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 西獨국민이 “통일은 멀었다”고 말했다

    베를린 장벽 붕괴 2주 전 브란트도 그렇게 말했다.

    金成昱

        

  • 하루하루 갑갑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거대한 歷史의 변화를 깨닫지 못한다.

    독일의 통일도 그랬다.
    서독(西獨)의 국민은 물론 정치인 역시 생전(生前)엔 통일을 보지 못할 것이라 보았다.

    한반도 역시 마찬가지. 북한정권이 무너진 뒤 이뤄질 자유통일도 ‘산사태’처럼 올 것이다.
     
    ▪ 서독 국민들의 ‘통일에 대한 전망’은 1951년에서 1967년까지 31~66% 수준이었다.
    그러나 브란트의 동방정책 이후 이 수치는 1987년 3%대로 떨어졌다.
    97%의 서독 국민들이 믿지 못했지만,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1년 뒤 독일은 통일됐다(‘평화문제연구소’ 간 ‘독일통일 바로 알기’ 참고).
      
    ▪ 브란트 前서독 수상은 1984년 “통일문제를 논의하는 것은 아무 실효가 없으므로 중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1989년 10월25일 <시사저널> 초청으로 방한한 브란트는 “독일의 통일과 구라파의 통합이 매우 중대한 국면에 접어들고 있다”고 말했지만, “독일의 통일은 유럽의 통합이 이뤄진 다음에야 기대할 수 있다”는 요지로 말했다.


  • 그가 독일 통일에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말한 불과 2주일 뒤 베를린 장벽은 무너졌다.
     
    ▪ 독일 통일 주역인 기민당의 콜 수상 역시 다르지 않았다.
    1988년 10월 콜 수상은 모스크바를 방문,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을 만났다.
    그 후 한 기자가 ‘언젠가는 고르바초프가 독일에 통일을 제의하지 않겠는가’라고 묻자 콜은 비꼬는 투로 이렇게 답했다. 

    “나는 (영국인 소설가) 웰즈처럼 미래 소설을 쓰는 사람이 아니다.
    당신의 질문은 판타지의 영역에 속한다”

    콜 수상의 경직된 시각은 바뀌지 않았다.
    그는 1989년 8월15일에도 “나와 호네커 동독 공산당 서기장은 지금 유지하는 우호 정책을 계속하기로 하였다”고 기자들에게 발표했다.
     


  • ▪ 백면서생(白面書生)들도 거기서 거기다.
    동독을 탈출한 사람들이 유럽의 서독 대사관에 들어가 농성 중이던 1989년 여름 서독 지식인들은 ‘이젠 공식적으로 동서독 통일의 포기를 선언해야 될 때가 온 것이 아닌가’라는 주제로 토론을 벌였다.
    주간지 ‘슈피겔’은 카버 스토리로 “왜 정부가 서독(西獨) 대사관을 찾는 동독(東獨) 사람들을 받아주느냐”고 따졌다.

    독일 통일 과정을 보면, 북한이 영원할 것처럼 떠들며 ‘통일비용’과 ‘중국(中國)반대’를 과장하는 한국의 정치인, 언론의 반(反)통일적 작태에 실망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

    기득권에 빠지면 대부분 인간은 이대로 있고 싶은 법이다.
    욕심이 눈을 가려 하루를 살 뿐 미래(未來)를 보거나 천시(天時)를 듣지 못한다.
    그러나 역사는 흐른다. 오늘 하루를 지나면 통일은 하루 더 가까이 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