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호 전 교양다큐채널 회장 "TV조선서 6월 25일 7부작 [우남이승만] 방영예정"
  • [편집자 주]

    지난 11일 서울 중구 정동에 위치한 <정동제일교회> 아펜셀러홀에서
    제27회 [이승만포럼]이 열렸다.

    "<TV조선>에서 6월 25일에 방영될 예정인,
    7부작 다큐 <우남이승만>을
    제작하면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다.
    오늘 포럼에서 몇 가지 사실들을 발표하겠다."

       -김지호 전 교양다큐채널 <CTN> 회장


    최근 민족문화연구소가 [백년전쟁]이라는 동영상을 제작했다.

    이 영상에는 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한 거짓 정보가 가득했다.

    <뉴데일리 이승만연구소>는 <생명의 길>이라는 동영상을 제작했다.
    이는 <백년전쟁>이 남긴 거짓을 바로잡기 위함이다.

    이 시기에 다큐멘터리 전문가 김지호 전 회장이 7부작 [우남이승만]을 제작했다.
    그는 "거짓을 용납할 수 없었다"고 제작의도를 밝혔다. 


    <제27회 이승만포럼>


    이승만 영상물 제작에 얽힌 이야기


     

  • ▲ 11일 중구 정동제일교회 아펜셀러홀에서 열린 제27회 [이승만포럼]에 발표자로 나선 김지호 전 회장.ⓒ정상윤 기자
    ▲ 11일 중구 정동제일교회 아펜셀러홀에서 열린 제27회 [이승만포럼]에 발표자로 나선 김지호 전 회장.ⓒ정상윤 기자


    ▲ 김지호(전 교양다큐채널 CTN 회장, <우남이승만> 7부작 제작자)

     


    들어가기


    본인이 2003년에 제작한 <우남이승만> 7부작을 완전히 새롭게 재구성했다.

    2012부터 기존의 다큐멘터리에서 부족한 부분을 보강하고 새로운 증언을 수록하는 등
    수정작업을 거쳐 이번 6월 초에 공개를 앞두고 있다.

    본인은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사람으로서 역사의식을 갖고,
    사실에 오류가 있지 않았는지,
    과장된 표현은 없었는지,
    충분한 조사를 거쳐 정확한 기록을 담고자 노력했다.

    이번에 공개되는 다큐멘터리에서 새롭게 추가된 내용을 두어 가지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이승만의 귀국 과정에 얽힌 일화


    이번 공개되는 다큐멘터리의 새로운 내용 가운데,
    하나는 이승만의 귀국에 얽힌 이야기이다.

    해방 후 이승만은 미 국무성의 귀국 방해로 인해,
    맥아더의 도움을 받아 단독으로 서울에 들어왔으며,

    이때 미군용기를 이용했는데,
    민간인은 군용기에 탑승할 수 없다는 규정 때문에 미군복을 착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고증 학자 조벨(전 맥아더기념관 관장)의 증언에 의하면,
    이승만은 귀국 당시 맥아더의 도움을 받아 OSS 대령이라는 정식 군인신분으로
    마닐라를 거쳐 동경에 들어왔다.

    이승만이 OSS 대령의 신분을 획득하는 조건은,
    한반도에 들어와 미 국무성에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이 정보를 하나도 제공하지 않았다고 불평하는 미 국무성의 미공개 서류가 있다.

    1945년 10월 14일 동경에 도착한 이승만은,
    4시 30분부터 30분간 맥아더와 면담한 후 임영신에게 귀국일정을 알려주었다.

    때문에 김포공항에는 몇 천 명의 환영객이 기다리고 있었다.

    맥아더로부터 이승만을 정중하게 환영하라는 지시를 받은 하지 중장은,
    미군 의장대 사열은 물론 김포공항에 연단을 설치하고 귀국연설을 하도록 배려했다.

    이승만은 귀국할 때,
    미국 동지들에게도 자신의 귀국 일자나 귀국 사실을 알리지 않고 귀국길에 올랐기 때문에
    미국의 동지들은 매우 서운해 했다.

    그것은 이승만이 OSS 대령 신분이었으므로 비밀리에 귀국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승만의 귀국은 첩보작전을 펼치는 것처럼 은밀하게 진행되었던 것이다.


  • ▲ 11일 [이승만포럼]에 발표자로 나선 김지호 전 회장ⓒ정상윤 기자
    ▲ 11일 [이승만포럼]에 발표자로 나선 김지호 전 회장ⓒ정상윤 기자



     

    2.동지회에서 쫓겨난 김원용


    김원용은 1930년 6월 하와이에서 개최되는 <대한인동지회> 대표자대회(미포대회)에
    로스앤젤레스 대표로 참석하기 위해 호놀룰루에 왔다.

    이후 이승만은 젊고 똑똑한 김원용을 <대한인동지회> 재무책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김원용은 동지회 임원이 된 후 직책을 충실하게 이행하지 않고 교민단과 자주 접촉하며, 특히 자신과 친분이 두터운 <국민회> 기관지인 <국민보>의 주필 김현구와 어울려,
    동지회 내부 정보를 국민회에 넘겨주었다.

    <국민회>는 1920년 10월 7일자의 임시정부 내무부령 제4호에 의거,
    1921년 3월 3일자로 기존의 <대한인국민회>를 해체하고 <대한인교민단>으로 개편했다.

    그러나 1930년 초에는 반 이승만 측 사람들이 <교민단> 임원으로 선출되며
    <교민단> 내에서 이승만 지지 세력의 영향력이 점차 줄어들고,
    <교민단>과 <동지회> 측은 갈등 국면에 있던 민감한 시기였다.

    이런 시기에 김원용은 <동지회> 임원으로서 <동지회> 내부의 정보를
    <교민단> 측에 넘겨준 것이다.

    이와 같은 김원용의 행동이 이승만의 눈에 거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금전출납이 분명치 못했다.

    결국 <동지회>는 김원용을 파면하고 후임에 박상하를 발탁했다.
    신임 재무 박상하는 김원용을 상대로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재판은 얼마를 끌다 장기화될수록 피차간에 손해만 더할 뿐만 아니라,
    외국인이 보기에도 창피한 노릇이라는 여론에,
    박상하가 소를 취하하는 바람에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동지회>를 떠난 김원용은 그 후
    <대한민국민회>(1933년 교민단을 장악한 반 이승만 측에서 명칭을 <국민회>로 복원함)
    <국민보> 주필 및 편집인·대표로 하와이 활동을 하며,
    앞장서서 이승만을 비난했다.

    김원용은 해방 후 <재미한족연합위원회> 국내 파견 부단장으로 귀국하여
    1946년 9월에 임시정부의 유동열, 김본준 등을 끌어들여 <신진당>을 창당했으나 성과가 없었다.

    같은 해 김원용은 하지 중장에 의해 과도입법의원의 관선의원으로 임명되어
    적산관리문제와 민족반역자특별법을 다뤘으나 11월 미 군정청에 의해 거부되자,
    김원용은 김호와 더불어 남북협상으로 선회했다.

    1947년 9월에는 김원용과 김호는 홍명희-이극로의 통합운동에 가담하여,
    <민주독립당>을 결성하고 홍명희-이극로-박용희 등과 함께 공동의장으로 선출되었다.

    <민주독립당>은 좌익들과 똑같이 자주적 민족통일정부 수립과 미소 양군 철퇴를 주장했다.

    1947년 12월에
    김규식을 중심으로 한 중도파 정당의 연합협의체로 <민족자주연맹>이 결성되자,
    김원용과 김호는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1948년 1월 유엔임시한국위원단이 서울에 오게 되자 더 이상 할 일이 없게 된
    김원용과 김호는 즉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미국으로 간 김원용은 김호의 지원에 힘입어 1959년 3월 <재미한인오십년사>를 집필하는 등,
    김원용과 김호는 이승만과 대한민국 정부를 비판하는 활동에 남은 생애를 보냈다.



  • ▲ 11일 [이승만포럼]에 발표자로 나선 김지호 전 회장ⓒ정상윤 기자
    ▲ 11일 [이승만포럼]에 발표자로 나선 김지호 전 회장ⓒ정상윤 기자


     

    3.<Japan Inside Out> 집필에 관한 뒷이야기


    한인들의 경제력을 향상시켜 장래 필요한 재정을 확보하고,
    노령에 접어들어 사탕수수 농장에서 더 이상 일할 수 없는 한인들을 한 곳에 모아
    자작농장으로 운영하여 그들의 경제적 자립을 도모하기 위한 야심찬 계획으로,
    1925년 12월 13일 설립한 <동지식산회사>가 2만 달러가 넘는 부채를 지고
    1931년 4월경에 파산하자,
    이승만은 실의에 빠졌다.

    1933년 이승만은,
    제네바 국제연맹본부에서 열리는 일본의 만주 침략을 규탄하는 국제회의에 참석하여
    한국독립문제를 세계여론에 호소하기 위해 제네바를 방문하였다.

    이승만은 그곳에서 평생 반려가 될 프란체스카 도너를 만나 결혼을 약속했다.

    이승만은 1934년 10월 8일 프란체스카와 결혼한 후 호놀룰루로 돌아와
    한인기독학원과 한인기독교회 일에 전념할 뿐,
    외교적 성과는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자 교포들의 지탄과 불만의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실의에 빠진 한인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는 자극제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이원순은,
    <동지회> 간부회의를 소집하고 이승만을 다시 워싱턴으로 가도록 해서
    그곳에서 독립운동에 관한 책을 집필하도록 했다.

    이원순은,
    60고개를 넘긴 이승만이 갑자기 돌아가시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염려에서,
    집필을 서두를 필요를 느껴 이승만에게 <독립운동사>를 집필하도록 한 것이었다.

    그러나 워싱턴으로 간 이승만은 얼마 안 되어 독립운동사보다는
    일본을 규탄하는 글을 집필하는 것이 좋겠다는 편지를 보내왔다.

    그래서 <동지회>는 착수금 조로 500달러를 송금했다.
    그 결과 1941년 여름 <Japan Inside Out>이 출판됐다.
    그러나 처음부터 이 책이 미국인들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아니었다.

    미국인의 무관심으로 판로가 없자,
    이승만은 750권을 호놀룰루로 보냈고,
    이 책은 부인회와 동지회를 동원하여 판촉에 나서 모두 판매했다.

    이원순은 이 책의 출판으로 하와이 교민들에게는 새로운 자극을 줄 수 있었고,
    의연금을 걷는 데도 부끄럽지 않게 되었다고 증언했다.

    <Japan Inside Out>은 이승만에게는 물론 동지회로서도 커다란 성공이었다.

    <Japan Inside Out>은 미국인들의 관심을 받으며 베스트셀러가 되어,
    각 학교와 도서관에서 이 책을 구입하였으며,
    그밖에도 많은 미국인이 구독하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