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서화 장편소설 '레드'-2
  • <75> 최면


    “부조장 동무, 어떻게 됐습니까?”
    “누군가 훼방을 놓았소. 아니, 우리가 철저히 농락당했소.”
    “대체 그게 무슨 말입니까?”
    “누군가 우리보다 한발 앞서 움직인 것 같소.”
    “그럼 우리 말고 또 다른 누군가가 비밀자금의 실체를 파악하고 이미 가져갔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소, 보시오. 이 종이글이 그 증거요.”
    “제기랄! 우리의 꿈이 한순간에 빛을 잃었군요.”
    “맞소. 전투행동계획에 없던 매우 곤란한 상황이 벌어졌소. 아무래도 우리의 위치가 노출된 것 같소. 그런데 그 상대가 바람을 타고 활공을 하는 AN-2기처럼 매우 은밀하고 위협적이오.”
    “내일의 계획이 쉽게 떠오르질 않는군요. 그저 상대를 알아차리는 순간이 너무 늦지 않기를 바랄 뿐이고요. 그런데 누가…….”
    “어쩌면 홍화 동무의 방에 무선전파송신기를 설치한 적과 동일인물일 수도 있소.”
    “동일인물이라, 음. 혹시 조장 동무가?”
    “조장 동무는 분명히 아니오. 그건 현실적으로 도저히 불가능하오.”
    “그럼 부사장인가요?”
    “흠! 부사장이라. 가능성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 하지만 섣불리 단정할 수는 없소.”
    “그건 왜죠?”
    “이 종이글을 남긴 상대가 국정원 요원이 아니란 확신이 섰기 때문이오. 아무튼 지금은 여기를 신속히 빠져나가는 게 우리의 최우선 과제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 반동들은 어떻게 처리할까요?”
    “흠, 저기 점장방이 좋겠군. 일단 저기로 몰아넣으시오. 처리는 내가 직접 하겠소.”
    “알겠습니다. 저 여직원도 함께?”
    “아니오. 저 여직원은, 더 좋은 방법이 있소. 탈출할 때 소모품으로 쓰는 게 좋겠소.”
    “알겠습니다. 자, 모두 일어나! 점장방으로 들어가!”
    “선생님, 제발 살려주세요. 아까 금고실을 열어드렸잖아요.”
    “좋소, 아가씨는 살려주지. 대신 내 부탁을 들어주어야 하오.”
    “무슨 부탁입니까?”
    “아주 간단하오. 혹시 운전할 줄 아시오?”
    “아, 예. 집이 인천이라 제 차로 출퇴근을 하고 있습니다.”
    “좋소, 차량번호는?”
    “XX모 2365 소형입니다.”
    “알겠소. 그럼, 우선 이 조끼부터 입으시오.”
    “이거 혹시?”
    “혹시, 뭐요?”
    “언젠가 이것과 비슷한 걸 영화에서 본 적이 있거든요.”
    “맞소, 바로 그거요. 하지만 내 지시대로만 움직이면 폭탄단추를 누르는 일은 절대 없을 테니 안심하시오.”
    “헉!”
    “은행에서 나가는 즉시 차를 몰고 경부고속도로로 들어가시오. 그런 다음 기름이 떨어질 때까지 계속 달려야하오. 알겠소?”
    “예, 알겠습니다.”
    “절대 멈춰선 아니 되오. 만일 멈추면 그 즉시 이 빨간 단추를 누를 것이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 줄 아시오?”
    “!”
    “펑! 소리와 함께 폭죽처럼 폭발하지. 물론 예쁜 아가씨의 몸은 갈기갈기 찢겨 차 안에 흩어질 테고.”
    “아, 알겠습니다.”
    “제법 머리가 잘 돌아가는 아가씨로군. 그럼 아가씨를 믿겠소.”
    “예.”
    “대충 마무리된 것 같으니까 먼저 여직원을 데리고 나가 있으시오.”
    “예, 알겠어요.”
    피오기의 얼굴은 모든 악의 전형(典型)처럼 변했다. 홍화와 여직원이 비상출입구를 통해 밖으로 빠져나가자 곧바로 점장실에서 참극이 연출됐다. 피오기는 먼저 화학탄을 점장방 한복판에 투척했다. 그리고 자동소총을 난사했다. 특별한 원한이나 동기도 없었다. 그저 흔적을 지우기 위한 폭력적이고 무감각한 습관적 학살이었다. 그 혼란 중에 남자직원 두어 명이 비 오듯 쏟아지는 총알 사이로 무작정 내달렸다. 하지만 피오기는 조소를 머금고 카운터로 뛰어올라 일일이 정조준해 사살했다. 한 스푼의 동정심이나 자비심도 없는 무용담으로 쓸어 담기엔 너무도 붉은 그림이었다.
    “쿵!”
    잠시 후 피오기가 주차장에 나타났다. 그리고 급조폭발물(IED)로 제작한 폭탄조끼를 입은 여직원에게 뚜벅뚜벅 다가갔다. 피오기는 악마의 눈길로 다시 한 번 주의사항을 상기시켰다. 피오기의 입에서 나는 악취 때문에 공포에 질린 여직원은 고개만 끄덕거릴 뿐이었다. 시선이 불안하게 흔들리던 여직원은 자신의 차에 올라 다급히 시동을 걸었다. 그리곤 죽음의 늪에서 탈출하듯 서둘러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삐! 철컥!”
    여직원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피오기와 홍화는 약속이나 한 듯 다른 차량으로 급히 뛰어갔다. 두 사람이 타고 온 차가 아닌 은행직원의 차량이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아니 누군가의 마법 같았다. 홍화의 차량이 골목길을 빠져나와 대로에 들어선 이후 한 번도 신호등이 있는 교차로에서 멈춘 적이 없었다. 놀랍게도 직진 방향의 신호등 전체가 온통 파란불뿐이었다. 심지어 막 바뀐 빨간불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래서 다른 차선의 차량들이 갑자기 바뀐 빨간불에 급브레이크를 밟으며 경적소리로 짜증스러움을 표출했다. 도로는 자연스런 흐름이 끊겨 사방에서 격한 감정이 흘러넘치는 아수라장(阿修羅場)으로 변했다.
    “그나저나 부조장 동무, 전투가 실패했으니 이제 어쩌죠? 분명 상부에서 무거운 후과가 따를 텐데요.”
    “당연하지. 그래서 생각 중이오.”
    “빵! 빵빵! 빠~아~앙!”
    “이거 서울 도심의 교통이 아주 난장판이 됐군.”
    “그러게요. 교차로뿐만 아니라 주변 도로도 상황이 심각한데요. 우리가 달리는 차선을 제외한 다른 모든 차선이 파란불로 바뀌어 차량들이 서로 가려고 뒤엉켰어요.”
    “흠,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효과가 크군. 이것만 잘 활용해도 해방전투 시 적을 독 안에 든 쥐처럼 가두고 휴전선에서 사정거리 120㎞ 이상인 주체 100포로 때리면 간단히 섬멸할 수 있겠소.”
    “그러게요. 은혁 동무가 교통관제센터의 컴퓨터를 해킹해 시스템의 알고리즘을 바꾸어놓는다고 했을 때 사실 이 정도까지는 예상하지는 못했거든요. 전 그저 신호등의 전원공급만 차단하는 줄 알았어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요.”
    “그런데 부조장 동무?”
    “뭐요?”
    “아까 조장 동무는 현실적으로 절대 불가능하다고 했는데, 그건 믿음인가요 아니면 그렇게 믿고 싶은 건가요?”
    “그건 단순한 믿음이 아니라 확신이오.”
    “확신이라, 음. 모든 상황이 예상을 빗겨가네요.”
    “홍화 동무, 그건 오해요.”
    “오해라. 그건 제 상상이 지나치다는 말인가요. 아니면 제가 모르는 진실이 따로 존재한다는 뜻인가요?”
    “둘 다요.”
    “!”
    “아무래도 내가 궁지에서 빠져나가려면 부연설명이 필요할 것 같소.”
    “대체 진실이 뭐죠?”
    “누가 그랬다더군. 복수의 묘미는 계획을 짜는 데 있다고.”
    “그가 누구죠?”
    “국가안전보위부 해외반탐국장으로 있는 어광선 동무요.”
    “부조장 동무가 어떻게 해외반탐국장을 알죠? 더구나 우리와는 공화국의 미래를 위해 조만간 적으로 만날 가능성이 높은데…….”
    “이젠 날 보위부의 쁘락지로 의심까지 하는 거요?”
    “아니요, 그런 뜻이 아니라…….”
    “정보수집을 위해 리명수 상장께서 직접 지시하신 사항이오. 그러니 의심을 푸시오. 물론 반탐국장인 어광선 동지와 직접 선이 닿은 게 아니라 그의 부하와 선이 닿았소.”
    “부하라면?”
    “어광선 동지의 심복인 대위 소재철이오. 소재철 대위는 내 이종사촌 형이기도 하오.”
    “아, 그런데 그 동무가 조장 동무를 어떻게 알죠?”
    “그 형이 중위 때 국가안전보위부 7국 소속으로 순환근무를 했었소.”
    “7국 소속이면 농장지도관리국.”
    “그렇소.”
    “그렇다면 정치범수용소를 직접 관리·운영하는 주체니까 15호 관리소에 있던 조장 동무도 관리대상이었겠군요.”
    “맞소.”
    “그런데 부조장 동무의 확신과 이종사촌 형과는 무슨 관련이 있다는 것이죠?”
    “관련사항 자체가 절대비밀에 속하는 것이오.”
    “물론 그렇겠죠.”
    “남파되기 직전 내가 조장 동무에게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형이 집으로 은밀히 불러 말해준 비밀이 있소.”
    “그게 뭐죠?”
    “결론적으로 말하면 현재 조장 동무는 ‘꼭두각시’오.”
    “꼭두각시라고요!”
    “그렇소.”
    “아니, 국가안전보위부에서 왜 자기식구인 조장 동무를 꼭두각시로 만들었다는 거죠. 혹시 가족의 반역과 배신으로 인한 잠재적 탈북의 위험성 때문인가요?”
    “아니오.”
    “그럼 대체 의도적으로 죽음의 덫을 만들어 조장 동무를 가둔 이유가 뭐죠?”
    “그건 잔인한 복수 때문이었소.”
    “잔인한 복수라고요?”
    “그렇소. 어광선 동무는 중국에서 외화벌이사업을 했소. 하지만 실제사업은 탈북 쁘락지를 통해 또 다른 탈북자들의 위치와 신상정보를 수집하는 비밀공작이었소. 그리고 역공작을 통해 수집된 정보를 국가안전국의 조선족 요원들에게 팔아넘겼소. 물론 그 과정에서 상당한 돈도 챙겼고.”
    “아주 영악한 사람이네요.”
    “맞소. 하지만 직장동료들은 그가 해외반탐 요원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소. 그런데 그는 평양연극영화대학 출신인 윤일현 동지의 아내인 성혜경 동무를 언제부턴가 짝사랑하게 됐소.”
    “갑자기 우리 아바지가 한 말이 생각나네요. 떼레비(텔레비전)에 나온 성혜경 동무를 보고 그러셨어요. 강물처럼 깊고 반짝이는 눈을 가져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는 미인이라고.”
    “그런데 그게 윤일현 동무에게 발각되고 말았소.”
    “그럼 왜 부화사건으로 처벌받지 않았죠?”
    “그건 윤일현 동무가 인민보안부(경찰)에 고발하지 않았기 때문이오. 어쩌면 자신의 실체가 드러나는 걸 우려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어광선 동무는 생각이 달랐소. 언젠가 자신에게 닥칠 위험요소로 판단하고 제거대상으로 정했거든.”
    “그래서 오그랑수를 써서 누명을 씌운 것인가요?”
    “그렇소.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었소.”
    “그럼요?”
    “15호 관리소에 수감된 윤일현 동무를 끝까지 괴롭혔소. 그리고 조장 동무가 정치범수용소에서 풀려나게 도와준다는 조건으로 죽음까지 강요했소.”
    “…….”
    “한마디로 윤일현 동무의 죽음은 자살이 아닌 타살이었소.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소.”
    “그럼 또 다른 복수가 있었다는 소린가요?”
    “어광선 동무는 편집증이 있소. 결국 성혜경을 끝까지 따라가 복수하기로 다짐했지. 그리고 어떻게 처단할지 생각했소. 방법은 두 가지였소. 무자비하게 총알을 박아 넣는 방법과 조장 동무를 미끼로 남조선 쁘락지로 활용하는 방법. 그런데 어광선 동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오?”
    “남이 생각지 못하는 충격적인 방법을 사용했군요.”
    “바로 맞췄소. 이 두 가지 방법을 한꺼번에 쓰기로 한 거요. 쉽게 설명하면 딸인 조장 동무를 이용해 성혜경을 제거하는 거지. 그 계략이 성공하기 위해선 가장 먼저 조장 동무의 의식과 기억을 철저하게 봉인해야만 했소.”
    “!”
    “그때 사용된 세뇌기술이 파블로프 세뇌반사 조건화라는 방식이오.”
    “혹시 개가 주인의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침을 분비한다는 조건반사 말인가요?”
    “처음 사용된 것은 1950년 남조선해방전쟁 때요. 때문에 지금은 기술이 많이 발전했소. 아무튼 목적은 오로지 성혜경과 동생에 대한 증오와 분노의 극대화였소. 아마 조장 동무는 지금도 모를 것이오. 자신의 혼란스런 심리상태를 이용해 어광선 동무가 자신의 기억을 모두 지우고 재구성했다는 사실을. 물론 조장 동무는 조작된 기억을 자기 기억으로 재인식해 어광선 동무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소. 그 거짓기억들 중 하나가 바로 성폭행이오. 실제로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소. 단지 최면기술로 분위기만 조성했을 뿐이오.”
    “그게 정말 가능한가요?”
    “물론이오. 최면을 활용하면 의식의 내면에 새로운 인격과 접근통로를 만들 수 있소. 그리고 최면에 빠진 사람은 꼭두각시가 되어 특정 암시어구나 시각적 자극, 전화음성에 반응해 무의식중에 명령을 수행할 수밖에 없소. 따라서 비밀공작 전·후에는 평범하게 행동하지만 비밀공작에 대한 기억은 전혀 남질 않소. 심지어 거짓말탐지기에도 걸리지 않소. 그런데 최면에는 단점이 있소. 최면이 늘 적용되는 것이 아니며 그 결과도 예측할 수 없다는 사실이오. 하여간 어광선 동무는 자신이 가지고 다니는 지포라이터를 이용해 조장 동무에게 최면을 걸었소.”
    “그럼 두뇌자석자극은 어떤가요?”
    “자기장으로 뇌의 여러 영역을 자극하게 되면 지각에 심대한 영향을 미쳐 온전하던 정신상태가 변화를 일으키게 되오. 물론 뇌를 조작해서 가짜기억도 이식할 수 있고. 하지만 과도한 전기가 흐르면 몸의 방어체계가 혼란을 일으켜 무력화되지. 때문에 심장마비로 죽을 수가 있소. 그런데 이 두 가지 세뇌기술의 단점들을 보완하고 결과에 대한 신뢰성을 보다 높이기 위해 어광선 동무는 마지막으로 세뇌약물까지 사용했소.”
    “봉인을 뜯지 못하도록 아예 입구를 막아버린 것이로군요.”
    “물론 세뇌약물에 장기간 노출되면 정도에 따라 환각과 망상, 악몽 등 정신분열병의 증상을 경험할 수 있소. 아마도 현재 조장 동무도…….”
    “그럼 부조장 동무는 그런 정황을 모두 알고도 쫓아다닌 건가요?”
    “처음엔 나도 몰랐소. 하지만 알고 나선 더 좋아하게 됐소.”
    “대체 이유가 뭐죠?”
    “이유라, 흠. 사실 난 어린 시절 그림그리기와 생각하기를 좋아하던 조용하고 평범한 소년이었소.”
    “부조장 동무가요? 솔직히 상상이 잘 안 되네요.”
    “그런데 같은 반 동무들이 나를 수시로 괴롭혔소. 남조선 말로 하면 왕따가 바로 나요. 하루가 멀다 하고 학교에서 당했소. 매일 얻어맞아 얼굴이 성한 날이 없었으니까. 그러다 어느 날 생각과 삶의 방식을 바꿨소. 맞다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 때리는 걸 배운 거지. 다음날 한 녀석을 완전히 곤죽으로 만들었소. 그때 비로소 깨달았소. 내 유전자에 무자비한 폭력성이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강인함이 모든 걸 앞선다는 사실까지도. 결국 난 나조차도 두려워하는 악마가 됐소.”
    “부조장 동무는 용기로 육체적 한계를 뛰어넘었군요. 몸에 난 상처와 흉터는 모두 그 증거고요.”
    “그렇소. 난 혹독하고 척박한 환경에 맞서 적극적으로 나 자신을 변화시켰소. 지금 벌이고 있는 전투도 내겐 살인이 아닌 소명이며 명예일 뿐이오.”
    “아주 인상적인 말이네요. 아직도 신음하는 북조선 인민들을 위해 자신을 버리는 것이야말로 진짜 용기죠.”
    “아무튼 조장 동무는 우리가 갖지 못한 걸 가졌소. 우리와 달리 정신에 몸을 맞췄거든. 그것이 나를 꼼짝 못하게 만드는 올가미요.”
    “이젠 알겠어요. 그러니까 부조장 동무는 조장 동무를 볼 때마다 어린 시절 순수했던 자신의 환영을 본 것이로군요. 맞죠?”
    “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