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서화 장편소설 '레드'-2
  • <78> 희생양

     
    “저, 거기가 남성의류전문회사인 나반 본사인가요?”
    “예, 맞습니다. 고객님. 저는 상담원 이다정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그럼, 혹시 감사팀의 나…….”
    “쾅!”
    “!”
    그때 피오기 일행이 화원에 들어섰다. 피오기는 모든 걸 잃은 남자의 걸음걸이였다. 하지만 홍화의 얼굴에선 전투결과를 읽을 수 없었다. 더구나 홍화는 고개까지 빳빳이 쳐들고 가슴을 내민 채 또박또박 걸어왔다. 지원을 업신여겨 깔보는 무시였다. 그런데 세 사람과 달리 순간 지원은 눈앞이 캄캄했다. 몸에서도 공포에 대응하기 위한 방어기재로 전신적인 반응이 일어났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어금니를 악물었다. 그런 지원에게서 이상함을 느낀 홍화가 갑자기 생기 없는 얼굴로 눈을 치켜뜨며 쳐다봤다. 홍화의 날카로운 눈빛은 계략을 써서 남을 그 꾀에 걸려들게 만드는 의식의 올가미였다. 그때 대화보다는 주먹을 선호하는 갱단처럼 피오기가 책상 앞에 있던 의자를 발로 거칠게 걷어찼다. 날아간 의자는 화분과 부딪혀 파열음을 냈다.
    “조장 동무, 혹시 어디에 전화를 하고 있던 중 아니었소.”
    “생리소비품이 필요해 마트에 확인 중이었소.”
    “매우 수나롭게(쉽게) 대답하는군.”
    “부조장 동무, 지금 내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오?”
    “솔직히 그렇소.”
    “내 말을 믿지 못하는 이유가 대체 뭐요?”
    “이유는 아주 간단하오. 평소와 달리 조장 동무의 목소리가 챙챙하지(야무지고 맑지) 않기 때문이오.”
    “동무는 언제쯤 나를 의심하는 부족점(단점)을 깨우쳐 바로잡을 것이오?”
    “부족점이라, 이거야 원. 그런데 조장 동무?”
    “또 뭐요?”
    “조장 동무의 이마에 맺힌 좁쌀땀(좁쌀같이 작게 방울진 땀)은 대체 뭐요?”
    “아까 못 쓰는 화분들을 혼자 뒷마당으로 옮겼더니 그렇소.”
    “내가 보기엔 아침과 별로 달라진 게 없는데, 홍화 동무는 어떻소?”
    “!”
    “제가 보기에도 그런데요.”
    “탁없는(터무니없는) 말이 아니오.”
    “알겠소. 그런데 이 종간나는 대체 뭐요?”
    “!”
    “지하감옥에 있어야 할 이 에미나이가 왜 여기에 숨어 있는 것이오?”
    “생리양이 많아 내가 쓰던 생리소비품을 건네주었을 뿐이오.”
    “뭐요! 가져다주면 될 것을 이리로 직접 불러왔다?”
    “동무, 동무의 눈엔 보이지 않소.”
    “뭐가 말이오?”
    “다리에 채운 족쇄 말이오. 동무는 저 족쇄를 차고 도주할 수 있소?”
    순간 지원은 지수의 목을 움켜잡은 피오기의 사나운 눈을 보았다. 전투실패로 피오기의 분노가 무서운 속도로 자라나 있었다. 지원도 위기의식을 느꼈다. 때문에 신경전에서 물러설 수 없었다. 그때 생김새만큼 치명적인 홍화가 지원의 주위를 어슬렁거렸다. 그리곤 책상 위에 있던 지원의 흰색 토트백을 사납게 움켜잡았다. 그건 지원의 자존심에 상처를 남기려는 사악한 의도였다. 홍화는 버릇없는 고양이처럼 가방을 뒤엎어 그 속에 담긴 내용물을 고스란히 엎질렀다. 누가 보아도 홍화의 입가엔 비웃음이 선명했다. 그런데 홍화가 내용물들 사이에서 무언가를 집어 들었다. 겉봉투의 회사로고가 특별했다. 순간 홍화는 인상을 찡그렸다. 반면 지수는 죽음의 그림자를 보았는지 고개를 힘없이 떨어뜨렸다. 그리곤 체념하듯 조용히 눈을 감았다.
    “조장 동무, 그런데 이건 뭐죠?”
    “그건…….”
    “로마행 비행기 항공권 아닌가요?”
    “맞소.”
    “항공권!”
    “우리의 정체가 탄로 났을 때 깨물어야 할 독약캡슐이나 독침은 안 나오고 가방에서 엉뚱하게 편도 항공권이 두 장이나 나왔다?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키는군, 이 반동!”
    “윽!”
    “조장 동무, 그대로 가만히 있으시오. 만약 손가락 하나라도 움직이면 이 에미나이 머리통에 총알구멍을 내겠소.”
    “적후에서 해방전투 임무수행 중 위기가 닥치면 퇴로 확보도 중요하오. 그래서…….”
    “혁명투사가 영웅적인 총폭탄이 될 각오가 아니라 혼자 살려고 도망갈 궁리부터 했다? 자신의 말과 달리 혁명의식이 자유화의 바람에 아주 심하게 오염된 게 확실하군.”
    “아니, 조장인 내가 조원들의 안전을 생각한 게 범죄란 말이오?”
    “뭐라고? 모래 위의 발자국처럼 혼자만 흔적도 없이 사라지려 해놓고 감히 조원들을 팔아.”
    “퍽!”
    “으으으.”
    “그건 홍화 동무의 말이 전적으로 맞소. 정말 뻔뻔스럽기 짝이 없는 아주 지독하고 무지막지한 거짓말이오. 동무의 죄는 단순범죄가 아니오.”
    “그럼 뭐요?”
    “당과 인민을 배신한 반역자지. 또한 사회주의를 폄하한 교조주의자고.”
    “설명을 해보시오. 내가 왜 반역자이며 교조주의자인지.”
    “좋소! 왜 항공권이 두 장뿐이오. 그 이야기는 우리가 없는 사이 동무가 이 에미나이와 함께 해외로 탈출을 모의했던 것으로밖엔 달리 생각할 수가 없소. 아니 그렇소?”
    “…….”
    “거기다 왕복 항공권이 아닌 편도 항공권이오. 그건 돌아오지 않겠다는 의미가 아니고 대체 뭐요. 어서 대답해보시오!”
    “…….”
    “동무, 대답을 거부하는 것이오. 아니면 내 말을 인정하는 것이오?”
    “으으으.”
  • “어쨌든 좋소. 난 내 말을 인정하는 뜻으로 받아들이겠소. 더구나 내가 아는 동무는 적개심과 복수심으로 불타올라야 하오. 그런데 동무는 지금 그렇지 않소. 가만! 둘이 복제품처럼 닮아도 너무 닮았지. 게다가 둘 다 얼굴에 표시로 삼을 만한 그 흔한 점도 하나 없고. 혹시…….”
    “흐흐흐. 동무, 지금 혼자서 너무 미심쩍고 매우 위험한 상상을 하고 있다는 걸 아시오? 보시오. 저 에미나이의 손가락을. 동무들이 저렇게 만든 것 아니었소?”
    “!”
    “하지만 난 이렇게 멀쩡하오. 그럼 이제 됐소?”
    “흠, 그렇군.”
    “동무들, 난 죽음의 올가미인 부르주아적 자유화의 바람에 오염될 만큼 나약하지도 그렇다고 어리석지도 않소.”
    “이렇게 되면 오히려 내가 죽을고(막다른 고비나 골목)에 내몰리게 되는 건가. 맞소?”
    “동무, 공화국에 돌아가 맞닥뜨릴 후과가 정말 두렵지 않소?”
    “그놈의 후과, 후과! 공작조의 서열파괴가 공화국의 반당, 반혁명적 반역자보다 그 죄가 무겁지는 않소. 아니 그렇소?”
    “…….”
    “좋소! 그럼 내가 한 가지만 묻겠소. 15호 관리소에서 동무에게 혁명적 투사의 길을 터준 사람이 누구요?”
    “그건…….”
    “왜 대답을 못하시오. 기억나는 게 아주 많을 텐데. 15호 관리소의 분주소 지하감옥에서 말이오.”
    “어, 광, 선, 동지요.”
    “크크크, 좋소. 하지만 안타깝게도 기회는 이미 날아갔소. 내가 이 에미나이에게 총알구멍을 낸다고 했을 때 동무는 더 되싸게(심하게) 나왔어야 했소. 그런데 그렇지 않았소. 그건 동무가 조원들 몰래 항공권을 구입한 의도가 불순했음을 증명하는 것이오. 따라서 설혹 어광선 동지가 이 자리에 있다 하더라도 동무의 반당적·반혁명적 배신행위는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을 것이오. 지금 이 순간부터 동무의 공작조 명령권도 인정할 수 없소.”
    “부조장 동무, 애초 이 반동은 제 스스로 진실을 증명하지도 못하는 꼭두각시잖아요. 혁명과업을 수행하기엔 출신성분이 너무 열악했던 것 아닌가요?”
    “동무, 경고하겠소. 나에 대해서 아는 척하지 마시오.”
    “홍화 동무, 아무래도 그런 것 같소. 아니면 세뇌의 효용성이 그다지 없던가.”
    “동무, 지금 뭐라고 했소. 세뇌라고 했소?”
    “그렇소. 동무가 방금 힘들게 기억해 낸 성폭행사건도 사실 세뇌기술의 총아로 만들어진 것이오. 한마디로 가짜 기억이라고나 할까. 크크크.”
    “아니, 뭐라고! 그럼 그동안의 생각과 행동이 모두…….”
    “그렇소. 공화국이 개발한 세뇌기술로 혁명전투에 적합하도록 동무의 생각과 행동을 모두 재구성한 것이오. 그래서 가끔 설명하기 어려운 형태와 이상한 소리 또는 반짝이는 불빛이 보일 것이오. 그게 바로 그 후유증이오.”
    “애초 네 운명은 정해져 있었어. 넌 결코 네 시간을 가질 수 없도록 설계됐거든. 자신의 임무에만 충실했으면 아무 일 없었잖아. 부조장 동무, 이제 그만 이 반동을 어울리지 않는 공작조의 조장에서 끌어내리죠?”
    “흠, 조원들의 뜻이 정이나 그렇다면 할 수 없지. 자, 동무들! 지금부터 우리 공작조는 부조장인 내가 맡을 것이오. 어떻소, 혹시 이의가 있는 동무가 있으시오?”
    “없습니다.”
    “좋소, 은혁 동무가 내 뜻에 동조하니 훨씬 마음이 가볍소. 가장 먼저 전투행동계획을 변경하겠소.”
    “어떻게 말인가요?”
    “윤지원 동무, 지금 당과 인민의 명령으로 동무의 운명을 결정하겠소. 동무의 운명은 최종 목적지가 여기가 될 것이오.”
    “!”
    “은혁 동무, 이 두 반역자를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지금 당장 지하감옥의 서로 다른 방에 가두시오. 그리고 철저히 감시하시오.”
    “알겠습니다.”
    “만약 이 반동들이 허튼짓을 하면 즉결사살해도 좋소.”
    피오기는 상당히 오만한 느낌을 주었다. 그 오만함이 의미하는 건 너무도 자명했다. 공포로 가득한 새로운 밤이 이제 막 시작되려는 것이다. 지옥의 문은 그렇게 열렸고 지원과 지수는 고통과 비명으로 얼룩진 지옥문으로 끌려들어갔다. 네 사람이 뒷마당으로 나가 온실 쪽으로 사라지자 피오기가 화원의 책상 끝에 엉덩이를 걸터앉았다. 그리곤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마침내 생각이 정리됐는지 피오기가 수화기를 집어 들고 재다이얼을 눌렀다. 이어 전화연결음이 들리는가 싶더니 활기찬 상담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랑합니다, 고객님. 남성의류전문회사인 나반입니다. 저는 상담원 이다정입니다. 무얼 도와드릴까요. 고객님?”
    “뭐라고!”
    “예?”
    “거기가 혹시 나현우란 사람이 근무하는 회사 맞소?”
    “아, 예. 맞습니다. 그럼 감사팀으로 전화를 연결해 드리겠습니다.”
    “일 없소!”
    피오기가 한차례 으르렁거림으로 화원이 자신의 영역임을 처음으로 알렸다. 그리고 잡은 먹잇감에서 소화가 되지 않는 털부터 조심스럽게 뽑아내는 상상을 했다. 물론 피오기는 자신의 영역을 침범한 대가를 죽음으로 되갚아줄 생각이다. 그 첫 번째 대상은 바로 현우였다. 피오기는 자신의 얼굴에 난 선명한 전투의 흔적을 정성스럽게 매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바로 작업실로 걸어 들어갔다. 작업실에 들어온 피오기는 소파에 누워서 느긋하게 상황변화를 즐겼다. 그때 피오기의 주의력이 흐트러진 틈을 타 누군가 겁도 없이 그의 영역에 들어왔다. 홍화였다. 홍화는 은행경비원이 갖고 있던 전기충격기를 맞은편 소파 위에 집어던지며 싱겁다는 듯 피식 웃었다.
    “부조장 동무, 이제 저 반동들을 어떻게 처리할 생각이죠?”
    “글쎄, 어떻게 하면 홍화 동무의 마음에 들겠소?”
    “내 맘대로 할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 지옥맛을 보여주고 싶어요. 겨우 저런 전기충격기로는…….”
    “아니요, 아주 유용하게 쓰일 것이오.”
    “혹시 북조선으로 복귀할 때를 대비해 인질로 삼는 건가요?”
    “그보다는 우리의 목숨을 살리는 희생양으로 삼을 것이오.”
    “희생양요?”
    “그렇소. 저 반동의 희생이 우리를 사지에서 구해주고 동시에 영웅적인 투사로 만들어줄 것이오.”
    “아! 알겠어요. 훌륭한 생각이에요. 그러니까 오늘 공격전투가 실패한 책임을 저 반동에게 돌리자는 말이죠. 그렇죠?”
    “그렇소! 셋보다는 하나의 목숨이 희생되는 게 더 합리적이고 경제적이지.”
    “! 그렇고말고요. 반동의 배신과 음모로 적후에서 함정에 빠졌지만 영웅적인 혁명의식은 우리를 조국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배려했다 뭐, 이 정도의 시나리오면 영웅적인 투사가 되기에 충분하지 않나요?”
    “어차피 하나는 소모품이고 나머지 하나는 전리품이오. 저 반동은 여기서 바람처럼 사라져도 아무도 모를 것이오.”
    “정말 기발한 생각이에요. 하지만 솔직히 조금은 두렵기도 해요.”
    “뭐가 말이오?”
    “나도 상황에 따라 저렇게 제거되는 건 아닌지…….”
    “그런 일은 절대 없소. 홍화 동무가 총폭탄이 될 땐 나도 총폭탄이 될 것이오.”
    “믿어도 되죠?”
    “물론이오.”
    지원은 밤새도록 의자에 묶여 갖은 욕설과 함께 모진 고문을 당하고 새벽이 되어서야 지하감옥에 갇혔다. 그런데 모진 고문으로 다리를 쓰지 못하는 상태임에도 죽을힘을 다해 기어서 벽으로 갔다. 그리고 떨리는 손끝으로 어둠 속에서 글자를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썼다. 지원은 자기가 쓴 글자를 쓰다듬으며 비오는 날 처마 아래의 어미 고양이처럼 상처 입은 지수의 영혼을 달랬다.
    “이젠 내가 언니야. 언니는 두렵지 않아. 동생은 언니가 지켜주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