 그런데 최근까지 그 비밀암살조직과 관련해 우리가 갖고 있던 정보는 리더가 3등육좌 출신이라는 게 전부였어.”
    “그럼 다테노카이의 리더가 바로?”
    “그래. 내 판단이 맞는다면 그 비밀암살조직의 실질적인 리더는 바로 마에다 유주루야.”
    “그게 사실이라면 정말 놀라운 반전인데요.”
    “그래서 일본 정부가 해외직접투자 지원제도까지 활용해 재팬리스를 관리한 것이로군요. 또한 나이초우(內調)의 요원인 미우 나카무라가 지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요.”
    “따라서 공안조사청의 키시카와 조사 제2과장의 정보오류는 단순 실수나 의도된 설정이 아니야. 즉 키시카와조차도 그의 실체에 대해 거짓된 정보를 갖고 있었던 게 분명해.”
    “그건 곧 마에다 유주루가 내각정보조사실 내에서 차지하는 역할과 비중을 반증하는 것이네요.”
    “맞아!”
    “팀장님. 그렇다면 거짓된 정보를 고의로 흘린 건 나이초우겠네요?”
    “다른 곳은 그럴 필요성이 없으니까. 그런데 마에다 유주루를 앞세운 일본 정부의 농간질이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지 그걸 모르겠어. 마치 여러 명이 게임을 하는데 게임규칙을 우리만 모르는 느낌이랄까.”
    “게임규칙은 모르지만 농간질의 궁극적인 목적이야 빤하지 않나요. 전범가의 후손인 현재의 일왕을 국가 원수(元首)로 격상시키기 위한 고도의 음모 말입니다.”
    “글쎄, 그게 전부라면 주변국의 비난만 감수하면 되겠지.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문제는 매우 심각해질 수도 있어.”
    “이거 점점 흥미진진해지는데요.”
    “과거 일본 제국주의는 아시아인의 고귀한 생명뿐만 아니라 평화를 사랑하는 아시아인의 숭고한 정신세계까지도 파괴했어. 또다시 그런 일이 벌어지게 놔두어선 안 되겠지.”
    “당연하신 말씀입니다.”

    정원은 영혼까지 꿰뚫어보는 눈을 갖고 있었다. 동시에 재국과 유진이 오싹한 전율을 느낄 만큼 눈빛도 강렬했다. 정원은 분명 전보다 더 영리해지고 더 강해지고,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더 차가와질 수도 있다는 공포심을 불러일으켰다. 그 기운은 폭로된 더러운 비밀의 분명한 결말을 원하는 정원의 아우라(Aura)가 틀림없었다.
  • “그럼 류가흔의 정확한 역할은 무엇입니까?”
    “최소한 우연은 아니겠지.”
    “그렇다면 마에다 유주루와 공범이라는 말씀인가요?”
    “그렇지 않다면 범행 목적에 맞춰 장동하 영사에게 표지(標識)를 달아줄 이유가 없잖아.”
    “그 말씀은 범행시간에 맞춰 류가흔이 장동하 영사의 동선(動線)을 확인시켜주는 전화를 했다. 거기에 심층자료를 구실로 피살자와의 점심약속까지 이미 치밀하게 계획된 것이라는 말씀이군요.”
    “그럼 중국이 개입한 동기는 무엇입니까?”
    “그것 역시도 편지 속의 지워진 이름처럼 궁금증을 증폭시킨다고나 할까.”
    “한마디로 의문덩어리란 말씀이군요.”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해.”
    “그게 뭡니까, 팀장님?”
    “중국의 민족주의는 패권적 야망으로 인해 점차 화평(和平·평화)이 희석되고 굴기(堀起·떨쳐 일어남)만 남고 있어. 따라서 가까운 장래 주변국들에게 불안감을 안겨주고 동아시아의 항구적인 평화와 안정을 해칠 것이라는 거지.”
    “팀장님, 그럼 이제 우리의 마지막 선택은 무엇입니까?”
    “유진 씨의 말투를 보니 어째 상황이 돌변했다는 소리를 하고 싶은가보군.”
    “맞아요. 전 솔직히 국정원의 존재 목적이 평화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평화가 아니라고?”
    “예, 주변국과의 항구적인 평화를 원한다면 국정원이 아니라 당연히 외교통상부로 가야죠. 저는 우리의 주된 임무가 국가와 국민을 위협하는 악(惡)과 불의(不義)를 찾아내서 먼저 제거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히~유! 난 또.”
    “때문에 악과 불의를 보고도 항거하지 않고 침묵한다면 그건 자신의 존재이유와 정체성을 망각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침묵도 유죄라!”
    “왜요, 제 말이 틀린가요?”
    “하지만 마에다 유주루 같은 괴물을 잡으려면 국가와 국민에 대한 헌신과 열정, 그리고 사명감만으로는 부족해.”
    “그럼 뭐가 더 필요한 거죠?”
    “초자연적인 기적이나 행운.”
    “결국 제 발로 들어온 암살자마저 살려보내야 한다 뭐, 그 말씀이군요.”
    “더구나 임무의 성격상 결정권자의 재가(裁可)가 반드시 필요하고.”
    “유진아, 넌 방금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 못 들었니?”
    “들었어요, 재국 선배.”
    “그게 현실이잖아.”
    “하지만 규정 위반도 진실하고 절박한 사연이 있다면 용인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흠…….”
    “역시 안 되는 거로군요. 히~유! 이래서 내가 뒷맛이 씁쓸한 블랙유머를 싫어한다니까.”
    “재국 선배, 저 역시 마찬가지예요.”
    “후후후, 사람들하곤.”
    “팀장님, 그 미소의 의미는 뭐죠?”
    “미소? 별것 아니야. 막다른 길에 몰려 도망갈 수 없으니까 거래를 하겠다는 거지.”
    “거래라고요?”
    “그래.”
    “갑자기 무슨 거래요?”
    “좋아! 복수가 정의는 아닐지라도 정의 때문에 복수를 포기한다는 건 더 바보겠지. 그것은 어쩌면 더 큰 정의와 희망을 포기하는 거니까.”
    “가만! 지금 그 말씀은…….”
    “유진아, 왜 어려워? 팀장님이 마침내 중대 결정을 내리셨다는 소리잖아.”
    “두 사람 얼굴을 보니 이제야 만족하는 것 같군.”
    “훗! 당근이죠.”
    “역시 팀장님은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니까요.”
    “두 사람의 말대로 상황은 변했어. 상황이 변하면 우리의 임무도 그에 따라 바뀌지. 그게 바로 내가 이 직업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고.”
    “그럼 팀장님이 생각하시는 마에다 유주루의 처리방법은 무엇인가요?”
    “마에다 유주루는 단순 모의가 아닌 실체법적 위법행위인 살인을 저질렀어. 그러니까 범죄행위에 대한 응분의 대가가 뒤따라야 되겠지.”

    정원의 눈빛은 거대한 빙붕(氷棚)에서 빙산(氷山)이 떨어져나가며 깨어나기 시작한 알래스카의 바다 같았다. 그만큼 예측 불가능한 놀라움의 집결체였다. 그 기운은 고스란히 재국과 유진에게 전해져 마음 깊은 곳에서 열정과 용기를 끌어올렸다. 이제 정원은 자신의 초감각을 이용해 한반도를 둘러싼 요동치기 직전의 전조현상(前兆現象)을 느끼기 시작했다.

    “하지만 팀장님, 그러기에는 마에다 유주루가 국내에 머무르는 시간이 너무 짧은 것 아닙니까?”
    “우리가 선택할 수 방법은 현실적으로 한 가지뿐야.”
    “혹시 비공개로 임무를 수행하는 특수상황을 의미하시는 겁니까?”
    “마에다 유주루의 세탁된 신분이 야쿠자인 동시에 국제테러범이잖아. 그러니까 그의 신분에 걸맞게 대접해야지.”
    “캬~아! 그거 정말 기발한 발상입니다. 따라서 이제부터 부수적인 상황은 더 이상 고려의 대상도 아니고요.”
    “거기다 의혹은 줄이고 설득력은 증폭시킬 수도 있잖아요.”
    “정답이야.”
    “뭐, 좋은 포장지가 없을까요. 누가 봐도 아름답고 세련돼 보이는.”
    “유진 씨, 마에다 유주루의 성격에 대한 리포팅 좀 다시 한 번 부탁해?”
    “아, 예. 항상 일본인 특유의 침착하고 겸손한 태도를 유지해 외형적으로는 매너가 좋은 사업가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편집증적으로 의심이 많고 사교성이 매우 부족합니다.”
    “편집증적으로 의심이 많다. 흠, 어쩌면 그게 우리가 찾는 답일지도 모르겠군.”
    “어떻게요?”
    “여우는 아주 영리하지. 하지만 늑대에게는 한낱 먹잇감일 뿐이야.”
    “그럼 이제부터 저희가 해야 할 일은 뭐죠?”
    “이번 작전은 거친 압박과 치밀한 유도(誘導)가 필요한 작전이야. 우선 나와 유진 씨는 내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그를 일본으로 귀국시켜야 해.”
    “그러니까 첫 번째 임무는 우리가 파놓은 함정으로 먹이를 모는 일이군요?”
    “그렇지! 그리고 재국 씨는 그동안 수집한 자료들을 세심하게 분석해.”
    “분석기준은 뭡니까?”
    “사건 위주의 개별조사 말고 패턴 위주로. 그것이 끝나면 특정 날짜와 특정 장소의 연결고리를 찾아내.”
    “쉽지는 않겠는데요.”
    “그런 다음 협상전문가 신분으로 한적한 곳에서 외국 친구들과 후머스(콩을 익혀 으깨고 참기름에 조미한 음식)파티를 즐기면 돼.”
    “후머스파티요?”
    “응.”
    “설마 그 외국 친구들이 지금 국내에 들어와 있는 모사드의 비밀요원들을 가리키시는 겁니까?”
    “후후후, 왜 아니겠어. 마에다 유주루와 모사드, 그 둘 사이에 뭔가 재밌는 상황이 벌어질 것 같지 않아?”
    “가만요, 팀장님. 이건 정말 예상치 못했던 상황인데요.”
    “뭐가?”
    “그럼 암흑세계의 사형집행을 우리가 시행하는 게 아니란 말씀인가요?”
    “맞아.”
    “솔직히 조금 허탈하네요. 재국 선배도 그렇죠?”
    “그러게. 왜 우리가 힘들게 잡은 먹이를 다른 포식자에게 던져줘야 하는 겁니까?”
    “그래서 내가 거래라고 했잖아.”
    “그럼 그 거래라는 게 모사드와의 거래를 말씀하신 겁니까?”
    “그건 두 가지 거래 중 하나일 뿐이야.”
    “그럼 나머지 하나는요?”
    “두 사람과 나와의 거래. 즉 난 국가와 국정원의 자존심을 지키려는 두 사람의 바람을 들어주고, 두 사람은 마에다 유주루의 제거작전에 있어서 현실적인 양보를 하고. 어때, 공평하지 않아?”
    “헐~!”
    “물론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도 있어. 크게 두 가지야.”
    “그게 뭐죠?”
    “가장 먼저 일본에게 명분을 만들어주는 게임이 아니라 이기는 게임을 하기 위해서야. 그 방법만이 마에다 유주루가 일본의 야마토다마시이(大和魂)의 상징으로 날조되는 위험성을 사전에 차단할 수 있거든.”
    “그럼 두 번째 이유는 뭐죠?”
    “당연히 우리 정부에 부담이 되는 정치·외교적인 수사(愁思)를 피해갈 수 있잖아.”
    “하여간 우리 팀장님의 머리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니까요. 크크크.”
    “이제 이해가 된 건가?”
    “물론입니다.”
    “아무튼 이번 작전은 비공개로 진행되는 특수상황이야. 세부사항은 물론이고 작전 자체도 극비야. 엄 처장님께는 내가 작전이 종결된 직후에 직접 보고드릴 게.”
    “팀장님, 한 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
    “선 조치, 후 보고는 엄 처장님을 비롯한 국정원 식구들이 ‘딜레마’에 빠지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배려인가요?”
    “후후후, 그건 나에 대한 과대평가야. 자, 이제 엄 처장님의 책상에 미리 정직서류 한 장씩 더 갖다놔.”
    “옛설!”
    “아참! 유진 씨?”
    “왜요, 팀장님?”
    “지금 당장 귀임한 류가흔의 행적부터 추적해봐.”
    “그건 왜죠?”
    “내 짐작이 맞는다면 아마도 마에다 유주루가 예약한 호텔과 류가흔이 머무르는 호텔이 같을 거야.”
    “류가흔은 북경수도국제공항으로 가는 항공기를 탔고, 마에다 유주루는 천진의 빈해(浜海)행 항공권을 예매했잖습니까. 가만! 그렇다면 두 사람이 공범이라는 부인할 수 없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겠군요?”
    “그렇지!”
    이제 정원은 사방에서 미친 듯이 부는 광풍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서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일본의 극단적 전체주의는 자제가 불가능한 광기이고, 정원은 겸손한 인간의 지혜와 이성으로 그 광기를 잠재우려는 것이다.


    “팀장님의 말씀이 맞았어요.”
    “흠! 북경의 리전트호텔이라.”
    “현재 류가흔은 피트니스센터에서 운동을 끝내고 프라이빗룸에서 마사지를 받고 있답니다.”
    “천진에서 북경까지의 거리가 대략 120km쯤 되니까 차로 가도 한 시간 남짓이면 되겠군.”
    “이로써 두 사람이 공범이라는 추정이 사실에 보다 근접한 건가요?”
    “생각할 수도 없는 사실이 실제 얘기가 될 수도 있다는 의미겠지.”
    “그나저나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유진 씨의 말대로 마에다 유주루는 프로야. 프로는 위기상황에서 자기를 방어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최소한 하나쯤은 숨기고 있지. 하지만 우리 역시도 프로야.”
    “총기는 그렇다 치더라도 도청장치라도…….”
    “그보다 더 확실한 건 내 자신을 믿는 거겠지.”
    “결국 팀장님의 안전보다는 사명감이 앞선다는 말씀이군요.”
    “단지 그게 최선이며 유일한 방법이란 소리야.”
    “아예 입을 막아버리시네요.”
    “하여간 내 명령이 있기 전까지는 상황에 대해 눈과 귀를 모두 막아야 해.”
    “호텔 보안센터에 앉아 그저 행운만 빌라는 말씀이군요.”
    “그럼 고맙고.”
    “아참! 재국 선배도 후머스파티를 끝내고 지금 이리로 출발했답니다.”
    “그럼 약속시간에 계획대로 작전을 진행해도 큰 무리가 없겠군. 과학 1팀에 부탁한 음성변조기는?”
    “당연히 챙겼죠. 그나저나 팀장님이 이런 걸 계획하실 줄은 정말 몰랐어요. 더구나 피살사건과 관련해 류가흔과 통화한 내용을 음성변조 샘플로 사용하실 줄은…….”
    “유진 씨, 최고의 거짓말이 뭔 줄 알아?”
    “! 저한테 알려주시면 나중에 후회할지도 모르는데요.”
    “그건 거짓말을 하는 자신조차도 속일 만큼 진실에 가까운 사실이야.”
    “그래서 그토록 꼼꼼하게 마에다 유주루의 개인파일을 만드셨다는 말씀이죠?”
    “맞아. 그런데 은서 씨한테는 뭐라고 설명했어?”
    “아, 맞다. 은서도 있었지. 국제마약거래와 관련된 일본 조직원이 입국해 잠복근무를 해야 한다고 했어요. 그래서 동선을 파악할 모니터요원이 필요한데 새벽까지만 도와달라고요.”
    “좋아! 자, 이제 우리의 존재를 드러낼 시간이야. 마음의 준비는 됐지?”
    “당근이죠.”

    정원과 유진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모르는 사람들처럼 각기 다른 방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발소리는 밤처럼 차갑고 밀도가 높은 지하 공간에서 더욱 크고 멀리 퍼져나갔다. 물론 두 사람의 긴장감도 빠르게 증가했다. 이제 정원은 외관부터 고급스럽게 치장된 승객용 엘리베이터를 마주보고 서 있었다. 마치 엘리베이터가 생사(生死)의 문 같았다. 바로 그때 저만치서 유진의 발걸음도 멈췄다. 그 순간 정원의 눈이 어둠 속에서 티 없이 맑고 순수하게 빛났다. 정원의 눈은 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유진 씨, 내가 말했던가?”
    “뭘요?”
    “내가 지은 유진 씨의 별명.”
    “그런 게 있었어요?”
    “응, 내 휴대전화에도 그렇게 저장되어 있거든.”
    “뭔데요?”
    “아름다운 동화.”
    “!”
    유진은 정원의 눈웃음을 보는 순간 그 의미가 또렷이 보였다. 그래서 유진도 흰 우유자국처럼 한 스푼의 미소를 입가에 묻혔다. 유진의 미소는 갓 구은 빵에 떨어트린 시럽처럼 달콤하게 V자형 턱선을 따라 온화하게 흘러내렸다. 이제 정원은 구름 속으로 들어간 비행기처럼 엘리베이터 안으로 사라졌다.


    “이번만큼은 누구의 강요나 협박이 절대 아니에요. 나 스스로 독이 든 사과를 먹었어요. 독이 온몸으로 퍼져나가 점점 의식이 희미해지네요. 그래서 더 늦기 전에 고백할게요. 난 12시가 되기 전에 돌아가야 하는 유리구두의 주인이 아니에요. 내가 나오는 이야기의 결말은 늘 뻔해요. 항상 고통이 내 운명을 기다리죠. 그래야 세상이 행복해지고 사람들이 아름다운 꿈을 이루거든요. 하지만 딱 한 번 유리구두의 주인공이 되고 싶었어요. 현우 씨는 늘 내가 행복한 신부가 아닌지 착각하게 만들었거든요. 현우 씨, 약속해줘요. 내 사랑이 티끌만큼의 거짓도 없던 진실한 순간만을 기억해주겠다고. 난 그것으로 충분해요. 그리고 다시 내게 보내준 달래도 정말 고마워요. 그럼 잘 자요. 현우 씨, 자고 일어나면 아마 새로운 사랑이 보일 거예요. 물론 거기에 나는 없겠지만.”
    국제마약상이라는 위장신분으로 정원이 마에다 유주루를 만나고 있을 무렵, 지원은 달빛에 한껏 부풀어 오른 거실에 있었다. 그리고 지원의 옆에는 유리접착제가 흘러내리면서 말라붙어 거미줄처럼 늘어진 달래가 서 있었다. 물론 사고가 있기 전의 건강하고 완벽한 모습은 아니었다. 한쪽 귀와 꼬리의 절반은 떨어져나가고 없었다. 하지만 달래가 다시 돌아와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지원은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