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서화 장편소설 '레드'-2
  • <58> 죽음의 냄새

    “이 냉혈 살인마.”
    과거에는 옷 밖으로 여성의 속옷이 보이면 주위의 시선이 송곳처럼 따가웠다. 하지만 요즘은 예쁘고 화려한 속옷을 밖으로 드러내는 게 패션트렌드로 정착됐다. 벌써부터 거리는 섹시함을 맘껏 드러낸 여성들의 노출의상들로 넘쳤다. 하지만 지원의 화원 분위기는 밖의 풍경과 사뭇 달랐다. 아니나 다를까. 갑자기 한쪽 구석에서 영하의 북극 냉기가 매우 세차게 일어나더니 폭풍처럼 맹렬한 기세로 화분 사이를 빠져나갔다. 냉기는 통로를 빠져나가자마자 금방 눈보라로 변했다. 그리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곧바로 작업실을 덮쳤다. 지원이었다. 지원이 움켜쥔 원예용 전정가위에는 힘이 잔뜩 실려 있었다.

    “피오기 동무, 이번에도 동무요?”
    “뭘 말이오, 조장 동무?”
    “지금 정말 몰라서 내게 묻는 것이오. 아니면 시치미를 떼는 것이오?”
    “아, 그 종간나 에미나이 말이로군. 지하차마당(지하주차장)에서 기다렸는데 스스로 알아서 죽을고(막다른 고비나 골목)에 처박혀 꼼짝을 않더군. 그래서 그냥 걸상끈(안전벨트)을 매단 채로 죽탕을 쳐버렸소(쳐서 몰골 없이 만들었소).”
    “내가 일전에도 한 번 말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동무의 그런 무모한 행동들이 다른 조원들에게 동기부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후에서 조원들을 자멸의 길로 이끄는 위험한 행동이라고. 또한 공작조직의 동지적 신뢰를 무너뜨리며 공작조를 흔들어 무력감만 안긴다고.”
    “자멸의 길로 이끈다. 내겐 조장 동무의 그 말이 더 끔찍하게 들리오.”
    “동무가 지금 내 말을 걸써(건성으로) 듣는 것이오?”
    “난 조장 동무의 말을 걸써 들은 적 없소. 내 발이 조장 동무의 말에 걸채면(걸리며 채이다) 또 모를까. 아니 그렇소?”
    “이제 나는 조장으로서 더 이상은 서열을 무시하고 게바라오르는(기어오르는) 걸 두고 볼 수가 없소.”
    “조장 동무, 이게 뭔 줄 아시오?”
    “!”
    “이 양손가위는 단순한 작업도구가 아니오. 뭐랄까, 내 외로움을 달래주는 아주 오랜 친구라고나 할까. 어느 땐 엔도르핀을 분비해 고통을 잊게도 하고 또 어느 땐 아드레날린을 분비시키는 분노의 발톱과 이빨이 되기도 하오. 이 녀석의 발톱과 이빨에는 맹독이 발라져 있소. 독은 혈류에 침투하면 곧바로 심장을 멈추고 살을 부패시키지. 주위가 온통 죽음의 냄새로 가득 찬다는 소리요.”
    “동무. 어리석은 생각은 위험을 만들고, 어리석은 행동은 죽음을 부른다고 내가 분명히 사전경고를 했을 텐데.”
    “계속되는 내 충고를 무시하고 지옥문을 먼저 연 사람은 조장 동무가 아니었소?”
    “!”
    “그리고 이건 내 임무 중 하나요.”
    “무슨 임무? 동무의 광기를 위해 조직과 조원들을 희생시키라고 당과 조국이 지시했단 말이오?”
    “이건 노출이 아니라 보호요. 물론 흔들리는 조장 동무까지도 포함해서.”
    “자기가 신인 줄로 착각하는 지독한 나르시시스트(Narcissist)로군.”
    “쩝! 이거 어째 고맙다는 인사치고는 너무 차갑고 거친 것 같소.”
    “상황을 차갑고 거칠게 만든 건 바로 동무요. 더구나 우리의 과업수행과 상관없는 남조선 여성을 무차별 타격한 건 임무가 아니라 적대행위요.”
    “적대행위라. 그건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른 것 아니겠소. 난 분명히 과업수행에 차질을 가져오는 방해물이라 판단했소. 따라서 내 행동은 전투원으로서 정당했소.”
    “이성을 완전히 상실하고 동물적인 잔인함만 남았군.”
    “그 잔인함이 바로 혁명투사가 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항목이오. 목적을 위해 절차를 무시한 결과물이거든.”
    “…….”
    “그래서 지금 조장 동무는 결단을 내린 것이오?”
    “심리적인 교화(敎化)가 불가능한 동무에게는 달리 방법이 없으니까.”
    “당연히 생존을 건 싸움이 되겠군.”
    “그렇소. 동무가 그토록 간절히 원하던 신체적인 교화요.”
    “동무들, 정말 왜 이러시오. 여기는 적후요. 벌써 잊었소?”
    “상원 동무, 정말 미안하오. 하지만 조직과 조원들 전체가 살려면 피오기 동무의 독성을 지금 당장 중화시켜야만 하오.”
    “피오기 동무, 내가 보기에도 동무의 독단적 행동은 남조선 공안 당국의 시선을 우리에게 집중시키는 매우 위험한 돌발행동이었소.”
    “글쎄요. 내 생각은 조금 달라요.”
    “!”
    “아니, 홍화 동무까지 왜 이러시오?”
    “사실이 그렇잖아요. 부조장 동무의 개인행동은 결국 조장 동무의 조직 장악력에 문제가 있음을 설명하니까 말이에요. 사실 최근 들어 조장 동무는 제가 보기에도 사냥의지를 상실한 맹수 같거든요. 아니, 더 솔직히 말하면 혁명투사보다는 가정부녀(가정주부)로 보여요. 그것도 애가 서넛쯤 딸린 아줌마로.”
    “!”
    “때문에 어느 면에선 그 에미나이의 제거가 조장 동무의 투쟁의지를 높이고 사상무장을 다시 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 홍화는 높은 횃대에 올라가 회를 치는 닭 같았다. 하지만 그 울음소리에 갑자기 하늘가에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예상치 못한 강한 빗줄기가 쏟아졌다. 사실 지원이 눈에 보이는 조직의 리더였다면, 피오기는 보이지 않는 조직의 리더였다. 그 사실을 지원도 암묵적으로 묵인했다. 솔직히 피오기와 홍화는 지원이 갖고 있지 못한 아주 강력한 무기를 갖고 있었다. 바로 북한이 주장하는 사회주의·공산주의 이념의 평등원칙과 모순되는 좋은 성분이었다. 그래서 지원은 좀처럼 의혹을 지울 수 없었다. 최악의 출신성분인 지원을 공작원으로 선발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똑똑한 두뇌와 신체조건까지 갖추어야 하는 공작조의 조장이란 책무까지 맡겼다. 분명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

    “갑자기 끔찍한 기분이 드는군. 동무의 그 발언을 내 지시에 대한 동무의 강력한 거부의사로 받아들여도 되겠소?”
    “그건 조장 동무 좋으실 대로 판단하세요.”
    “여기 떠돌이 무단 침입자가 또 한 사람 생겼군. 하지만 변화를 바라는 건 매우 위험한 행동이라는 걸 알려줄 필요는 있겠지.”
    “조장 동무의 지금 그 발언도 부러진 갈비뼈가 숨을 쉴 때마다 내장을 찌르는 것처럼 끔찍하군요.”
    “하긴 죽음의 냄새를 맡기 전까지 자신의 죽음을 실감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지. 그런데 홍화 동무 그거 알고 있소?”
    “뭘 말인가요?”
    “살아남은 자들의 공통점.”
    “글쎄요. 결국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것 아닌가요?”
    “아니오. 그것이 우연이든 필연이든 반드시 생존기회가 있었다는 것이오. 그런데 동무는 지금 그 소중한 기회를 스스로 날려버렸소.”
    “그럼 제가 조장 동무의 호의를 저버린 나쁜 사람이 되는 건가요?”
    “물론 그렇소.”
    “전 사실 그동안 호의를 베푼 사람이 오히려 저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저만의 착각이었나 보군요.”
    “물론이오.”
    “그럼 지금부터 제 속마음을 좀 더 보여드리죠. 아마도 만족감이 클 거예요.”
    “원한다면. 하지만 동무가 얻는 건 아무것도 없을 것이오.”

    순간 작업장이 히말라야 설산(雪山)의 얼음벽처럼 위험으로 뒤덮였다. 거기다 팽창하던 전운이 급기야 정면으로 부딪혀 허공에서 한차례 강렬한 섬광을 폭발시켰다. 홍화의 투지와 지원의 능력을 가늠하는 서로의 기싸움이었다. 지원은 원예용 전정가위를 작업대 위에 조용히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네임피크를 묶었던 포니테일을 벗겨내 머리를 옆으로 넘겨 아래로 묶었다. 차분하게 가드닝 앞치마까지 벗어 그 위에 살며시 덮었다.

    “!”
    홍화가 먼저 지원을 향해 도도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홍화의 발걸음엔 실내의 공기와 뒤섞인 위험을 감지하는 조심성이 가득했다. 엉덩이를 낮춘 채 앞발에 뒤발을 옮겨놓으며 지원에게 조용히 다가서는 홍화의 모습은 정말 치타 같았다. 그때 지원이 눈표범처럼 순백의 숲 속에서 눈을 살포시 떠 자신의 존재감을 인상적으로 드러냈다. 눈표범은 먼저 움직이지 않는 한 그 누구도 찾아낼 수 없는 신비의 동물이다.

    “은혁 동무, 우린 결과나 지켜봅시다.”
    “아, 예. 부조장 동무.”
    “쾅!”
    그때 잘못된 상황을 만든 피오기가 더 이상은 관심 없다는 듯 들고 있던 양손가위를 작업대에 거칠게 꽂고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문가에서 돌발상황에 안절부절 못하는 상원까지 불러냈다. 이제 작업실은 누구의 시선도 의식할 필요가 없는 완전한 폐쇄공간이 됐다. 자고로 폐쇄공간에 갇힌 동물들은 극단적인 공격성을 드러낸다. 순간 작업실엔 날카로운 맹수의 경고음이 한차례 울려 퍼졌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왕좌와 생존을 건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눈표범을 대신한 지원과 치타의 모습을 한 홍화. 작업장엔 금방 한 치 앞을 분간할 수 없는 죽음의 눈보라가 몰아쳤다. 먼저 거리와 속도를 정확히 계산한 홍화가 타이밍을 잡는 발차기도 없이 곧바로 공격을 개시했다.
    “이~얍!”
    “!”
    홍화의 발끝은 흡사 도검 같았다. 목을 베고 쇄골까지 내려쳐 흉곽과 심장을 그대로 관통할 것처럼 날카로웠다. 하지만 지원도 격렬한 싸움을 좋아하는 파이터처럼 몸의 탄력성을 최대한 이용해 홍화의 공격을 가볍게 피했다. 이제 지원도 날카로운 발톱을 서서히 드러냈다. 그리고는 부메랑처럼 팔을 구부려 작은 손동작으로 시야에 들어온 홍화의 급소를 전광석화처럼 공격했다. 홍화 역시 지원의 공격을 담장 위의 고양이처럼 가벼운 몸놀림으로 빠져나갔다. 살상을 목적으로 급소만을 골라 큰 타격을 입히는 북한의 격술맞서기였다. 지원과 홍화는 마치 영역싸움을 하는 맹수들처럼 거칠고 격렬하며 치명적이었다. 때론 속임수로 가득 찬 몸짓을 하고 때론 경험과 본능에 따라 상대의 공격에 발레리나처럼 유연하고 날렵하게 대처했다.
    “헉! 헉! 헉! 역시 쉬운 상대는 아니군.”
    “아쉽군. 조금 더 일찍 알았으면 좋았을 걸.”
    지원과 홍화는 속도와 균형, 그리고 움직임을 통해 상대에게 주먹공격, 발차기, 파고들기, 메치기 등 필살기를 연속적으로 시도했다. 특히 홍화는 극상의 살상기술만 골라 공격했다. 하지만 둘 다 정확한 상황인지와 판단, 그리고 빠른 움직임으로 공격과 방어를 동시에 수행했다. 더구나 공격에 취약한 신체의 각 부분을 너무도 잘 알아 결코 허점을 보이지 않았다. 때문에 서로의 꼬리를 무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다.
    “조장 동무, 이건 마지막 공격이오.”
    “과연 그럴까.”
    바로 그때 발에서 머리까지 하나의 근육체계가 만든 단일구조의 힘을 폭발시켜 홍화가 불속을 뛰어넘는 맹수처럼 순식간에 도약했다. 그리고는 긴 뒷다리의 추진력을 이용해 곧장 지원을 향해 멋진 비행으로 날아왔다. 홍화의 입가에는 근거 없는 승리감에 도취된 자만심이 자기도 모르게 번졌다. 하지만 불행히도 지원은 그 공격의 위험성을 이미 꿰뚫고 있었다. 순간 극상의 살상기술로 단련된 일격필살(一擊必殺)의 발끝이 홍화의 얼굴에 정조준됐다. 그리고는 곧바로 여전사의 파워풀한 액션과 통쾌한 반격이 이루어졌다. 한마디로 영화에서도 볼 수 없는 화려한 비주얼액션(Visual action)이었다. 지원은 위력(격파)시 발에 닿는 촉감으로 자신의 공격이 정확했음을 순식간에 감지했다. 이제 홍화는 마감재로 사용하는 바크(Bark) 포대 위에 떨어져 시간에 뒤틀린 나무처럼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윽! 컥! 으으으.”
    “홍화 동무는 처음부터 격투상대를 잘못 골랐소. 격술은 잔기술보다 공격력이 더 중요하오.”
    “발차기 한 번 성공했다고 잘난 척하지 말아요. 격투의 승패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으니까.”
    “패배를 인정할 수 없다는 말이로군. 하지만 난 이미 이겼고 굴욕감을 참아내는 건 동무의 몫이오.”
    “아니, 난 결코 패하지 않았어요. 격투에 있어서만큼은 지금까지 그 누구에게도 패한 적이 없소. 컥!”
    “하긴 우리는 패배와 포기를 배운 적이 없지.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니까. 그래도 내가 보기엔 동무의 말과 다른 것 같은데.”
    “잘못 봤어요. 설마 이 정도의 고통도 없이 내가 잔인함을 배웠다고는 생각하지 않겠죠?”
    “솔직히 동무의 격투기술도 매우 뛰어났소.”
    “마치 쥐를 놀리는 고양이의 표정이로군요?”
    “아니오.”
    “윽, 젠장!”
    “나는 증오심과 복수심으로 불타는데 동무는 그런 나를 한낱 자존심으로 상대했다는 게 문제요.”
    “거기 서!”
    “쾅!”
    “홍화 동무, 그건 안 되오. 어서 내려놓으시오.”
    “문 선생, 더 이상 가까이 오지 마세요. 조장 동무, 난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분명히 말했어요. 지금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예요.”
    “홍화 동무, 세상에서 가장 넘기 힘든 고개가 뭔 줄 아시오. 그건 히말라야라는 설산(雪山)이 아니라 바로 증오심과 복수심이오.”
    “홍화 동무, 더 이상 무모한 고집을 피우면 이후 동무가 감당해야 할 후과(결과)가 너무나 크오. 감당할 수 있겠소?”
    “제기랄!”
    “자, 어서 들고 있는 양손가위를 내려놓으시오. 홍화 동무처럼 성분이 좋은 동무가 무엇 때문에 스스로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려 하는 것이오. 또한 홍화 동무의 지금 행동은 숭고한 혁명전사의 의무를 불필요한 감정 때문에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소. 내 말이 틀리오?”
    “…….”
    “홍화 동무, 문 선생의 말을 따르시오.”
    “으으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