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추모제 400명…올해 600명, 늘어난 추모객이승만 그는 누구? 모르고 비난? "안돼~"
  • <건국대통령이승만박사기념사업회> 이기수 회장이 19일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에서 열린
    제48주기 건국대통령 우남 이승만 박사 추모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사진=이종현 기자) 


    "공산독재와 세습통치로 파산 일보직전의 위기에 몰린 북한.
    그에 비하면 자유와 평화를 누리는 우리.

    이는 미래를 내다본 우남 이승만의 용기와 결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우남에 대한 후세의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리고 있습니다.

    우남을 향한 존경과 추모의 열기가 해를 거듭할수록 늘고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사실 왜곡을 뚜어넘어 일방적 매도와
    원색적 비난까지 서슴치 않고 있습니다.

    역사를 배웠고 전공했다는 사람들까지 이런 짓을 하고 있는
    현실이 더욱 안타까워지는 오늘입니다"

       - 이기수 회장


    <건국대통령이승만박사기념사업회> 이기수 회장이
    이승만 대통령의 48주기 추모식에서 한 말이다.


  • 19일 제48주기 건국대통령 우남 이승만 박사 추모식이 열린
    서울시 동작구 국립현충원 전경.(사진=이종현 기자)


    19일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현충관에서 열린
    추모식에는 역대 최대 인원인 600 여 명의 시민이 참가했다.

    이기수 회장은 상해임시정부와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인
    우남 이승만 박사를 이렇게 평가했다.

    "4.19에 의해 하야했지만 항상 우리 청년들을 향해
    <장하도다! 우리 청년들!>이라며 그들의 기상과 용기를 높이 평가 했다.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검증되지도 않고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온갖 거짓 소문과 악담들이 사실인 양,
    이 대통령 서거 이후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분단 고착화, 친미, 독재 등
    온갖 난폭한 언어들로부터 오늘날까지도 자유로울 수가 없는,
    실로 답답할 수밖에 없으신 분이다.

    이제는 이 대통령께서 서거한 지 반세기가 되어가는 만큼
    <분단>이 아닌 <건국>을 말해야 하고 <친일파> 등용에 대한 비난이 아니라
    <평화선>을 선포, 일본을 압박하여 오늘날의 해양주권을 확보하고
    <친미주의자>가 아닌 <용미주의자>였던 대통령이었음을 알려야 한다"

       - 이기수 회장



  •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인 이인수 박사가 19일 서울시 동작구 국립현충원에서 열린
    제48주기 건국대통령 우남 이승만 박사 추모식에서 유가족을 대표해
    참석한 추모객들에게 인사말을 전하고 있다.(사진=이종현 기자)

    추모식은 국민의례, <기념사업회> 이기수 회장 인사말,
    <국가보훈처> 최완근 차장, <자유수호국민연합> 장경순 총재 추모사,
    마하나임 중찬단, 임청화 백석대 교수 추모공연,
    서울효제초등 한우진 학생 추모 편지 낭독, 추모제 참가자 분향,
    이인수 박사와 부인 조혜자씨의 유가족 인사 등으로 진행됐다.


  • 서울효제총등학교 6학년 한우진 학생이 19일
    서울시 동작구 국립현충원에서 열린

    제48주기 건국대통령 우남 이승만 박사 추모식에 참석해
    <건국대통령 이승만 할아버지께 드리는 편지>라는
    제목의 편지글을 낭독했다.(사진=이종현 기자)



    우남, 제대로 알자!

    우남 이승만(1875.3.26〜1965.7.19)은 황해도 평산(平山)에서 출생했다.
    18세까지 과거시험에 매년 응시했으나 부정부패로 실패, 배재학당에 입학했다.

    한학을 배운 그는 이후 1896년  협성회(協成會)를 조직해
    협성회보(協成會報)라는 주간지를 발간하면서 주필로서
    구한말 정부를 향해 날카로운 비판을 시작했다.

    협성회보가 정부의 탄압으로 폐간되자
    일간지인 매일신문(每日新聞)을 발행, 주필로 계속 활동했다.

  • ▲ (사진=이종현 기자)
    ▲ (사진=이종현 기자)


    1898년 고종 황제에 의해 독립협회가 해산됐다.
    이승만 박사는 "광무황제는 연령이 높으시니 황태자에게 자리를 내 주셔야 한다"라는
    전단을 배포하다 징역 7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미지를 중앙에 배치합니다.

    옥중에서 그의 정치사상을 가장 잘 표현한 <독립정신>을 저술했다.

    1904년 미국으로 건너간 이승만 박사는
    1905년부터 1910년까지 워싱턴 대학, 하바드 대학, 프린스턴 대학
    등에서 수학하며 박사학위를 받았다.

    1912년 세계감리교총회 한국대표로 임명돼 하와이에 근거를 두고
    <한국·태평양> 신문을 발간, 박용만·안창호와 힘을 모아 독립운동에 전념했다.


  • ▲ (사진=이종현 기자)
    ▲ (사진=이종현 기자)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고 상해(上海)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됐다.

    1921년 5월 워싱턴 군축회의와 1933년 제네바 국제연맹회의에 참석해서
    일제의 만행과 침략을 폭로하기도 했다.

    광복 후 귀국한 뒤 독립운동가들과 힘을 합쳐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국내외에 선포하고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을 끌어들여
    지금도 우리나라의 평화에 지대한 역할을 하는 한미 동맹을 이뤘다.

    이승만 박사가 맺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이제 동아시아 평화를 지키는 근간이 되고 있다.


  • ▲ (사진=이종현 기자)
    ▲ (사진=이종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