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첩보 액션스릴러!

<83> 예언

| 최종편집 2013.02.26 11:4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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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서화 장편소설 '레드'-2

<83> 예언

 
“은혁 동무, 이쯤이 적당하겠소. 저 반동을 여기에 묶으시오.”
“알겠습니다, 부조장 동무.”
“마침 선로에 수갑을 고정시킬 고리까지도 있군. 크크크.”
“이제 여기에 누우면 되는 건가?”
“편안한 자리는 네가 선택해. 그 정도 소원은 들어주지.”
“히유! 이거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고통스런 시간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군.”
“공포와 즐거움을 온몸으로 느끼면 더욱 멋진 경험이 될 거다.”
“감정이 아주 복잡해지는군. 이 정도의 큰 불행을 경험하는 사람도 드물겠지?”
“아마도.”
“안 하려고 했는데 더 늦기 전에 이 말은 꼭 해야겠어.”
“뭐지?”
“예언.”
“예언?”
“그래. 우린 꼭 다시 도착지에서 만날 거야.”
“글쎄, 그게 과연 가능할까?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때는 내가 고통스런 시간을 경험하지.”
“약속하는 건가?”
“물론.”
“역시 게임의 법칙을 아는 사람이군.”
“그렇다고 감탄할 필요는 없어. 그런 일은 절대 없을 테니까. 왜냐, 이건 네 계획의 일부가 아니라 내 계획의 일부거든.”
“그거야 신만이 알고 있겠지. 안 그래?”
“정말 힘들군. 절정에 이른 살인충동을 억누른다는 게. 하여간 너무 욕하지는 말게. 이것도 반동의 운명이니까.”
“누가 당신을 비난할 수 있겠어. 하지만 선택에 대한 책임까지 회피할 생각은 아니지? 날 살인하는 방법으로 19금+α를 선택한 것 말이야?”
“좋아,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은 내가 지지.”
“대답이 시원해서 좋군!”
“부조장 동무, 그만 가죠?”
“마지막으로 내가 비밀 하나를 더 알려주지.”
“꼭 들어야 하나?”
“선물을 거절하는 건 상대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게다가 다음에 듣고 싶을 땐 네가 남조선을 배신해야만 들을 수 있거든.”
“좋아, 해봐.”
“반동은 지금까지 네가 좋아한 여성 동무의 이름조차 몰랐어. 저 여성 동무가 바로 지수 동무야.”
“실없긴, 맞아. 내가 좋아한 사람이 저기 서 있는 지수 씨야.”
“아니지, 네가 좋아했던 사람은 저 여성 동무가 아니라 쌍둥이 언니인 지원 동무지.”
“뭐?”
“크크크, 놀라긴. 사실이야.”
“그럼 내가 지금 쌍둥이 자매를 착각하고 있다는 건가?”
“이제야 정황판단이 서나 보군. 넌 우리의 속임수에 넘어간 미시리야.”
“미시리?”
“그래, 얼간이라고. 우리가 두 사람을 서로 바꿔치기했거든. 이제 알겠어?”
“그게 사실이라면 피로회복제가 필요 없을 만큼 충격적이군. 하지만 내가 지금 마주한 상황보다는 약해. 내 목숨이 경각에 달렸잖아. 그래도 진실을 알려줬으니 확인은 해야겠지?”
“좋을 대로.”
“지수 씨! 이 말 거짓말이죠? 당신이 내가 사랑하는 지수 씨 맞죠?”
“…….”
“아마 네가 좋아했던 지원 동무는 지금쯤 온실에서 장렬한 화폭이 됐을걸.”
“뭐라고!”
“그러니까 어서 가서 만나야지. 그럼 실연의 상처를 치유하면서 죽음의 공포를 실컷 만끽 하라고. 크크크.”
“고맙군, 운명의 소개팅을 시켜주어서. 당신도 내 예언 잊은 거 아니지?”
“물론. 너도 지원 동무에게 내 안부 전하는 거 잊지 말고, 푸하하하!”
피오기는 현우의 몸속 206개의 뼈마디가 모두 부러져 파편처럼 심장을 파고드는 고통을 음미했다. 거기다 입맛까지 다셨다. 그 상상이 몹시도 만족스러웠는지 피오기는 공격성을 다소 누그러뜨린 채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몸을 돌려서 가려다말고 뭐가 아쉬운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곤 다시 현우를 비웃듯이 쳐다봤다. 순간 북한 공작원들이 주로 사용하는 벨기에제 FN 브라우닝 하이파워의 총구가 현우를 향했다.
“피융! 푸하하하!”
확률에 목숨을 거는 러시안룰렛게임을 하듯 정말 섬뜩하고 소름끼치는 폭력행위였다. 이제 피오기 일행은 현우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그런데 그 다음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피오기 일행이 바람처럼 사라지는 순간, 현우의 눈빛에서도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변화가 감지됐다. 바람을 피해 땅바닥에 납작 엎드린 포도 같던 현우였다. 하지만 평소의 순수한 눈빛이 사라지고 카리스마와 영민함이 번뜩거리기 시작했다. 눈빛으로만 보면 현우도 피오기 못지않은 최고의 사냥꾼이었다. 현우가 묶인 곳은 전 구간을 용접으로 연결해 하나의 레일로 만든 KTX의 경부선 선로였다. 그리고 그 위를 수시로 KTX와 KTX-산천이 번갈아 운행했다. 그런데 고속철도는 일반열차보다 훨씬 빨리 달려 제동거리도 훨씬 길었다. 더구나 피오기의 속셈은 자신을 이용해 KTX의 탈선사고를 유발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피오기의 의도대로 고속철도가 탈선한다면 항공참사에 버금가는 대형참사를 피할 수 없었다.
“타타타타타.”
“이봐요, 여기요. 여기!”
그때 현우의 시야 밖에서 강한 느낌으로 공기를 가르는 헬기의 메인로터(주회전날개)소리가 들렸다. 예상치 못한 희망이 날아든 것이다. 헬기는 빠른 속도로 현우의 몸을 정확히 이등분하며 다리 방향으로 곧장 날아갔다. 독수리의 용맹함과 기동성을 가진 한국형 기동헬기(KUN)인 수리온이었다. 그런데 다리 끝에 다다른 수리온이 현우의 외침을 못 들었는지 공중에서 안정적인 정지비행을 하는 게 아니라 갑자기 메인로터의 회전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그리곤 테일로터(꼬리회전날개)의 깃각을 변화시켜 우측의 열린 방향으로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고 말았다. 아마도 수리온은 탐색구조임무로 투입된 게 아니라 테스트 중인 기체가 분명했다. 헬기의 엔진소음만 사라진 게 아니라 헬기를 쫓던 현우의 한 가닥 희망도 동시에 날아갔다. 가슴 한쪽에선 아쉬움이 소용돌이치며 와류(渦流)를 만들었다. 하지만 때론 빠른 포기도 지혜가 된다. 현우는 결국 자신의 인생에 빨간불이 켜졌음을 자각했다.
“하나, 둘. 으라차!”
현우는 곧바로 양손으로 H자형 선로의 홈을 단단히 움켜잡고 허리의 유연함을 이용해 다리를 머리 위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다리를 최대한 벌려 무언가를 찾아냈다. 클립모양을 한 가는 철선이었다. 현우는 그것을 펴고 구부려 자신이 원하는 모양으로 만든 다음 수갑의 홈에 천천히 밀어 넣었다. 그러자 몇 번 움직이지도 않아 오른쪽 수갑이 가볍게 풀렸다. 하지만 바로 그때 두 개의 위기가 동시에 찾아왔다. 하나는 선로의 한쪽 끝과 맞닿은 지면에서 약간의 진동이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헬기의 로터가 돌아가면서 내는 엔진소음보다 훨씬 더 무겁고 진행속도도 빨랐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 반대편에서 정원이 현우를 부르며 뛰어오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문제는 정원의 달리기 속도와 KTX-산천의 속도가 비교조차 무의미했다는 것이다.
지면의 진동을 통해 시시각각 전달되는 KTX의 속도감은 거역할 수 없는 죽음의 그림자 같았다. 분명 재앙이었다.

그런데 뛰어오던 정원이 현우와의 거리를 불과 10여m 앞에 두고 갑자기 장승처럼 멈춰 섰다. 그리곤 재킷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갖고 있던 권총을 뽑아들었다.
타깃은 현우의 왼쪽 손목 쇠사슬이었다. 현우는 그저 정원의 놀라운 기지(機智)에 자신의 운명을 맡길 뿐이었다. 현우는 유탄을 피하기 위해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때 정원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조준선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다. 정원으로선 방아쇠를 당기는 게 현우의 생존확률을 높이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탕! 탕! 탕!”
“끼~이익!”
마침내 정원의 손끝에서 현우의 수갑을 향해 방아쇠가 당겨졌다. 그리고 그 순간 KTX-산천의 비상제동장치가 작동하면서 선로 위에 불꽃이 튀기 시작했다. 하지만 KTX-산천은 토네이도처럼 쉽사리 멈춰 서지 않았다. 결국 열차는 현우가 있던 자리를 50m쯤 지나친 위치에서 멈췄다. 열차가 감속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음에도 정원의 생각보다 제동거리가 비교적 짧았다. 물론 그 이유는 따로 있었다. 유진이 신속하게 철도교통관제센터의 열차집중제어장치(CTC)사령실에 연락해 원격제어로 레일의 전력공급을 차단시켰기 때문이었다.
“현우야!”
정원은 이제야 상황을 실감하는지 정신적 압박감과 긴장감을 동시에 느끼기 시작했다. 마치 극심한 건기의 대지처럼 의식조차 말라가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정원은 잡초더미에서 바늘을 찾는 심정으로 차량 밑을 꼼꼼히 살피며 앞으로 나아갔다. 당황한 기관사와 승무원들도 열차의 긴급정차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운전실과 승무원실에서 뛰어내려 정원의 뒤를 따랐다. 그런데 객차와 객차 사이의 관절형 대차(차량을 떠받치고 있는 구동장치)와 바퀴들을 아무리 살펴도 현우는 그곳에 없었다. 그렇다고 선로 위에 핏자국도 없었다. 단지 현우가 누웠던 자리의 콘크리트침목 위에 쇠사슬이 끊어진 수갑의 고리만이 흉물스럽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순간 정원의 얼굴에 화색이 돌며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어디선가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현우야, 괜찮아?”
“으으으, 머리만 빼고. 그런데 정원아, 네 판단이 너무 무모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니?”
“후후후, 물론 무모했지. 하지만 네가 살아 있는 걸 보니 최선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그래, 너 아니었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다.”
“그런데 이상하지?”
“뭐가?”
“난 방금 영화 속 주인공을 본 느낌이거든.”
“하긴 내 행동이 좀 민첩하긴 했지. 그런데 여긴 어떻게 알아낸 거야?”
“왜, 궁금해?”
“당연하지. 솔직히 내가 남겨놓은 휴대전화로 여기를 찾아낼 거라곤 반신반의했거든.”
“정답은 습벽이다.”
“습벽?”
“그래, 범인들은 일반적으로 일정한 수단과 방법 및 습관에 의해 반복적으로 범행하는 특징을 갖고 있지. 이러한 수법유형을 통해 범인의 잠재적 범행도 예측할 수 있고.”
“그런데?”
“그런데 지난번 은행에 난입한 무장괴한들이 이 부근의 대곡역에서 차량을 버리고 도주를 했거든. 그 이야기는 무장괴한들이 이 지역의 지리에 밝다는 걸 의미하겠지. 따라서 지리에 밝은 이점이 있으니까 범행장소로 또다시 선택할 가능성 역시 높고.”
“그래서 대곡역을 중심으로 근처의 KTX역을 살피다 행신역이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 거구나?”
“맞아! 더구나 행신역은 경의선의 철도역으로 인근에 한국고속철도 고양차량사업소도 있잖아. 따라서 범행 후 도주로 확보도 용이하고.”
“히~유! 이거 추론이 존경스러울 정도다.”
“하지만 우리의 신속한 행동에 결정적인 도움을 준 건 헬기야.”
“그럼 아까 그 수리온이…….”
“맞아. 군·경에 협조를 구했더니 마침 이 부근을 비행하는 테스트 기체가 있더라고.”
“그랬구나. 난 또 그냥 날아가 못 본 줄 알았지.”
“그런데 오른손 수갑은 어떻게 푼 거야?”
“살려고 발버둥을 치니까 신이 도와주더라. 그런데 행운은 거기까지였어.”
위험지대를 벗어나 정원의 차에 올라탄 현우는 말이 없어졌다. 이제 상황은 늪지처럼 현우를 점점 더 깊이 빨아들였다. 그리고 현우가 몸을 움직일수록 가라앉는 속도도 더욱 빨라졌다. 분명한 건 양쪽 모두 절대 물러설 수 없는 마지막 한판이라는 사실이었다. 현우도 스스로 피할 수 없는 최악의 상황과 극한의 조건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현우의 심경 변화를 언제부턴가 정원도 읽고 있었다. 하지만 정원은 납치된 지원에 대해 어디서부터 어떻게 논리적으로 설명해야 할지 그 방법을 찾지 못해 혼란스러웠다.
“현우야, 우선 미안하다.”
“뭐가?”
“내가 소개시켜준 사람이 지수 씨가 아니라 그녀의 일란성 쌍둥이 언니인 지원 씨였어.”
“알고 있어.”
“안다고?”
“그래, 무장간첩이 친절하게 설명까지 해주더라고.”
“그랬구나. 지원 씨는 동생 지수 씨와 어머니가 남한으로 올 때 평양에 있었어. 그래서 함께 탈북하지 못했고 이후엔 가족의 탈북으로 인해 엄청난 고통까지 당했어.”
“…….”
“지수 씨는 우리가 몸에 설치된 급조폭발물을 해체하고 아까 대학병원으로 이송했어. 지금쯤은 도착해서 정밀진단을 받고 있을 거야. 너도 거기 가서…….”
“가만, 지수 씨! 그럼 납치된 사람이 지원 씨라는 거야?”
“당연하지.”
“흠! 역시 그랬군. 내 느낌이 정확했어.”
“지수 씨의 말로는 무장간첩들이 은행에 갔을 때 지원 씨가 신분을 바꾸자고 제안을 했대. 그런데 토트백에서 항공권이 나오는 바람에 모든 계획이…….”
“항공권?”
“응, 로마행 항공권이래. 그것도 편도로 두 장.”
“!”
“그 두 사람에겐 소설 속에나 있을 법한 정말 가혹한 운명의 연속이었어.”
“정원아, 이미 알아버린 진실을 회피한다면 그건 비겁한 것이겠지?”
“물론 그렇지.”
“더구나 지원 씨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야. 그렇다면 이 사태를 나와 논의해야 하지 않을까?”
“그거야 나도 알지. 그래서 지금 너에게 진실을 말하는 것이고. 가만! 설마 너 혹시?”
“그래, 이젠 나에게 분명하고 확실한 희망이 생겼어.”
“나도 너의 용기와 신념은 충분히 이해해. 하지만 이건 재미로 하는 서바이벌게임이 아니야. 극도로 위험한 대간첩작전이라고.”
“나는 자신의 전부를 잃어버린 지수 씨, 아니 지원 씨에게 자유를 선물하고 싶어.”
“뭐!”
“잠에서 깼을 때 아침이 반가운 이유는 많아. 하지만 마음껏 마실 수 있는 자유만큼 숭고한 가치도 그리 흔하지 않아. 정원아, 이건 부탁이다. 다시없는 기회야. 지원 씨가 자유를 찾을 수 있도록 돕고 싶다. 내 목숨은 내가 결정할게.”
“이건 누가 봐도 무모한 결정이야. 아니, 가학적이야.”
“알아, 네가 날 걱정하는 마음. 하지만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정보수집기관인 국가정보원이 그렇게 소심한 사람들의 집단은 아니잖아?”
“뭐! 이거야 원…….”
“정원아.”
“그래 좋아. 어차피 이번 사건의 원인제공은 내가 했으니까 내가 도의적 책임을 지는 게 마땅하겠지. 지원 씨의 안전문제도 있고.”
“고맙다, 정말 고맙다!”
“하지만 네 무모한 행동으로 인해 지원 씨에게 더 큰 위험이 초래된다면 그 즉시 생각을 바꿀 거야.”
“물론이다.”
그 사이 창밖에는 숨 막히는 석양의 붉은 광휘(光輝)가 극지의 오로라처럼 깊은 여운을 남기고 있었다. 그리고 차 안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그 침묵은 긴박하게 돌아가는 상황 때문에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팀장님, 군·경이 그물 같은 경계망을 펼쳤지만 무장간첩의 흔적을 또 놓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인천국제공황과 제1국제여객터미널, 주요 공공기관에서 불시검문을 시행했지만 현재까지 의심할 만한 인물도 발견하지 못했고요.”
“또 예상 도주로의 차단 위치를 파악하고 귀신같이 빠져나갔군. 벌어지는 상황이 언제나 똑같아. 항상 우리를 앞서가고 있어.”
“그렇습니다, 팀장님. 마치 우리가 누군가의 저주에 걸린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감정의 지배를 받게 되면 거칠고 대담해지기 마련이지. 광기어린 몸부림처럼 무모하기까지 해. 그런데 도주 중인 무장간첩들은 그런 감정적인 분노조차도 의식적인 결정에 의해 하고 있어. 더구나 비상식적일 만큼 기막히게 도주로를 찾아내 군·경의 추격을 따돌리고 있거든. 그 이유가 도대체 뭘까?”
“그러게요. 단순히 군사적 전술운용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정원아, 이건 내 생각인데.”
“응.”
“누군가 지금의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이용하고 있는 건 아닐까?”
“!”
“그 말씀은 혹시 적이 내부에 존재할 수도 있다는 말씀인가요?”
“그렇습니다, 그것도 아주 가까이. 모두의 의식 속에.”
오후 3시를 기해 군·경찰·정보사·기무사·국정원이 포함된 대간첩작전본부가 통합방위법에 의해 합참(합동참모본부)에 설치됐다. 그리고 경찰은 경기도 전역에 갑호비상령을 발령했으며 군도 서울과 경기도를 포괄하는 수도권 일원에 대간첩 침투작전의 경계태세를 의미하는 진돗개 하나를 발령했다. 때문에 군대와 경찰은 다른 임무가 제한되고 명령에 의해 지정된 지역에서 수색 및 전투를 수행했다.
그 시각 합참의 대간첩작전본부 상황실은 전시를 방불케 했다. 한쪽에서는 군·경의 지휘부들이 모여 서울·경기 지역의 육군 보병사단과 특전사의 투입문제를 그리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민·관·군·경의 유기적인 협조체제 구축과 관련된 작전을 토의했다. 또한 간첩들의 예상도주로를 차단하고 일정 범위 내에 가두어 검거하기 위한 군·경의 검문활동도 광범위하게 진행됐다. 하지만 현우는 대간첩작전본부에서 투명인간이나 다름없었다. 그저 군용지도를 활용해 무장간첩의 출현위치와 병력의 이동상황 등을 도시(圖示)하고, 상황요지를 기입한 상황판을 쳐다보는 게 다였다.
“아! 그동안 혼자 얼마나 무섭고 두려웠을까.”
현우는 군·경 합동상황실의 공기가 지루하고 답답해 복도로 나왔다. 그리곤 선로 위에서 본 지원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렸다. 현우가 본 지원은 이전의 모습과 많이 달랐다. 그것은 자신의 앞날에 드리운 암운(暗雲)을 상징하기도 했다. 지원의 눈빛은 무릎 위에서 죽어가는 자신의 운명을 쳐다보는 것처럼 조용했다. 지원은 그렇게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연병장에서 무장병력의 소란이 일었다. 5분전투대기부대에 갑자기 출동명령이 떨어졌다. 동시에 부대원들에게 신속한 군장결속과 탄약·식량분배가 이루어졌다.
“정원아, 무장간첩들의 도주로가 확인된 거야?”
“아니, 사패산 등산코스 중 하나인 회룡사의 바위틈에서 하산하던 등산객이 우연히 일련번호가 없는 M16탄피를 발견했다는 신고가 접수됐어.”
“의정부의 회룡사라고?”
“인근에는 서울외곽순환도로와 경원본선의 역인 회룡역도 있고.”
“하지만 사패산 주변은 얼마 전까지 군사보호구역으로 묶여 있었잖아.”
“맞아, 솔직히 나도 너하고 같은 생각이야. 발견된 탄피가 무장간첩들의 흔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하지만 나도 일일상황보고는 해야 하거든”
“흠, 단지 상황보고 때문이라고? 왠지 내가 평소 알던 너의 모습과는 괴리감이 느껴진다.”
“짜식하고는, 그럼 나 다녀올게.”
“그래.”
“왜 그러시죠?”
“아, 유진 씨. 다름이 아니고 그동안 무장간첩들이 활용한 전술형태로 봤을 때 다소 의아스러운 부분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어떤 부분 말씀인가요?”
“무장간첩들은 비밀스럽고 모호하지만 과감하고 공격적인 방법으로 군·경의 추격을 따돌리고 있습니다.”
“그렇죠. 거기다 군사적인 기만행동과 심리활동까지 뛰어납니다. 그래서 합참도 언론에 군·경의 작전계획을 노출시키지 말라고 이미 협조를 부탁한 상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가시적인 성과는 없습니다.”
“맞습니다.”
“그만큼 무장간첩들은 대남침투와 요인암살을 위한 고강도 훈련을 받은 특수공작원들입니다. 또한 최악의 환경과 물리적인 악조건하에서도 전술적으로 승리할 수 있는 강한 정신력과 신체, 그리고 두뇌까지 가졌다는 증거이기도 하고요.”
“한마디로 전술표적을 선별적으로 타격하는 데 특화된 살인병기들이죠.”
“따라서 낮에는 비트를 파고 숨어 있다가 인적이 뜸한 밤에 산골짜기를 타고 북상하지는 않을 겁니다. 즉 그런 특급 살인병기들이 일반인들의 상식을 갖는다는 건 애초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그런 정도의 실력이라면 지금까지 군·경의 추적을 따돌리는 것조차도 불가능합니다.”
“음, 그런가요.”
“아마도 무장간첩들은 현재도 우리 군·경의 의표를 찌르는 대담하고 전술적인 행동을 하고 있을 겁니다. 그런데 제가 정말 의아스럽게 생각하는 건 정원이의 행동입니다.”
“팀장님의 행동이요?”
“예, 정원이는 방금 제가 말씀드린 사실들을 모두 알고 있을 겁니다. 모른다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하죠. 정원이는 가능한 상황을 유추하는 특별한 능력을 보유한 친구거든요. 거기다 어쩌면 무장간첩들이 예상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이동하면서 군·경의 포위망을 벗어났을 수도 있다는 걸 충분히 예상하고 있을 텐데 말이죠.”
“…….”
현우의 말이 채 끝나기가 무섭게 연병장에서 5분전투대기부대가 급히 출동을 했다. 그리고 정원과 재국을 비롯해 합동조사반에 포함된 요원들도 첩보수집을 위해 현장으로 출동했다. 그런데 이러한 출동이 다음 날과 그 다음 날, 이후 이틀이나 계속됐다. 그리고 그렇게 반복적으로 출동해서 얻은 성과물도 실탄이 장전돼 있는 AK-47 탄창 하나와 불발된 수류탄 한 발이 전부였다. 하지만 정원은 싫은 내색 없이 신속히 출동했다. 그리고 돌아오면 어김없이 신입사원처럼 시시콜콜한 것까지 상황보고를 했다. 하지만 현우는 그 이유가 명확하지는 않았지만 정원이 불장난을 하는 어린아이 같았다. 분명 숨은 의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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