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회 이승만포럼, 김학은 연세대 명예교수 강연한국-체코 건국대통령 이승만, 마사리크 공통점 밝혀
  • 8일 오후 서울 중구 정동제일교회 아펜젤러홀에서 열린 30회 이승만포럼에서 김학은 연세대 명예교수가 강연을 하고 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 8일 오후 서울 중구 정동제일교회 아펜젤러홀에서 열린 30회 이승만포럼에서 김학은 연세대 명예교수가 강연을 하고 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이승만은
    세계 최초의 외교독립 주창자이자 이를 실천한 인물이며,
    여기에 필적할 만한 사람이 체코의 국부로 불리는 마사리크 교수다.

     
       - 김학은 연세대 명예교수


    이승만 대통령과
    사상-이념-활동-업적-평가 등 전 생애에 있어
    [쌍둥이]라 불릴만한
    [유럽판 이승만]이 존재했었다는 견해가 학계로부터 나왔다.

    특히
    두 사람 모두
    강대국에 주권을 빼앗긴 약소국의 건국 대통령으로,
    무력이 아닌 외교를 통해 조국의 독립을 실현하려 했다는 점에서
    놀라울 정도의 유사점을 보이고 있어, 큰 주목을 끌고 있다.

    김학은 연세대 명예교수는
    8일 오후 서울 중구 정동제일교회 아펜젤러 홀에서 열린
    <제30회 이승만포럼>에서 이런 내용을 담은 주제 강연을 했다.

    <이승만과 체코 건국의 아버지 마사리크>라는 제목으로 열린 이날 강연에서
    김학은 교수는 이승만 대통령과 체코슬로바키아의 건국 대통령 마사리크(Thomas Garrigue Masaryk 1850-1937) 교수의 생애를 비교분석한 결과를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김학은 교수가 밝힌 두 사람의 공통점은 다음과 같다.

    출신은 다르지만
    빼앗긴 조국을 되찾기 위한 두 사람의 노력은 똑같다.

    외교독립노선을 주장하고 실천한 점도 같다.

    미국을 주된 외교의 대상으로 삼았고,
    외국어에 능통했다는 점도 놀라울 정도로 같다.

    두 사람 모두
    미국 윌슨 대통령의 정치사상에 크게 기대를 걸었고,
    칸트의 영구평화론을 신봉한 점도 점에서도 같은 길을 걸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의 멸망을,
    마사리크 교수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멸망을 각각 예언했다는 점 역시 같다.


    김학은 교수는
    한국과 체코의 외교독립투쟁과정 역시
    상당히 유사하다고 말했다.

    예를 들면 
    이승만과 마사리크의 외교독립운동을 도와준 사람들이
    중복된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인물이 <허버트 밀러> 교수다.
    그는 한국의 독립과 건국을 도운 공로로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받았다.

    1919년 4월 열린 <제1차한인회의>와
    이보다 6개월 앞서 열린 체코의 <중부유럽선언 회의>가
    미국의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것도 유사하다.

    이날 <이승만포럼> 강연자료는
    김학은 교수가 발간 예정인 <이승만과 마사리크> 제1부의 내용을
    요약 정리한 것이다.

    다음은 김학은 교수의 강연 전문이다.

    ***************************************************************************************


    <이승만과 마사리크>


                                                                           

                                          김 학 은 연세대학교 상경대학 명예교수



    차 례

    I.외교와 독립

    II. 선전과 외교


    I. 외교와 독립


    연구의 동기


    오래되었지만 우연한 기회에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 우남 이승만(雩南 李承晩 Syngman Rhee 1875-1965)의 박사학위 논문 『미국영향하의 중립』을 읽고 이것이 국제법과 외교관련 문헌으로 분류될 수 있겠으나 다른 한편 경제이론에 바탕을 두고 전시에 중립국[비교전국]의 해상교역 권리의 역사적 발전을 추적하고 있는 서적임을 깨달았다.

    다시 말하면 통상법제사에 관한 문헌이다. 경제학적으로 말하면 국제무역의 한 부분으로 오늘날 자유무역협정 Free Trade Agreement이 등장하게 되는 먼 배경의 초기 법제사이다.

    이승만은 그의 학위논문에서 그가 이해한 경제이론을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지 않지만 경제학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그 흔적을 쉽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에게 박사학위를 수여한 곳도 프린스턴 대학의 ‘역사학, 정치학 및 경제학과 Department of History, Politics and Economics’였고, 실제로 그는 조지 워싱턴 대학과 하버드 대학에서 경제학과목을 이수하였다.

    이에 필자는 경제학자로서 언젠가 그의 학위논문을 경제학적 측면에서 논평해보리라는 생각 하에 틈틈이 그의 다른 저서와 논설을 읽으면서 이승만의 정치경제 사상이 일관되게 발전해왔음을 추적할 수 있었으며, 나아가서 그의 독립운동의 지적배경과 독립 후 그의 영도 하에 제1공화국의 경제정책도 어느 정도 합리적으로 인식할 수 있었다.

    여기서 합리적이란, 지금과 달리 당시의 경제학이론을 인식기준으로 보았을 때 그렇다는 뜻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연구자를 압도한 것은 그가 남긴 방대한 자료였다. 현대한국역사에서 이만큼 많은 자료를 남긴 인물이 달리 있었겠는가. 그가 나라 없는 독신의 망명자이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그것은 역사적 사명감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결과, 당시에 이만한 지적수준에 도달한 인물이 한국에 몇 명이나 있었을까, 나아가서 세계적으로도 이 분야에 이승만에 비견할만한 인물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떠올랐다.

    그럴 수 있다면 두 인물의 비교를 통하여 이승만을 심도 있게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흔히 시간과 공간을 달리하는 넬슨(Lord Horatio Nelson 1758-1805) 제독을 이순신(汝諧 李舜臣 1545-1598) 장군에 대조하는 것이 가능하듯이 이승만을 외국인물과 비교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던 가운데 문득 필자가 오래 전 대학생 신분으로 한국자본주의 역사를 공부할 때 김준보 교수의 논문 「삼일운동의 경제사적 의의」 에서 다음 글을 읽은 것을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전략.

    제국주의하 민족항쟁으로서의 삼일운동은 그 기본성격을 ‘비교사적’ 입장에서 추구할 때, 한층 실감적으로 우리에게 파악된다.

    그것은 세계식민사상 지배주의의 과거를 평가하는 동시에, 일제하 우리의 입장을 확인함에 직접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주요 각국의 식민지경영방식(특히 일제하의 대만이나 영국치하의 인도 등)과 더불어 ‘비교측량’할 수 있거니와, 그에 관련하여 특히 제국주의의 진전이 가져온 대중적 항쟁운동의 필연을 실증하는 구상 또한 매우 중요하다.

    그와 더불어, 예컨대 삼일운동을 제1차 대전 전후의 ‘동구 각국’에서 전개된 제독립운동과 대비한다든지, 후략. [원문의 한자의 한글 표기와 따옴표는 필자]

    이어서 그는 각주에 다음을 예시하였다.

    제1차세계대전에 앞서서 동구각국 - 핀란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 그리이스 등은 오랫동안 이민족의 지배 하에 놓여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전후 즉시 이민족으로부터 토지몰수를 포함한 토지개혁을 실시한 바 있었다.

    그밖에 그들의 이민족에 대한 항쟁은 일제하 한민족의 그것과 흡사한 바 있었던 역사이다.[원문의 한자의 한글 표기와 따옴표는 필자]

    이 가운데 체코와 슬로바키아 두 민족은 1620년 이래 1918년까지 거의 삼백년 동안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식민지이었기에 한국의 삼 십 오 년 식민 경제사와 비교할 때 그 식민 경제사가 궁금하였다.

    나아가서 수많은 피정복국가의 독립 후 과거사 청산 범위와 식민 지배기간 사이의 상관관계 분석도 가능하리라고 보았다.

    그러나 여러 관련 문헌을 읽는 과정에서 체코슬로바키아의 건국 대통령 토마스 게리그 마사리크(Thomas Garrigue Masaryk 1850-1937)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에서 1918년 종전에 이르기까지 불과 4년 만에 선전외교방략으로 체코와 슬로바키아 두 민족을 묶어 체코슬로바키아로 독립시킨 ‘전설적인’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합스부르크 왕가가 지배하는 복잡다기한 다민족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왕국 Austro-Hungary Dual Monarchy의 신분제 사회에서 식민지 슬로바키아 농노 출신 마부와 [체코] 모라비아 하녀 출신 가정부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지극히’ 어려운 가운데 스스로 몸을 일으켜 프라하 대학 철학교수가 되었음도 범상치 않거늘, 일개 교수의 신분에서 4년 만에 건국대통령이 되었다는 사실에 더하여, ‘거의 혼자의 힘으로’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을 필설에 의지한 선전외교방략으로 실현시켰다는 역사가 동 시대 유럽인들에게 ‘동화 fairy tale’ 또는 ‘신화 myth’가 되기에 충분하였을 것이다. 한 정치철학자는 그의 업적을 요약하였다.

    마사리크는 민주주의 정치가로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의 업적은 하루 밤 사이에 절대주의 중부유럽 한복판에 민주주의 국가를 창설했다는 점이다.

    고대 로마제국과 신성 로마제국을 천년 동안 계승하여 유럽역사를 좌지우지하였던 절대주의 삼 왕조 - 합스부르크 왕조, 호엔촐레른 왕조, 로마노프 왕조 - 의 붕괴를 논리적으로 예견하고 그 실현에 앞장섰으며 그 가운데 합스부르크를 민주공화제로 대체한 것은 마사리크 교수의 작품이다.

    터키의 오스만 왕조도 이 목록에 추가된다. 고대 로마에서 시작한 시저, 카이저, 자르, 술탄의 칭호도 여기에서 막을 내렸다.

    이를 두고 영국의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David Lloyd George 1863-1945) 수상은 "제1차 대전의 진정한 승리자는 마사리크 교수"라고 말했다.

    절대주의 대 민주주의. 이것이 마사리크 교수 필생의 투쟁이었다.

    이 역사적 사실이 나의 관심을 끌었고, 애초의 김준보 교수가 제시한 비교경제사 보다 비교독립사 내지 비교독립지사에 더 관심을 갖게 만들었다.

    당연히 전체주의에 맞서서 민주주의의 첨병이 되었던 이승만을 마사리크와 비교할 수 있다는 가능성과 마주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이 책의 내용이 주장하듯이, 위의 인용문에서 주어를 마사리크 대신 이승만으로, 배경을 중부유럽 대신 동아시아로 바꾸어도 크게 손색이 없는 것은, 후술하겠지만 위의 인용문에서 ‘민주주의’라 함은 마사리크에게 있어서 매우 모호하고 독특한 개념이었기에 이승만에게도 어울릴 수 있는 문장일 것이라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사리크에 있어서 민주주의란 귀족주의[절대주의]의 반대어에 불과하였다. 그렇다면 이승만에게 있어서 민주주의란 전체주의의 반대어였을 것이라는 추정을 해본다.


    연구의 방법


    필자는 독서가 부족한 탓인지, 이승만을 비롯한 한국의 독립지사들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 몇몇 훌륭한 글을 제외하고는 ‘평가기준’을 만족하게 제시한 글을 찾기 어려웠다.

    더욱이 한국사의 관점뿐만 아니라 세계사의 관점에서 볼 때 더욱이 그러하다.
    절대주의 대 민주주의 또는 전체주의 대 민주주의라는 이념의 구도에서 볼 때에도 그러하다.
    역사에서 전기야말로 쓰는 사람의 주관이 가장 영향을 미치는 분야인 탓일 것이다.

    역사문헌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동기 아니면 결과에 의존하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동기는 겉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다.

    여기에 더하여 "선의가 우리를 지옥으로 인도한다.
    The road to hell is paved with good will."라는 서양속담이 가리키듯이 그 동기가 아무리 순수하다 하여도 결과는 의도와 다를 수도 있다.

    이렇게 보면 결과가 인물과 역사를 평가하는데 더 객관적이겠으나 그것은 승자(?)가 독점할 수 있고 패자(?)의 해석에 따라 좌우될 수 있다는 단점이 있다.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견해에 경도될 위험도 있다. 이에 하나의 결과를 놓고 될 수 있는 대로 여러 문헌을 균형 잡힌 시각에서 비교분석하는 연구가 중요할 것이다.

    그러나 또 하나의 방법이 있다.

    앞서 김준보 교수가 제시한대로 여러 비슷한 결과를 비교하는 방법이다. 이것은 귀납법에 속한다.

    하나의 개별적 현상에서 드러나지 않는 ‘법칙’이 전체를 보면 발견할 수 있다는 가설은 께뜰레(Adolf Quetelet 1796-1874) 이래 현대통계학 귀납법의 기본이 되었다.

    이승만 외교독립방략의 단독 연구만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어떤 보편성을 마사리크의 그것과의 비교에서 찾아낼 수 있다는 가설도 여기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이 방법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지성사 연구에 이미 나타나고 있다.

    지성사를 역사학에서 제외시키는 주장과 포함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대립되어 있다.

    후자의 경우 방법론이 문제였다. 두 가지가 제안되었다.

    하나는 하나의 역사적 사건에 대한 연구자들의 의견 사이에 관계를 조사하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의 역사적 사건에 대한 견해와 다른 사건에 대한 견해 사이에 관계를 규명하는 방법이다. 여기서 사상과 사상의 연결과 보편성이 발견되기를 희망한다.

    이승만과 마사리크를 비교하는데 있어서 이승만은 한국사상과 서양사상의 산물이고 마사리크는 체코사상과 유럽사상의 산물이지만, 두 인물이 공유하는 사상이 있으니 칸트 Kant의 영구평화사상이다. 이것을 잣대로 두 사람을 비교하도록 한다.


    연구의 범위


    대한제국이 일본에 의해 강점되고 불법적으로 국권마저 빼앗겨 마침내 식민지가 되었다. 여러 애국지사들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 내세운 방략에 무장독립, 준비독립, 그리고 외교독립이 있다.

    그 가운데 준비독립은 그 준비의 목표가 무장준비인지 외교준비인지 불분명하다.
    이렇게 볼 때 결국 무장독립과 외교독립으로 압축된다. 이 두 가지 방략은 모두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우선순위를 둘러싸고 의견이 갈린다.
    참고로 일본이 대한제국을 병탄했던 순서를 보면 군대 해산(1907년)보다 외교권 박탈(1905년)을 앞세운 것은 그들의 우선순위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가리킨다.

    이승만의 외교독립 우선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으며 그 공과에 대하여 시비가 분분하다. 그 와중에 이승만을 다른 방략을 제시한 독립지사와 비교한 연구도 적지 않다.

    그러나 모두 국내 독립지사와 외형적 비교에 그쳤다. 이에 대하여 외국의 어떠한 독립지사의 방략은 물론, 특히 마사리크의 외교독립방략과 비교한 연구는 일찍이 없었다.

    이 연구는 이승만과 마사리크의 비교를 외교독립방략에 조명한다.

    비교연구의 취지가 마사리크를 내세워 이승만을 찬양하거나 격하하자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취지는 한편으로 공정하지도 않고 거꾸로 이승만을 내세워 마사리크를 평가하는 순환론의 모순을 가져올 수 있으며, 또 한편으로는 다른 독립방략을 주장했던 한국독립지사를 비슷한 주장을 하는 외국독립지사와 비교하는 논자 자의의 주장 전개도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한국현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만큼 논란도 격렬하지만 그것이 숭배나 폄하할 이유는 못된다고 생각한다.

    그 역시 하나의 인간이었기에 장점과 단점을 모두 지니고 있었다. 마사리크 역시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 모두 난세를 헤쳐나간 다른 역사적 지도자들처럼 복잡하고 모순되며 뛰어난 인물이다.

    그리고 오늘 우리의 생활에 깊은 영향을 남기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동시에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은 인물이다.

    따라서 비교연구의 취지는 두 인물의 외교독립방략에서 어떤 보편성을, 실패할지도 모르지만, 찾아내고자 하는 것이다.

    연구의 범위와 취지가 두 인물의 외교독립방략에 한정되면 먼저 지배자의 억압으로부터 ‘해방’과 국제법상 ‘독립’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이에 따라 그 활동 시기는 마사리크의 경우 제1차 세계대전 기간과 그 배경이 되는 그 이전으로 거슬러 연장되지만, 1918년 해방을 거쳐서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서 승인한 독립 직후에 일어난 영토전쟁이 끝나는 1920년까지를 포함한다.

    이승만의 경우는 제2차 세계대전 기간과 역시 그 배경이 되는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여기에 1945년 해방을 거쳐서 실제 독립이 되는 1948년의 이승만 외교역량의 총세와 이승만 외교의 결정체라 할 수 있는 1953년의 한미상호방위조약까지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마사리크가 제1차 세계대전에서 러시아 내전에 휩쓸린 체코슬로바키아 반공포로를 이용하여 연합국, 특히 미국의 윌슨 대통령과 협상을 벌린 것으로 그의 외교독립에 대미를 장식한 것과, 이승만이 한국전쟁의 반공포로를 이용하여 마침내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Dwight D. Eisenhower 1890-1969)에게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이끌어 내어 그의 외교정책의 백미가 된 것이 쌍벽을 이루기 때문이다.

    혹시 이승만이 자신의 정치생명을 걸고 감행한 반공포로석방이라는 도박은 마사리크에게서 암암리에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닐까?

    제1차 대전 때 러시아전선에 갇힌 체코슬로바키아 반공포로를 구출하기 위한 작전에 미국을 위시하여 11개국이 3년간 개입하였으며, 한국전쟁에서도 미국의 선도 하에 16개국이 3년간 참전하였다는 점도 흥미로운 비교이다.

    체코포로군단 구출작전 개입은 인도주의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제1차 대전 직후 탄생한 레닌의 소비에트 공산주의 혁명정권에 대한 연합국의 타도에 있었고, 한국전쟁의 개입 역시 민주주의 방어를 내세우고 제2차 대전 직후 스탈린의 소비에트 공산주의 팽창에 대한 국제연합의 저지에 있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제1차 대전과 파리강화회담 내지 국제연맹의 탄생아이고 한국은 제2차 대전과 국제연합의 탄생아이다.

  • 체코 프라하 성 앞에 우뚝 서 있는 건국대통령 마사리크 동상.
    ▲ 체코 프라하 성 앞에 우뚝 서 있는 건국대통령 마사리크 동상.


    인물의 선택


    이미 밝혀졌지만 이 책에서 이승만과 귀납적으로 비교되는 인물로 선택된 인물은 마사리크이다.

    그 출발은 이승만과 마사리크가, 비록 한 사람은 몰락한 왕가의 후예였고 다른 한 사람은 농노의 아들이었다는 점은 다르지만, 비슷한 점이 허다하다는 데에 있다.

    일찍이 정한경 (Henry Chung 1891-1985) 박사도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의 토마스 마사리크처럼 이[승만] 박사는 정치가이며 학자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보아서 두 사람 사이의 유사점을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이 유사점을 더욱 확장해 보면, 국내에 가족을 남겨두고 해외에 거점을 두었던 망명 독립지사, 개혁가, 언론인, 박사, 교수, 학자, 대의원, 저술가, 외교가, 웅변가, 선전/선동가, 평화주의자였다.

    그리고 마사리크와 이승만은 모두 높은 이상을 지닌 현실주의자였다.

    이 책의 목적에 부합하는 가장 중요한 공통점은 두 사람 공히 외교독립을 우선적으로 주창하였다는 사실이다.

    그 과정에서 두 사람 모두 역시 학자 출신인 평화주의자 미국 대통령 윌슨(Woodrow Wilson 1856-1924)의 정치사상에 크게 기대하였다.

    마사리크가 미국에 의존하는 선전외교방략을 주장했을 때 그것은 돈키호테의 무모한 도박이라고 아무도 지지하지 않았듯이, 이승만의 방략을 따르는 사람도 많지 않았지만, 두 사람 모두 개의치 않고 초지일관 하였다.

    그럼으로써 두 사람 공히 여러 갈래로 분열된 독립단체들 가운데 단연 두각을 나타내어 주도권을 잡았고 끝내 그 정통성을 고수한 사실은 지적 카리스마와 세계가 인정하는 대의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두 사람 모두 한 때 동지였으며 동시에 정적이었던 인물들의 의문스런 사망과 암살 미수를 둘러싼 ‘세간’의 소문에 휘말렸다.

    두 사람 모두 독립운동 자금 유용의 구설수에서 자유롭지 못했으며 독립운동 기여도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도전 받았다.

    부인도 모두 외국인이었으며 독립운동 과정에서 전염병으로 아들을 잃었다는 점도 같다.

    마사리크의 남은 아들이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여 커다란 실망이 되었고 이승만에게 첫 번째 양자가 비극이 되었던 사생활까지 닮았다니!

    사적으로 어머니의 종교를 버리고 ‘개신교 입국론’을 주장한 점도 공통적이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근대유럽의 민족주의의 원천이 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한 이승만이 한국의 독립적인 교회가 필요함을 강조한 것처럼 마사리크도 얀 후스(Jan Huss 1369-1415)의 전통을 잇는 체코의 독립적인 교회가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두 인물 모두 청년기에는 기울어져가는 기존질서를 거부하는 개혁가/이단아였고, 장년기에는 미래를 내다보고 제자를 양성하는데 힘썼으며, 노년기에는 세계대전의 발발과 함께 제자를 데리고 망명정객으로 외교독립운동을 하였다는 점까지 닮았다.

    이승만이 청년단체인 기독교청년회 YMCA의 중요성을 인식하였듯이, 마사리크 역시 청년단체인 소콜 운동 Sokol Movement의 중요성을 일찍부터 간파하였다.

    마사리크가 독립국가의 대통령이 되었을 때 그의 나이 68세였고 이승만 역시 그 자리에 올랐을 때 73세였다. 신생 독립국의 지도자 자리는 평생을 대의에 바친 노 독립투사들에게 어울리는 자리였는지 모른다.

    이승만은 책임감이 강한 업적지향의 노력가였고 마사리크 역시 그에 못지않게 절제와 도덕을 강조한 인물이었던 만큼 모두 금욕(금연과 금주)주의자에 높은 뜻을 간직하였으면서도 생활은 소박하였다.

    그럼에도 지성만큼 청결과 외모를 중시한 것은 두 사람 모두 국제적 외교무대를 항상 의식하며 조국을 대표하는데 손색없는 국제신사가 되고자 노력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무대에서 반드시 필요한 외국어를 완전하게 구사하였다. 이승만은 영어사전을 통째로 암기하였으며, 마사리크 역시 라틴어사전을 통째로 암기하였다.

    두 사람 공히 모국어 이외에 4개 이상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 당대의 최고 지성인 가운데 하나였는데, 이승만은 동양 고전(한문문헌)과 영어에 능통하였고, 마사리크는 서양 고전(라틴희랍문헌)과 영어문헌을 원문으로 읽는데 능숙하였다.

    이승만은 배재학당에 새로운 문물을 알기 위하여 영어를 배울 욕심으로 문을 두드렸으며, 마사리크는 보헤미아의 낙후를 극복하기 위해 외국어 공부를 장려하였다.

    이승만과 마사리크. 두 사람 공히 외국어를 정규교육 이외에 부유한 외국인에게 한때 가정교사를 함으로써 습득하였고, 가정교사로 자신을 부양하였다.

    언어의 중요성은 정한경이 정확하게 지적하여 한국독립운동 지도자의 자격으로 세 가지를 꼽았다.

    (1) 그는 반드시 진정한 의미에서 한국 애국자여야 한다.

    (2) 그는 말하고 쓰기에서 영어가 완벽해야 한다. 여기에 그가 프랑스어까지 영어만큼 구사한다면 더할 나위가 없다.

    (3) 그는 서구 시각에서 볼 때 훌륭한 학자로서 유럽과 미국 정치를 이해하여야 하며 서양의 심리를 파악해야 한다.

    이것은 마사리크를 모범으로 보고 이승만을 의중에 둔 주장이라 할 수 있다.


    독립정신


    이승만과 마사리크는 거의 가망이 없는 상태에서 조국의 독립을 믿었다.

    마사리크는 썼다.

    “전쟁 [제1차 대전] 전 우리의 조국이나 다른 소국들이 독립할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은 너무 오래되었다. … 그럼에도 나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고는 한 번도 믿지 않았다. 이 신념은 나의 모든 행동과 지침을 위험에 빠뜨렸다. … 우리가 자유를 지킬 만큼 도덕적이고 준비된 상태이고, 국내나 국외에서 정직하고 정당한 정책을 따르기 충분한 정치적 이해를 가지며, 그리고 민주적으로 강한 유럽국가의 동정을 획득할 수 있다면 가능하다고 믿었다. 민주주의 원칙이 널리 확장되는 상태에서는 한 국가가 다른 국가를 지배할 수 없게 된다.
    18세기 이후 유럽 역사가 소수민족도 민주주주의 자유 하에서 독립할 수 있다는 점을 증명하였다. 이번 세계 대전은 프랑스 혁명에서 시작된 이 운동의 절정이다.”

    이승만도 기록하였다.

    “우리 마음을 돌아보아 조금이라도 ‘우리는 할 수 없다’는 생각이 있다면 이러한 생각을 버리고 … 스스로 행동에 나서야 할 것이다. … [이러한] 신념을 가지고 최선을 다한다면 우리나라도 반드시 문명부강한 나라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도덕적 원칙이 있느냐 없느냐를 중요한 기준으로 삼는다. … 도덕적 원리를 중시하기 때문에 … 우리가 올바른 목표만 추구한다면 여러 나라 사람들이 우리를 도울 것이다.”

    “동양의 도덕이 점점 쇠퇴하면서 … 이 같은 뿌리 깊은 나쁜 습관을 고치치 않고는 다른 나라와 좋은 관계를 발전시킬 수 없다. … 진실함을 외교의 근본을 삼아야 한다.” “프랑스 혁명 기록에 대해 읽은 사람들은 … 백성들의 지식이 늘어나자 마침내 미국 제도를 본받아 민주국가가 되었다. … 프랑스 혁명으로 정치개혁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다른 유럽 국가들도 민주공화국이 되었다. … 영토와 인구가 작은 나라들까지도 그들의 주권을 보호하며 … 올바른 정치의 힘이 계속 커져서 동양으로 파도처럼 밀려드는데 누군가 홀로 반대하며 막으려 한들 과연 누가 이기고 누가 지겠는가.”

  • 체코 우표속의 마사리크 건국대통령.
    ▲ 체코 우표속의 마사리크 건국대통령.

    평화주의


    이유는 달라도 두 사람 공히 사형선고를 목전에 둔 적이 있었으며, 폭력과 무력을 혐오하는 평화주의자에, 왕조의 해체를 주장하는 공화주의자가 되었다.

    두 사람 모두 칸트의 영구평화사상을 신봉하였다.

    이승만의 저서 『일본 내막기 Japan Inside Out』는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이 책을 세상에 내놓는 동기가 전쟁을 위해서가 아니라 평화를 위한 것임을 먼저 밝힌다.”

    마사리크도 그의 저서 『국가창설 The Making of A State』에서 체코의 구원자가 “시저가 아니라 예수”라는 유명한 표현을 남겼다.

    그래서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세르비아에게 최후통첩을 보낸 [1914년] 7월 23일 나는 여전히 긴장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평화의 희망은 버리지 않았다.”라고 적고 있다.

    마사리크는 폭력에 반대하며 “자기희생은 [체코]민족의 이상이 되어왔다. … 이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순교가 민족에게 하찮은 일상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이어서 “참된 인본주의의 목표는 … 폭력과 영웅적 행위와 순교라는 낡은 이상을 극복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마사리크가 얼마나 폭력을 혐오했는지 좋은 예가 있다.

    러시아의 황실과 국정을 농단한 괴승 라스푸틴(Gregory Rasputin 1869-1916)의 암살을 망명지인 런던에서 듣고 그는 다음과 같이 촌평하였다. “진실은 [러시아의] 관계나, 정계나, 교계가 라스푸틴의 영향에 맞서지 못했고 자르와 황후를 보호할 능력이 없었다는 점이다.

    암살만이 라스푸틴을 제거할 수 있다면 그 명분이란 도덕적으로 법률적으로 과연 무엇이어야만 하는가? - 그것도 어떻게 될지 알고 무엇이 행위의 증거가 될지 아는 고위의 귀족, 제국의회의 보수의원, 황실의 일원이 암살자라니! (푸리쉬키예비치에 의한) 암살의 전모를 읽고 나는 이들이 생각이 없는 만큼 불필요한 잔혹성으로 심지어 범죄에서 조차 얼마나 생각이 없고 무능한 사람인지 알게 되었다. … 이들은 그 범죄 또는 그보다 더한 범죄에서 조차 무능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마사리크가 무조건 폭력에 반대한 것은 아니다.

    1887년 톨스토이와 토론을 하는 자리에서 그가 “[톨스토이]의 견해와 다르게… 우리는 항상 악에 항거해야 한다.”라고 반대의견을 표명한 것은 악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자기방어’를 위한 폭력은 허용해야 한다는 뜻이다.

    제1차 세계대전을 반대하였던 프랑스의 평화주의자 로망 롤랑(Rolland Romain 1866-1944)과 거리를 두었다.

    마사리크는 1913년까지 두 번이나 노벨평화상 후보에 거론되었지만 그를 두려워하였던 오스트리아 황위 계승자 페르디난트 대공(Archduke Franz Ferdinand 1863-1914)의 방해로 무산되었다.

    이승만 역시 자기방어의 폭력은 인정하였다.
    평화주의자답게 자유와 권리를 국가의 최고 덕목으로 삼았고 여성참정권을 포함한 보통비밀선거제도를 도입한 점도 공통점이다.


    문필가


    이승만이 누대로 사대주의에 의존하여 잠자고 있던 백성을 깨우칠 목적으로 『독립정신』을 한문 대신 한글로 쓴 것이나, 마사리크 또한 비슷한 목적으로 『체코역사의 의미 The Meaning of Czech History 1879』를 독일어가 아닌 체코어로 집필한 것이 닮았다.

    한국이 오래 동안 중국을 의지하여 ‘잠자고’ 있었던 것처럼, 체코 역시 “다른 나라가 수 세기 동안 그들의 문화를 발전시킬 때 우리[체코]는 잠자고 있었다.”

    이승만이 그의 대저가 된 박사학위논문 『미국영향하 중립 Neutrality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 1912[1910]』을 영어로 써서 미국 국제외교의 당대 권위자가 된 것은, 마사리크가 그의 대저 『러시아 정신 The Spirit of Russia 1913』을 러시아어로, 『소국의 문제 The Problems of Small Countries in the European Crisis 1915』를 영어로 저술하여 러시아와 국제정치의 당대 권위자가 된 것에 견줄 만하다.

    역시 이승만이 『일본 내막기 Japan Inside Out 1940』를 출판하여 일본제국의 도발과 몰락을 예측한 것을, 마사리크가 『사회현안 Social Question 1898』과 『자살론 Suicide and the Meaning of Civilization 1879』을 발표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도발과 몰락을 예측한 것과 나란히 둘 수 있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보스니아-헤르제고비나 강제합병이 세르비아에 대한 선전포고를 거쳐 영국, 프랑스, 러시아, 그리고 미국을 전쟁에 불러드리는 서곡이라고 마사리크가 인식한 것의 짝을 찾는다면, 일본 제국의 한국 강제합병이 만주사변을 거쳐 중국 그리고 미국을 전쟁에 불러드린 전초라고 이승만이 예측한 것에서 고를 수 있다.

    두 사람 모두 많은 서적과 논설을 집필하였으나 구체적이며 정합적인 정치사상을 드러내지 않은 점은 이들 보다 글의 분량은 많지 않으면서 삼민주의를 주창한 손문과 대비된다.

    이승만이 한글보급과 국민계몽을 목적으로 한국최초의 일간신문인 『매일신문』을 창간할 무렵, 마사리크 역시 비슷한 목적으로 잡지 『학술진흥 Athenaeum』을 창간하였다.

    마사리크가 자신의 주장을 신문, 잡지, 서적, 개인적 친분, 각종회의에 크게 의존한 것처럼, 이승만 역시 신문, 잡지, 서적, 개인적 친분, 각종회의를 끊임없이 이용하였다.

    이승만이 한국인 최초로 시작한 『영한사전』을 『독립정신』 집필의 시급성으로 중단했듯이, 마사리크는  최초의 체코어『백과사전』을 기획하다가 『학술진흥 Athenaeum』의 논쟁에 휘말려 중단하였다.


    독선


    측근정치를 하였으며 정적에 대하여는 관대하지 않았다.

    흔히 이승만이 독선적이라고 일부 평자들은 비난하지만, 마사리크 또한 대단히 독선적인 인물이었으며 조건 없는 충성을 요구하였다.

    윌슨 역시 그 같은 일면이 강했는데 제1차 대전에서 민주당-공화당 연정의 전시내각을 거부하고 민주당 측근만으로 내각을 구성한 이유를 묻는 마사리크에게 “자신에게는 연정이나 타협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고백하면서 “나는 솔직히 말해서 스코틀랜드 장로교인의 후손이라서 완고하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하여 마사리크는 “윌슨 대통령은 비판에 지나치게 민감하여 참지 못하는 성격”이며 “실제적이라기보다 이론적이며 귀납적이라기보다 연역적이었다.”라고 평했다.

    측근정치를 선호한 마사리크가 아들을 대사로, 딸을 국회의원으로 임명하였는데, 타협할 줄 모르는 윌슨도 사위 맥아두(William Gibbs MacAdoo 1863-1941)를 재무장관에 재임시켰고 연방준비은행 이사도 겸임토록 하였다.

    이와 달리 이승만은 이러한 족벌주의에서 자유로웠다.

    윌슨은 프린스턴 대학총장으로서 이승만에게 박사학위를 수여하는데 그치지 않고 1914년 딸 엘리노아(Eleanor Wilson 1889-1967)가 맥아두 (William Gibbs MaAdoo 1863-1941) 재무장관과 혼인할 때 이승만에게 청첩장을 보내어 화제가 될 정도로 둘 사이는 사제지간이 되었다.

    하와이에서 청첩장을 받은 인물은 하와이 총독과 이승만뿐이었다.

    마사리크가 윌슨을 설득하기 위해 미국에 도착했을 때 많은 사람과 만났는데 그 가운데 맥아두 장관이 있었으며 그를 통해 미국 금융계인사들과 교유하였다.

    이승만과 마사리크.
    두 사람 모두 독선에 지적 우월감까지 가세하여 가는 곳 마다 반대파가 등장하여 고립 되었다.

    마사리크에게는 가까운 친구도 없었다.

    "[마사리크]의 말하는 태도와 지시는 상대방에 반감을 갖도록 하여 반대자로 만든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그의 비판 방식에 매료되어 동일한 방식을 그[마사리크]에게 사용하고, 나아가서 유쾌하지 않고, 비민주적이며, 귀족적인 형식으로 발전시켰다. 그 결과 사람들이 그들에게서 멀어지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두려움이 없는 타협할 줄 몰랐던 원칙주의자였다.

    그의 연설에서 이승만은 “나는 두렵지 않다. 모두 나를 비난하라고 하라. 하나님만이 나를 질책하지 않으신다면 그뿐이다.”라며 독선에 가까운 신념에 차있다.

    마사리크의 일생은 “다수, 사회의 암시적 강요, 무비판적인 견해, 전통과 집단적 미신에 대한 투쟁이었다.”

    마사리크는 “전통, 다수, 편견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도 때때로 실수하지만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는 숭고한 이단에 속한다.”


    약소국


    한국은 러시아, 중국, 일본이 둘러싼 약소국이었고, 체코슬로바키아는 러시아,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에 포위된 역시 약소민족이었다.

    두 나라는 지정학적으로 고립된 요새이다.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체코슬로바키아를 오스만 터키의 침략으로부터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점령했듯이, 일본 제국은 한국을 러시아의 야욕에서 보호한다는 구실 하에 강점하였다.

    그러나 마사리크의 항의처럼 보호가 반드시 억압이라는 법은 없지 않겠는가? 또 러시아로부터 보호할 필요가 없는 대만 점령에 대한 일본의 명분은 무엇인가?

    체코슬로바키아가 문화민족이듯이 한국 역시 높은 문화를 창조하였다.

    로마교황, 합스부르크왕가, 독일군국주의에 저항했던 체코에게서 중국, 몽고, 일본에게 굴복하지 않은 한국의 모습이 겹쳐진다.

    역사에서 강자에게 굴복하여 사라진 나라가 그 얼마였으며 부활한 나라 그 또한 얼마였던가.

    그럼에도 국제사회에서 조선 혹은 한국은 알려지지 않은 존재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체코슬로바키아라는 국명은 역사에서도 아예 없었으며 그나마 알려진 이름은 보헤미아 정도였는데 이것마저 집시 또는 ‘방랑자[보헤미안]’라는 선입견이 지명의 뜻을 오도하였다.

    체코와 슬로바키아를 묶어 하나로 만든 것은 마사리크의 회심의 작품이지만 그럼에도 마사리크 자신도 런던 망명시절 작성한 비망록에서 체코슬로바키아라는 이름은 쓰지 않고 ‘보헤미아의 독립’이라 표현하고 있다.

    선교사를 파송하는 미국교회 목사의 기도 가운데 한국은 ‘남태평양의 한국,’ 영국교회에서는 ‘코르시카 옆에 있는 코리아’라고 밖에 알려지지 않은 형편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신의 존재를 계속되는 발칸전쟁에 식상한 열강에게 무력이나 폭력에 호소하지 않고 평화적으로 알리는 것이 무엇보다 급선무였다고 믿은 마사리크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민주적 선전외교에 승부를 기대하였고, 이승만 역시 간전기 間戰期 - 제1차와 제2차 세계대전 사이 - 에 또 한 번의 세계대전이나 폭력을 혐오하는 국제적 분위기에 어울리는 민주적 선전외교에 승부를 걸었다.

    대부분의 한국 독립지사들이 사대주의 틀에 갇혀서 중국에 또는 이념에 사로잡혀 새로 등장한 소비에트 러시아에, 대부분의 체코슬로바키아 독립지사들이 범슬라브주의에 현혹되어 제정 러시아에 커다란 기대를 건 것은 당시로서는 자연스러운 안목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이승만과 마사리크는 모두 이를 탈피, 세계대세를 정확하게 읽고 미국을 이용하여 조국을 독립시키려는 외교정책을 밀고 나가 마침내 성공하였다는 공통점은 오늘날은 당연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19세기말-20세기 초 당시로서는 아직 강대국이 아닌 미국의 국제적 지위를 고려하면 매우 어려운 선택이었다고 아니할 수 없다.

    전통적으로 후견인이었던 중국이 부패, 외침, 패전, 혁명으로 빈사상태에 빠지자 한국에서 사대주의파가 몰락한 것처럼 기대했던 제정 러시아가 역시 부패, 외침, 패전, 혁명으로 쓰러지자 체코에서 범슬라브주의파가 몰락한 반면, 미국이 세계 제1의 강대국으로 등장한 것은 그만큼 그들이 미국의 가능성을 예견할 수 있는 혜안을 갖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이승만은 줄기차게 중국, 러시아, 일본의 세력균형의 완충장치로서 동아시아 평화에 있어서 한국의 독립이 필수적임을 선전외교를 통하여 미국 조야에 역설하였고, 마사리크 역시 러시아,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세력균형에 완충지로서 유럽 평화에 있어서 체코슬로바키아의 역할을 제1차 대전의 연합국 특히 미국에 강조하였다.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 1815-1898)는 한때 말했다.

    “보헤미아는 유럽대륙 한복판에 세워진 자연요새이다. … 보헤미아가 러시아 수중에 들어가면 독일은 노예가 되고, 우리 수중에 넣으면 자르의 제국과 휴전 아니면 전쟁이다.”

    마사리크는 마르크스를 비판하는 최초의 조직적 저서를 쓴 사람답게 마르크스주의의 가장 격렬한 반대자였고, 이승만은 한반도에 대한 러시아의 야심을 청년기부터 인식한 터라 모두 반소, 반공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음은 당연한 귀결이다.

    마사리크가 공산주의자와 합작을 거부한 것처럼 이승만도 단연코 그러했다.

    마사리크의 후계자 베니시(Edvard Benes 1884-1948)는 그의 전임자와 달리 친소적 경향이 있었는데 그를 소개하고자 했던 배민수(1886-1968)의 권고를 이승만은 거절하였다.

    그러나 필요하다고 판단했을 때에는 러시아에도 손을 뻗었다.
    마사리크는 러시아가 극도로 기피하는 인물이어서 러시아 입국조차 허락되지 않았지만 기회가 왔을 때에는 그들과 담판을 피하지 않고 러시아를 찾았듯이, 이승만 역시 소비에트 러시아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때에 담판할 것을 주저하지 않고 소련을 방문한 적도 있다.

    이승만이 미국의 개신교, 민주주의, 자본주의에 편승한 것은 마사리크가 미국의 개신교, 민주주의, 자본주의에 기댄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럼으로써 이승만은 조국의 존재를 그 역사에서 최초로 대륙세력이 아닌 해양세력 속에서 찾은 만큼, 마사리크 역시 시야를 넓혀 모국의 존재를 그 역사에서 처음으로 범슬라브주의가 아닌 전 유럽 내지 세계 속에서 인식하였다.

    “우리[체코]의 정책은 세계정책이 되어야만 한다. 비스마르크가 보헤미아의 지배자가 유럽의 지배자라고 말했을 때 그는 제국주의와 범게르만주의의 시각에서 우리[체코]의 민족 nation과 국가 state의 위치가 유럽에서 바로 한복판임을 이해한 것이다.”

    그 구체적인 증거로 마사리크가 오랜 유럽역사의 절대주의에 대항하여 민주주의를 내걸고, 이승만이 새로 등장한 전체주의에 맞서서 민주주의의 첨병이 되었다는 데에서 찾아볼 수 있다.

    구체적으로 마사리크는 체코 독립운동의 목표를  중부유럽 최초의 민주주의 실현에 두어 미국의 참전목표에 일치시켰고, 이승만은 한국을 아시아 최초의 개신교 국가로 만들겠다는 목표로 기독교에 기초한 미국건국 정신에 일치시켰다.


    외교방략


    이승만은 상해 임시정부 본부와 별도로 워싱턴 사무소에서 미국을 상대하여 외교활동을 했으며, 마사리크 역시 파리 임시정부 본부와 별도로 런던 사무소에서 처음에는 영국과 프랑스, 후에는 미국의 참전과 더불어 미국을 외교적으로 상대하였다는 유사점도 눈길을 끈다.

    각각 공간적으로 떨어져 있는 임시정부를 원격 통치하기 위해서 통신원제도를 활용하였다.

    마사리크는 재정을 완전 장악하였으며, 이에 비해 상대적으로 여건이 불리하였던 이승만 역시 재정을 어느 정도 장악하였다.
    모두 독립을 담보로 채권을 발행하여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하였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지리적으로 무장봉기가 어려운 나라였다.
    합스부르크에 충성하든지 러시아가 구원해주길 기다리든지 양자택일의 길밖에 없어보였다.

    한국도 지리적으로 무장봉기가 쉬운 곳은 아니다.

    결국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탈출을 의미한다.
    이승만이 105인 사건의 대량 체포에서 간신히 서울을 탈출했듯이, 마사리크 역시 제1차 대전의 계엄령 하의 대량 체포에서 프라하를 탈출한 유일한 체코출신 제국의회 의원이 되었다.

    이승만과 마사리크. 두 사람에게 무력이 외교방략이라는 커다란 틀 속에서 하나의 수단밖에 될 수 없었던 것은, 첫째, 개인적으로 무력과 폭력을 극히 혐오했다는 점에 더하여, 당시 국제사회가 기존의 평화질서를 유지하는 것을 선호하였고, 둘째, “우리[체코슬로바키아]는 우리 힘만으로는 결코 자유를 획득할 수 없었다.”고 고백한 것은 약소국이 힘으로는 강대국, 그것도 1천년 동안 유럽의 중심 제국이었던 합스부르크에 상대가 되지 않았고, 셋째, 독립 후에 집단안보체제에 의존해야만 하는 약소국으로서 공통의 운명 때문이었다.

    이승만도 자력만으로 독립을 쟁취하기 어렵다고 보고 외교독립에 무게를 실었다.

    그러나 무력사용에 대한 외교독립주의자 마사리크의 태도가 제1차 세계대전의 동부전선인 제정 러시아에 갇힌 체코슬로바키아 반공포로군단이 위기에 처했을 때 달라졌듯이, 외교독립주창자 이승만 역시 미일개전과 함께 대일무장투쟁을 병행하였다. 이승만은 전시에 군작전권을 유엔군에 이양하였고, 마사리크는 전시뿐만 아니라 평화 시에 프랑스에게 군통수권을 맡겼다.

    이승만의 외교역량과 그 방법이 도전 받았고 현재도 받고 있듯이, 체코 포로군단의 역할 보다 마사리크의 외교역량에 무게를 두는데 대하여 반론도 만만치 않다.

    마사리크의 공헌이 과장되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활약이 대단하였던 폴란드 포로군단이나 세르비아 포로군단으로도 폴란드나 세르비아가 파리강화회의에 초대받지 못했지만 체코슬로바키아는 초대받았다는 사실을 보면 외교가 더 중요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전쟁 초기에 누구도 전쟁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 수 없어서 아직 중립국이었던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교전국에게 전쟁의 목적을 문의하는 웃지 못 할 상황에서 마사리크 혼자만이 전반적인 전쟁의 목적, 양상, 전망을 비망록으로 만들어 연합국 지도자들에게 배포하고 체코슬로바키아 독립투쟁의 목표가 연합국 특히 미국의 목표와 일치함을 보였다.

    이것이 그의 외교방략의 핵심이었고 주효하였다.

    게다가 다른 지도자들과 달리 제1차 대전이 예상보다 빠르게 종결된다고 전망한 마사리크는 여러 가지 구실을 만들어 체코포로군단을 시베리아로부터 무사히 귀국시키는 데에만 열중하였다.

    실제로 윌슨 대통령에게 적당한 핑계를 댔으며, 러시아나 루마니아 등 어느 전선에서나 체코포로군단이 오스트리아-헝가리 군과 싸우는 것도 구실을 만들어 피했다.

    체코포로군단을 러시아에서 빼내는 경로를 택하는데 있어서도 시간을 끌기 위해 가장 긴 시베리아 경로를 선택하였다.

    결과적으로 2년이 걸렸으며 전쟁이 종료된 훨씬 이후의 일이었다.

    마사리크는 체코포로군단을 시베리아에 두고 홀로 떠나면서 러시아 내전에 휩쓸리지 말 것을 엄명했으며, 내전에 개입하는데 도화선이 되었던 쿠데타의 주역을 강제 퇴역 시켰다.

    영국의 무관은 마사리크가 현장에 있었으면 그 같은 사태가 발생하지 않았으리라고 애석해 했던 사실로 유추하건대 마사리크는 체코포로군단에 대한 평화적 수송 계획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그 군사적인 과정에서도 그의 외교력이 발휘되었다. 그 결과 주적인 오스트리아-헝가리와는 한 번도 싸우지 않고 오히려 러시아 영토에서 볼셰비키와 선전포고 없는 전투를 하게 되었다.

    이렇듯 한번 잃은 나라를 되찾고자 하는 약소민족의 독립운동이란 그 폭과 깊이가 보통 사람들의 상상을 뛰어 넘어서야 하는 거의 불가능한 작업이었다.

    더욱이 그들이 걸어갔던 독립운동의 길은 처음부터 어떠한 공식으로 주어졌던 것이 아니다. 해방 후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던 남한의 극심했던 혼란상을 생각하면 이 점 뚜렷해진다.

    두 사람 모두 보이지 않는 길을 개척해 나갔다.
    예를 들면, 마사리크는 합스부르크 왕조 우산 하에 각 민족 자치정부의 연방제 주장에서, 로마노프 왕관 하의 슬라브 연방제 주장으로 선회하는 듯하더니, 합스부르크의 오스트리아-헝가리를 해체하고 공화제 체코슬로바키아의 완전독립을 주장하는 방향으로 대선회하였다.

    그러나 그 역시 체코슬로바키아와 유고슬라비아를 연결하는 소위 체코 통로 the Czech Corridor를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자치에서 완전 독립, 그러나 현실적으로 북아일랜드는 보류하고 남부 아일랜드만의 분리 독립으로 여러 번 독립운동의 노선을 수정한 인물에 아일랜드 건국대통령 드 바레라 (Eamon de Valera 1882-1975)를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독립운동의 길이 험난하여 처음부터 주어지지 않았기에 이승만 역시 일본으로부터 완전독립의 요구에서, 국제연맹의 일시적 위임통치로 잠시 선회하는 듯하더니, 다시 완전독립으로 자리를 잡았으나, 현실적으로는 강대국의 국제정세로 말미암아 결과적으로는 드 바레라처럼 남한만의 단독 독립을 실현할 수밖에 없었다.

    마사리크가 1918년 10월 18일 미국에서 체코슬로바키아 독립을 기습적으로 선포한 것은 합스부르크의 칼 황제가 10월 18일 윌슨의 제의를 수락하며 연방제를 선언하는 것을 선제적으로 제압하기 위함이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합스부르크는 체코슬로바키아를 수중에서 내놓고 싶어 하지 않았다. 윌슨은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체코슬로바키아를 파리강화회담에 초청하였다.

    패망을 앞둔 마지막 순간에 일본제국도 미국에게 만주사변 이전의 국경선을 인정해 달라는 화평을 요청하였다.

    마지막 순간까지 한국을 장중에서 내놓지 않으려는 의도였다. 미국이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평화조약에 한국을 포함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음이 애석할 따름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승만과 마사리크의 운명이 갈라진다.

    체코슬로바키아는 국제연맹의 집단안보체제를 믿었다가 영국, 프랑스, 이태리의 배신으로 히틀러의 나치독일에 희생되었는데 이 역시 이승만이 정확하게 읽었듯이 간전기에 전쟁과 폭력을 피하고자 하는 열강, 특히 영국의 쳄버린 (Arthur Neville Chamberlain 1869-1940) 수상의 소극적 평화주의, 곧 “우리 시대의 평화” 때문이었다. 제1차 대전 후유증으로 다른 나라 사정을 돌볼 수 없었던 탓이다.

    이에 대하여 “다음 세대까지 [영구]평화”를 꿈꾼 이승만은 영토야욕을 품은 소련을 배후에 둔 채로는 연약한 독립국 infant nation의 자력국방이 어렵다는 점을 알고 미국과 벌린 "벼랑 끝 외교"로 한미상호방위조약(1953년)이라는 구체적이고 확실한 집단안보체제를 구축하는데 성공하였다.

    일시평화 대 영구평화. 제3차 대전을 두려워한다는 미국의 약점을 오히려 역이용한 이승만의 이 같은 도박은 마사리크의 운명과 차이를 드러낸다.

    고종이 조미우호통상조약(1882년)에서 실패한 역사를 반복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것은 평생을 고집해온 이승만 외교정책의 결정판이 되었다.

    또 하나 운명이 갈라진 것은 체코슬로바키아는 합스부르크의 압제 하에 삼백년이라는 긴 세월을 지낸 결과 독립 후에 반민족 행위를 구분하기가 어려웠다는 점이다.

    누대를 지나오면서 누가 누구에게 손가락질할 수 없는 지경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그렇더라도 4년의 짧은 독립운동 기간에 한정에서 볼 때 합스부르크 편에서 마사리크의 독립운동을 방해하고 반대하였던 인사들을 독립 후에 관대하게 채용한 것은 이례적이다.

    일본제국의 삼 십 오 년 압제의 시간도 상대적으로 길지 않았기에 반민족행위에 대한 문제가 사회적으로 첨예한 갈등을 빚어내고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는 한국과 대조적이다.

    그러한 갈등은 이승만이 국내기반이 없었던 탓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마사리크 역시 국내기반이 없어서 대통령으로 추대되었을 때, “마사리크 대통령! 좋지! 그러나 그에게는 정당의 기반이 없잖아! 그는 정치인이라기보다 철학자이며 이상주의자야.”라고 대수롭지 않게 보아서 그를 허수아비 대통령으로 만들려고 하였다.

    이러한 기성세력의 반대를 무릅쓰고 체코슬로바키아에서나 한국에서나 누대에 문제가 되었던 숙원의 농지제도를 개혁하였다는 것은 마사리크와 이승만의 공통적인 업적이다. 그 과정에서 독립운동의 해외파와 국내파 사이의 알력과 다툼이 계속되었던 것도 공통점이다.

    어찌되었든 필생의 목표가 달성되는 것을 본 이승만을 가리켜 운이 좋다고 말하는 평자도 있지만, 운으로 말하자면 마사리크의 행운에 비견할만한 사람도 없다. 그러기에 ‘동화 또는 신화’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행운만이 아니다.

    1910[1912]년 박사학위 논문과 그 전후 저술에서 드러난 이승만의 정치경제사상과 외교방략은 1914년 마사리크의 그것보다 시대적으로 앞선다는 점에서 이승만의 선구적인 점이 돋보이지만, 그것을 더욱 빛나게 한 역사적 실례를 후에 등장한 마사리크의 1914-1918년 외교독립 성취에서 찾을 수 있다면, 비록 제1차 대전과 제2차 대전이라는 시간과 유럽과 아시아라는 공간의 여건이 일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동서양 비교역사에서 보기 드문 흥미로운 사실이 될 것이다.

    이승만은 이것을 알고 있었다.

    체코슬로바키아라는 나라는 구라파의 동남지방에 산재한 민족으로 여러 강국에 부속되어 다소간 학대를 받다가, 세계전쟁 후에 미국에서 미국 친우들의 도움으로 독립을 선언하고 마사릭씨를 대통령으로 삼아 윌슨 대통령의 동정을 얻어 오백만원 차관을 얻어 독립국을 이루었다.

    말하자면 마사리크의 외교독립방책이 이승만의 외교독립방책을 그대로 닮고 있다.

    이승만의 선전외교독립방략은, 비록 중경임시정부의 측면에서 볼 때 태평양전쟁 시에 성공적이지 못했다고 하나, 이론과 실제를 겸비하게 되는 셈이다.

    오히려 이승만 외교독립은 3년의 해방공간에서 발휘된다. 이것이야말로 어쩌면 마사리크가 4년 만에 조국을 독립시킨 사건에 비교될 수 있을지 모른다.


    한국과 체코


    이승만은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으리라 사료된다.

    제1차 대전이 종전되던 바로 그날 정한경의 연설문을 보면 “체코슬로바키아 임시정부를 연합국 정부가 인정하였고 체코슬로바키아의 모세라고 널리 알려진 그 지도자 토마스 마사리크 교수가 현재 워싱턴에서 미국정부와 협의하고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후술하겠지만 이승만의 외교독립운동을 도와주었던 미국인 구성을 보면 마사리크를 결정적으로 도와준 사람들과 겹치는 사실에 미루어 볼 수도 있다.

    이를 유추할 수 있는 단서가 이승만의 편지와 문장 가운데 적지 않다.

    이승만의 구미위원부 Korean Commission라는 명칭도 마사리크의 체코국민협회 Czech National Council를 원용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일본제국이 이승만에게 불구대천의 원수이었듯이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은 마사리크에게 분쇄해야할 역사적인 원수였고 거꾸로 오스트리아인에게 마사리크는 악몽이고 악동 enfant terrible 이었던 만큼, 오스트리아 국적의 이승만의 부인 프란체스카 (Francesca Donner Rhee 1900-1992)가 마사리크의 존재를 몰랐을 리 없다.

    그가 19세 때 조국 오스트리아가 식민지 체코와 슬로바키아를 잃었기 때문이다.

    당시 열악한 식민지 사정 아래였으므로 어렴풋할 수밖에 없었겠지만 조선의 지식층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윤치호(1865-1945)의 1919년 12월 20일 일기가 그것을 말해준다.

    “마사리크 교수가 미국에서 선전을 잘 해서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을 이끌어냈다고 생각하는 조선인들이 더러 있는 모양이다.”

    삼일운동으로 탄생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추대하자 조선의 지식인들이 마사리크 교수의 ‘선전외교방략’으로 독립한 체코슬로바키아를 선망한 흔적이다.

    그러나 이승만과 달리 윤치호는 한국민족의 잠재력에 대한 신념이 부족하였다고 보여진다.
    그의 일기는 이어진다.

    “이들은 유럽의 정치를 발칵 뒤집어놓은 세계대전이 없었더라면 마사리크든 다른 어느 누구든 간에 체코슬로바키아에게 독립을 가져다주지는 못했을 거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또 체코슬로바키아는 지적으로 일정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는 것과 국제정세를 완벽하게 이용했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 우리 조선인들은 유능한 독자정부를 세울 준비를 갖추었나.”

    흥미로운 것은 윤치호가 ‘준비가 되었다고’ 믿었던 바로 그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하여 마사리크 자신은 해외로 망명할 때 “우리는 자유를 위하여, 하나의 독립 국가를 관리하고 유지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하였나?”라고 자문하였다는 점이다.

    그는 그 이유로써 “수 세기에 걸친 타국의 지배가 의존 습관을 길러서 자치를 할 수 없게 만들어졌다.”는 점을 들었다. 마사리크는 독립 후에 이 점을 항상 강조하였다.

    윤치호는 제1차 대전의 미진한 마무리로 유럽의 불안정한 평화와 일본제국의 군국주의가 일으키는 아시아의 불안정한 정세로 야기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세계대전을 예견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 같은 "국제정세를 완벽하게 이용“하여 체코슬로바키아가 그러했던 것처럼 한국독립의 기회로 삼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았고, 생각하였다 하여도 그 가능성을 믿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지식인이었던 윤치호가 그렇게 생각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던 것은 조국독립의 가능성을 믿은 마사리크와 이승만 조차도 그 실현에는 조바심을 낸 것을 보면 이해할 수 있다.

    마사리크는 제1차 세계대전이 조기에 종전되어 외교독립운동에 충분한 시간을 제공하지 못할까 노심초사하였고, 마찬가지로 제2차 대전은 이승만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기에는 예상보다 빨리 끝났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독립한국에 비극이 되었다.

    체코독립 직후인 1920년대에 김우진(1897-1926)은, 마사리크 대통령과의 대담을 책으로 발간한 체코의 극작가 차페크(Karel Capek 1890-1938)에 대한 글에서 체코의 독립을 언급하며 그 역사에 대하여 관심을 보이고 있다.

    차페크는 로봇 Robot이라는 말을 처음 만들어낸 것으로 유명하다.

    그로부터 10년 후에도 조선에서 마사리크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나타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백낙준이 『동광』에 기고한 「첵크 국부 마사릭 박사」와 「건국시대의 마사릭」이다.

    이것은 당시 조선에서 ‘마사리크 전설’이 어느 정도 조선 지식인 사이에 공유되고 그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공유는 이미 이승만의 주도로 1919년 4월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제1차 한국회의 First Korean Congress에 참석한 인사들에게서 더 적극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내[헐버트 밀러 교수]가 체코슬로바키아의 자연적 양심의 역사에 크게 주목한바 여러분들 [한국인들]이 그들[체코슬로바키아]과 함께 [제1차 세계] 대전에 관계하였다는 것은 뜻밖이다.

    [제정]러시아 정부에 의해 무장한 삼 만 명의 한국인이 린 장군 지휘 하에 [제1차 대전의 러시아] 동부전선에서 싸우고 있으며 러시아 정부가 해체되자 그들은 체코슬로바키아 포로들과 함께 시베리아로 이동하면서 볼셰비키와 싸우고 있다.

    동부전선에서 체코슬로바키아 또는 다른 민족만큼 많은 한국인이 싸움터에서 목숨을 바쳤다는 것은 사실이다.

    여기서 “린 장군”이란 추측컨대 중국인을 지칭하는 것 같은데 러시아에 갇힌 체코슬로바키아 반공포로군단을 구출하기 위해 시베리아에 출병한 11개국 가운데 하나가 중국군이었다.

    기록을 보면 러시아 내전에 휩쓸린 상당수의 한국인들이 북극해 아르한겔스크 항이나 무르만스크 항으로 빠져나와 런던에 도착했을 때 이승만에게 연락을 한 것은 사실이다.

    이 탈출 경로는 원래 체코 포로군단의 탈출 경로였는데 이보다 훨씬 더 먼 시베리아 경로로 변경되었다.

    헤이그 밀사 가운데 하나였던 이위종(李瑋鐘 1887-1919)은 러시아 내전의 우파 Ufa 전투에서 볼셰비키 군의 기관총 소대장으로 체코슬로바키아 군단과 조우하고 있었고 이것이 그의 마지막 소식이 되었다.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국회의가 개최되기 불과 반년 전에 체코슬로바키아를 선두로 마사리크가 주재하는 중부유럽연합 선언 Declaration of Mid-European Union이 역시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되었으며 마사리크가 동지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은 바로 그 독립관 The Independence Hall에서 이승만도 한국회의를 마치고 기념사진을 찍었다는 사실은 우연으로 보기가 어렵다.

    그날 『필라델피아 레코드 Philadelphia Record』에 실린 기사가 증명한다.

    "체코슬로바키아가 몇 개월 전에 그러했듯이, 오늘 자신들의 조국의 독립을 선포하기 위해 독립관에 모인 한국 대표들은 … [사진을 찍었다].“ 위에서 인용한 헐버트 밀러(Herbert Miller 1875-1951) 교수가 바로 중부유럽연합의 이사이며 사무총장으로서 마사리크를 포함한 체코슬로바키아 대표들의 독립관 모임을 주선한 사람이다.

    밀러 교수는 이승만의 한국독립운동도 도운 공로로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받았다.

    그해 체코슬로바키아 의회 사무총장이 체코슬로바키아 국기와 우표를 한국위원회 파리 지부에 보낸 데에 대한 감사답장을 보냈고, 다음 해 파리 지부가 체코슬로바키아 의회 사무총장에게 한국에 관한 책자를 보낸 것을 수령했다는 편지가 교부되었다.

    1942년 워싱턴 라파예트 호텔에서 열린 한인자유대회 Korean Liberty Conference에 재미 체코슬로바키아 공사관에서 격려의 서한을 보내왔다.

    외국공사관에서 보내온 유일한 서한인데 마사리크의 투쟁을 언급하며 어두운 시대에 한국과 체코슬로바키아가 민주주의를 위해 함께 싸울 것을 믿는다는 요지였다. 당시 체코슬로바키아는 히틀러 나치에 지배되고 있었으므로 그 공사관은 망명정부 공사관이었다.


    건국대통령


    이승만의 귀국 첫 일성은 “뭉치면 살고 헤어지면 죽는다.”이었다고 전한다.

    마사리크 추종자이며 후계자인 베네시 역시 해방이 임박했을 때 국내에 있는 여러 노선의 지도자들에게 “뭉친 모습”을 연합국에게 보여야 한다고 당부하였다.

    이승만의 추종자 정한경도 “모든 한국인의 행동과 생각이 일치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승만과 마사리크의 정치적 운명은 독립 후에 엇갈린다.

    마사리크는 “중부유럽 역사상 최초의 민주공화국 정부”를 수립한 인물로 국제적으로는 고대 로마의 철인 정치가 마커스 아우렐리우스 황제(Marcus Aurelius 121-180)에 비견될만한 철인 정치가 philosopher statesman와 국내적으로는 "해방자-어버이 마사리크 Daddy Masaryk-Liberator"이라는 칭송 하에 그에 한하여 예외적인 종신대통령으로 추대되는 가운데, 아일랜드/영국의 조지 버나드 쇼우(George Bernard Shaw 1856-1950)는 "마사리크는 유럽합중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어야 했다."라고 극찬한 반면에, 레닌(Vladimir Lenin 1870-1924)은 "마사리크야말로 유럽에서 가장 심각한 이념의 적이다."라고 경계하였다.

    이보다 더 극적인 것은 아마 마사리크를 정의를 실천하는 "좋은 임금 good king" 또는 “철인-임금 Philosopher-King” 이라고 극찬하기까지 한다는 점일 것이다.

    체코 잡지에 실린 어느 시는 체코슬로바키아에 독립을 가져다 준 마사리크를 어린애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가져다 준 산타클로스에 비유한다. 앞서 정한경이 전하는 표현은 “체코민족의 모세”였다.

    마사리크는 망명 초기인 1914년 12월 그의 지위가 체코슬로바키아 민족의 합법적 대표성도 확보하지 못한 개인적인 망명객이었기 때문에 그가 이끄는 파리 체코국민회의는 종전을 불과 1개월 앞 둔 1918년 10월까지 임시정부라는 명칭도 얻지 못하였으며, 그것마저도 스스로 그렇게 명명했고 그는 스스로 임시정부의 대통령이 되었음에도 결과적으로 이러한 칭송을 받았다.

    마사리크 교수가 해외에서 대표성도 없이 독립운동을 했던 유일의 명분은 체코를 탈출한 유일한 제국의회 체코의원이었다는 점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아시아 역사상 왕조를 대체한 민주공화국을 첫 번째로 세운 이승만은 대한제국 중추원 의원이었으므로 마사리크의 잣대로 보아도 대표성이 충분하고 여기에 더하여 임시정부 초대대통령으로 합법적 대표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건국대통령’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조차 논란이 일고 있다.

    나치 치하에서 마사리크는 사후 - 그는 나치침공 1년 전에 죽었다. - 였음에도 매도되었고 나치의 패전으로 다시 회복되었다.

    냉전과 함께 소련의 비호 하에 등장한 공산당 치하에서 그의 둘째 아들은 살해(?)되었고 그의 이름은 금기가 되어 두 번째로 매도되었다.

    소련의 붕괴로 체코슬로바키아가 공산당 치하에서 벗어나자 1993년 체코와 슬로바키아 두 나라로 분리하는 소위 젠틀혁명 the gentle revolution 혹은 제2차 벨벳혁명 the velvet revolution을 평화리에 성취한 문필가 하벨 (Vaclav Havel 1936-2011) 체코 대통령은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방법으로 그[마사리크]의 정치개념을 시도해 보자"라고 선언하며 마사리크를 세 번째로 부활시켰다.

    마사리크의 동상은 지난 90년 동안 건립과 철거를 세 번 반복하였다. 이승만의 동상은 지난 60년 동안 한 번 건립되었으나 철거되었고 아직 재건되지 못하고 있다.


    민주주의


    제1차 세계대전으로 태어난 체코슬로바키아와 제2차 세계대전으로 태어난 대한민국은 각각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왕조를 버리고 ‘민주주의’를 실시하게 되었다.

    그것도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모르는 정치사회적 박토였다.

    해방 직후 상해 임시정부[대한민국]와 서울 임시정부[조선건국준비위원회, 후일 조선인민공화국]가 있었듯이, 체코슬로바키아에서도 파리 임시정부[국민회의]와 프라하 임시정부[국민위원회]가 병존하였다는 것은 비록 잠시였으되 모두 선거에 의한 민주주의에 어울리지 않는 현상이라 하겠다.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이 연합국 승인하의 국제적인 사건이므로 연합국과 상의 없이 합스부르크와 어떠한 약속이나 타협도 하지 말라는 마사리크의 파리 임시정부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프라하 임시정부가 단말마만 남은 합스부르크와 협상하는 실수를 하였듯이, 여운형의 조선건국준비위원회[조선인민공화국]도 조선총독부에 협조하는 똑같은 실수를 저질렀다.

    민주주의는 오랫동안 왕조, 게다가 외국 왕조에서 살았던 백성에게 그 역사에서 처음 경험하는 일이었다.

    마사리크는 “세계대전의 묘지에서 [민주주의] 실험실”이 세워졌으나, “[체코슬로바키아] 백성은 의회정부에 필요한 인내와 경험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후일 독립 10주년기념사에서 국민에게 말했다. "왕조에서 민주주의로 전환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민주주의는 정말로 크나 큰 시도이며 크나 큰 문제이다. 그러나 생각과 지식을 가진 백성이라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국민에게 향하는 마사리크 연설은 이어진다.

    "민주주의는 여러 형태이다. 영국 민주주의, 미국, 프랑스, 스위스 민주주의, 독일, 라틴 민족주의와 차별주의 형태이다. 슬라브 민족은 어떠한 형태를 만들어야 하는가?"

    "현대 민주주의는 불완전하며 단지 시도되고 있을 뿐이다."

    이에 백성이 계몽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확고한 정치철학을 가진 마사리크는 “민주주의는 새로운 아담 A New Adam을 필요로 한다. 사람은 관습의 존재이다.
    여러분이 진실로 민주주의를 원한다면 낡은 정치 관행을 끊어버려야 한다. 모든 형태의 폭력을 잘라내야 한다.”고 호소하고 있다.

    당시 체코슬로바키아 의회는 폭력으로 얼룩져 있었다.

    ‘새로운 아담’이 되기 위하여 이승만이 독립운동에 앞서서 자신부터 근대교육을 받았듯이, 마사리크 역시 그러하였다는 점이 흥미롭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필수여건으로 마사리크의 체코슬로바키아는 독립 당시 이미 낮은 문맹률을 누리고 있던 유리한 환경에 비하면, 이승만의 대한민국은 독립 당시 높은 문맹률로 민주주의 실험 또는 실시에 불리한 실정이었다.

    독립 후 이승만은 교육투자를 통하여 단시간에 문맹률을 낮추어 불리함을 극복하였고 후일 경제성장에 커다란 원동력을 제공하였으되 그것이 자신의 정권을 타도하는데 기여했다는 것은 역설이다.

    윤치호가 평했듯이 한국 보다 모든 면에서 환경이 더 유리하였던 체코슬로바키아였지만, 독립 후 ‘초기 30년’의 정치적 불안정을 우려한 종신대통령 마사리크는 비록 민주주의 신봉자였으나 백성들의 민도를 믿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의회수준도 신뢰하지 않았기에 ‘궁성 宮城 Hrad’과 ‘금요인사 金曜人士 Patecnici’이라는 교묘한 초헌법적이며 비공식적 자문기구를 만들었다.

    흡사 명치유신 직후 일왕을 보좌하는 초헌법적 직제인 ‘원로 제도’의 모습이 연상된다.

    우후죽순 정당에 기초한 의회가 악취탄 stinkbomb을 터뜨리는 정도로 혼란 속에서 무기력하고 비효율적으로 운영되자 모든 정치집회에는 헌병이 입회하도록 법률이 정했다.

    마사리크는 이를 타파하기 위하여 5개 주요정당 당수로 구성된 역시 초헌법기관인 ‘5인방 Petka’을, 비록 후에는 자신의 궁성에 대립되는 세력이 되었지만, 만들기를 권장하였다. 5인방은 “우리는 합의하기로 합의했다.”라는 유명한 표현대로 의회를 고무도장으로 만들었다.

    이것은 모두 국경을 마주하고 새로 탄생한 소련 공산당의 서진을 우려한 마사리크의 자구 장치였다.

    그는 ‘스스로가 설정한 self-styled 이상적 새 민주주의’ 또는 ‘관리 민주주의’ 또는 ‘계몽 민주주의’로 포장한 자신을 중심으로 강력한 지도체제를 구축하고 그에 바탕을 둔 정치적 안정을 최우선으로 삼았다.

    그럼에도 세상은 마사리크를 가리켜 ‘민주주의의 챔피언’이라고 부르지만, 숙적 오스트리아에서는 마사리크의 민주정치를 ‘사교 민주주의 cult democracy’ 라고 폄하한 것도 저간의 이유가 있었다.

    사가들은 ‘마사리크 민주주의’가 동시대 윌슨의 높은 이상의 국제적 도덕주의와 레닌의 피를 부르는 폭력적 볼셰비즘 모두에 영향을 받았다고 평가한다.

    관리 민주주의 하에서 외교를 뒷받침하는 국내선전과 해외선전은 여전히 중요하였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약소국가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배경을 갖고 마사리크는 언론도 교묘히 통제하였다.

    헌법 113조에 “…출판에 관하여 사전에 검열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금지된다.”라고 명시하였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언론은 독립적이며 민간단체이이지만 선전외교를 담당하는 외무성이 관리하였다.

    체코슬로바키아는 태생이 연합국에 의해 창설되었기 때문에 독립 후에도 해외 정세에 커다란 무게를 두었다. 외무성 선전국은 언론이 다루는 해외 사정을 예의주시하였고 해외에 보내는 국내 사정 보고서를 관리하였다.

    관리민주주의의 또 하나의 특징은 의회 구성에 있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혁명과 쿠데타를 피했지만 정치적인 구조는 처음부터 소수민족의 대표성을 무시하면서 비민주적인 요소를 배태하였다.

    독립 직후 임시의회 256석 가운데 40석만 슬로바키아에 할당하고 나머지는 체코가 독점하는 가운데, 기타 독일계, 헝가리계, 폴란드계, 루테니아계에게는 전혀 할당하지 않았다.

    그나마 많은 슬로바키아 의석도 정당인이 아닌 사람들에게 할당되었는데 그 가운데 마사리크 대통령의 맏딸 앨리스 마사리크(Alice Masaryk 1879-1966)도 포함되었다.

    이 초대 의회에서 언어법이 통과되었는데 소수민족의 의견은 묻지도 않았다.

    독립 직후인 1919년 3월 4일 독일계주민의 거주지인 카덴 Kaaden과 오파바 Opava에서 평화적 시위가 일어났다.

    이들은 마사리크가 윌슨에게 호소한 동일한 민족자결원칙에 의해 체코슬로바키아에 편입되는 것을 거부하고 새로 탄생한 독일-오스트리아 German Austria에 귀속하길 요구했다. 마사리크 정부는 무력으로 진압했는데 기관총 발사로 54명이 사망하고 107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뿐만 아니다.

    독립운동 과정에서 ‘독재자’의 칭호를 부여받았던 마사리크는 그 자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저항하는 기간에 독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전쟁은 미국뿐만 아니라 어느 곳이든지 독재를 요구하여 절대적인 권력을 그에게 부여한다.”라고 주장하였다.

    이와 비슷한 움직임은 한국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도 나타난다. 서재필(松齊 Philip Jaisohn 1864-1951)은 제1차 한인회의 First Korean Congress에서 독립 후 일정기간 민주주의를 보류하고 전제적인 강력한 중앙집권적 정부를 제안하였다.

    사실상 한성정부로부터 “독립 후 정식국회가 소집될 때까지 일체의 권한”을 위임 받은 사람은 다른 이가 아닌 이승만이다.

    이러한 제안이 현실적으로 실현되지 않자 임시정부의 집정관총재를 대통령으로 바꾸고 독립 후에는 법률학자 유진오(玄民 兪鎭午 1906-1987)의 내각책임제 구상 대신 대통령중심제를 관철한 이승만의 경우나, 임시정부의 총리에서 대통령으로 직위를 바꾸고, 독립 후에는 초대대통령 직책을 파리 임시정부의 적법성 시비 구실을 내세워 치른 간접선거로 2대 대통령에 취임한 마사리크의 경우도 비교대상이 될 것이다.

    특히 적법성 시비는 법률학자 판투체크(Ferdinand Pantucek 1863-1925)의 구상을 따라 제정한 1918년 임시헌법의 명목상 대통령 직위를 1920년 ‘궁성’의 주도하에 헌법을 개정하여 강력하고 ‘방해가 없는’ 대통령 직위로 바꾸는 구실에 불과하였다.

    마침내 새 헌법에 의해 대통령 마사리크는 장관뿐만 아니라 수상도 임면할 수 있게 되었고 의회를 해산할 권한도 확보하였다. 심지어 지방의원의 3분의 1을 대통령이 임명할 수 있었다.

    한국의 제3공화국의 유신국회가 연상된다. 교수와 고급 공무원의 임면권도 부여되었다.

    건강과 고령을 의식해서 자신의 후계자로써 당시 34세에 불과한 베네시를 자신의 사후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하여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통령 피선거권을 45세의 상원의원 피선거권 보다 더 낮은 35세로 낮춘 것은 작은 예에 불과하다.

    대통령에 대한 명예훼손 등은 법률적으로 금지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대통령은 국정책임을 지지 않도록 여러 겹의 장치를 초헌법적으로 설치하였다.

    견제와 균형이 없는 민주주의였으니 체코공화국의 형태는 의회 민주주의였으나 실제로는 ‘대통령 민주주의 presidential democracy’가 되었다. 1948년 한국 헌법을 제정하는데 있어서 미국헌법, 독일헌법, 바이마르 헌법, 프랑스 헌법, 중화민국헌법을 참고하였다 하지만, 이 1920년 체코슬로바키아 헌법이 행정연구위원안과 법전기초위원회의 헌법개정요강을 통하여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음미할 만하다.

    그럼에도 대한민국 헌법은 대통령에게 체코슬로바키아 헌법만큼 강력한 권한을 부여하지 않았다.

    어찌되었던 마사리크의 우려대로 제1차 대전 후 함께 독립한 폴란드, 헝가리, 발틱 삼국, 발칸 제국들을 보면, 독립 직후 터져 나온 정제되지 않은 민의 (공산당을 포함한)를 효과적으로 다스리는데 실패하여 예외 없이 군사독재나 군주독재로 대체됨으로서 베르사유의 이상을 무색하게 만들었고 파시스트 출현의 전조를 제공하여 그들에 의한 제2차 대전의 한 원인이 되었다.

    베르사유 정신의 핵심 linchpin 인 체코슬로바키아의 마사리크 하에서도 여러 번 군사정변 위기에 직면한 적이 있었다. 독립직후 최초로 정권탈취를 시도한 측은 볼셰비키였다.

    이것이 실패하자 그들은 암살로 응수하였다.
    초대수상은 암살에서 살아났으나 초대재무장관은 피하지 못하였다.
    암살자는 모두 20세 미만의 공산주의자들이었다.

    마사리크는 무자비하게 탄압하여 뿌리를 뽑았다.

    한국도 독립직후 공산당의 폭동으로 정권이 위태로웠다. 이승만 역시 무자비하게 탄압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에도 신생독립국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이웃 신생 독립국가들을 세밀히 관찰한 마사리크 역시 대통령 선출을 국회의 간접선거에서 직접선거로 바꾸려는 ‘헌법쿠데타’를 기획하였다.

    이것은 이웃 폴란드의 예를 따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럴 필요가 없을 정도로 체코슬로바키아 국민들은 ‘마사리크 신화’를 믿는 신자가 되었다.

    이에 대하여 이승만 역시 비슷한 기획으로 대통령 선출을 국회의 간접선거에서 직접선거로 전환하였지만 후세에 엇갈리는 평가를 얻게 되었다.

    마사리크가 어느 정당에도 소속되지 않았던 것처럼 이승만도 초기에는 초당적인 위치를 유지하려고 하였다.

    결과적으로 이웃 국가들과 달리 신생 체코슬로바키아는 마사리크의 독재정치 지도력으로 히틀러의 침탈이 있기까지 20년 동안 어려움도 있었지만 비교적 안정적으로 번영하였다.

    비록 건국한지 1년 만에 슬로바키아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공산주의 헝가리의 침략으로 슬로바키아의 대부분을 빼앗기는 일을 당하였으나 베라 쿤(Bela Kun 1886-1938)의 공산주의 헝가리 정부가 루마니아와 벌린 전쟁으로 무너지면서 간신히 슬로바키아를 회복할 수 있었고 화폐개혁을 하였다.

    한국도 건국한지 2년 만에 공산주의 북한과 중공의 침공으로 거의 국토를 잃을 뻔했으나 간신히 수복하였고 임시수도 부산에서 역시 화폐개혁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승만이 한국전쟁 초기 서울시민을 두고 홀로 서울을 떠났듯이, 마사리크가 러시아 내전에 휩쓸려 앞날이 불투명한 7만의 체코반공포로들을 뒤로 두고 홀로 시베리아를 빠져나갔고, 맥아더(Douglas MacArthur 1880-1964)는 자신의 군대를 필리핀 사지에 두고 홀로 오스트레일리아로 탈출했다.

    마사리크는 체코와 슬로바키아를 묶어 하나의 통일된 국가를 수립하였으나 결국은 그의 사후 둘로 분리되었다.

    이와는 반대로 이승만은 국제정세로 하는 수 없이 남한의 단독정부만을 수립하였지만 그의 사후 아직도 통일한국은 이루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이승만을 북아일랜드를 분리하여 아일랜드공화국만을 단독으로 독립시킨 드 바레라 건국대통령에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마사리크처럼 드 바레라 역시 종신토록 대통령과 총리를 지냈으나 북아일랜드의 문제는 그의 사후 여전히 미결이다.


    정치사상


    아마도 이상의 비교 기술에 대하여, 그렇지 않은 기술도 상당하다고 믿지만, 외형적인 비교에 치중되었다는 반론도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필자가 이승만을 마사리크와 비교하면서 가장 아쉽게 생각하는 부분은 마사리크의 정치사상을 체코사상사나 유럽 사상사와 연결하는 연구는 많은데 대하여 이승만의 정치사상을 서구 사상은 물론이고 조선의 사상 특히 실학사상과도 관계 내지는 연결을 시도한 연구를 거의 발견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손문의 경우, 오늘날 그의 삼민주의는 중국의 지도이념이 되어 있지만 중국의 전통사상과 서양의 근대사상을 “그 자신의 독자적인 이해로서 결부 공존케 한 것으로서 … 장개석은 특히 양명학을 근거로 삼민주의를 해석하고 손문이 공맹 이래의 도통을 이은 것이라 하여 이것을 유학의 계승으로 보았으며 … 이러한 유학의 근대적 재건의 시도는 국민정부 중국의 오늘날의 문제로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형편이므로 이승만과 마사리크의 비교에 있어서 진수가 될지 모르는 정치철학이나 역사철학의 비교는 한정적일 수밖에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의 정치사상인 ‘일민주의’의 뿌리를 조선의 실학과 서양의 근대사상에서 함께 찾고자 노력할만한 가치가 있다.

    이 시도가 성공한다면 한국역사에서 단절되었던 조선의 정치사상과 서구의 정치사상이 연결될 수 있고 그 연결점에서 이승만을 새롭게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병행하여 이승만의 정치사상과 마사리크의 그것을 비교할 수 있는 고리도 확보할 수 있다.

    그 고리가 칸트의 영구평화사상이라는 가설도 검정할 만하다.

    이승만의 30년 측근 이원순은 이승만이 모든 정치적 사태를 설명할 수 있는 기준을 갖고 있었다고 증언한다.

    "이승만 씨는 후일 수많은 연설이나 논문을 통하여 모든 사태에 적용할 수 있는 기준으로써 그의 이러한 지론을 여러 가지로 되풀이 하였다." 그 기준이란 무엇인가.

    이[승만] 박사가 느낀 또 한 가지의 특이한 국제법상의 현상은 강대국의 지도자들은 전쟁이 일어나게 되면 혹사되는 국민들의 감정을 무마시키기 위하여 기본적인 원칙의 변명을 발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의 실례로서, 이 박사는 윌슨의 14개 원칙을 비롯하여 프랭크린 A[sic] 루즈벨트의 4대 자유, 루즈벨트와 처칠 간의 대서양헌장 및 트루먼의 기본원칙 등을 인용하였다.

    여기서 인용한 윌슨의 14개 원칙, 루즈벨트의 4대 자유, 그리고 트루먼의 기본원칙은 모두 칸트의 영구평화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처럼 모든 정세에 적용할 수 있는 기준을 갖고 있었기에 “이승만 씨는 현 국제 정세에 가장 알맞은 실질적인 국제법을 논술해 보고자 저작에 몰두하였다.”

    이승만의 학위논문은 통상이 평화를 가져온다는 칸트의 철학적 추론에 실증적이고 귀납적인 사례를 제공한 문서이다.

    20세기 초 한국과 일본이 평화롭게 살기 위해서 한국을 독립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일본의 미학자이며 민속학자 유종열(柳宗悅 1889-1961) 역시 칸트의 영구평화사상을 자신의 주장의 근거로 삼았다.


    II. 선전과 외교


    시대와 인물


    사람이 시대를 만드는가 아니면 시대가 사람을 만드는가.

    이 질문은 진부하고 상투적이기는 하지만 그 대답에 앞서서 사람과 시대가 불가분의 연관을 맺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어서 한 사람의 전기는 반드시 시대상황이 뒷받침하여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약소국가 출신인 이승만과 마사리크의 외교독립론은 제국주의 말기의 산물이다.

    합스부르크 제국 하에서 마사리크는 청년기부터 외교와 선전의 중요성을 인식하였고 제1차 세계대전을 ‘민주주의 대 절대주의’의 대결이라는 해석 하에 시대의 흐름을 잘 이용하여 외교독립을 달성하였다.

    일본 제국주의 하에서 이승만 역시 청년시절부터 외교의 중요성을 당대의 누구보다 절실하게 깨달은 선각자였으며, 장년기에는 중국을 둘러싼 미일외교의 대립과 갈등에서 간신히 유지되는 이른바 워싱턴 체제 하의 국제협조주의외교를 이해한 외교관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과 해방 후 혼란기에는 ‘민주주의 대 전체주의’라는 시대의 흐름을 정확하게 포착하여 혼란스런 국내-국제정치무대에서 외교독립의 목적을 극적으로 완수하였다.

    특히 1953년 미국과 맺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은 갓 독립한 어린 국가를 외교로 지켜내는데 성공했다는 의미에서 그가 평생을 주장해온 외교방략의 결정체라고 생각한다.

    두 사람의 외교독립 주장의 시대적 배경은 비슷하다.

    마사리크는 발칸반도를 둘러싸고 범게르만주의 Pan-Germanism와 범슬라브주의 Pan-Slavism의 충돌이 필경에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외교정책을 소위 ‘제국의 자살’로 내몰 것으로 예상하고 그 기회를 엿보았다.

    이승만은 중국을 둘러싼 미국의 문호개방정책 Open Door Policy과 일본의 팽창정책 Power Politics이 충돌하여 마침내 일본이 몰락할 것을 예감하고 그 기회를 포착하는 외교독립의 가능성을 추구하였다.


    선전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마사리크와 이승만은 다른 무엇보다 선전과 외교를 조국 독립의 방략으로 삼았는데 역사학자 피셔(Herbert Albert Laurence Fisher 1865-1940)는 "체코슬로바키아는 선전의 탄생아이다."라고 주장하였다.

    그 배경에는 근대적 선전이 있었다. 그것은 제1차 대전의 산물이다. 제1차 대전 이전에도 선전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특히 이 시기를 ‘선전의 시대’라고 부른다.

    선전의 원래 의미는 식물학 용어에 남아있는 것처럼 번식 propagation 이라는 과학용어이므로 좋고 나쁨의 차원이 아니다. 그러나 차츰 변질되어 갔다. 종교개혁 횃불에 대항하여 스스로의 조직을 방어해야할 처지가 된 바티칸은 이 과학용어를 ‘참된 신앙’의 의미를 강조하는데 동원하였다.

    삼십년 종교전쟁 (1618-1648)에서 천주교는 개신교를 무력으로 제압하는 한편 새로이 조직한 예수회 Jesuit를 이용하여 선전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나폴레옹은 계몽주의와 함께 막 시작된 신문의 보급이 자신의 선전수단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당시 신문의 보급은 제한적이었다.

    사정이 혁신적으로 크게 달라진 된 것은 제1차 대전의 발발이다. 그것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등장한 전기통신의 발달 덕택이다. 광범위하게 보급된 신문은 말할 것도 없고, 잡지, 책자, 라디오, 사진, 영화, 연극, 전시물, 각종회의나 집회, 교과서, 심지어 아동서적까지 동원하였다.

    미증유의 국가총력전에서 여론의 중요성을 깨달은 교전국들은 글뿐만 아니라 말과 영상을 적극 활용하여 후방에서 지원받고, 전방을 독려하며, 중립국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드리도록 설득하였다.

    적국 병사들의 사기를 꺾어 총을 버리게 한 것도 선전이었다. 신중하게 편집된 영국의 선전을 받은 미국의 언론은 독자의 구미에 맞게 다시 가공하여 게재하였다.

    영국은 이에 앞서서 독일과 미국을 연결하는 전신전화선을 두절하면서 개전 초기부터 미국여론을 선점하는데 성공하였다. 심지어 독일 편에 섰던 특파원들조차 이 독점적인 전신선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 또한 영국 선전부에 모두 포착되었다. 미국승객을 싣고 가던 영국 여객선 루시타니아 Lusitania가 독일잠수함에 의해 격침되었을 때, 영국 간호사 에디스 카벨 (Edith Cavell 1865-1915)이 독일군에 의해 처형되었을 때, 영국은 미국을 전쟁에 끌어드리는 호재로 적극 활용하였다.

    프랑스 역시 마타 하리 (Mata Hari 1876-1917)를 독일첩자혐의로 처형하고 그 뒤처리에 있어서 선전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같은 사건을 공론화하는데 독일은 실패하였다.

    아마도 이러한 노력의 절정은 짐머만 전보 Zimmerman Telegram 사건일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미국을 전쟁에 끌어드리게 하려는 영국의 의도와 맞물렸다. 영국이 독점적으로 장악한 정보통제와 거짓이 미국을 전쟁에 관한 한 쪽 의견으로 경도되게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미국이 참전하자 영국은 선전의 비중을 감소시켰다. 영국은 비로소 선전의 장기적 역효과를 두려워하였다. 심하게 왜곡된 기사로 인한 "인간정신의 피폐가 인간육신의 파괴보다 더 심각"하다는 고백이 가리키듯이 제1차 대전의 선전은 곧 여론을 오도하는데 기여하였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교전국은 서로 상대국이 "시체에서 비누를 만든다."라고까지 선전하였다. 제1차 대전 와중에 아일랜드 독립운동이 일어났을 때 미국의 아일랜드 이민자들의 호응을 두려워한 영국은 그 지도자가 동성애자라고 악선전하였다.

    조선에서 삼일운동의 민족대표 손병희를 일제가 파렴치한으로 세계 언론에 악선전한 것도 같은 방식이었다.

    영국이 소극적으로 물러앉은 자리를 미국이 채웠다. 윌슨 대통령을 보좌하는 여론정보위원회 CPI=Committee on Public Information가 설립되고 조지 크릴(George Creel 1876-1953)이 그 책임자가 되었다.

    “미국의 반제국주의적인 전쟁목적과 민주적인 평화 요구를 1천 단어 이하로 현수막 문구로 요약하라.”는 주문을 받은 위원회의 목표는 멀리 떨어진 유럽전선에 미군병사를 보내야만 하는 이유를 자국국민과 외국국민에게 납득시키는 일이었다.

    크릴은 자신의 임무가 ‘광고 중에 광고’임을 인식하고, 새롭게 등장한 할리우드 영화에 특히 주목하였다. 수많은 전쟁영화가 제작되었고 세계에 배포되었다.

    주당 평균 8천만 명의 관객이 극장을 찾았다. 그것은 ‘미국 민주주의’를 세계에 전파하는 호기라고 보았다는 점에서 제1차 세계대전의 목적이 이제 비로소 윤곽이 서서히 잡혀가고 있었으니 윌슨의 대독선전교서 對獨宣傳敎書에 "민주주의를 위해 세계를 안전하게 만들자"라는 구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민주주의 대 절대주의’의 싸움이 되었다.

    가장 큰 선전효과는 윌슨 대통령이 선포한 14개 조항이다.

    미국은 643 종류의 전단 6천 만장을 8개 국어로 만들어서 뿌렸다. 그 가운데 1천 만장은 4개 국어로 112개 신문에 배포하였다. 수많은 적국병사들이 투항했을 때 그들의 손에 이 전단이 쥐어져 있었다. 어떤 날은 하루에 잡힌 350명의 포로의 손에 8백장의 전단이 발견되었다. 한 독일 병사는 기록하였다.

    1915년에 적들은 우리를 향해 선전을 시작하였다. 1916년부터 그것은 강도를 더해갔다.

    1918년 초에 그것은 폭풍 구름처럼 커졌다. 이제는 누구나 그 효과를 볼 수 있었다. 우     리는 적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생각하도록 훈련되었다.

    그 병사란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였다. 그가 정권을 잡기까지 그리고 그 후 그것을 유지하는데 선전을 적극 동원한 것은 아마도 제1차 대전의 경험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독일 군부 내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전단 선전으로 적들은 우리를 패배시켰다. 숨어서 독침을 날리는 것은 독일 방식이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생사의 문제이고 우리는 우리 무기로 싸워야만 한다는 점을 깨달았      다. 그럼에도 적들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며 소멸되지도 않는다.

    1918년 미국 전쟁성은 독일포로들을 심문하면서 그들이 선전에 영향을 받았는지 조사하였다. 결과는 불분명하였지만, 앞에서 이미 제시한 바대로 포로 가운데 80퍼센트는 전단을 읽었다고 대답하였고 심지어 전단을 돈 주고 구했다고 대답한 포로도 있었다.

    전쟁 초기부터 마사리크는 이러한 변화의 중요성을 간파하였다. 마사리크는 조국이 독립을 강탈당한 삼십년 전쟁에서 개신교에 대한 천주교의 선전이 크게 기여했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제1차 대전에서 마사리크의 선전과 외교는 서부유럽과 미국에 집중하였고, 특히 여론형성에 영향력 있는 인사와 정책결정자에게 접근하는 노력을 꾸준히 시도하였다.

    밀러 교수의 도움을 받은 마사리크는 크릴의 여론정보위원회를 이용할 수 있었다.

    그가 고집한 첫 번째 원칙은 "대중에게 직접 호소하는 것 보다 그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주요 인사를 움직이는 것이다."

    그의 목표는 윌슨 대통령이었다.

    그러면서 미국에 정착한 체코와 슬로바키아 동포를 동원하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앞서 잠시 언급한 짐머만 전보 사건에도 미국거주 체코출신 마사리크의 첩자 미국 육군 첩보부 보스카 (Emanuel Viktor Voska 1875-1960) 대위가 깊숙이 관련되어 있었다. 보스카의 활동으로 미국주재 독일 대사관의 무관과 오스트리아 대사가 추방되었다.

    그러나 마사리크는 선전의 병폐 또한 잊지 않았다.

    "나에게는 선전에 관해 원칙이 있었다. 그것은 올바른 것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독일인들을 악용하지 말아야 하고, 적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되고, 사실을 왜곡해서도 안 되며, 교만해서도 못 쓴다. 헛된 약속을 하지 말 것이며, 애걸은 더욱 안 된다. 사실 그 자체가 말하도록 하라. 사실에 입각해서 당신들의 이해는 이러한 것이며 따라서 당신의 의무도 뒤따른다는 점을 지적하면 그만이다. 발상과 토론을 하는데 배경을 잊지 말며, 그리고 한 가지 더, 불법 방해하지 마라. …거짓과 과장은 가장 나쁜 선전이다."

    이승만도 비슷한 노선을 줄곧 지켰는데 1954년 미국 국빈으로 방문 중이던 워싱턴 한미재단이 주최한 만찬에서 “내가 여기에 온 것은 많은 원조, 더 많은 자금, 기타 무엇을 요구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 민족이 난관에 처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 국민은 울면서 도움을 갈구하지 않는다. … 정의라는 대의의 갑옷을 입고 신의 가호를 받고 있는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라고 연설하였다.

    초대대통령 취임사에서 “과거 40년간 우리가 국제적으로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 것은 세계 모든 나라가 우리와 접촉할 기회가 없었던 까닭이다.

    세계가 일본인들의 선전만 듣고 우리를 판단해왔지만 이제 우리가 우리말을 할 수 있고 우리 일도 할 수 있다. 우리 정부와 민중은 해외선전을 중요히 여겨서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는 각국 남녀에게 우리의 올바른 사정을 알려 줘야 한다.”라고 밝히고 있다.

    이승만이 미일대전을 예견하여 집필한 『일본내막기 Japan Inside Out』는 일본의 속내를 모르는 채 그들의 거짓 선전에 현혹되어 가는 미국인과 그 정부에 대한 경고였다.

    아예 "일본의 선전을 막아야 한다."라는 독립된 장(제12장)이 있으며, 미국여론이 일본의 진정한 모습에 눈을 떠야 하는 시기임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그는 후일 자신의 책을 한 마디로 요약하였다. “현 시대에서 선전의 필요성은 이렇게 중요한 것이다. … 지금 한국인들이 일본문제 해결을 위하여 할 일은 첫째 선전사업이[다.]”

    이승만도 거짓 선전의 역효과를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책을 읽은 펄 벅(Pearl Buck 1892-1973)은 “사실 일본에 정복된 나라의 한 시민으로서 이[승만] 박사는 오히려 지나치게 온건하다. 그는 공포를 그린 것이 아니라 다만 일어나고 있는 현상을 말하고 있으며 또 물적 증거를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라고 평하였다. 이것이 사실 그 자체가 입을 열도록 하는 수법이다.

    이승만의 이러한 진실의 고발은 삼일운동 직후인 1919년 4월 일본에 보낸 공개서한 「사려 깊은 일본인들에게」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여러분의 정부는 지금은 파괴되고 사라진 유럽의 전제정치에 의해 길러진 잘못된 이상과 탐욕의 야심을 향유하고 있다. 만일 여러분 국민이 우리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지적이고 현명하다면, 이 같은 정책은 변경되어 당장 높고 고결한 사람들에게 행복을 가져오는 진정한 민주주의를 여러분의 정부가 채택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지금처럼 프러시아 형의 이기적인 정책을 계속한다면 여러분의 나라는 여러분이 모범이라고 여기는 유럽국이 밟은 길을 따라가서 똑같은 운명을 맞을 것이다." 이 예언은 적중하였다.

    동일한 시기에 「미국에 보낸 서한」에서는 "우리들은 미국국민의 지원과 동정에  호소한다.

    그 이유는 여러분이 정의를 사랑하고 자유와 정의를 위해 투쟁한 것이 기독교와 인류애에 입각했다는 것을 우리들이 알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주장은 하나님과 인류의 법 앞에 떳떳한 것이며, 우리가 바라는 것은 군사적 압제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이고 그 목표는 아시아의 민주주의이며, 우리들이 희망하는 것은 보편적인 기독교이다."

    이 글에서 이승만은 1882년에 체결한 한미우호통상조약 제1조 제2항을 언급하면서 미국이 일본에 대하여 양심적인 개입을 기대하고, 평화회담에서 윌슨 대통령이 제안한 국제연맹에 대해서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이승만은 일본이 미국을 상대로 선전에 매년 5백만 달러를 뿌리고 있다고 숫자까지 제시하고 있다.

    일본은 유럽국가에도 자금을 살포했는데 파고드는 힘이 특별히 대단해서 “심지어 이류 언론인에게도 … 수만 달러씩 주었고,” 프랑스 언론에 영향력이 컸으며, 전직 프랑스 외교관은 일본상품을 수입하는 회사를 경영하고 있었다.

    지구 반대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마사리크 선전에 대항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 대표단들도 선전에 많은 비용을 지불하며 워싱턴, 파리, 런던 등의 외교부 문턱을 드나들었다.

    양측 모두 주요국 정부인사 및 언론인들과 교제를 넓혀가며 그들의 영향력에 많은 기대를 걸었다. 저마다 자신의 국가의 역사와 전쟁의 당위성을 민주 서방에 설명하는 만찬장이 새로운 선전장으로 떠올랐다.

    저명한 폴란드의 작곡가이며 피아니스트인 파데레브스키(Ignacy Jan Paderewski 1860-1941)가 1916년에 백악관에서 연주를 할 수 있는 기회에 행한 연설이 윌슨 대통령을 움직여 14개 조항에 폴란드를 삽입하였다는 것은 이제 역사적 사실이 되었다.

    이런 면에서 마사리크는 『쿼바디스』를 쓴 폴란드 소설가 센키이에비치(Henryk Sienkiewicz 1846-1916)가 체코에 없다는 사실에 한탄하였다.

    이들은 이에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열강의 관심을 끌 수 있는 국제회의를 주최하였다.

    그 한 예가 1918년 가을 뉴욕 카네기홀에서 열린 중부유럽 피압박민족 대회 The Oppressed Nationalities of Central Europe가 그것이다. 이 대회는 미국 여론정부위원회의 크릴이 주선한 것이다.

    여기서 마사리크와 파데레브스키는 윌슨 미국대통령에게 보내는 연설문을 낭독하고 참가자들의 결의를 받았다.

    이 결의문에서 마사리크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체와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이 미국이 설정한 제1차 대전의 목적인 ‘민주주의 대 절대주의의 대결’과 일치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이 결의문은 예상하지 못한 우군을 만나 윌슨 미국 대통령에게 전달되어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해체의 지지를 얻어 내는데 기여를 하였다.

    그 동안 선전외교의 성과로 개인적 친분을 쌓은 미국 정부의 여론정보위원회의 크릴은 이 대회에서 채택된 결의문을 윌슨 대통령에게 보내어 윌슨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해체하는 결심을 이끌어 내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마사리크를 윌슨 대통령과 면담을 결정적으로 주선한 인물은 국제적십자 총재 존 마트(John Mott 1865-1955)이었다. 마트 총재는 마사리크와 친분을 쌓기 훨씬 전부터 청년 이승만과 교분을 맺고 있었으며 이승만을 일제로부터 보호하는 국제적 후견인이었다.


    외교


    대체로 선전이 세력균형이 깨진 전시에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수단이라면 외교는 평화 시기에 국제법에 의거한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는 세력균형의 또 하나의 수단이다.

    선전과 외교는 파리강화회의에서 저력을 발휘하였다. 미국대표 자문으로 파리에 머물던 어느 교수는 부인에게 편지를 썼다.

    “저녁은 루마니아 대표와, 점심은 이태리 대표와 약속되어 있다. 금요일 저녁은 세르비아 대표와, 월요일 저녁은 체코슬로바키아의 베네시와 크라마르시와 잡혀있다.“

    루마니아 여왕 마리 Queen Marie는 파리에 와서 대회 지도자를 유혹하고 염문을 뿌렸는데 새로운 영토다툼으로 밀고 당기는 지루한 회의에 싫증나던 독자들에게 ”루마니아는 얼굴을 필요로 한다. 내가 루마니아의 살아있는 얼굴이다.“라고 당차게 말했다.

    이 여왕의 육탄외교 공세로 루마니아는 주장하던 영토를 모두 얻으며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제1차 대전과 제2차 대전 사이, 즉 간전기 間戰期 interwar는 평화가 유럽과 아시아에서 간신히 유지되는 시기였다.

    세계대전의 참혹상을 경험한 열강들은 평화를 기원하여 윌슨 대통령이 제안한 국제연맹을 창설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전기에 아일랜드내전(1919-1923), 모로코전쟁(1919-1926), 만주사변(1931), 파라과이전쟁(1932-1938), 스페인내전(1936-1939), 중일전쟁(1937-1945)이 일어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는데, 그 가운데 약소국가는 강대국가에게 패하여서 무력으로는 약소국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보여줬다.

    "우리[체코슬로바키아]는 혼자의 힘만으로는 결코 자유를 쟁취할 수 없었다. 연합국의 도움으로 얻은 것이다.“ 체코슬로바키아의 선전외교는 다음과 같이 평가되었다.

    전쟁터 대신… 그들은 신문 편집국, 연합국 수뇌부, 연합국 지휘부에 서서히 침투하였다. 여론, 선전, 사적 친분이 군사적 타격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 체코슬로바키아는 선전의 탄생아이다.
      
    파리강화회의에서 합스부르크 제국은 정식으로 해체되고 그 자리를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가 차지했다.

    이 가운데 회의에 초대된 것은 체코슬로바키아뿐이다.

    독립에 대한 마사리크의 명분이 평화적인 방법, 즉 외교방략으로 보편적 민주주의 가치에 일치시키는 노력을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폴란드 포로군단이나 세르비아 포로군단도 대단한 활약을 하였으나 외교방략에 있어서 마사리크를 능가할 수 없었다.

    불안한 평화 속에서 또 하나의 세계대전을 피하려는 열강의 노력은 외교에 역량을 쏟게 되었다.

    당시 영국 외상 그레이(Edward Grey 1862-1933)는 제1차 대전 이전 당시 유럽은 경쟁적으로 무장되어 있었는데 그 목적은 안전보장이었지만 이것이 오히려 불안감과 공포감을 발생시켰고 공포가 비밀외교와 폭력을 낳았다고 술회하였다. 이를 뒷받침하기라도 하듯이 후일 역사학자 카(Edward H.Carr 1892-1982)는 제1차 세계대전의 원인이 비밀외교에서 기인하였음을 논증하였으며 비밀외교를 종식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18년 윌슨 대통령은 모든 비밀외교에 의한 국가 간 조약은 무효라고 선언하였다.

    그럼에도 불과 20년 만에 제2차 대전이 발생한 이유는 키신저(Henry Kissinger 1923-현재)가 지적한대로 유럽 각국이 세력균형 정책을 군비확장 정책으로 치환했다는데 기인한다고 지적하였다.

    이에 따라 독일 지도자들은 영국의 자유주의, 프랑스 혁명이 제창하는 보편적 자유로서 종합적 철학적 이념을 존중하는 대신 인접 국가를 적대시하는 현실정치의 폭주가 되었다고 설명하였다.

    이것은 일본에게도 해당된다.

    일본의 외교사를 보면 대정 大正 시대에 외교정책의 주체는 외무성과 군부의 두 축이었는데 군부의 독자적인 외교가 침략전쟁을 야기하였다는 것이 정설로 되어 있다.

    특히 1920년대의 미일 사이에 무력을 배제하는 ‘워싱턴 체제’ 하에서 일본외무성의 ‘국제협조외교’가 종식되고, 1930년대 군부가 일으키는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은 마침내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졌다. 전쟁을 직업군인에게만 맡겨서도 안 되고 외교 역시 직업외교관에게만 위임해도 안 된다는 주장이 여기에 기인한다.

    폭넓은 세론의 지지를 받는 민주적인 공개외교의 필요성이 대두되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마사리크에 의해 예견되었다. 마사리크는 비엔나를 중심으로 짜여 진 메테르니히(Klemence von Metternich 1773-1859)의 이른바 ‘궁전 외교정책’을 따르는 시대를 대신하는 새로운 시대를 일찍이 예견하였다.

    그 새로운 시대란 국제법에 기초한 공개외교의 시대이다.

    “오스트리아 외교뿐만 아니라 모든 외교는 낡았다. 그것은 절대주의였고, 비밀주의였으며, 형식주의였다. 이 분야에도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공적이고, 공개적이며, 문화적이고, 실제적이어야 한다. 외교는 아직도 메테르니히의 낡은 수법으로 행해지고 있다.” 이 예견은 윌슨보다 시대적으로 앞섰다는 점에서 마사리크의 독창적인 면모를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당시에 세계 대세를 파악할 수 있고 그를 이용하여 조국독립의 발판으로 삼는 능력을 갖춘 인물로서 마사리크나 이승만은 예외에 속한다. 조병옥(1894-1960)은 회고록에서 다음의 글을 남겼다.

    내 장인인 노병선 씨와 결의형제를 맺은 바 있는 … 이승만 박사는 나에게 이렇게 역설하는 것이었다. "한국독립은 외교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20세 미만의 청년인 나는, 그 이 박사의 역설이 도저히 납득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당시의 일본은 청일, 노일 양 전쟁에서 승리를 하여, 치외법권(治外法權)과 조계(租界)까지 확충하는 판국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일본과 외교전을 통하여 한국의 독립을 쟁취한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조병옥은 박용만(1881-1928)을 만나서 들은 "한국의 독립은 무력전으로 해야 한다."라는 말 역시 이해할 수 없었는데 당시 피압박민족 미국주민의 출신지 독립운동은 미국 이민법이 허락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전쟁 시에 그들이 포로가 되는 경우에 헤이그 조약 Hague Convention에도 문제가 된다.

    조병옥은 안창호(1878-1938)의 또 다른 주장 "한국의 독립은 지구전이 되지 않을 수 없다."는 소위 지구론에 "감복"되어 흥사단에 참여하게 되었다. 조병옥은 이승만의 외교독립론에 대하여 첨언을 하였다.

    그러나 이[이승만의 외교독립론]는 무슨 과학적 근거로 그런 말을 하였는지 몰라도, 외교가 우리 한국의 최대의 무기일 뿐 아니라, 외교전으로써만 우리 한국의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고 [이승만은] 강조하는 것이다.

    이승만은 만 20세의 젊은 조병옥에게 이른바 ‘과학적 근거’를 설명하지 않았다.

    그래서 조병옥도 이승만의 말만 듣고 자신의 "견해를 첨가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병옥은 후일 다음을 깨닫게 된다.

    폴랜드나 체코슬로바키아가 국제적 변동에 따라 자주독립을 얻게 된 예를 상기할 때 우리 민족도 반드시 자주독립을 할 수 있도록 하게 하는 폴랜드와 같은 경우의 그러한 국제적 변동이 있을 것이라고 믿고, 한 줄기의 희망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근대학문을 습득하기 위해 이제 막 미국에 도착한 20대의 젊은 조병옥은 이승만의 주장을 이해하지 못하였지만, 40대의 조병옥은 체코슬로바키아의 예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 이승만의 이른바 ‘과학적 근거’의 외교노선을 늦게나마 이해하게 되었다고 여겨진다.

    외교독립에 대한 이승만의 과학적 근거가 후술하는 그의 학위논문이다.

    이승만은 1905년 민영환에 의해 미국에 밀파되기 전부터 미국 국무장관 존 헤이(John Milton Hay 1838-1905)의 문호개방정책 The Open Door Policy을 알고 있었고 대학원에서 이에 대해 습작을 작성한 바 있었는데 이것을 심화 확대 발전시킨 것이 그의 논문이다.

    그 후 미국의 문호개방정책과 일본의 팽창정책 사이의 대립과 길항이 중국을 둘러싼 랜싱-이시이 협정 Lansing-Ishi Agreement 1917, 워싱턴회의 9개국조약과 4개국조약 Washington Naval Conference 1921-1922, 스팀슨 독트린 Stimson Doctrine 1931 등 일련의 국제관계를 거쳐 마침내 1939년 미일 사이의 무조약 사태로 확대시키는 것을 주시할 때까지 간전기에 평화적인 외교정책만이 독립방략의 길임을 확신하였다. 그래서 출판한 책이 『일본 내막기』이다.

    중세 이래의 절대주의를 뒤엎은 프랑스 혁명정신의 자유물결이 시간과 함께 고조되어 그 절정에 달한 제1차 대전이 나머지 절대주의를 해체시켜 그 아래에서 억압받던 유럽의 소수민족들이 자유를 찾아 독립한 것처럼 다음에는 아시아에서도 절대주의가 붕괴되어 소수민족들이 자신들의 국가를 세울 것이라고 예측한 사람이 마사리크이다.

    그의 전망대로 제2차 대전은 마침내 그 정신을 다시 일으켜 한국의 독립을 그 자유의 물결의 두 번째 예로 만들었다.

    이승만의 『독립정신』을 보면 미국독립과 프랑스 혁명을 거친 자유의 물결이 인류사에 새로운 시대를 열고 그 끝자락에 한국이 우뚝 설 것을 확신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마사리크의 예견에 동조하고 있다고 보아 틀리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