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서화 장편소설 '레드'-2
  • <55> 본능

     
    현우 일행은 축하파티를 벌였다. 그런데 강 건너 또 다른 공간에선 우울한 어둠가루가 쇼팽의 <빗방울 전주곡> 위를 떠다녔다. 어둠가루는 흡사 먹이사냥을 나온 흡혈박쥐 떼 같았다. 어둠가루가 지나간 자리엔 살점 하나 남지 않은 고요만이 나뒹굴었다. 그리고 고요가 하나둘 쌓여 늪을 이루자 네 개의 꽃잎으로 장식된 창문에서 환한 불빛이 새어나왔다. 그리고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폭포소리 같은 물소리도 흘러나왔다. 그런데 물소리를 따라가자 거기에 선원들을 유혹해 배를 난파시켰다는 신화 속 요정 세이렌(Siren)이 있었다.
    “촬촬촬.”
    여인은 한 손에 볼이 큰 와인 잔을 들고 있었다. 젖은 입술과 살짝 풀린 눈, 그리고 몽환적인 표정은 그 누구의 심장이라도 단번에 터트릴 만큼 충동적이었다. 그때 숯처럼 검은 생쥐 한 마리가 그 마력에 이끌려 어둠 속으로 잽싸게 숨어들었다. 그리곤 탐욕스런 시선으로 주위를 살폈다. 하지만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여인은 손바닥을 활짝 펴 물안개를 휘저으며 놀았다. 지원이었다. 지원은 와인잔을 나무테이블에 내려놓고는 욕조의 수도꼭지를 잠갔다. 곧이어 입고 있던 블랙 캐미솔이 발등에 떨어졌고, 욕실은 순백의 하얀 피부에서 뿜어져 나온 성숙한 여인의 향기로 가득 찼다.
    “쏴~아~.”
    지원은 서둘러 샤워기의 레버를 돌렸다. 그리고는 온몸에 치명적인 독이 퍼진 먹잇감처럼 고개를 숙인 채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자신의 내면을 녹여내는 침묵의 의식 같았다. 그것이 끝나자 지원은 샤워부스에서 나와 미리 목욕오일과 장미 꽃잎을 넣어둔 밀라노풍의 반신욕조에 몸을 담갔다. 혈액순환이 빨라지며 근육의 긴장도 서서히 풀어졌다. 그런데 집 안으로 숨어든 생쥐도 더욱 강렬한 본능에 이끌렸다. 생쥐는 잽싸게 거실을 지나 욕실 앞을 어슬렁거렸다. 이제 생쥐는 욕실문의 손잡이에 두툼한 앞발을 얹고 조심스럽게 힘을 주었다.
    “윽!”
    “부조장 동무, 무슨 일이오?”
    “그게 저…….”
    “난 오늘밤 동무를 초대한 사실이 없소. 더구나 이런 깜짝파티는 좋아하는 스타일도 아니고.”
    “너무 갑작스러웠다면 정말 미안하게 됐소.”
    “동무가 보다시피 지금 난 수건 한 장만 달랑 걸친 반라(半裸)상태요. 이런 나를 만나야 할 만큼 남운영과 관계된 우리의 흔적이 국정원에 노출된 거요?”
    “아니오. 긴박한 외부상황은 없었소. 설혹 있었더라도 그것으로 지금 상황을 설명하기엔 미흡하고…….”
    “그럼 협상의 여지도 사라져버리는군. 하긴 그럴듯한 변명을 늘어놓는다고 내 집을 무단 침입한 동무의 죄과가 사라지는 건 아니지.”
    “조장 동무?”
    “뭐요? 동무 스스로 자신이 얼마나 저열한 정신세계를 갖고 있는지 알려주려는 것이오?”
    “물론 조장 동무가 나를 무자비한 악마로 본다는 걸 이미 알고 있소.”
    “이유 없는 살인을 아무나 즐기는 건 아니니까.”
    “좋소! 그럼 조장 동무가 나를 악마에서 성자(聖者)로 만들어주시오.”
    “동무, 피 맛을 본 짐승은 결코 우리에 가둘 수 없는 법이오.”
    “거절이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동무의 악마성은 내가 없앨 수 없을 만큼 그 정도가 심각하다는 말이오.”
    “맞는 말이오. 그래도 막상 면전에서 거절을 당하니 대단히 실망스럽소.”
    “동무의 그 실망이 희롱을 당한 나보다 불쾌감이 더 크지는 않을 것이오. 나는 매춘부나 돈으로 사는 길거리의 하룻밤 여자가 아니라 동무의 직속상관이오.”
    “그런데 지금 조장 동무는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소.”
    “착각!”
    “그렇소. 내가 성자가 될 수 없듯이 조장 동무 역시도 성녀(聖女)가 아니라는 사실을.”
    “마치 동무가 내 영혼의 책을 들여다본 것 같소.”
    “다 본 건 아니고 펼쳐진 면만 봤소. 어쨌든 지금 동무의 혈관에 흐르는 피도 포도주로 씻은 것이 아니라 나처럼 죽음의 냄새로 씻은 것이오. 내 말이 틀리오?”
    “동무에게서 그런 말을 듣다니 벗은 몸을 들킨 것보다 몇 배는 더 치욕스럽소. 아무튼 내가 지금 동무에게서 느끼는 건 색종적인 색정광(호색한)의 불쾌하고 역겨운 욕망이오.”
    “듣고 보니 마치 내가 발정난 한 마리 수캐가 된 느낌이오.”
    “그럼 아니오?”
    “조장 동무, 그거 아시오?”
    “뭘 말이오.”
    “동무의 그 일방적인 편견과 아집이 지금 내 악마성을 깨우고 있다는 거. 더구나 나도 잘 모르는 나에 대해 너무도 쉽게 이야기하고 있소. 하긴 내게 있어 명예와 영광이 없는 과정이야 그리 중요한 게 아니었소. 내게는 항상 결과가 중요했소. 결과가 있어야 내가 살아남았고 내일까지 보장받았으니까. 때문에 결과는 역겨운 피냄새가 진동했지만 생존 그 자체였고 동시에 동기였소. 또한 두려움을 극복했다는 명예이며 영광이었소. 물론 이런 악마를 가장 필요로 한 건 바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오. 그리고 난 그 대가로 내일에 대한 아주 작은 희망을 얻었을 뿐이고.”
    “마치 내겐 남녀의 사랑마저도 달성해야 할 하나의 과업이란 소리로 들리는데, 맞소?”
    “그렇소.”
    “하긴 욕망보다 같이 마시는 차 한 잔의 의미가 더 클 수도 있다는 걸 동무가 료해(이해)할 리가 없지.”
    “차 한 잔의 여유라! 이제야 궁금증의 해답을 겨우 찾은 것 같군. 얼음처럼 차갑고 이성적이던 조장 동무가 왜 이렇게 감성적으로 변했는지. 또한 조장 동무가 나에게 고압적인 이유까지. 그러니까 원인은 바로 그 남조선 미시리였군. 아니 그렇소?”
    “…….”
    “그런데 조장 동무, 그거 아시오. 내가 동지를 처음 본 곳이 어딘지. 그러니까 남파되기 1년 전쯤 남한 신분증을 위조하는 813연락소였소. 그때 난 복도에서 동무를 처음보고 만수대 예술단 무용수거나 평양예술대 학생이라고 생각했소. 정말 고왔소. 그리고 오늘밤도 동무는 내가 가진 냉혹함과 무자비함을 무디게 할 만큼 정말 아름답소.”
    “숨어든 불청객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지는 않겠소.”
    “좋소! 눈으로 즐길 만큼 즐겼으니 이만 돌아가겠소. 하지만 내 욕망의 앞을 가로막는 건 그 무엇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오. 지금 이 순간 악마가 사는 지옥의 문은 활짝 열렸소.”
    “내 똑똑히 기억하겠소. 그럼 나갈 때 잠금장치나 원상태로 해놓으시오. 숨어든 걸로 봐서 일도 아니겠지?”
    “쾅!”
    지원의 단호한 눈빛은 냉기에 살짝 살얼음이 얼어 그 날카로움으로 피오기를 위협했다. 그런데 창문 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본 또 다른 그림자가 있었다. 더욱이 말라죽은 나무처럼 그림자가 천천히 옆으로 쓰러지더니 이내 뚝 하고 밑동이 부러졌다. 어둠 밑바닥에 가라앉은 홍화의 혀끝에선 오로지 씁쓸함만 느껴졌다. 그리고 그 씁쓸함은 침으로 희석시켜도 이미 뇌리에 깊이 각인되어 파도처럼 쉼 없이 혀끝에 몰아쳤다.
    “뭐, 매춘부나 길거리의 여자? 추악한 욕망? 그럼 내가 혁명투사로서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지각의 예리함과 맥박의 빨라짐, 그리고 근육의 수축과 이완 등은 모두 거짓이며 악이란 말이군. 또한 그것으로 조국의 명예를 지키고 인민을 해방시키겠다고 맹세한 나의 결심은 기만이고. 쳇! 그래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동물은 바로 그 욕망의 산물이라는 거야. 비록 참은 아닐지 몰라도 거짓도 아니야.”
    “홍화 동무.”
    “아, 은혁 동무.”
    “술에 취하기라도 한 겁니까?”
    “아, 아니에요. 달빛이 너무 아름다워서 나도 모르게 그만.”
    “그럼 달빛에 취한 것이로군요?”
    “맞아요.”
    “저토록 친근한 달도 현실에선 너무 멀리 있죠. 하지만 인간이 결국 정복했잖아요. 물론 갖고 있던 환상은 유리잔처럼 잔인하게 깨졌지만.”
    “은혁 동무, 지금 그게 무슨 뜻이죠?”
    “우리에게는 의식되는 모든 것이 혁명과업이라는 소립니다. 심지어 남녀 간의 사랑까지도. 그래서 사랑도 마지막 결전을 향해 나아가는 것처럼 해야 하고요. 아닌가요?”
    “…….”
    “그저 쟁취하기 위한 목표일 뿐이죠. 그래서 제가 보는 달이 저토록 슬픈 것인지도 모릅니다. 왠지 밝으면 밝을수록 제 모습이 더욱더 처량하고 서 있는 위치가 절벽처럼 불안하게 느껴지거든요.”
    “왠지 공작원이 하기엔 너무 감상적인 말투처럼 느껴지는데. 하긴 남조선에 와서 직접 본 것이 있는데 그러고도 흔들림이 없다면 오히려 그것이 더 위험한 발언일지도 모르죠. 안 그런가요?”
    “그렇다고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적후에서 과업까지 망각한 건 아니니까.”
    “믿어요, 동무의 그 혁명적 열의를. 하지만 다른 사람 앞에선 가급적 위험한 발언을 삼가 하세요.”
    “그러죠.”
    “그건 그렇고 우리 어디 가서 술이나 한 잔 할까요? 그러다보면 오늘밤은 달에 흠뻑 취해서 이 밤의 고통이 아침의 햇살과 함께 사라질지도 모르죠. 안 그래요?”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