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는 집토끼, 48%는 산토끼집토끼도 지키고 산토끼도 잡아야 하고...
  • 詩人 金芝河(시인 김지하)에게 열광하도록 만든 건

    한국언론의 비겁

    조선일보 최보식의 金 시인 비판 글을 읽고.




  • 조선일보 최보식의 무리수

    오늘 아침 (1월11일자) [조선일보]는 최보식 기자의 펜을 통해 시인(詩人) 김지하(金芝河)의 최근 언행에 대해 ‘그럴수록 많은 사람이 시인에 대해 가졌던 부채의식과 경외심의 기억은 사라질 것’이라고 일갈했다.

    아하, 그런가?

    [조선일보]는 언론으로서 정녕 이 시대의 부채의식을 체감하지 못한다는 말인가.
    정말 그러하다면 오늘자로 [조선일보]는 더 이상 <민족 정론지>도 아니고 <대한민국 보수의 대변지>도 아니며 <정통 우파 신문>도 아님을 스스로 만천하에 공표하는 셈이 된다.
    필자부터 절독을 선언한다.

    기자 최보식의 펜을 통해 나온 글들을 조금 더 파 보자.

    (중략)
    그때까지 김지하를 안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설마 그가?”하는 당혹과 허탈감을 줬겠지만.

    그때까지 김지하를 안다고 하는 사람들은 대체 김지하를 어떻게 알고 있었단 말인가.
    그 어떤 전체주의도 거부하며 저항했던 자유주의자 김(金) 시인(詩人)의 사상(思想)을 알던 사람이라면 의당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데도 말이다.
    이어지는 문장도 조금 골 때린다.

    그가 “아버지 어머니 모두 총탄에 죽었다.
    그런 상황에서 18년 동안이나 고독 속에서 지냈다.
    박근혜가 내공이 쌓였을 것이라고 결론냈지.”라고 이유를 밝혔으니, 더 이상 따지고 궁금해 할 단계는 지났다.

    최보식 기자는 이 문장에서 김(金) 시인(詩人)이 이유를 밝혔으니 그걸로 됐고...라며 덮어버린다.
    독자의 눈길을 다른 곳으로 허겁지겁 끌고 가는 것이다.
    이로써 최보식 기자는 독자들로 하여금 한 여성이 비극적 삶에서 어떤 무게의 고통을 감내했으며, 그 과정에서 몇 번이나 쓰러질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운명과 맞서 싸우며 영혼과 인성(人性)을 오롯이 지켜낸 감동을 허락하지 않는다.
    동시에 시인(詩人)의 통찰로 건져 올려진 한 인간의 함축된 생애의 결정체를 애써 징징 밟아 묻어버리는 것이다.

    대체 최 기자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진정, 오늘까지 최보식 기자를 안다고 하는 사람들은 대체 최보식 기자를 어떻게 알고 있었단 말인지, 골머리가 빠개질 만큼 아파온다.
    필자뿐 아니라 그의 글을 좋아하는 독자들은 남다른 필력을 자랑하며 몇 년 전 <매혹>이라는 문학작품을 낼 정도로 심안(心眼)이 열린 기자인 줄 알았을 것이다.
    평범한 기자들이 파헤치지 못하는 사람들의 심부(心府) 깊숙한 곳, 그늘지고 음습하거나 혹은 너무나 애달프고 서러워 쉽게 꺼내지 못하는 이야기를 잘도 캐내 독자를 감동시키는 능력과 인품의 기자인 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 어머니 모두 총탄에 죽었다...더 이상 따지고 궁금해 할 단계는 지났다>고 덮어버리고 문장을 다른 주제로 옮기는 최보식의 심안(心眼)은 이미 닫혀져버렸다.
    대신에 잔머리 굴려 이리 쑤시고 저리 자르고 잽싸게 빠지는 영리한 뇌안(腦眼)의 기자에 다를 바 없음을 보여주었다.
    가슴이 먹먹해 진다.

    그 다음부터 이어지는 그의 글에는 [조선일보]의 초조함이 묻어난다.

    선거와 정치판에서 잘 싸우는 역할은 그와 같은 시인이 아니어도 할 사람들이 줄을 서 있다.

    그런가?
    그래서 우리 정치판이 종북(從北) 패거리들에게 휘둘리고, 연예계를 넘어서 언론까지 ‘종북(從北)비판 엄금’시대를 맞이했는가?
    잘 싸우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기 때문에...아하, 그렇구나. 그래서 대(大)[조선일보] 같은 기업형 언론에서 월급 받아먹는 기자가 아니면 입 닥치고 조용히 노후(老後)나 보내라는 말인가.
    미안하지만, 작금의 대한민국에는 언론다운 언론은 없다.

    언론이 표방하는 정론직필(正論直筆)은 북한 정권 앞에서 구부러지고, 종북주의자 앞에서 휘어지고, 빈 껍데기 안철수 앞에서 궁굴어지며, 노무현 전 대통령의 역적모의 앞에서 부러진다.
    종북주의자들이 “김정일 개새끼”를 소리 내어 말하지 못하듯, 한국의 언론들은 ‘국가반역’이라는 단어를 활자로 옮기지 못한다.
    특히 [조선일보]는 부산서민들의 피땀 묻은 돈 6조원을 사취한 광주일고 출신들의 부산저축은행 사건을 보도하면서 이미 정론직필(正論直筆)을 버리고 비론곡필(非論曲筆)하지 않았는가.

    이런 신문이 지난 대선기간 중에는 어떤 태도를 취했나.
    선거가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는데 정작 유권자들은 야당의 후보가 누가 되는지 알 수조차 없었다.

    아, 이건 문(文)과 안(安)의 단일화가 늦었기 때문이라고?
    우리 더 이상 ‘언론은 책임 없다’는 식의 이런 장난질은 그만 하자.

    후보 단일화가 되지 않았던 상황에서는 지면(紙面) 배분이 각 각 3분의 1로 가서는 안 되는 것 아니었나?
    박근혜 후보에게 지면(紙面) 배분이 1 이라면 문재인 0.5, 안철수 0.5로 지면이 배분되었어야 정직하고 정의로운 신문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나.
    이걸 후보나 후보 예정자나 똑 같이 배분하는 바람에 박근혜 후보는 2명의 적(敵)과 싸워야 했고, 야당에게 단일화를 최대한 늦출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지 않았나.

    최보식 기자 개인이나 [조선일보]가 박근혜 후보처럼 불공정한 게임을 하게 되었다면 고분고분했을까.
    더구나 거액이 걸린 승부에서라면 말이다.
    모르긴 해도 길길이 뛰었을 것이다.
    ‘정의’와 ‘공평’과 ‘공정’을 외쳤을 것이다.
    구경하는 사람들에게는 ‘용기’를 거론했을 것이다.

    능히 그러고도 남았을 언론이 왜 김지하(金芝河) 시인에게는?

    사람들은 안다.
    신문이 더 이상 신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언론의 정론직필(正論直筆)은 고사하고 거칠고 투박하지만 정직한 말만이라도 타는 목마름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가슴속이 시커멓게 타들어가던 때 김지하9金芝河) 시인의 단비 같은 직설의 언어는 적어도 51.6%의 국민에게는 진정 생명수나 다름없었다.

    이것이 어찌 김(金) 시인(詩人)의 책임인가.

    시인(詩人) 얘기가 나오니 한 마디 더 하자.
    이번 대선에서 시인(詩人) 안도현은 민주통합당 공동선대위원장을 맡았지.
    그는 <너에게 묻는다>라는 시로 유명하고, 그의 시는 교과서에도 실려 있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하던 그 시를 쓴 사람. 


  • 그런 그가 지난 해 11월 말경, 방송에서 “박근혜 후보 부모가 왜 총에 맞아 죽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신문을 보던 필자는 눈을 의심했다.
    이 사람이 정말 그 시를 쓴 사람인가 하고.
    시인의 시심(詩心)은 어디로 날아 가버린 것일까.
    너무 화가 나서 메모장에 이렇게 그의 시를 비틀었었다.

    박근혜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진실한 사람이었느냐.

    이렇게 비틀면서 그의 시를 살펴보니 참으로 가벼운, 광고카피보다 조금 긴 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우리 문화의 천박성까지.

    그런데, 만약에 말이다.
    문재인 후보가 이겼다면 시인 안도현은 인수위가 출범할 때 평범한 시인으로 돌아갔을까?
    더 깊숙이 우리 사회에, 이 나라 정치에 참여하지 않았을까.
    그가 구가하던 인기와 팬 클럽까지 몰고서 말이다.

    그때도 최보식 기자는 지금처럼 시인 안도현에게 글팔매질을 하게 됐을까?
    “당신 말고도 선거와 정치판에서 잘 싸울 수 있는 사람은 많다”고 하면서 말이다.
    계속 살펴보자.

    그는 한 인터뷰에서 '정치에서 절제란 할 말 못 할 말 구분하고 잘사는 사람 못사는 사람 구분하는 거야.
    그런 것도 없는 사람(안철수씨)이 자기 전문 영역과 정치의 관계도 모르고'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바로 그 자신도 그런 함정에 발을 들여놓았다는 걸 깨닫지 못한다.

    최보식 기자는 김지하(金芝河) 시인이 함정에 빠졌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다음 문장을 보자.

    그는 자신이 초연한 위치에 있다고 믿지만, 박근혜 당선인의 맨 앞줄에 전사(戰士)처럼 서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그는 한 수 훈계를 한다고 여기겠지만, 안하무인(眼下無人)의 언어는 단지 상대방에게 상처를 줄 뿐이라는 걸 알지 못한다.
    그는 시대와의 화해를 얘기했지만, 현실에서는 불화와 분열을 더 조장할 공산이 높다.

    최보식 기자는 김지하(金芝河) 시인의 말에 의해 상처받을 사람들을 염려하고 있는 것이다.
    김지하(金芝河) 시인에 의해 상처받을 사람들은 누구를 말하는가.

    지난 8일 CBS 라디오에 출연한 金 시인은 우리 언론들이 겁에 질려 감히 꺼내지도 못했던 말들을 고스란히 쏟아내 주었다.



  • 김현정 앵커가 조작된 질문으로 함정을 팠음에도 불구하고 金 시인은 명쾌하게 논파해 버렸다.
    이로써 제도권 언론들은 거의 맨탈 붕괴에 이르렀던 게 사실이다.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국민들은 이 날 金 시인의 직설에 가슴을 쓸어 내렸다.
    ‘아, 드디어 우리 심정을 전해주는 인물이 나타났구나’하는 안도의 한 숨을 내쉬면서.

    그런데 최보식 기자는 金 시인으로부터 상처받은 사람을 염려한다.
    천안함에 아들을 잃고 상처받은 유가족들을 포함해서 대한민국에 사는 국민 대다수는 ‘빨갱이’들에 의해 가장 많은 상처를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다.
    어쩌면 앞으로도 더 생겨날 것이다.
    그 인기 많다는 힐링 프로그램도 정작 ‘빨갱이들로부터 상처받은 국민들을 위로해 주는’ 힐링 하나 없는 이 시대에, 金 시인 홀로 거센 바람을 안고 섰다.

    그런데 최보식 기자는 상처받은 사람을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최보식 기자는 <金 시인이 시대와의 화해를 말하지만 오히려 분열을 더 조장할 공산이 높다>고 단언한다.
    우선 ‘시대와의 화해’에 대해 말해보자.

    내 알기로, 金 시인이 말하는 ‘시대와의 화해’란, 작금의 조선일보처럼 종북세력에게 굴종하면서 ‘화해’라고 눙치는 것과는 다르다.

    내 알기로, 가해자인 북한정권에게 피해자인 대한민국이 굴복하면서 ‘화해’라고 사기 치는 것과는 다르다.

    내 알기로, 金 시인의 ‘시대와의 화해’란, 서로가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노력했지만 서로가 보는 시각이 다르고 처지가 달라 불화(不和)가 아니고서는 도무지 어찌할 수 없었던 그 지랄 같던 시대와의 화해를 의미하는 것이다.
    박근혜 당시 대통령 후보도 이런 심정에서 김지하 시인과의 만남과 지학순 주교의 묘소 참배를 했던 것이고.

    그 다음, <현실에서는 불화와 분열을 더 조장할 공산이 크다>는 대목을 보자.
    우리 솔직하게 까놓고 말해보자.
    현실이 대한민국의 길적화(赤化)통일의 길로 갈라지는 불화와 분열의 갈래 길이 나온다면 어떻게 할 텐가.
    만약, 그대가 우리사회에 적화통일을 원하는 사람은 없다고 한다면, 그대는 안철수처럼 "요즘 세상에 빨갱이가 어디 있습니까“라는 시각의 소유자임을 자인하는 셈이다.
    깡통 기자인 셈이다.
    그게 아니면서도 이런 글을 쓴다면 적화보다는 불화와 분열을 막는 것이 더 소중하다는 주장을 하는 셈이고.

    알다시피 대한민국은 건국 이후 오늘날까지 체제에 관해서만은 국민적 선택이 늘 있어왔다.
    3년에 걸친 6·25동란 속에서 한국인들은 체제선택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그 결과 북한에 남았던 많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대한민국의 체제를 선택하고 내려왔다.

    이번 선거도 대한민국의 헌법적 가치를 국민이 다시 한 번 선택하는 기회이기도 했다.
    국가의 생존이 걸렸다는 절박감이 50대 이상의 기성세대가 영하 10도가 넘는 한파를 헤치고 투표장에 나가게 만들었다.
    그런데도 최보식 기자가 말하듯 불화와 분열을 염려한다면, 대체 이 절박한 상황에서 누구와의 불화와 분열을 염려하는지 되묻고 싶은 것이다.

    느슨하든 빡빡하든 연방제 통일을 주장하고, NLL을 북한에 개방해 버리며, 대한민국 정부를 ‘남측 정부’로 표현해도 아무런 감각이 없는 사람들과 대체 어떤 식의 불화와 분열을 피하란 말인지도 묻고 싶은 것이다.

    최보식 기자의 글은 다음과 같이 계속된다.

    매스컴은 그를 찾고 우파 단체도 모시려고 한다.
    그의 말문이 열릴 때마다 세간의 반응은 폭발적이다.
    그동안의 고립과 소외감에서 그가 벗어날 때도 됐지 않았는가.
    정치권력으로부터 대접받는 날도 와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재미에 빠질수록 많은 사람이 그에 대해 가졌던 막연한 부채 의식과 경외심, 시인다운 시인에 대한 기억은 사라질 것이다.

    이 문단은 마치 김지하(金芝河) 시인이 언론의 간지러움에 빠져 넋 나간 사람으로 그리고 있다.

    미안하지만 최보식 기자는 대단히 잘못 보고 있다.

    金 시인의 말문이 열릴 때마다 세간의 반응이 폭발적인 이유는, 金 시인이 그동안 고립과 소외감에서 벗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적어도 51.6%의 우리 국민이 그동안 그 잘난 제도권 언론과 방송으로부터의 고립과 소외감을 뼈 속 깊이 사무치게 겪다가 金 시인 덕분에 해방됐기 때문이다.
    적어도 51.6%의 국민들은 이 위대한 시인의 재림(再臨)에 감동하고 있다.
    부디 이 감동을 짓밟아 부수지는 말기를.
    그랬다가는 우리가 너무 슬퍼지기 때문일세.

    좌파 진영에서 뭐라고 욕하고 비판하는 것은 그는 그냥 흘려버려도 된다.
    정작 귀담아들어야 할 것은 내 주변의 생각 있는 사람들이 걱정하는 말이다.
    '노년의 김지하가 왜 저렇게 됐을까.'
    특정 이념과 정파의 열렬한 환호 속에서 이런 작은 목소리도 묻혀있는 것이다.

    이 문단속 마지막 문장에 힌트가 숨어 있는 듯하다.

    특정이념과 정파의 열렬한 환호속에서...

    필자에게는 대한민국의 체제를 지지하는 이념이 특정이념이 되고, 그 이념을 실천하는 집단이 특정 정파가 된다는 최보식 기자의 시각이 몹시 거슬린다.

    그래서 다시금 꺼내고 싶은 의문문은 “대체 최보식 기자는 누구냐”이다.

    너는 좌파(左派)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들이 뭐라고 하든 그냥 흘려버려도 된다’고 하니까.

    그렇다면 너는 51.6%에 속하는 우파(右派)냐?
    글을 보면 그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너는 그저 바람 부는 대로 까불대는 ‘중파(中派)’냐?

    김지하씨가 거울 앞에 서면 그 속에는 황석영씨가 보인다.
    황씨는 작년 연말 등단 50주년을 맞았다.
    나이 일흔이 됐다.
    그럼에도 그는 '만약 정권 교체에 실패한다면 프로방스 시골로 떠나 밥집이나 하겠다'고 말했으니, 열정과 가벼움은 나이와 상관없을 수도 있다....
    (이하 4문단 모두 황석영 관련 글로 생략함)

    필자는 이 대목부터 종잡을 수 없는 대비구도(對比構圖)로 인해 읽어내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최보식 기자는 시인 김지하(金芝河)와 소설가 황석영을 동격(同格)으로 두고 비교하고 있다. 


  • 필자보다는 문학에 더 박식한 최보식 기자에게 물어보자.
    도대체 자유의 저항시를 쓰다 옥고를 치렀던 김지하(金芝河) 시인과 동족 3백만을 죽인 김일성의 품에 안겨 對南(대남) 선동 글을 쓴 황석영 작자가 어떤 거울에서 보면 겹쳐 보이냐.

    김지하나 황석영씨쯤 되면 '독립된 개인'으로서 외로운 위치를 지켜야 하는 의무도 있지 않을까.
    꼭 정치판에 휩쓸려야 사는 맛이 나는지도 만나면 물어볼 작정이다.

    역사의식도 없고, 인간에 대한 예의나 연민도 부족하고, 세상을 비틀어 보는 데 너무 익숙하다 보니 마음조차 비틀어 진 것은 아닌지, 나도 자네 만나면 물어볼 작정이다.

    그 좋던 글이 왜 이렇게 망가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