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서화 장편소설 '레드'-2
  • <73> 농간


    평소보다 30분 일찍 출근한 현우는 하루 일과를 소비자상담실에서 시작했다. 하지만 담당 직원이 출근하지 않은 상태였다. 현우는 한쪽 행거에 가지런히 걸린 반품들을 보며 복잡한 생각을 정리했다. 그런데 수십 번을 살펴보고 또 살펴봐도 결론과 확신은 더욱 강해졌다. 하지만 어떻게 모든 생산요소가 자사의 제품과 동일한지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현우는 재단부터 완성품 생산, 유통까지 일괄 점조직망을 구축하고 있는 짝퉁 명품제조업체의 솜씨라는 결론을 내렸다. 따라서 회사의 경제적 손실은 물론이고 이미지 실추가 불을 보듯 뻔했다. 분명 자사의 상표를 무단으로 도용한 상표법 위반사건이었다.
    “헉! 헉! 헉! 거봐요, 연제환 대리. 내가 뭐랬어요. 분명 우리 회사사람이라고 했죠?”
    “히~유! 다행이다. 헉! 헉! 헉!”
    “팀장님, 오늘 아침 연 대리와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아침부터 놀라게 해서 정말 미안합니다. 연 대리, 주인도 없는 집에 들어와 주인행세까지 하고. 하지만 아무것도 손대지 않았습니다.”
    “괜찮습니다. 여기엔 중요한 회사 기밀사항도 없습니다.”
    “연 대리가 이해하세요. 우리 팀장님의 열정은 아무도 못 말려요.”
    “히,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팀장님, 생산시스템상의 문제점은 발견하셨나요?”
    “현재까지는 저도……. 단지 반품이 진짜처럼 만든 짝퉁이라는 사실과 아주 조직적이고 전문적인 기술자의 손을 거쳤다는 사실만 확인했을 뿐입니다.”
    “그럼 짝퉁 전문가의 솜씨란 말씀입니까?”
    “아마도.”
    “세상에!”
    “우리 회사의 제품은 어깨선이 여성복처럼 부드럽게 떨어져 다른 회사에서 도용하기가 쉽지 않거든요. 그런데 반품된 제품들은 모두 우리 회사제품과 동일한 디자인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구나! 하여간 대단하십니다. 전 아무리 봐도 모르겠던데요. 히~.”
    “그럼 전 이만.”
    “아, 예. 올라가십시오, 팀장님.”
    현우와 석우는 곧장 현관로비에 비치된 커피자판기로 갔다. 그리곤 커피를 뽑아들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비상계단 쪽으로 걸어갔다. 비상계단은 비밀아지트인 챔버와 곧장 연결되어 있었다. 현우는 시각장애인처럼 현재의 위치·진행방향·주변 상황에 대한 정확하고 적절한 정보를 제공하는 벽 쪽의 계단손잡이를 잡고 올라갔다. 그리고 석우는 계단난간을 장난스럽게 손바닥으로 쓸며 올라갔다. 그런데 평소와 달리 계단의 디딤판에 올라서는 석우의 발걸음이 왠지 무거웠다. 현우가 계단 끝에 설치된 점자표시판 위에서 청동상처럼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곤 아무 말없이 창가로 조용히 걸어갔다.
    “제가 보기에 팀장님은 중세 항해사들이 상상했다던 바다 끝 같습니다.”
    “바다 끝? 불구덩이?”
    “솔직히 어느 땐 천재수학자처럼 굽은 공간을 마음대로 펴고 늘여서 진실을 증명해내는 팀장님의 능력이 두렵기까지 합니다.”
    “싱겁긴.”
    “사실 전 처음에 이번 조사를 아주 사소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밀레니엄 난제에 도전하는 기분입니다.”
    “홍 대리가 말머리를 무겁게 꺼내는 걸 보니 왠지 모르게 흥분이 밀려오는군. 혹시 백 전무님의 스캔들과 관련해 새로운 사실이라도 밝혀낸 거야?”
    “그건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었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되지 않는 건 충격적이게도 이미 사모님과 3년 전에 협의이혼을 했다는 겁니다.”
    “그럼?”
    “지난번에 말씀드렸던 김세령 씨와 관련된 내용입니다.”
    “김세령 씨와 관련된 새로운 내용?”
    “경악스럽게도 그녀의 진술내용이 모두 거짓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럼 진술의 신빙성이 전혀 없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가장 먼저 백 전무님이 회식자리에서 했다는 성상납 관련 내용은 미산 회원들과 산행에 대해 이야기를 하던 도중 자연스레 나왔답니다. 물론 김세령 씨 입장에서는 상사가 성상납을 요구하는 것으로 오해하거나 착각할 수도 있습니다.”
    “오해거나 착각?”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 당시 동석했던 미산 회원들은 단순한 유머로 받아들였다는 겁니다. 더욱이 그리 저급하고 노골적인 음담패설도 아니었답니다. 단지 경직된 분위기를 띄우려고 그날 스포츠신문에 실린 내용을 인용한 것뿐이랍니다.”
    “대체 이유가 뭘까, 흠…….”
    “오히려 평직원인 김세령 씨가 지점장과 점장들 회식자리에 우연을 가장해서 나타나 은근히 백 전무님에게 추파를 던졌답니다. 심지어 블랙컬러의 라이더 재킷에 파격적인 레이스 미니스커트 차림으로 백 전무님의 팔에 매달리기까지 했답니다.”
    “그렇다면 석정균 차장님이 제안했다는 성상납 요구도 당연히 거짓이겠군.”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그럼 석정균 차장님이 요구했다는 뇌물상납 건은?”
    “그것 역시도 신빙성이 제로입니다.”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는?”
    “석정균 차장님이 천안백화점에 들렀을 때 저녁식사 제의를 먼저 한 건 김세령 씨랍니다. 주위에 다른 직원들도 있었는데 술까지 사달라고 졸랐고요. 거기다 평소 회사의 인사발령에 불만이 많았답니다. 천안백화점 점장의 진술에 의하면 여러 번 고속승진 방법에 대해 묻기도 했답니다.”
    “예를 들면?”
    “소위 말하는 줄 같은 거 말입니다. 나중에는 승진만 시켜준다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다고 했답니다.”
    “무슨 짓?”
    “몸로비 말입니다. 점장이 보기에 평소 그녀의 행동도 말처럼 그리 조신하지 않았답니다. 일주일에 한 번은 똑같은 옷을 입고 출근했답니다. 외박을 한 사람처럼 말입니다. 술이 덜 깬 상태에서 출근한 적도 여러 번 있고요.”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결론은 악의적인 모함이란 소리군.”
    “맞습니다. 그런데 석정균 차장님의 주변을 조사하다 김세령 씨와 관련된 이상한 루머도 들었습니다.”
    “어떤 루머?”
    “뇌물과 성상납 모두 김세령 씨가 먼저 여러 번 제안을 했답니다. 결국 참다못한 석정균 차장님이 총무팀에 직접 제보를 했고요.”
    “그렇다면 지점장과 점장들의 진술이 모두 사실이라는 소리가 되잖아?”
    “맞습니다. 그런데 더욱 이해가 안 되는 건 김세령 씨가 석정균 차장님을 협박했다는 사실입니다.”
    “협박을 했다고?”
    “그런데 인사발령과 관련된 내용이 아니라 다른 문제 때문이었답니다.”
    “어떤 다른 문제?”
    “아마도 돈과 연관된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구체적인 내용은 당사자들의 입을 통하지 않고는 현실적으로 확인이 불가능했습니다.”
    “뇌물상납 때문에 강제퇴직을 당하는 사람이 돈문제로 고발인에게 협박을 했다. 이거야말로 난센스로군.”
    “그러게요.”
    “그렇다면 김세령 씨의 위치가 갑자기 을에서 갑으로 바뀐 이유가 뭔지 구체적인 사항에 대한 확인 좀 해봐.”
    “아참! 팀장님, 충격적인 사실이 하나 더 남았습니다.”
    “오늘은 충격의 바다에 빠지는 날이군.”
    “한때 매장직원들 사이에서 추 이사님과 김세령 씨의 스캔들이 유령처럼 떠돌았답니다.”
    “그렇다면 대전 지역 지점장이 진술했던 스위스여행도 사실이었나 보군. 구체적인 시기는?”
    “묘하게도 김세령 씨가 퇴사하기 2개월쯤 전부터였습니다.”
    “히~유! 평소 추 이사님을 따르던 직원들에겐 그야말로 재앙이군.”
    “그리고 이건 여담입니다만, 제 사촌 형님이 추 이사님의 대학 후배라 학교생활과 관련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추 이사님은 한때 운동권 동아리에서 활동했답니다. 그것도 주한미군철수·국가보안법철폐·연방제통일을 강령으로 정한 NL(National Liberation)계 주사파(주체사상파)에서 말입니다.”
    “언젠가 추 이사님이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지.”
    “어떤 말을 했는데요?”
    “자기보다 더 큰 고기를 낚으려면 그 덩치에 맞는 크기의 신선한 먹잇감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이야. 그러면서 한낱 정어리로 잡기엔 백상아리가 너무 큰 포식자라는 말을 했어. 또한 그 크기를 짐작조차 못했는데 내가 위험을 무릅쓰는 바람에 비로소 알게 됐다는 말까지 하더군.”
    “왠지 제가 듣기엔 예언처럼 섬뜩한데요. 그럼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백 전무님도 힘에 벅찬데 거기다 추 이사님까지…….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속담도 있잖아. 우선 나랑 머리도 식힐 겸해서 백화점이나 한 바퀴 돌자고.”
    “뜬금없이 백화점은 왜요?”
    “내부의 적 못지않게 짝퉁을 제작한 외부의 적도 시급히 찾아내야 하거든, 안 그래?”
    “지금쯤이면 출근했을 시간인데 동해도 부를까요?”
    “아침시간이라도 혼자 있게 내버려둬. 어제도 하루 종일 나머지 한 명의 공동명의자가 드리운 그림자에 매몰되어 있더라고.”
    “후후후,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