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서화 장편소설 '레드'-2
  • <65> 공포


    “손님, 정말 죄송합니다.”
    “분명 이 회사의 신상(신상품) 맞죠?”
    “예, S/S시즌에 저희가 출시한 신상품이 맞습니다.”
    “그런데 왜 아까는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하셨어요?”
    “아주 가끔 악덕업자들이 저희 회사 인기상품을 모방해 오픈마켓에서 부당이득을 챙기는 경우가 있거든요. 그래서 혹시 손님께서 그런 사기를 당하신 게 아닌지 생각했습니다.”
    “제가 분명히 을지로역 부근의 대형 백화점에서 구매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죄송합니다. 당시 저희로선……. 아무튼 저희가 파악한 바로는 협력업체 쪽의 생산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한 것으로 보입니다. 보다 정확히 알아보고 최대한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어떻게요?”
    “손님께서 원하신다면 이것과 똑같은 상품으로 교환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니요, 기분 나빠서 도저히 안 되겠어요. 전액 환불해주세요.”
    “손님, 환불은 구매하신 매장에서만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제품에 결정적 하자가 없는 한 회사규정상 전액 환불은 곤란합니다.”
    “곤란하다고요?”
    “예.”
    “그럼 왜 소비자만 일방적으로 물질적·정신적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거죠?”
    “손님의 입장은 저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더 이상 고객분의 감정을 상하게 하지 말고 원하시는 대로 해드려.”
    “앗! 이사님.”
    “손님, 제가 이 회사의 기획파트와 해외파트 총괄이사를 맡고 있는 추민성입니다.”
    “아~ 예, 그러시군요.”
    “먼저 책임자로서 정중히 사죄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제품을 생산할 때 보다 세심한 부분까지 신중을 기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연 대리, 뭐해. 어서 고객분께 환불해드리지 않고.”
    “아, 예. 알겠습니다, 이사님.”
    “그럼 일이 있어서 이만 실례를 하겠습니다. 살펴 가십시오.”

    나반이 큰 바다에서 폭풍우를 만난 것처럼 심하게 요동쳤다. 최근 들어 비상식적인 소비자들의 불만이 급증하였기 때문이다. 하루 평균 한두 건씩 구매자가 본사로 직접 찾아와 환불을 요구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나마 이번에는 추 이사의 중재로 큰 소동 없이 마무리됐다. 현우는 소비자상담실 직원에게서 반품된 제품을 건네받았다. 아무리 살펴봐도 원단과 디자인은 본사가 협력업체에 주문한 제품과 동일했다. 하지만 소비자의 주장대로 바느질이 다소 허접했다. 현우가 봐도 분명 완성도가 떨어졌다. 그렇다고 불량도 아니었다. 현우는 즉각 장안평중고차시장 근처에 위치한 재킷제작공장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곳 관리자로부터 재단에서 완성까지 제품생산 전반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들었다. 하지만 관리자의 설명과 공정은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다. 거기다 그곳에서 제작한 제품은 반품과 같은 결정적 하자가 전혀 없었다. 물론 그 외에도 두 제품의 원단, 디자인, 제작기법 모두 동일했다.

    “그것 참! 도대체 이유를 알 수 없는 일이네요.”
    “흠…….”

    현우는 고심 끝에 반품된 제품은 지정협력업체에서 만든 제품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가장 큰 이유는 협력업체의 선정기준이 제품의 완성도와 기술력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제품에 발생한 하자나 불량률은 다음번 선정기준에 포함되기 때문에 요즘은 얕은 수를 쓰는 업체도 거의 없었다. 현우는 다시 회사 쪽으로 차를 몰았다. 그런데 현우가 한참 달려 멈춰선 곳은 지원의 화원 앞이었다. 지원은 중년신사의 꽃을 골라주고 있었다. 그때 횡단보도 앞에서 인파에 파묻힌 택배오토바이가 경적을 울렸다. 주위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지원도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순간 지원이 현우의 눈에 들어왔다. 지원의 얼굴은 태양빛을 고스란히 반사해 거울처럼 빛났다. 얄궂게도 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다시 현우는 현실이라는 사막의 고요한 일몰 속으로 빠져들었다. 하지만 목표한 것을 이룬 승자의 만족감이 현우의 얼굴에 가득했다.


    “부조장 동무, 얼굴 표정이 왜 그렇게 어두우세요?”
    “홍화 동무, 그동안 누가 반동적 간첩행위를 했는지 실체가 드러났소.”
    “무선전파송신기를 몰래 설치한 그 쁘락지(프락치) 말인가요?”
    “그렇소.”
    “그 쁘락지가 누구죠?”
    “문상원이오.”
    “문 기자라고요! 확실한가요?”
    “나도 믿기지 않는 일이오.”
    “그 동무는 혁명사업에 누구보다도 충실하고 열성적이었잖아요.”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란 말도 있잖소.”
    “그럼 우리가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혔다는 말씀이세요?”
    “그렇소. 그 반동은 남조선 국정원의 끄나풀이었소.”
    “세상에, 문 기자가 쁘락지였다니.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아셨죠?”
    “아까 온 부사장이 배신자의 변심을 그 증거로 건네줬소.”
    “그게 뭐죠?”
    “배신자의 가방 속에서 나온 취재노트요.”
    “취재노트에 뭐가 있었는데요?”
    “직접 한 번 읽어보시오.”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이성이나 합리성, 그리고 인본주의가 북한에는 없다. 따라서 민주주의가 가장 절실한 곳도 남한이 아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다. 칼과 십자가가 식민지 정복의 도구였다면 북한이 행하는 폭정의 도구는 칼과 이념적 기만이다. 또한 북한에는 3대 계층 51개 분류로 구성된 출신성분이 있다. 이 출신성분에 따른 차별은 모순(矛盾)이며, 그거야말로 반민주·반혁명 종파들이 주민들을 억압하는 역차별이다. 물론 타도와 응징의 대상이다. 내가 그동안 깨달은 교훈은 칼 막스의 인간관에 근본적인 결함이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타락한 것처럼 보이는 자본주의의 이면도 사실은 인간 본성의 또 다른 측면이다. 그 본능을 억누르고 다스리는 법을 강제적인 폭력이 아니라 자율에 맡긴 것 역시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보다 더 인간적이고 민주적임을 반증한다. 아울러 현재 북한의 권력층은 모럴 해저드가 극심하다. 황장엽 선생의 말처럼 주민들의 인간성을 빼앗아 짐승과 가축, 노예로 만들었다. 이는 북한의 권력집단이 노예사상을 가진 집단으로 정상적인 사람들이 아니라는 증거다. 물론 그런 비양심적인 집단이 주민들에게 가져야 할 초보적인 도덕적 의무감을 가질 리 없다. 따라서 인간 본성을 무시하는 북한 권력집단은 희대의 사기꾼들이며 위선자들이다. 어리석게도 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유사종교에 빠졌다. 할 수만 있다면 브레이크를 밟아 지금이라도 유턴을 하고 싶다. 그것이 민족과 역사 앞에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 최소한의 양심이지 않을까?]

    “어떻소?”
    “문 기자가 변심을 했다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군요.”
    “그렇소.”
    “그러면 우리의 정체가 이미 국정원에 고스란히 노출된 것 아닌가요?”
    “다행히 그건 아닌 것 같소.”
    “그걸 어떻게 확신을 하죠?”
    “부사장의 말에 의하면 그가 보고내용을 사전에 인지하고 중간에서 차단시켰다고 했소.”
    “그렇더라도 변절자 문상원을 그냥 살려둔다는 건.”
    “당연하오. 하지만 그것 역시도 해결이 됐소.”
    “어떻게 말입니까?”
    “이미 변절자 문상원은 척살(刺殺)됐소.”
    “누가요?”
    “부사장이 직접.”
    “혹시 그 부사장이 호접란을 사 가신 분인가요?”
    “맞소. 그 사람이 바로 부사장이오.”
    자연계의 모든 생명체는 소리 이외에도 냄새, 몸짓 등 다양한 방법으로 의사표현을 한다. 그중에서도 색(色)이 대표적이다. 지금 특유의 붉은빛을 쏟아내고 있는 피오기와 홍화의 눈빛이 그랬다.



    “찍! 찍! 찍!”
    피오기와 홍화가 연장창고 같은 작업실에서 은밀한 대화를 나누는 사이, 지원은 사물을 통과하는 유령처럼 뒷마당으로 갔다. 그리고 빈 화분들 틈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사각형의 커다란 새장이었다. 새장 안에선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먹이를 먹다 갑자기 몸의 중심이 떠오르자 두려움을 느낀 게 분명했다. 지원은 새장을 들고 온실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도시락을 준비해 집 근처로 소풍을 가는 소녀 같았다. 사실 지원도 현우를 보았다. 하지만 애써 못 본 척했다. 그런 마음을 아는지 맑은 날엔 온실 주위를 활발히 날아다니던 나비들마저 흐린 날처럼 얌전했다. 지원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넝쿨벽에 가려진 지하 공간의 출입문을 열었다. 그리곤 주저 없이 어둠 속으로 숨어들었다.

    “지수야, 너 그거 아니?”
    “…….”
    “내 기억속의 너는 한 마리 나비처럼 화려하고 아름다웠다는 거.”
    “언니도 그랬어. 지금도 생각이 나. 언젠가 학교에서 수구를 들고 한쪽 다리를 들어올려 360도 수직 회전하는 백 일루션(Back Illusion)을 하다 허리를 다친 적이 있었어.”
    “맞아, 너는 리듬체조를 전공했지. 그래서 몸매뿐만 아니라 발목 선도 중요하다고 집에 돌아오면 늘 발목 늘리는 연습을 했던 거.”
    “언니는 늘 부상예방을 위해 규칙을 꼭 지키라고 주의를 주었어. 그러다 어느 날인가 무리한 연습으로 허리에 통증을 느꼈어. 그때 언니가 밤새 내 허리를 마사지해주었지. 하지만 지금의 언니는 그때의 언니가 아니야!”
    “지금은 어떤데?”
    “잔인하고 소름끼치는 악마일 뿐이야!”
    “맞아, 나는 비록 악마로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지금은 악마야. 생존을 위해서라면 눈 한 번 깜짝 안 하고 살아 있는 사람의 몸을 칼로 조각낼 수도 있어.”
    “내가 보기에 언니는 그동안 자기애(自己愛)가 지나치게 강한 사람으로 변한 것 같아.”
    “자기애?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반해서 물에 빠져 죽었다는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나르키소스(Narcissus)처럼 말이냐?”
    “그래, 그런 사람은 타인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고 자기합리화가 심해 분노나 섭섭함을 자기중심적 사고체계 속에서 극단적으로 드러낸다고 하더군.”
    “그러니까 내가 어린 아이처럼 유치하게 관심을 받고 싶어서 응석을 부리다 아무도 안 받아주니까 나 자신에게 집착하게 됐다?”
    “맞아, 언니는 무슨 이유 때문인지 자기 내면을 전혀 돌아보지 않는 것 같아. 그게 아니면 머릿속에 기억용 단어카드가 아예 없던가.”
    “내면을 돌아보라. 누구와 똑 같은 말을 하는군. 하지만 내 내면의 기억은 아바지와 나를 버린 너와 달리 공포와 배고픔뿐이다.”
    “미안해,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야. 언니를 보면 내 마음이 너무 아파서…….”
    “그런데 어쩌지. 너의 그 위로가 내겐 기만이며 악마의 속삭임처럼 들리니.”
    “절대 언니를 속이기 위해 거짓으로 꾸민 가식이 아니야. 정말이야.”
    “그래 믿을게. 하긴 어쩌면 네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자연에서의 부성은 생명을 키운다고 하잖아. 하지만 너와 나처럼 딸들은 오마니의 세심한 손길이 필요한 순간이 아주 많지. 그런데 난 그 순간이 정말 싫었다. 그때마다 공포와 배고픔, 그리고 내가 혼자라는 사실까지 곱씹어야 했으니까. 그런데 내가 정말 가슴 아픈 건 이제 누군가를 사랑하는 방법도 사랑받는 방법도 모두 잊어버렸다는 사실이다.”
    “…….”
    “그러고 보니 오늘 특별식을 가져오길 아주 잘한 것 같구나.”
    “특별식?”
    “그래, 바로 이 녀석이다. 어때 맛있어 보이지?”
    “헉! 그, 그건.”
    “놀라긴 쥐잖아. 이 정도 크기면 내일 아침까지는 배 속이 든든할 거다.”
    “설마 지금 나에게 그걸…….”
    “맞아, 오늘 저녁이야. 너 주려고 며칠간 특별히 살까지 찌웠어.”
    “으으으, 언~니! 이러지 마.”
    “남미의 어느 동물원에선 쥐가 60원, 뱀은 30만 원이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고 하더라. 하지만 내가 볼 때 그 가치는 상대적이다. 수용소에서 쥐는 인민들에게 최고 보양식이거든.”
    지하 공간이 한순간에 불안과 공포의 도가니로 돌변했다. 동시에 지수의 비명소리가 날카로운 발톱처럼 밀실의 차가운 격벽을 긁어댔다. 하지만 지원은 개의치 않았다. 지원이 쇠창살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몸을 일으키자 지수는 벌써부터 오싹한 전율을 느끼고 오들오들 떨었다. 그리곤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한 두려움을 예상하고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지원은 새장을 열고 좌우로 흔들어 불안감을 키웠다. 그러자 그동안 갇혔던 쥐가 한 줌의 햇살처럼 스며든 자유를 찾아 새장 밖으로 쏜살같이 내달렸다. 쥐는 허공을 날아 밀실 안으로 떨어졌다. 지수는 공포감에 더욱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하지만 지원은 변화 없이 반복되는 일상처럼 지루하고 따분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매일 강제노동에 시달렸어. 하지만 몸이 아파 하루과제의 30%를 못 채우면 한 끼 식사를 자르고, 70%를 못 채우면 두 끼를 잘랐어. 그야말로 생존과의 싸움이었지. 그래서 정치범들은 땅에 흘린 강냉이 알을 주워 먹어도 수치심보다는 자신의 행운에 더 감사하지. 어떤 하내비(할아버지)가 밥을 먹다 죽었는데, 다른 정치범들이 입속에 있는 밥알을 꺼내 먹으려고 서로 싸우기까지 하더라.”
    “…….”
    “거기서 내가 깨달은 게 있어. 생명이란 죽는 순간까지도 손에서 절대로 놓을 수 없는 그 무엇이라는 거. 그래서 풀이든 나무껍질이든 그 밑으로 기어 다니는 개구리까지 닥치는 대로 먹었어. 하지만 그래도 도저히 먹을 수 없는 게 있더라. 비늘투성이의 뱀과 꼬리가 긴 쥐였어. 그런데 어느 날 은혜와 밭뜰에서 김매기작업을 하고 있을 때였어. 은혜가 바로 옆 고랑으로 쏜살같이 뛰어가는 커다란 들쥐 한 마리를 발견했어. 나는 지금의 너처럼 무서워 몸을 오들오들 떨었어. 하지만 은혜는 들쥐를 보는 순간 입맛을 다셨어. 그러곤 들쥐가 뛰어간 방향으로 곧장 내달리기 시작했어.”
    “언니! 제발, 이 쥐 좀 치워줘.”
    “은혜는 도망갈 수 있는 길을 막으며 침착하게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들쥐를 유인했어. 결국 나도 들쥐를 한쪽으로 몰며 쫓기 시작했지. 그런데 은혜가 유인하는 곳엔 작은 분뇨수렁이 있었어. 마침내 들쥐는 분뇨수렁에 빠졌고, 우리는 환호성을 질렀어. 은혜는 아주 능숙한 솜씨로 들쥐를 땅바닥에 패대기쳐 죽였지. 물론 은혜의 눈빛은 살려면 어쩔 수 없다는 설명을 했어. 그리고 들쥐를 거꾸로 들더니 뜯어먹기 시작했어. 그 모습을 사회에서 보았다면 먹은 것을 다 토하고 말았을 거야. 하지만 은혜는 맛있다는 말을 연발했지.”
    “으으으.”
    “그런데 신기하게도 더럽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더라. 오히려 먹고 싶다는 욕구가 점점 치솟았어. 그때 은혜가 다리를 하나 떼어 먹으라고 권했어. 보기만 해도 피하던 쥐를 입에 넣었는데 그렇게도 고소할 수 없더라. 어쩌면 은혜보다 더 맛있게 먹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줄도 모르고…….”
    “그날 이후 눈에 띄는 들쥐는 닥치는 대로 먹었지. 네 앞의 그 쥐도 혐오의 대상이 아니라 기초식량이지.”
    “언니 제~발, 그만해. 그만!”
    “철저히 고립된 극한상황에서의 생존은 그만큼 아름답지 못하지. 거기선 빛이 없어 모든 것이 꽁꽁 얼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도 아예 없지. 심지어 작은 꿈이 만드는 좌절과 희망의 순환주기마저도 멈춰. 그저 고통스런 오늘에 순응하는 것만이 허락될 뿐이지. 최소한의 단어와 감정만을 학습하고 투쟁하며 철저히 노예로 살아가는 게 정치범의 생활이야. 모든 걸 잃어버린다는 건 바로 그런 것이지. 내 기억은 그런 아프고 슬픈 조각들로 채워져 있어. 아마 내가 그 기억들을 생생하게 떠올리면 너는 가장 더디고 가장 고통스런 죽음을 맞게 될 거야.”
    “흑, 흑, 흑.”
    지수는 누군가가 자신의 몸통을 열고 부드러운 내장을 뜯어먹는 느낌이었다. 지수는 세상의 종말을 목격한 유사종교인처럼 크게 울부짖었다. 비단 연민의 정 때문만은 결코 아니었다. 그것은 한 인간의 삶이 누군가에 의해 얼마나 잔혹하게 유린당할 수 있는지 똑똑히 보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원이 보기에 그건 아주 작은 가시에 불과했다. 지원의 지난 삶은 지수가 상상할 수 있는 범주의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불길한 어둠의 기운이 가득하고 시시각각 전율스런 공포가 엄습하면 심장의 실핏줄이 제멋대로 뒤틀렸다.
    “이제 나는 눈에 보이는 건 그 어떤 것도 믿지 않아. 너의 그 눈물까지도 말이야. 내가 믿는 건 오직 내 자신의 감정과 본능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