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서화 장편소설 '레드'-2
  • <60> 도플갱어(double goer)


    현우는 자신의 이름이 형사과장의 프로파일에서 자연스레 지워졌음을 확인했다. 그로부터 세 시간쯤 지났을 무렵. 현우는 회사에서 두 블록쯤 지나 뒷골목에 자리 잡은 허름한 삼겹살집에 있었다. 현우는 오랜 시간 고기연기로 변색된 유리창을 화이트보드 삼아 나름대로 분석한 범인의 유형과 특성에 대해 표본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30분이 눈 깜짝할 사이에 흘렀다. 목 언저리가 뻣뻣했다. 현우가 목의 근육을 풀려는 순간, 의식세계 한복판에서 정원이 걸어 나왔다.
    “치~이~이!”
    “너라도 먼저 마시고 있지. 하긴 혼자 마시는 술엔 기쁨이 없지.”
    “이제 막 불판에 고기를 올렸다.”
    “그나저나 얼굴표정이 왜 그래?”
    “뭐가?”
    “얼굴에 안개가 자욱하잖아. 왜, 직장 상사한테 잔소리라도 들은 거야? 난 그 잔소리가 일을 해야 하는 목표다.”
    “난 요즘 태양의 중력이 불안정하게 되어 원형궤도를 벗어나 우주에 버려진 느낌이다.”
    “원형궤도를 벗어났다, 누가 명퇴라도 당했어? 아니면 갑작스런 죽음?”
    “…….”
    “이럴 땐 술만큼 좋은 벗도 없지. 자, 술부터 한 잔 털어 넣자.”
    “그래.”
    “캬! 죽인다. 역시 술은 오랜 친구와 마시는 게 가장 맛있어.”
    “정원아, 삼겹살 다 타겠다. 얼른 먹자.”
    “우리는 흔히 외국인 하면 우아하고 분위기 좋은 곳만 찾을 거라고 생각하잖아. 그런데 그것도 우리의 편견이더라고.”
    “…….”
    “내가 만난 어떤 외국의 정부인사는 햄과 소시지를 불판에 구워 먹더라니까. 거기다 라면사리를 넣은 부대찌개를 먹고는 자기가 지금까지 먹어본 음식들 중 최고라고 하더라고.”
    “호텔음식은 맛이 너무 연해 우리 고유의 분위기와 강렬한 맛을 제대로 느낄 수가 없잖아. 그보다는 김치와 쌈이 보다 한국적인 맛인지도 모르지.”
    “맞아. 그래서 하는 말인데 난 이렇게 시장골목처럼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진짜 좋아. 뭐랄까. 사람 사는 맛을 느끼게 한다고나 할까.”
    “보기엔 소란스러워도 테이블마다 주고받는 속정으로 시간 가는 줄 모르잖아.”
    “맞아. 이렇게 서로의 생각이 같으니 내가 너를 좋아할 수밖에. 혹시 우리 둘은 도플갱어(Double goer)가 아닐까?”
    “아쉽지만 아닌 것 같다.”
    “이거 심장에 불이 확 붙는데. 아니, 왜?”
    “도플갱어는 자신과 똑같은 사람을 만나면 대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다잖아.”
    “그 이야기는 나도 들었다. 도플갱어는 육체와 영혼이 분리돼 죽음을 부를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 그런데 현우야, 너는 세상에 적이 없지?”
    “적은 없지만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나도 모르게 많은 불순물이 쌓였겠지. 그만큼 순수함을 잃었다는 의미도 되겠고.”
    “순수라, 동화 같은 이야기다. 하지만 난 위기가 일상이고 주위에 적도 많다. 그것도 모두 얼굴 없는 유령들 뿐이야.”
    “하지만 그 적들은 너 개인의 적이 아니라 국가와 국민을 위협하는 공공의 적이잖아.”
    “그것만으로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내 근원적인 혼란스러움을 없애기엔 미흡한 것 같은데. 왜냐하면 내가 하는 일엔 속임수가 있을지언정 평화는 없기 때문이야.”
    “너에겐 아주 커다란 약점이 있다.”
    “약점?”
    “그래, 어쩌면 네 육체에서 영혼을 빼내가는 도둑이기도 하지.”
    “그 도둑이 대체 뭘까? 몹시 궁금해지는데.”
    “바로 뇌와 심장에서 시도 때도 없이 과다 분비되는 보민(保民)과 보국(保國)이야. 너 개인의 명예와 출세가 아니라 국민과 팀원들을 끝까지 보호해야 한다는 보민과 너를 보낸 국가를 마지막까지 지켜내야 한다는 보국의 정신 말이다.”
    “음, 보민과 보국이라.”
    “그래서 넌 행동함에 있어 명예에 연연하지 않고(進不求名) 머리를 숙여도 비굴하지 않아 보인다(退不避罪).”
    “보민과 보국은 정의나 진실처럼 타협과 협상의 대상이 아닌 우리가 반드시 지켜야 할 궁극적이며 절대적인 가치잖아.”
    “맞아.”
    “그나저나 단순한 감정을 넘어 이제는 관계가 따끈해질 만큼 시간이 흐른 것 같은데.”
    “지수 씨?”
    “응. 아! 그래, 내 연애카운슬러가 그러더라고. 똑같은 순간 사랑의 감정을 느껴도 각자가 품은 사랑의 크기는 서로가 다르다고. 대체 두 사람 중 누가 마음의 끈을 잡아당기는 거냐?”
    “오늘 나를 만나자고 한 이유가 그거였어?”
    “헐! 귀신이다, 맞아.”
    “거기다 이미 지수 씨의 입을 통해 구체적인 사실까지 확인한 상태고, 아니야?”
    “역시! 그래 좋다, 솔직히 나도 예상했다. 너를 상대로 한 급습은 처음부터 불가능하다는 걸. 사물을 보는 네 눈이 좀 날카로워야 말이지. 아무튼 지수 씨에게는 내가 이미 못을 박았다. 그래야 양복은 못 얻어 입어도 예쁜 손으로 직접 만든 식사라도 대접받을 거 아니냐.”
    “짜식하곤. 꼭 듣고 싶어? 들으면 후회할지도 모르는데.”
    “뭐,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괜찮아. 난 단지 지수 씨가 우리의 보호·관리 대상자라서, 그리고 또.”
    “또 뭔데?”
    “겸사겸사란 소리다, 후후후.”
    “최정원이 이 정도로 속물이었나? 아니면 내가 모르는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건가?”
    “또 다른 이유는 없고 친구를 생각하는 바람이다. 후후후. 그런데 내 연기가 그렇게 어설펐냐?”
    “당근이지. 너답지 않게 오늘은 분위기를 만드는 서설(絮說)이 솜털처럼 가볍고 치밀하지 못했거든.”
    “그래?”
    “응, 거기다 네 눈에서 지금 레이저가 뿜어져 나오고 있거든! 그런데 어떻게 내가 모를 수 있냐. 안 그래?”
    “내 눈에서 레이저까지?”
    “그래, 후후후.”
    “아무튼 좋다! 그럼 이제 내 질문에 네가 답을 할 차례다.”
    “결론부터 말하면 만남부터 신비로움에 끌려가는 건 바로 나야. 그런데 사랑의 울타리 안에선 그것은 재앙이 아니라 축복이더라. 그래서 요즘 새로 태어난 기분이다.”
    “컥! 차라리 안 듣느니만 못하네. 지난번에는 물의 여신인 유화(柳花) 어쩌고저쩌고 하더니 오늘은 새로 태어난 기분.”
    “그래서 앞서 내가 후회할 거라고 미리 말했잖아. 하여간 꿈도 현실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그저 놀랍다. 그것도 아주 우연한 기회에, 안 그러냐?”
    “마치 죽음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베푸는 온정의 일격을 당한 기분이 든다. 하지만 나도 대충은 알 것도 같다.”
    “가만, 너 혹시 유진 씨라는 피앙세를 내게 은근슬쩍 자랑하고 싶어서 일부러 지수 씨에 대해 물어본 것 아니야?”
    “후후후. 맞아, 짜식. 그냥 한 번 눈감아 주지.”
    “아무튼 우리는 서로 끝까지 믿어주자. 설혹 진실이 없는 세상에 둘 중 하나만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말이다.”
    “당연하지.”
    사실 현우의 말과 현실은 괴리감이 있었다. 더구나 한 발만 잘못 내디디면 지수와 이어진 끈조차 사라질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했다. 현우는 자신의 불안감을 정화시켜줄 주술적인 불이 필요했다. 하지만 빌딩숲에 가려진 밤하늘엔 나쁜 기운을 없애줄 원형의 불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세상도 달빛이 스며들기엔 너무나 화려했다. 어깨동무를 하고 삼겹살집을 나온 현우와 정원은 손을 흔들며 각자 택시에 올랐다. 그때 정원이 갑자기 현우를 불러 세웠다.
    “현우야, 우리 재미있는 게임할까?”
    “게임! 무슨 게임?”
    “누가 먼저 사랑을 얻는지 말이야.”
    “결승선은?”
    “물론 상대 여자분의 결혼 승낙이지.”
    “후후후, 좋아! 아주 재미있겠는데.”
    “패자는 승자의 요구조건을 무조건 들어주는 거, 어때?”
    “나중에 마음 바꾸기 없기다.”
    “당연하지. 그럼 게임은 이제 시작된 거다.”
    “그래,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