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서화 장편소설 '레드'-2
  • <81> 보험


    “으으으, 당신이 원하는 게 뭐야. 돈이야?”
    “돈은 너처럼 남조선 반동들에게나 필요하지. 내 허기를 채워주는 건 바로 영예다.”
    “그건 납치범들이 입에 담을 만한 말이 아닌 것 같은데 그나저나 지수 씨는 어디 있지?”
    “걱정하지 마. 우리가 안전한 곳에서 잘 보호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 보호가 언제까지 계속된다고는 장담을 못해. 세상일은 아무도 모르거든.”
    “그 말은 예언의 완성일지는 몰라도 내 물음에 대한 답은 아니야.”
    “넌 아무것도 몰라. 내가 누군지.”
    “당신이 누구든 그걸 꼭 알아야 하나?”
    “뭬야! 그것도 그렇게 틀린 말은 아니군. 하지만…….”
    “컥! 윽! 으으으.”
    “기분은 아주 더럽군. 알겠어?”
    “내 물음에 거친 반응을 보이는 걸 보니 주제도 모르고 지수 씨를 짝사랑했나 보군.”
    “아니, 이, 반동 새끼가!”
    “컥! 윽! 제기랄, 숨 쉴 때마다 통증이 밀려오는 걸 보니 늑골이 하나 부러진 것 같군.”
    “그래도 맷집 하나는 제법 쓸 만해. 아무튼 난 널 죽이고 싶어서 이리로 끌어낸 거야. 넌 내 인질이라고. 인, 질.”
    “언어적 유희에 대한 감각이 부족하군.”
    “뭐?”
    “안 그래? 인질은 왠지 섬뜩하잖아. 같은 말이면 듣는 사람을 생각해 보험이라고 해줘.”
    “크크크, 그래 맞다. 보험! 이젠 내가 어떤 사람인지 똑똑히 보이겠지?”
    “그래, 무장괴한으로.”
    “뭐, 무장괴한! 난 무장괴한이 아니라 영웅적인 혁명전사다.”
    “혁명전사! 그럼 무장간첩이란 소리군.”
    “뭐! 아니, 이 반동 새끼가.”
    “부조장 동무, 참으세요. 무엇 때문에 이런 반동에게 힘을 뺍니까. 아무래도 이 반동이 몇 대 얻어맞더니 정신이 약간 어떻게 된 것 같아요.”
    “둘 다 요리가 다 된 것처럼 흥분해 있군. 하지만 내가 보기에 조금 더 기다려야 맛있는 요리가 돼. 지금 열면 속이 아마 안 익었을 걸.”
    “반동 새끼, 내가 한 가지만 말해주지.”
    “재미없으면 하지 마.”
    “컥! 윽!”
    “들어! 내가 엄중히 경고하겠어. 더 이상 개나발 불지 마. 단 일 초라도 숨이 더 붙어 있고 싶으면, 알겠어?”
    “이거 창가에 드러누워 꼬리로 햇살이나 털어내던 고양이의 발톱이 더 매섭군.”
    “뭐! 고양이? 이 반동 새끼가 정말, 이 대검 보이지? 지금 네 가슴에 이 대검을 끝까지 밀어넣어줄까?”
    “!”
    “확인하고 싶지 않아? 대검이 등 뒤로 나오나 안 나오나.”
    “간신히 죽음을 모면하면 평생 간직할 수 있는 상처와 경험 하나는 얻겠군.”
    “헐!”
    “이봐, 교조주의자! 난 세상을 바꾸려고 해. 그래서 지난 20년간 공을 들였지. 그런데 어떤 반동 새끼가 그 20년의 세월을 한순간에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렸어. 난 그 반동 새끼를 찾아내 갈기갈기 찢어 죽여도 분이 풀리지 않아.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시간이 없어. 그래서 그 반동 대신에 네가 희생양이 돼야겠어. 그래야 나도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조국에 돌아갈 수 있거든. 어때 내 계획이 맘에 들어?”
    “전~혀, 당신은 몽상가일 뿐이야. 더구나 어린아이들이 읽는 동화처럼 결말도 뻔하고.”
    “결말이 빤하다?”
    “그래, 그러니까 당신 주위에 저런 발정 난 고양이만 꼬이는 거야.”
    “뭐! 발정난 고양이?”
    “컥! 윽!”
    “제기랄! 동물들은 짝짓기를 못하면 불쾌지수가 시한폭탄처럼 된다고 하더니, 그 말이 사실인가 보군.”
    “으으으, 이 반동 새끼가 정말.”
    “좋아, 아주 좋아. 대책 없는 낙관과 근거 없는 긍정이라. 생존이 곧 생활인 우리도 배워야 할 부분이군. 솔직히 난 반동이 몇 대 얻어맞으면 살모사에게 물린 쥐처럼 방향 감각을 상실하고 제자리만 맴돌 줄 알았거든. 그런데 정신력이 정말 대단해. 거기다 내 숨겨진 공격본능을 자극하는 탁월한 말솜씨까지. 따라서 보험으로서의 효용가치도 그만큼 높고.”
    “단지 그뿐인가?”
    “아니지, 또 있어. 언제부턴가 내 공격본능이 반동을 공격대상인 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했거든. 상당한 수준의 고문훈련도 체득한 것으로 보이고. 한마디로 완전히 길들여지지 않은 맹수로 보인단 말이야. 나한테 그렇게 보이는 이유가 과연 뭘까?”
    “쳇! 이젠 소설도 쓰시나. 그런데 어쩌지. 지금 나는 누군가가 될 상황이 아닌데.”
    “아니라 해도 상관없어. 우리는 적어도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니까.”
    “…….”
    “나중에 어미를 애타게 찾는 새끼의 울음소리나 내지 말라고. 난 세상에서 가장 싫은 게 아이의 징징거리는 소리거든.”
    “거래 치고는 조건이 너무 일방적이군. 아니, 하이에나의 냄새처럼 고약해.”
    “어쩌겠나. 불합리하더라도 세상의 규칙은 승자가 만드는 것이잖아.”
    “그래 좋아, 그 규칙을 받아들이지. 삶은 성공만큼이나 실패에 대해서도 냉정하니까.”
    “맞는 말이야. 모두가 운명을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갈 때 내일이 오지.”
    “내일로 가는 길이 참 험난하군.”
    현우는 순간순간 드러나는 시선과 표정에서 재빨리 피오기의 성격을 읽었다. 피오기는 다혈질적이고 호전적이었다. 하지만 피오기는 현우의 계산된 접근을 절대 허용하지 않았다. 그만큼 영리하다는 반증이었다. 피오기는 분명 야수의 발톱을 숨기고 있었다. 단지 지금까지 그 경계를 허물만큼의 커다란 위험이 없었던 것뿐이다.
    “그런데 궁금한 게 한 가지 있어?”
    “들어주지. 그래, 뭔데?”
    “달래의 죽음도 당신 솜씨지?”
    “크크크, 그래 맞다. 이제야 반동이 내가 누군지 조금씩 파악하는 것 같군.”
    “그래도 그건 너무 잔인했어. 말 못하는 짐승도 고귀한 생명이잖아.”
    “내가 아는 생명은 동지를 내 몸처럼 아끼고, 목숨을 바쳐 조직을 보위하며, 혁명적 의리와 동지애를 가진 그런 존재야. 그 외에는 생명이라고 할 수가 없지.”
    “결국 달래는 생명이 아니란 소리군. 또한 당신은 목적과 이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마키아벨리스트(Machiavellist)고.”
    “그래야 생존이 가능하니까.”
    “헉!”
    “이건 주제파악도 못하고 시건방진 소리를 한 대가다.”
    그런데 현우는 피오기의 기세에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오히려 현우의 눈빛은 차갑고 냉정했다. 거기다 위험에 맞서는 강한 정신력까지 갖고 있었다. 아무튼 현우는 주방의 한쪽 구석에서 뒤로 수갑이 채워진 채 식탁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피오기와 홍화는 가정집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자동소총과 권총 등으로 중무장한 상태였다. 홍화는 근접전투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냥용 대검까지 차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현우의 맞은편 식탁 위에 앉아 있던 홍화의 눈빛이 일그러졌다.
    “부조장 동무, 은혁 동무로부터 연락이에요. 조금 전 설치가 완료됐답니다.”
    “됐소. 지수 동무는?
    “지금 함께 이리로 이동 중이랍니다.”
    “좋소. 그나저나 부사장의 신속한 연락이 아니었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소.”
    “그러게요. 그럼 이것으로 부사장은 무선전파송신기와 관련된 의혹을 완전히 벗는 건가요?”
    “아마도.”
    “나는 여기에 이런 꼴로 두고 가는 건가? 누가 보면 내 체면이 말이 아닌데.”
    “아까도 말했지. 넌 인질, 아니지 보험이라고.”
    “거 봐. 듣기에 한결 부드럽잖아.”
    “그나저나 보험은 체면에 대한 염려보다 오히려 목숨을 걱정해야 하는 거 아닌가?”
    “!”
    “어쨌건 좋아. 넌 우리가 탈출할 동안 시간을 벌어주어야 할 임무가 아직 남았으니까.”
    “어떻게?”
    “궁금해?”
    “당연하지 않나. 내 최후와 관련된 일인데. 왜 말하기 싫어?”
    “해야 할 필요성이 없잖아. 안 그래?”
    “세상 참 야박하군. 그게 영예로운 혁명전사가 가는 길이란 말이지.”
    “뭐라고! 크크크. 좋아, 이왕 억울함을 풀어줄 거 내가 제대로 알려주지. 그런다고 상황이 변할 것도 아니고.”
    “내 묘비명에 새겨야 할 글이 뭐야.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는 매장이야 아니면 물고기의 밥이 되는 수장이야. 그것도 아니면 한 줌의 재로 남는 화장이야?”
    “어떻게 하지? 모두 틀렸는데.”
    “!”
    “넌 평소 상상도 하지 못한 사지가 찢기는 고통을 경험하게 될 거야.”
    “사지가 찢긴다? 그럼 드라마에서 보던 거열형(車裂刑)이군. 참혹하겠네.”
    “아주 조금. 하지만 강한 인상으로 남지. 물론 곧 편안해질 거야. 왜냐, 네 영혼은 시속 300km 이상으로 달리며 다른 세상을 여행하고 있을 테니까.”
    “그런데 당신 그거 알아? 남은 목숨이 경각에 달린 절박한 상황인데 위로가 너무 능청스럽다는 거.”
    “그랬나? 푸하하하. 아무튼 외롭지는 않을 거야. 무리죽음(대형참사)이 널 기다리고 있으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