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서화 장편소설 '레드'-2

  • <64> 프락치
     
    “안녕히 가십시오.”
    금천구의 어느 한우정육점식당. 한 무리의 사람들이 이제 막 계산을 마치고 식당을 빠져나왔다. 잠시 식당 앞에서 모였던 이들은 이내 가벼운 악수를 나눈 뒤 각자 뿔뿔이 흩어졌다. 그리고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똑바로 앞만 보고 걸었다. 하지만 뒤에 홀로 남겨진 사내는 그런 그들과 조금 달랐다. 사내는 길을 잃은 것인지 아니면 인생을 잃은 것인지 좀처럼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그러다 어깨에 멘 가방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그리곤 누군가에게 사진메일을 보냈다. 그러자 이내 답장이 왔다.
    [문 기자, 알고 싶은 게 뭐요?]
    “사진 속 인물과 관련된 정보입니다.”
    [내가 이 인물을 알고 있다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군.]
    “솔직히 그렇습니다.”
    [이유는?]
    “만약 모르는 인물이라면 처음부터 질문 자체가 달랐겠죠. 거기다 부사장님의 정보그물에는 유령도 걸려들지 않습니까.”
    [이거 기자양반은 당최 못 당하겠군. 문 기자와 내가 자리를 바꿔야겠소.]
    “누굽니까?”
    [통제불능인 내 부하 직원이오. 하지만 난 그 어떤 지시도 내린 적이 없소.]
    “그럼 독자적인 행동이라는 말이군요. 의외인데요.”
    [뭐가 말이오?]
    “그런 경직된 조직에서도 신념과 소신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 있다니 말입니다.”
    [어디나 튀는 사람은 있기 마련이지. 그게 영웅심리든 호기심이든.]
    “그런가요.”
    [아무튼 사진 속 인물은 먹이를 한 번 물면 절대 놓치지 않는 회색곰이오.]
    “최악이군요.”
    [최소한의 직업윤리겠지. 그런데 혹시 그동안 비밀자금을 추적하면서 흔적을 남겼소?]
    “나름대로 행동에 최대한 신중을 기했습니다.”
    [그건 내가 믿지.]
    “단지 국세청의 국건 팀장에게 중국 쪽에서 유입된 투기성 자본의 조사를 부탁한 적은 있습니다. 아무래도 자금추적은 저보다 그쪽 사람들이 전문가라서 말입니다.”
    [좋소.]
    “그럼 이제 저에게 드리운 그림자를 어떻게 처리하실 겁니까?”
    [그건 걱정하지 마시오. 그림자를 지우는 방법이야 간단하거든. 하늘에 구름만 적당히 만들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지.]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지금 좀 만났으면 합니다.”
    [지금은 곤란하오. 지금 어디를 가고 있는 중이라서 말이오.]
    “공연관람인가 보군요?”
    [하하하, 맞소! 하지만 두 시간 뒤에는 가능하니까, 그때 봅시다.]
    “좋습니다. 어디로 갈까요?”
    [가만 있자, 어디가 좋을까. 아! 그래. 그곳에서 가까운 곳에 지인이 최근 구입한 건물이 하나 있소. 물론 구입만 하고 아직 사용하지 않는 빈 건물이오.]
    “거기가 어딥니까?”
    [한국철도신호기술협회 부근의 5층짜리 벤처빌딩 408호요.]
    “알겠습니다. 그럼 거기에서 뵙겠습니다.]
    [혹시 모르니까 각별히 주의하시오. 워낙 후각이 발달한 들개들이 많아서.]
    “물론입니다.”

    그로부터 정확히 두 시간 뒤. 상원이 지하주차장을 빠져나와 약속장소로 향했다. 벤처빌딩은 새로 마감공사를 하기 위함인지 건물 전체가 기존의 마감재를 뜯어내 콘크리트 벽이 그대로 노출돼 있었다. 그리고 잠금장치가 풀린 출입문 바로 옆에는 석고보드와 석회 등 건축자재도 쌓여 있었다. 그야말로 약속장소는 어수선하다 못해 상원의 마음처럼 황량했다. 상원은 발걸음을 불편하게 막아서는 마감재를 피해 맞은편 창가로 갔다. 그리고는 무덤덤하게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창밖 세상은 빛과 색, 그리고 형태만으로 각자의 개성과 자존감을 표현했다. 그와 대조적으로 건물 속 상원은 그 모든 요소로부터 완전한 고립과 고독을 느꼈다.
    “딱! 딱! 딱!”
    그때 복도 저 끝에서 차가운 발소리가 서로 엇갈리며 두서없이 들리기 시작했다. 분명 발소리는 세 개였다. 잰걸음의 발소리가 멈추자 무표정한 중년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내에게서는 보는 이를 압도하는 존재감과 포스가 느껴졌다. 그리고 그런 존재감과 포스를 입체적으로 만들어주는 부하 직원들도 문 밖에 세워두었다.


    “사진 속 요원은 일단 접근금지를 시켰소. 혹시 오는 동안 또 다른 그림자가 따라붙지는 않았소?”
    “없었습니다.”
    “보는 눈이 많아 지금 당장 처리할 수는 없지만 시간이 좀 지나면 완벽하게 처리될 것이오.”
    “어떻게 말입니까?”
    “때론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정직이나 강등처벌이 흔적을 남기지 않아 깨끗하지. 흔적은 썩은 고기냄새를 풍기거든. 그래, 알아보라고 했던 것은?”
    “현재까지 비밀자금과 관련된 단서나 흔적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 만한 이유가 있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음, 비밀자금의 실체를 빨리 파악할수록 우리의 위험도도 줄어들 것이오. 그런데 갑자기 나를 보자고 한 이유는?”
    “그게 저, 다름이 아니고, 이제 그만 이쪽 일에서 손을 떼었으면 합니다.”
    “갑자기 그러는 이유가 궁금하군. 내가 아는 문 기자는 이런 일로 불안과 압박을 느낄 만큼 나약하지 않는데.”
    “…….”
    “혹시 남운영의 검거로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있소? 그렇다면 그건 걱정하지 마시오. 지금까지 그래왔듯 내가 바람 한 점 스며들지 못하도록 완벽한 보호막이 되어주겠소.”
    “솔직히 제 마음은 오래전부터 그만두라고 소리를 쳤습니다. 하지만 제가 못 들은 척 애써 무시했습니다. 그 사이 저는 나는 습성을 잃어버린 새가 됐고요.”
    “나는 습성을 잃었다? 신념과 믿음에 대한 회의(懷疑)인가? 아니면 새로운 운명을 만들려는 변절(變節)인가?”
    “마음 편한 것이 가장 좋다는 새로운 신념과 믿음입니다.”
    “솔직해서 좋군! 역시 내가 사람은 정확히 봤어. 나이를 먹으면 시력은 떨어지지만 오히려 사람 보는 눈이 더 정확해지더라고.”
    “사실 지금 상황이 너무 혼란스럽습니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말입니다.”
    “그래도 그동안 잘 해왔지 않소. 내가 다시 생각할 시간을 주지.”
    “무너지기 직전입니다. 이제 더 이상 할 수 없을 만큼 지쳤습니다.”
    “누구나 살다보면 한 번은 인생의 눈보라를 만나지.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말이야. 그럴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뭔 줄 아시오? 바로 방향감각을 잃지 않는 거요. 이제 거의 다 왔소. 이 터널을 빠져나가면 곧 빛의 세상이오. 여기서 포기한다는 건 너무 아깝지 않소. 문 기자와 가족 모두에게.”
    “그 빛의 세상이 언제부턴가 제겐 죽음의 사인처럼 섬뜩하다 못해 괴기스럽기까지 합니다. 전 아깝지 않습니다.”
    “두려움이 없는 눈빛이군. 그건 정말 지쳤다는 소리고. 그럼 문 기자에게 내가 아드레날린을 투여하지. 지금보다 파격적인 거래조건을 제시하겠소.”
    “애초부터 제게 돈과 명예는 관심 밖이었습니다.”
    “하긴 그랬지. 문 기자가 사는 이유가 따로 있었지. 가족을 잃은 슬픔이 분노와 증오로 변했고 분노와 증오는 다시 국가와 수사기관에 대한 철저한 복수를 원했지.”
    “정말 오랜 시간 그것이 제 삶의 전부였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닙니다. 복수를 한다고 뭐가 달라지겠습니까. 그리고 다시 저처럼 또 다른 증오와 복수를 만들 겁니다.”
    “문 기자, 감상에 젖지 말자고. 그럼 지역보안대의 수사담당자 찾기를 포기한 건가?”
    “예, 이미 마음을 비웠습니다. 이제부터는 모두 잊고 시골로 내려가 평범하게 살 겁니다.”
    “문 기자, 이번엔 내가 직접 사건을 철저히 조사하겠소. 그러니…….”
    “솔직히 못 믿겠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과거 때문에 제 인생을 허비하고 싶지 않습니다.”
    “보기보단 나약하고 이기적이군. 유감스러워. 하지만 그건 문 기자를 스카우트한 사람만이 갖는 선택권이야. 지금 내 기분이 어떤 줄 아나?”
    “…….”
    “자네의 대책 없는 변덕에 희롱당한 기분이야.”
    “할 수만 있다면 제 인생을 되돌리고 싶습니다. 어린 시절이 불가능하다면 최소한 부사장님을 만나기 전까지 만이라도.”
    “문 기자의 생각은 그랬군. 아무튼 문 기자는 지금 상황을 해결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문제를 만들었어.”
    “!”
    “그런데 어쩌지. 난 포기할 마음이 전혀 없고 여기서 멈출 수도 없는데. 왜냐? 난 이런 상황을 한 번도 계획한 적이 없거든.”
    “지금 생각해보면 저는 증오와 복수에 눈이 멀어 다른 사람이 파놓은 함정에 빠진 것도 몰랐습니다.”
    “그 말은 이제 죽음의 덫이 전부 보인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내 주위에 뿌려진 죽음의 덫과 그 덫으로 유인하기 위한 미끼가 모두 조작된 속임수라는 걸 알았습니다. 물론 그 함정을 판 사람은 바로 부사장님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맞아. 그런데 말이야 모든 인간관계는 속임수야. 일단은 상대를 공격할 수 있어도 없는 척 보여야 하고 힘을 쓸 때도 못 쓰는 척 보여야 하지.”
    “어리석었던 결정은 분명 제 인생 최대의 실수입니다.”
    “실수라, 이제 비겁한 인간이 계속 지껄이는 걸 들어주는 것도 지겹군.”
    “전 할 말 다 했으니까 이제 그만 가겠습니다. 다시는 연락하지 않겠습니다.”
    “기어코 혼자서 살길을 찾겠다! 문 기자, 지금 자네가 어떤 줄 아나. 내가 보기엔 꼭 인대가 파열된 경주마의 신세 같거든. 자네 혹시 그런 경주마가 어떻게 처리되는 줄도 아나?”
    “지금 저를 협박하시는 겁니까?”
    “미련 없이 안락사를 시키지. 하긴 솔직히 말하면 자네의 이용가치도 이제 다했어. 맹수가 한 종류의 먹이에만 적응하게 되면 결국 생존이 위협받거든. 그나마 내 뒷정리를 위한 소모품으로 남겨둘까 했는데 그림자가 생겼으니 그것마저도 틀렸군.”
    “저를 너무 쉽게 보시는 것 같군요.”
    “그럴 리가. 언론의 힘, 그거 아주 껄끄럽고 무섭지.”


    상원은 문 밖에 서 있던 또 다른 젊은 사내가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음을 까맣게 몰랐다. 젊은 사내는 낌새조차 느낄 수 없을 만큼 은밀하고 신중하게 움직였다. 상원이 젊은 사내가 몰고 온 불안감을 의식하는 순간 용암에 머리를 집어넣은 것처럼 뜨거운 열기가 덮쳤다. 동시에 뒷목 쪽에선 머릿속이 한참이나 끓인 스프처럼 걸쭉해지는 느낌마저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흐트러짐 없던 의식이 두개골의 깨진 틈으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헉!”
    “매번 느끼는 거지만 자신의 운명에 있어선 타이밍이 제로군. 좀 더 빠르던가 아니면 좀 더 늦었으면 좋았을 걸. 크크크.”
    두개골이 함몰돼 균형감각을 상실한 상원이 고목처럼 힘없이 쓰러졌다. 하지만 적개심은 바닥에 넘어지는 순간 고개를 돌려 살인자를 확인시켰다. 배신감에 휩싸인 상원의 눈에 들어온 건 마감재 사이에 있는 쇠지레였다. 쇠지레는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정말 끔찍한 소리를 냈다. 고통의 비명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벼락을 맞은 나무처럼 쩍 하고 갈라지는 느낌이었다. 상처는 머리에 났지만 온몸이 타들어갔다. 이제 혈관은 고통보다 죽음의 공포가 엄습하는 통로였다. 그런 상원의 목 부위를 사내가 발로 짓눌렀다. 상원은 계속 움직이려 애썼다. 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거기다 이제는 분노마저 상원을 버리고 의식의 저편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여기에 국민들이 모르는 희생이 또 하나 생겼군. 문 기자, 내 눈을 똑바로 봐.”
    “으으으.”
    “내가 지금부터 하는 말 잘 들어. 이건 절대 속임수가 아니라 진실이거든. 사실 모든 수사관들에게는 잊지 못할 사건이 하나씩 있기 마련이지. 알려진 것과 달리 당시 지역보안대가 안기부 수사관 명의로 수사서류를 조작한 게 아니었어. 처음부터 안기부의 주도하에 조작된 사건이었지.”
    “으으으.”
    “왜 안기부가 그런 잔인한 짓을 했냐고 지금 나에게 묻는 건가?”
    “…….”
    “당시 젊은 혈기는 그것이 곧 국가와 조직에 대한 충성이라고 확신했거든. 좀 더 솔직히 말하면 어리석게도 미래를 보장받고 싶었던 거지. 그리고 문 기자는 문동섭 간첩사건의 수사책임자를 찾았어. 물론 그의 손에 의해 자네도 아버지와 똑같은 운명을 걸었고. 크크크.”
    “으~으으.”
    “사냥을 할 때 뒤에 빠져 있던 늙은 맹수가 하는 일이 뭔지 아나? 잡은 먹이의 숨통을 끊는 일이야. 나이가 들면 에너지를 아꼈다가 반드시 필요할 때에만 쓰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지. 그건 경험을 통해 경솔하게 움직여서 얻을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라고 하더군. 그럼 잘 가게 문 기자. 오늘은 퇴근할 때 거실에 호접란이라도 하나 사다놓아야겠군.”
    “커~억!”
    “부사장님, 시체는 태울까요?”
    “아니야, 그럼 더 복잡해져. 그냥 단순 강도사건으로 위장해. 그럼 경찰이 최소한 뒤처리는 해주겠지.”
    “알겠습니다.”
    “그리고 여기 남아 있는 흔적도 깨끗이 지우고.”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