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함 폭침-연평도 포격 앞에 우물쭈물 했던 MB 전철 밟지 말아야
  • 대처 수상 /철녀(鐵女)의 전쟁 결단
    대처는,
    국방장관-외무장관부터 걷어 찼다

    북의 핵공갈 밑에서 교훈을 찾는다.


    허문도 /전 통일원 장관


  • 마가렛 대처 영국수상(재임 1979 – 1990)은 [철의 여인](Iron Lady)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 말은 그녀가 1975년 야당이었던 보수당의 당수가 되어, 평소의 소신대로 정책 등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대결자세를 명확히 하자 당시의 소련 쪽에서 갖다 붙인 별명이다.

    1982년 영국이 아르헨티나와 싸워 승리한 포클랜드 전쟁을 거치면서, 그녀의 이 별명은 더욱 굳어진다.

    아르헨티나 군대가 남미대륙 남단의 영국령인 포클랜드 섬을 침공, 점령하자, 대쳐 수상의 전쟁결단은 신속하고 단호했다.
    다음 날 하원에서 토론이 있었다.

    수상은 아르헨티나 군대의 점령을 배제하기 위해, 1만3천 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지구 저쪽으로 원정할 기동함대가 이미 준비되었고 막 떠날 참이라고 하자, 회의장에서는 환성이 올랐다.

    그러나 그중에는 수상에게 "여자인 당신이 전쟁을 경영하고 받쳐낼 [의지와 스태미너]가 있을까"라고 미심쩍어 하는 투의 발언이 있었다.
    대처수상은 회고록에서 이 질의를 놓치지 않았다.

  • ▲ 아르헨티나에 공격받고 침몰하는 영국 셰필드 함.
    ▲ 아르헨티나에 공격받고 침몰하는 영국 셰필드 함.

    한 의원이 이렇게 발언했다.

    “수상은 취임하자 이내 [철의 여인]이란 이명(異名)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소련과 그 동맹국에 대한 방위와 관련된 발언에서 생겨났습니다.
    이런 말을 듣고서 불만이었다든지, 실제로는 자랑을 느끼지 못한 것으로 상정할 이유는 없습니다. 지금부터 한 두 주간 사이에, 우리 국회와 국민, 그리고 각하 자신이 [도대체 그녀는 어떤 금속으로 되어 있는가]를 알게 되겠지오.”

    이는 역사가 오랜 영국하원에서 곧 잘 볼 수 있는 격조 높은 비아냥과 불안감을 눌러 놓은 격려의 발언이라 할 것이다.

    전쟁이 승리로 끝난 뒤 발언자 이녹 파월 의원은 전쟁이 시작될 때 했던 질의에 대해 대처 수상을 상대로 스스로 답해 보였다.

    “각하는, 내가 최근 분석된 어떤 물질에 관한 보고를 공식의 분석가로부터 손에 넣은 것을 아시는지요?

    그 보고에 의하면, 그 물질은 최고 품질의 철분으로 되어 있고, 대단히 신장성(伸長性)이 뛰어나고, 마모와 압력에의 저항력이 강하고, 여하한 국가목표를 위해서 사용해도 좋다는 것입니다.”

    문제제기를 했던 파월 의원이 전쟁이 끝나고서 마가렛 대처가 전쟁지도자로서 탁월한 정신적 자질을 갖고 있음을 역사 앞에 스스로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이 후속 발언은 대처의 비서관이 인쇄하여 액자에 넣어 그 해 크리스마스 선물로 수상에게 주었고, 사무실에 걸렸다 한다.

    이 얘기를 회고록에 실은 것을 보면, [철의 여인]인 그녀도 사기 공급을 필요로 했고, 그를 통해 힘을 얻고 있었다는 고백으로도 들린다.

  • ▲ 아르헨티나에 공격받고 침몰하는 영국 셰필드 함.

    [철의 여인] 대처는 1979년부터 1990년까지 12년간 세번 임기로 수상에 재임했고, 포클랜드 전쟁은 첫 임기의 4년 차에 있었다.
    나이 57세 때였다.

    대처가 수상에 취임했을 때, 경제는 침체하여 영국은 3류국가로 굴러 떨어지고 있었다.
    보수-노동 양당의 장기간에 걸친 경쟁적 복지정책으로 인한 인프레, 생산성 저하, 대량 실업의 늪에서 영국은 헤어나지 못했다.
    역사가 토인비가 ‘영국에는 두개의 정부가 있다’고 한탄했던 노동운동의 난맥상이 어떤 정부건 개혁시도에 발목을 붙들었다.

    메소디스트 가정에서 자란 대처는 금욕주의적인 자율-자립의 생활철학을 딛고서, 취임하자 마자 복지와 노동의 영국병에 도전하려 했다.
    인프레 잡겠다고 시작한 가혹한 긴축재정과 이로 인한 삼백만을 돌파한 실업대군이 대처 정치의 숨을 조였다.

    취임 3년째에 대신문 <더 타임즈>가 행한 누적 여론조사 결과는 [사상 최악의 수상]으로 나왔다.(<더 타임즈>의 두번째 최악은 2차대전 때 히틀러에 유화정책을 썼던 네빌 챔벌린 수상).


  • ▲ 포클랜드에 상륙한 영국군.
    ▲ 포클랜드에 상륙한 영국군.

    사태를 일변 시킨 것은 포클랜드 전쟁이었다.(노조까지도 파업 자숙 기미를 보였다 한다.)
    위기 앞에서 대처 정부가 취한 단호한 조치가 국민적 지지를 얻게 되자, 대처의 인기 또한 일거에 상승했다.
    자당내에서 조차 비관했던 1983년 총선에서, 그녀가 이끄는 보수당은 낙승하고, 임기 두번째를 시작할 수 있었다.

    주목해야 할 것은, 드물게 장기 집권을 하게 되는 [철녀](鐵女) 대처의 통치권위가 전쟁지도를 통해 형성되었다는 사실이다.
    정치지도자의 통치권위는 쉬 만들어지기 어려운 것이지만, 형성되고 나면 그보다 더한 국가의 자산은 없는 것이다.

    이후에 대처는, 영국사람들에게 자립-자율의 기풍을 살려냈고, 국가 위상에서 경제는 물론이고, 다시 유럽을 리드하는 중견국가의 수준으로 울라섰다.

  • ▲ 포클랜드 전쟁에서 맞붙은 아르헨티나와 영국의 전력 비교.
    ▲ 포클랜드 전쟁에서 맞붙은 아르헨티나와 영국의 전력 비교.

    [철녀] 대쳐는 회고록에서, 런던 다우닝가 10번지(수상관저)의 12년간의 나날들을 되돌아 봤을때, 포클랜드 전쟁의 11주간 만큼 그녀의 마음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시간은 없다고 했다.
    "그 기간 만큼 긴장에 차서, 마음을 태우며 나날을 보낸 적은 없다"고 했다.

    북의 전쟁 공갈 속에 있는 우리도 참고했으면 싶어서, 그녀의 회고록에서, 전쟁결단과 전쟁지도를 두고서 그녀가 집심하고 마음을 썼던 몇가지를 이하에서 주워 보겠다.

    첫째로 아르헨티나 군대의 포클랜드 점령은 돌연한 것이었고, 관계자의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침략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처의 즉각적인 전쟁결단은 많은 관계자들의 예상을 뒤엎는 것이었다.
    아르헨티나의 군사정권 자신이 그랬고, 냉전의 일방의 축이었던 소련 역시, 영국이 가치가 높지 않고 지구 반대편의 차거운 바다에 있는 영토에 대 기동함대를 보낼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한다.

    대처는 원칙 앞에 머뭇거림이 없는 지도자였다.
    그녀가 강조한 원칙은 ‘국제법이, 힘의 행사에는 이기지 않으면 안된다’였다. ‘침략과 부정(不正)에 무르게 대하면 더 한층의 침략과 부정을 부를 뿐’이라는 것이 그녀의 평소의 소신이었다.

    둘째로 그녀는 필요한 규모의 군사적 준비를 갖추는데 머뭇거림이 없었다.
    전쟁결정이 있자, 보수당의 원로인 전 수상 해롤드 맥밀란이 관저로 대처를 찾아왔다.
    지지표명과 조언을 위해서였다.
    외상, 국방상 등 소수로 구성되는 전쟁내각에 재무상은 빼야 할 것이라 했다.
    대처는 그대로 받았다.

    승리 말고 대안이 없을 때에는, 군사적 안전이 재정적 사고에 구애되지 말아야 한다고, 그녀는 단호했다.
    전쟁은 결국 항공모함 두 척을 포함 100척 이상의 함선과 2만5천의 인원을 1만3천Km 저쪽으로 보내는 황금작전이었던 것이다.

    셋째는 최고 통수권자인 대처가 관련 참모기능인 국방의 장군들과 외교관료의 조언을 어떻게 수용하고 사용했는가이다.
    전쟁결단은 어떤 경우에도 군사와 외교의 어느 균형점에서의 통합된 결론이다.
    결단은 어떤 경우에도 최고권력자의 의지와 정서의 문제이다.
    군사당국이나 외교당국이 절대로 대신 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천안함 폭침의 현장에서 정보에 후속하는 반격이 부재했던 것은, 최고통수권자의 의지의 부재의 결과였던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 ▲ 영국군의 공격을 받고 침몰하는 아르헨티나 함정.
    ▲ 영국군의 공격을 받고 침몰하는 아르헨티나 함정.

    아르헨티나 군대가 포클랜드 제도를 침공할 것 같다는 정보를 국방장관 존 노트가 받자마자, 수상에게 관계관 회의 소집을 요청하였다.
    대처가 주재한 회의에 국방, 외무 양성의 관계자가 비상 소집되었다.
    현실의 침공정보를 처음으로 접한 이 자리가 대처가 전쟁을 결심하고 전쟁을 지도하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정보보고와 동시에 있은 국방성의 대응방향과 상황판단을 대처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회고록의 이 대목에서 [철의 여인]이 모습을 드러낸다.
    침공 정보를 알리면서 “(국방상) 노트는 놀라서 당황하고 있었다”고 적고 있다.
    이미 해상에 전개되어 있는 아르헨티나 함대가 이틀 후면 포클랜드에 상륙할 것이라는 정보를 의심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침공정보를 전하는 국방상이 제시하는 대응방향을 거부하고 나왔다.
    존 노트는 국방성의 견해로서 ‘섬들이 탈취되어 버리면 탈환하기는 어려울 것’임을 분명히 밝혔다.
    전쟁대응을 기피하고자 한 것이다. 

  • ▲ 포클랜드에 출동한 영국함모와 공군기.
    ▲ 포클랜드에 출동한 영국함모와 공군기.

    대처는 회상 속에서 "노트의 얘기는 무서운 얘기였고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했다.
    그 자리에서 [철의 여인]은 바로 “만약 침략 당하면, 탈환하지 않으면 안될것이다”라 했다.

    전쟁결단은 이와 같이 내려졌다.
    그 자리에 참석했던 해군참모총장이 항모, 구축함, 프리게이트함, 상륙용주정 등으로 기동함대를 48시간 내에 편성할 수 있도록 필요한 허가를 하고서야, 그때까지 그녀가 가졌던 분노와 각오는 “든든한 확신으로 바뀌었다” 한다.

    이 자리에서는 가능하다면 비극을 피하려는 노력도 동시에 있었다.
    친분이 두터운 큰 댁 시아주버님 같은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에게 즉석에서 편지를 썼다.
    미국 입김 아래 있는 아르헨티나를 설득하여 함대를 되돌리도록.(레이건은 즉각 응락했으나 조정은 성공치 못했다.)

  • ▲ 대처 영국수상과 레이건 미국대통령.
    ▲ 대처 영국수상과 레이건 미국대통령.

    대영제국을 경영했던 전통이 외무성의 유능성을 떠받치고 있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외무성 전체로서의 정세분석-판단보고는 상기 대책회의 이틀 후인 아르헨티나 군대가 섬에 상륙하는 날이었다.
    대처는 외무성 보고를 회고록에서 [조언]이라 표현하는데, 이 역시 걷어 차버렸다.
    유능성을 자랑하나 신념이 약한 엘리트들을 냉소하는 것 같은 [철녀]의 기질이 왈칵 드러나는 대목을 그대로 옮긴다.

    “그 조언은 너무나도 외무성 다운 원칙의 탄력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내가 들은 것은 EC와 미국을 너무 믿을 수 없다는 것, 소련이 개입할 가능성, 영국이 식민주의 나라로 보이는 불리성, UN 안보리 지지획득의 문제점 … 등등이었다.
    다들 걱정거리인 것은 맞다.

    그러나 전쟁을 수행중에 가지가지 난문에 생각이 뺏겨서는 안된다.
    곤란을 타고 넘기 위해, 철의 의지로 임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 ▲ 대처 영국수상과 레이건 미국대통령.

    이외에도 대처 수상이 부심한 것은, 언론을 통해 지지를 유지하는 것, 미국을 위시한 서방동맹국들과 영연방 여러나라의 지지를 빠짐없이 확보하는 일 등이었는데, 자세한 것은 생략해야겠다.

    마지막으로 하나 보탤 것은 대처의 의회대책에서 보인 집심(集心)의 포인트다.
    기동함대 파견 발표에 하원의원 모두는 환성을 올렸지만, 상당한 숫자의 의원들이 내심, 그 함대를 외교카드 정도로 보는 눈이 있는 것을, 대쳐는 놓지지 않았다.
    이들로 하여금 그녀의 응징전쟁 의지는 관철되고야 말 것임을 확신케 하는데, 대처는 노력을 다했다.
    이를 통해 대처가 최종적으로 노린 것은 전쟁하는 영국이 “적에게도 동맹국에게도, 국민의 의사가 통일되어 있슴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북의 핵공갈 하에 있는 우리 모습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하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