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독(西獨)은
    동독(東獨)을 붕괴시키기 위한
    지원만 했다


    서독의 동방(東方)정책이 한국의 햇볕정책에 주는 교훈

      金玄浩

    ※ 이 기사는 <월간조선> 2000년 3월호에 게재된 내용입니다.
      
       단호한 원칙 없는 화해와 협력은 독일과 전혀 다른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서독은 결코 동독을 국제법상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다.
       ●서독은 동독의 人權 침해 사례를 30년간 모아 통일 후 처벌했다.
       ●경제 지원에는 반드시 국경에서의 긴장 완화 등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직접 차관은 不許… 차관과 총격 중지를 교환하기도
       ●社民黨정부, 동독과 화해정책 펴면서 「反체제 인사의 공직취임 금지」 결정
     

  • ▲ 유럽을 방문중인 한나라당 박근혜 전대표가 27일 오후(현지시간) 독일 베를린장벽의 현장을 방문, 수행의원들과 얘기를 하고 있다. 2006.9.27 (베를린=연합뉴스)ⓒ
    ▲ 유럽을 방문중인 한나라당 박근혜 전대표가 27일 오후(현지시간) 독일 베를린장벽의 현장을 방문, 수행의원들과 얘기를 하고 있다. 2006.9.27 (베를린=연합뉴스)ⓒ


       「붕괴를 위한 지원」 만이 있었다
      
       『東方政策(동방정책)은 동독 체제의 붕괴를 가속화시켰는가, 지연시켰는가』
       독일의 대표적 권위지인 週刊(주간) 디 차이트(Die Zeit)가 1992년 2월부터 3월까지 6회에 걸쳐 게재한 시리즈 논쟁의 제목이다. 당시 독일 지식인 사회는 이 주제를 놓고 일대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東方政策은 엄밀히 말하면 1960년대 말부터 서독 사민당의 브란트 정부가 추진한
    소련과 동구권에 대한 평화공존 및 화해정책이지만
    여기서는 브란트 이후 통일 때까지 서독이 동독에 취한 「독일정책」까지 포괄하는 의미이다.
       차이트紙(지)가 논쟁을 마무리하면서 마지막으로 실은 기사의 제목은
    「원칙적으로 올바른 東方政策이 왜 마지막에 가서 부분적으로 운영상의 실패로 끝났는가」였다. 핵심 부분을 인용해 본다.

       『과연 東方政策은 애초부터 의도적으로 공산주의 체제 붕괴에 일조할 목적으로 추진되었는가? 그같은 의도가 있었다고 주장한다면 東方政策에 너무 많은 기대를 한 것이다.
    그렇지만 공산주의 체제의 현실을 처음으로 직시하면서 동독의 內的(내적)인 안정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外的(외적)인 안정을 보장해 줌으로써 동독에 살고 있는 주민들을 돕는 것으로 공산주의 붕괴의 출발점이 되도록 했던 것만은 틀림없다.

    즉 「안정화를 통한 변화(Wandel durch Stabilisierung)」 유도였던 것이다.
    붕괴시킬 것인가, 지원할 것인가의 선택 가능성은 존재한 적이 없다.
    단지 붕괴를 위한 지원만이 있을 뿐이었다(통일부 번역자료에서)』

       이 글을 쓴 차이트紙의 로베르트 라이히트(Robert Leicht) 기자는 이같은 목적을 가진 東方政策이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위기를 맞기 시작했다고 지적했다.
    동서독간 타협으로 시작된 개방이 지속된 것이 아니라 사실상 「反動(반동)」을 맞았다는 것이다. 동독內 주민들의 분위기는 베일에 가려지고, 경제 침체는 가속화됐으며, 비밀경찰(Stasi)의 규모가 확대되고, 반체제 운동가들이 말문을 열기 시작했지만 서독의 정부와 政界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는 설명이다.
    東方政策의 후반기에 들어 서독의 정치인들이 현상에 안주해 동독內의 변화를 제대로 읽지 못한 채 너무 안이하게 대처했다는 비판이었다.
       이 기사가 東方政策에 대한 독일內의 일반적 평가를 대변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차이트紙의 논쟁 기사가 거듭 확인하고 있는 사실은 東方政策에 대한 시각과 평가는
    독일內에서도 매우 다양하다는 점이다.

       그런데 한국에 들어 온 서독의 東方政策은 어떠한가.
    한국인들의 東方政策에 대한 일반적 인식은 「독일 분단 시대에 서독은 동독에 대해 평화공존을 바탕으로 한 화해와 협력 정책을 꾸준히 추진한 결과 통일을 이룰 수 있었다」는 것이다.
    정부의 통일정책관련 자료나 학자들의 글 속에서도 이같은 인식은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독일의 통일정책하면 「화해와 협력」을 떠 올리는 것이 일반의 상식처럼 됐다.
    특히 이러한 경향은 金大中(김대중) 정부의 對北(대북) 햇볕정책이 추진되면서
    더욱 심화됐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인식이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차이트紙의 지적대로 서독의 對동독정책이 화해와 협력, 교류 등의 모습만 갖고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님에도, 우리에게는 유독 이 부분만 부각되고 있는 느낌은 떨치기 어렵다.
    서독이 동독과의 화해와 협력을 표방하고 추진하는 과정에서도 끝까지 견지하고 실현하려고 했던 핵심적 원칙들에 대해서는 좀체 우리의 시선이 닿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 원칙들은 화해정책 속에 담긴 「숨은 그림」과도 같은 것이어서
    얼른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을 발견해내지 못한 채
    화해와 협력이라는 겉모습만을 추구하다가는
    우리는 독일의 경우와는 전혀 다른 결과를 얻게 될지도 모른다.

       이 기사는 서독의 東方政策 전반을 되돌아 보려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화해와 협력이라는 화려한 外樣(외양) 속에
    서독 정부가 내부적으로 그어놓은 원칙과 양보할 수 없는 한계가
    무엇이었던가를 살펴보면서 한국에 주는 시사점을 찾아 보려는 것이다.
      
       동독을 국제법상 국가로 인정하지 않아
      
       독일 통일은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되어진 것」이라는 관점이 있다.
    독일 통일은 서독이 적극적인 통일정책을 추진한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통일을 사실상 포기한 채 동독과의 평화공존과 화해 협력을 강화해 온 결과 국제적 여건 변화에 따라 「偶然(우연)」의 모습으로 찾아 왔다고 보는 견해이다. 한국의 對北 햇볕정책도 근저에는 이같은 통일 철학을 깔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서독은 동독의 체제를 인정하고 대화와 협력을 강화해 나가는 과정에서도 자신들의 통일 의지를 스스로 약화시키거나, 약화된 것으로 비쳐질 수 있는 말과 행동은 극도로 삼가했다.
    서독 기본법은 서문에서 『모든 독일 민족은 自決(자결)에 의하여 독일의 통일과 자유를 완수하도록 요구받고 있다』고 규정하고 있었고, 역대 서독 정부는 이를 최고의 통일 이념과 통일 정책으로 삼아 對 동독 정책의 기본으로 유지했다.
       기본법의 이 규정은 단순한 선언적 의미에 머물지 않았다. 1972년 12월 동서독 기본조약이 체결되자 서독 바이에른 주정부는 이듬해 5월 연방헌법재판소에 기본조약의 위헌 소송을 제기했다. 당시나 지금이나 바이에른주는 독일에서 가장 보수적인 기사당(CSU)이 집권하고 있다.
    위헌 소송을 제기한 이유는 기본조약에서 동독을 서독과 동등한 자격을 가진 독립된 자립 국가로 승인한 것은 기본법에 규정된 「통일 완수의 使命(사명)」에 위배된다는 것이었다.
       기본조약은 「독일연방공화국(서독)과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은 동등 자격의 원칙 위에서 상호 정상적 선린 관계를 발전 시킨다」 「(양측은) 주권상의 평등, 독립의 존중, 자립과 영토의 불가침성, 자결권, 인권 보장 등 유엔헌장에 명시된 목표와 원칙을 준수한다」는 등의 조항을 담고 있었다.
       서독은 기본조약에서 동서독 관계를 「특수 관계」로 규정하려 했으나, 동독의 강력한 반발로 이를 조약에 명시하지 못했다. 브란트 사민당 정부는 동독과의 관계 개선에 나서기 앞서 동독에 대한 국가 승인의 문제가 국내에서 논란을 불러일으키자 1969년 10월28일 『서독 정부가 동독을 국제법상 승인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설사 독일에 두 개의 국가가 존재한다 할지라도 이들은 서로에게 외국이 아니다. 따라서 이들간의 관계는 특수할 수밖에 없다』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에 반해 동독은 정권 수립 이후 줄기차게 서독으로부터의 국가 인정을 요구해 왔고, 기본조약 협상 과정에서도 독자적인 주권 국가로서 서독으로부터 제한 조건 없이 국제법상의 국가 인정을 받기를 원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기본조약의 해당 조항 표현은 양측의 타협의 결과였다.
       서독 연방헌법재판소는 기본조약은 위헌이 아니라고 판결하면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동독은 국제법상 하나의 국가이다. 그러나 서독에 의한 동독의 국제법상 승인 문제는 별개이다. 서독은 동독에 대한 국제법상 승인을 공식적으로 한 적이 없으며, 오히려 이와 반대로 되풀이하여 이를 분명히 거부하였다. 서독이 동독에 대하여 긴장 완화 정책의 일환으로 취한 태도와 특히 조약을 체결하면서 대두된 실제상의 승인 사실을 평가한다면 이는 특수한 형태의 사실상의 승인으로서만 이해될 수 있다』
      
       常駐대표부도 총리실 소속으로
      
       헌법재판소는 서독 정부의 「특수 관계」이론을 지지한 것이다.
    헌법재판소는 특히 기본조약이 분단 고착화를 위한 것이 아니라 통일을 위한 것임을 강조했다.

       『이 조약은 기본법상의 再통일 사명과 모순되지 않는다. 이 조약은 분단을 위한 조약이 아니고 오히려 독일 민족이 다시금 국가적 통일을 달성할 수 있도록 연방정부가 오늘에도 내일에도 언제나 모든 가능한 방법을 동원하여 통일을 위해 노력해 나가기 위해 마련한 조약인 것이다』
       연방헌법재판소의 판결은 학자들 사이에 적잖은 이론적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서독 헌법재판소 판결이 독일 국내와 국제사회에 알리고자 한 메시지는 분명했다. 그것은 서독이 추진하는 동독과의 평화공존과 긴장완화 정책이 결코 통일 의지의 약화를 전제로 한 것이 아니며, 서독 정부는 영원히 통일의 사명을 위해 헌신해야 한다는 선언이었다.
       서독 정부 역시 동독의 체제를 인정하면서도 이것이 국제법상의 국가 승인으로까지 확대 해석되는 것을 막기 위해 구체적인 조치를 취해 나갔다. 기본조약에 따라 동독의 동베를린에 설치한 상주대표부를 외교부가 아닌 총리실 소속으로 한 것이 대표적 사례이다. 이는 常駐대표부 설치가 동독과의 외교 관계 수립, 즉 국제법상의 국가승인으로 해석되지 않도록 하기위한 苦肉策(고육책)이었다. 반면 동독은 서독 본에 설치한 常駐대표부를 외교부 산하에 두어 양측 관계를 국제법상의 국가관계 성격으로 만들기 위해 진력했다.
       당시 서독의 야당이었던 보수성향의 기민당(CDU)은 常駐대표부 교환과, 서독 연방대통령에대한 동독 常駐대표부 대표의 신임장 제정이 국제법상의 승인과 다름없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민당 정부는 서독 기본법에 규정된 신임장 제정 대상인 「파견된 자(die Gesandten)」를 반드시 외교사절에 한정할 필요가 없다는 논리까지 개발하면서 이를 일축했다. 常駐대표부 근무자들에 대해 비엔나 외교협정의 외교관 특권을 인정할 것인가의 문제가 쟁점이 됐을 때도, 서독 정부는 현실적으로 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끝까지 「이를 준용하여 적용한다」는 유보적 태도를 고수했다.
       서독의 통일 의지에 맞서 동독의 「분리 의지」도 집요했다. 1971년 집권한 동독의 호네커 정권은 1974년 헌법 개정에서 통일 조항을 아예 삭제함으로써 對 서독 「분리 정책(Abgrenzungspolitik)」을 공식화했다. 삭제된 통일 조항은 「독일민주공화국(동독)과 그 국민은 독일민족의 제국주의에 의하여 강요된 독일 분단을 극복하고 두 개의 독일 국가를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바탕 위에서 통일할 때까지 단계적으로 노력한다」는 내용이었다. 같은해 유엔 총회 연설에서 피셔 동독 외무장관은 『오늘날 독일 땅에는 두 개의 국가가 존재할 뿐만 아니라 두 개의 민족, 즉 「사회주의적 민족」과 「자본주의적 민족」이 존재한다』는 주장까지 폈다. 동독이 「2 민족론」까지 내세우며 서독으로부터의 「분리 독립」을 줄기차게 요구한 것은 인구, 국력, 국제적 위상, 정통성 등에서 서독에 대한 절대적 열세를 느꼈기 때문이다.
      
       「흡수통일」 아닌 동독의 자발적 「편입」
      
       서독이 동독과의 평화 공존과 화해 협력을 추구해 나가면서도, 이것이 어떠한 경우에도 통일의지의 약화로 비쳐지지 않도록 분명한 자세를 견지한 사실은, 한국 정부가 「흡수 통일」 배제를 對北 정책의 3원칙 중 하나로 공식 천명하고 있는 점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정부가 말하는 「흡수통일」은, 동독 공산 정권 붕괴 이후 서독이 주도한 독일식 통일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작 독일에서는 이 용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으며, 정확한 용어라고 할 수도 없다.

    독일 통일 당시 서독 기본법 규정에 따르면 두 가지 방식의 통일이 가능했다.
    기본법 23조에 따라 동독 지역이 서독 연방에 「편입」하는 방식과,
    146조에 따라 동서독이 함께 새로운 통일 헌법을 제정하는 방식이었다.

    호네커 정권 붕괴 후 자유총선에 의해 구성된 동독 의회는 이 두 가지 방식 가운데 조속한 통일을 위해 스스로「편입(Beitritt)」을 선택해 서독 기본법 체계 속으로 들어 간 것이다.
    서독도 통일과정의 단순화를 위해 이 방식을 선호했다.

       만약 한국 정부가 독일식 통일을 배제한다면, 어느 날 북한 주민들이 자유로운 의사에 의해 한국 헌법 체계 속으로 들어 올 것을 결정하더라도 우리 정부는 이를 「배제」하겠다는 뜻이 된다.

       한국 정부가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성이 높은 통일 방식의 배제를 굳이 공식 정책으로 천명하고, 대통령까지 나서 되풀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국내외적으로 통일 의지의 약화로 비쳐질 가능성이 높다.
    더구나 金大中 대통령은 『지금 곧 통일해도 우리에게는 북한을 지원할 능력이 없다. 통일을 서두르는 것은 북한이나 한국에게 모두 좋은 일이 아니다』(지난 1월5일 도이 다카코 일본 사민당 당수와의 회견)고 언급하고 있다.
    통일 비용이 두려워 일부러라도 통일을 늦추겠다고 공개적으로 천명하고 있는
    한국 정부의 통일 의지는 도대체 어느 정도인가.

       한국 정부는 현재 미국과 일본 등에 대해 북한과의 수교를 촉구하고 있다.
    이것이 마치 한국이 북한을 국제법상의 국가로 승인하는 의미로 비쳐질 가능성도 없지 않다.
    물론 남북한은 현재 어느 일방도 동독과 같은 「분리 정책」을 취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것이 당장 논쟁거리가 될 여지는 거의 없다. 남북기본합의서도, 동서독 기본조약과 달리, 남북한 관계를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라고 명시적으로 규정해 놓고 있다.

    그러나 만약 어느 날 북한 정권이, 동독이 그랬던 것처럼,
    한국에 대한 체제 열세를 절감해 국제사회와 한국에 대해 체제 보장을 요구하고 나설 경우
    한국의 북한에 대한 국제법상 국가 승인 문제가 대두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이 경우 한국 정부가 현재 취하고 있는 여러 가지 對北정책은
    한국의 북한에 대한 국가 승인 여부를 판단하는 주요 기준이 될 수도 있다.
    북한이 金日成(김일성) 死後(사후) 자신들을 「金日成 민족」이라고 부르고 있는 사실에서
    동독의 「2 민족론」을 연상하는 것은 영원한 杞憂(기우)일까.
      
       동독인은 당연히 서독 국적을 인정
      
       서독이 동독과의 화해정책 속에서도 동독의 강력한 반발을 무릅쓰고 끝까지 원칙을 고수함으로써 통일의 기반을 구축했던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정책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동독 탈출 주민 문제였다.
       이는 현재 한국 정부의 탈북자 또는 중국內 조선족들에 대한 정책과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서독은 동독 주민을 자국민으로 간주했다. 법적으로 뿐만 아니라 현실 정책에서도 이 원칙을 지켰다. 서독 기본법 116조는 『1937년 12월31일 현재 독일제국 영토하의 독일 국적 소유자와 그 배우자 및 비속은 독일 국적을 갖는다』고 규정했다. 이는 곧 서독이 전체 독일 민족의 정통성을 법적으로 승계하고 있음을 명확히 천명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동독 지역은 물론 폴란드 체코 소련 등지의 독일인들은 독일 국적을 갖고 있는 것으로 인정됐으며, 이들이 서독으로 들어 올 경우 별도의 국적 취득 절차 없이 당연히 서독 국민이 갖는 모든 권리를 갖는 것으로 해석됐다. 동서독 기본조약에 대한 위헌 소송 판결에서 서독 연방헌법재판소는 『이 조약은 동독 정부가 국적에 관한 법률을 어떻게 다루든지 관계없이 서독은 동독의 모든 국민에게 기본법 규정에 따라 서독 국민과 동일한 독일인으로 취급한다고 해석해야 한다』고 판시했다.
       서독의 「1 국적 주의」에 동독은 강력히 반발했다. 동독은 동서독이 서로 다른 2개의 국적을 갖는다는 내용의 국적법을 제정했고, 기본조약 체결 이후에는 『서독도 2개의 국가와 2개의 국적을 명시적으로 인정했다』고 주장했다.
       1950년부터 1989년까지 동독에서 서독으로 유입된 인구는 4백90만명에 달했다. 서독에서 동독으로는 47만명이 넘어갔다. 동독의 이주·탈출 주민들은 서독과 국제사회에서 동독 체제의 문제점을 폭로함으로써 동독 체제의 안정성을 더욱 떨어뜨렸다. 대개 교육 수준이 높은 젊은층들이 대거 서독으로 넘어감으로써 동독 체제 내부의 자체 개혁 잠재력이 더욱 약화돼 사회적 위기가 고조됐고, 결국 공산정권의 붕괴를 초래했다는 분석도 제기됐다. 반면 서독에서는 1960년대와 1970년대의 고도 성장 과정에서 이주민들의 역동력이 경제 발전의 중요한 역할을 했다.
      
       기업型 「탈주 지원」도 보호
      
       서독 정부가 동독으로부터의 탈출 주민들에 대해 어떤 자세를 견지했는지는 탈출 지원자들에 대한 처리에서 분명해진다. 베를린 장벽 구축으로 서독으로의 탈주로가 봉쇄되면서 서독인들의 동독인 탈출 지원도 크게 늘어나게 됐다. 이를 서독은 「탈출 지원」이라고 했고, 동독은 「인신 매매」라고 격렬히 비난했다. 처음에는 탈출 지원이 순수한 인도적 성격이었지만 나중에는 돈을 받고 도와주는 상업적 탈주 지원까지 생겨나게 됐다.
       동독은 서독의 탈출 지원 업체의 활동을 중단하라고 강력히 요구했다. 그러나 서독은 거주이전의 자유는 자유민주주의 기본질서에 속하는 절대적인 기본권이며 단일 국적 제도를 원칙으로 삼고 있어 동독 시민의 서독 입국을 막을 수 없다는 입장을 지켰다. 나아가 다른 사람이 거주이전의 기본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사람도 형사 처벌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지원 과정에서 문서 위조 등을 하였다 하더라도 범죄 행위가 되지 않는 것으로 간주했다.
       1977년 9월 서독 연방대법원은 탈출 지원에 관한 3건의 소송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판결을 내렸다. 이중 2건은 동독 탈주 성공 후 탈주자가 지원자에게 잔금 지불을 거절한 것이었고, 1건은 탈출 실패 후 선금을 환불하라는 소송이었다. 연방대법원은 동서독간에 체결한 통과교통협정이 개인의 권리와 의무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양독간의 국가 관계만을 전적으로 규정하는 것이므로 탈출 지원은 법적인 금지 사항이 아니라고 판결했다. 따라서 탈출 지원 계약은 동독에서 오는 독일인으로 하여금 기본권을 활용하도록 하는 것이기에 「善意(선의)의 관습」에 어긋나지도 않는다고 밝혀 탈주 지원 행위를 격려했다.
       이 판결에 대해 당시 니르 동독 외무장관은 『서독에 있는 범죄적 인신 매매자들의 존재와 행위를 정당화시킬 뿐 아니라 동독內 통과路(로)의 악용을 공공연히 호도하는 것』이라고 비난했고, 동독 대법원도 『(서독) 도당에 의한 범죄행위가 정당화 됐으며, 동독의 법률 질서를 깨뜨리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동독은 1957년 형법에서 「동독 출국 使嗾(사주)」와 「反(반)국가 인신매매」를 범죄로 규정했고, 1977년에는 탈주 지원에 대해 종신금고형까지 가능토록 했다. 동서독 통과교통협정 발효 후 6년간 서독 출신 9백52명이 동독에서 탈주 지원 또는 방조 혐의로 체포돼 이중 8백65명이 기소되고 6백34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탈출 지원에는 납으로 봉인된 트럭을 이용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고, 이는 동서독간 협정을 명백히 위반하는 것이었다. 동독측은 불시에 봉인된 트럭을 열어보는 방법으로 대처해 나갔다. 이런 일로 동독과의 마찰이 심해지자 서독은 1978년 기업형 탈출 지원에 대해 마약 남용(탈주자를 운송 과정에서 마취시키는 경우) 규정 등을 적용해 영업 행위를 일부 제한하는 조치를 취하기는 했으나 탈출 지원 자체를 금지하지는 않았다.
       독일 통일의 직접적 계기가 된 1989년의 동독인 대거 탈출 사태는 이같은 역사적 배경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西獨, 동독 인권 침해 사례 기록 모아
      
       한국 정부는 북한의 인권 문제에 관해 공개적인 언급을 가급적 삼가하고 있다. 여기에는 실효도 없이 공연히 북한 정권을 자극만 한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 남북기본합의서에도 「人權(인권)」이라는 단어는 찾아 볼 수 없다.
       동서독 기본조약은 유엔 헌장을 빌어 「인권 보호」를 명시적으로 규정했고, 이는 서독의 강력한 요구에 의한 것이었다. 동독 정권이 서독의 인권 개선 요구를 내정간섭이라고 비난하는 경우에 대해 서독 연방헌법재판소는 다음과 같이 판시했다.
       『서독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이익을 자유롭고 합당하게 표출하는 것을 동독이 기본조약 정신을 위배한 내정간섭이라며 이를 제한하려는 것은 오히려 그 편(동독)에서 조약을 위배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서독 기본법이 적용되는 지역은 서독 지역에 한정돼 있었기 때문에 동독 주민들에 대해 서독 기본법상의 인권 보장을 동독에 요구하는 것은 실효성을 갖기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다. 결국 서독은 동독內의 인권 신장을 원칙으로 천명해 놓고 실질적인 관계개선을 이루어나가는 과정에서 구체적 사안마다 동독 주민들의 삶의 조건 개선을 시도해 왔다고 할 수 있다. 동독은 서독과의 기본조약 체결 이듬해인 1973년 국제인권협약을 비준하고 1976년부터 국내에 발효시킴으로써 형식적으로나마 인권에 관한 국제적인 구속력을 인정했다.
       서독이 현실적 제약 속에서도 동독內의 인권 개선 의지를 지속적이고 단호하게 행동으로 보여준 대표적 사례가 잘츠기터(Salzgitter)에 설치한 동독지역의 정치적 폭행사례에 관한 기록보존소였다. 잘츠기터는 지방법원이 소재한 도시 중 동서독 경계에 가장 가까운 국경 도시였고, 이 도시가 속한 니더작센주는 가장 긴 동서독 경계선을 갖고 있었다. 동독의 코앞에다 이런 기록보존소를 세운 것 자체가 서독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 기록보존소의 설립 목적은 동독 정권에 대해 인권 침해에 대한 경고를 보내는 동시에 심리적 압박을 가하려는 것이었다. 동독內에서 자행되는 각종 인권 침해와 정치적 탄압 사례를 최대한 수집해 자세히 기록해 둠으로써 동독이 민주화되거나 통일이 이루어지면 가해자들을 처벌할 수 있는 증거를 확보해 두려는 목적이었다. 당장은 이같은 無言(무언)의 경고를 통해 동독 정권이 가급적 인권 침해를 자제토록 하는 효과를 노렸다.
       동독은 이 기록보존소의 존재 자체가 동독에 대한 내정간섭이라고 주장하면서 서독과의 교류 중단까지 위협하면서 기회 있을 때마다 해체를 요구했지만 서독은 요지 부동이었다. 서독 연방대법원은 동독인이 동독內에서 행한 행위에 대해서도 서독 법원의 사법권이 미친다는 취지의 판결을 통해 기록보존소의 법적 정당성을 뒷받침했다. 잘츠기터 기록보존소는 1961년 동독의 베를린 장벽 구축에 대한 대응조치의 하나로 설립된 후 통일 이후인 1991년까지 30년간 존속했다.
       관련 기록들의 수집 통로는 다양했다. 돈을 지불하고 인도 받은 동독 정치범, 동독 탈출자, 동독 방문 서독인 , 동독의 신문 방송 등에 보도되는 사건 등을 통해 인권 침해 사례를 모았다. 인권 침해를 당한 경험이 있는 사람에게 묻는 질문서에는 가해자의 성명 주소 연령 인상착의 특징 등을 자세하게 기록하는 난이 포함돼 있었다. 이 기록보존소가 30년간 수집한 사례는 4만3백 건에 달했다. 여기에는 8만여 명의 이름이 언급됐고, 이중 1만여 명이 형사 소추가 가능한 사람들이었다. 이 문건들은 실제로 통일 후 동독 체제 청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인권 침해 가해자들에 대한 형사 처벌의 증거가 되는 한편,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의 근거로 활용됐다.
       잘츠기터 기록보존소는 우리가 지금 북한 인권 문제에 어떤 관심을 보이고 있는지를 되새겨 보게 한다.
      
       경제 지원에는 국경 긴장 완화 조건 붙여
      
       서독의 동독에 대한 지원은 항상 조건이 붙어 있었다. 서독의 요구 조건은 인적 교류의 확대, 內獨間 국경에서의 수속 절차 완화, 환경 문화 교육 분야의 협력 강화 등이었다.
       동서독간 경제 협력중 교역이나 임가공 등은 순수 경제적 측면이 강했던 반면, 정치적 고려에 의한 서독의 동독에 대한 직접적인 지원은 주로 차관 형태로 이루어졌다. 서독 은행들은 1970년대부터 동독에 차관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서독 자금이 곧바로 동독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서독 은행의 외국 지점(주로 런던 파리 룩셈부르크 등)이 국제 컨소시엄(채권단)을 구성해 「유럽 차관(Eurokredit)」을 제공하는 형식을 취했다. 서독 정부와 연방은행은 통일 당시까지 서독은행이 서독의 자금을 직접 동독에 차관으로 제공하는 것을 허가하지 않는 원칙을 고수했다.
       동독은 1983년 서독측에 대규모 차관을 요청했다. 1980년대 들어 동독은 심각해진 경제난으로 국제 금융시장에서 채무는 늘어나고 신용도는 떨어져 서방은행들이 차관 제공을 거부하는 사태를 맞고 있었다. 당시 동독의 왜채는 90억~1백30억 달러에 달했으며, 이중 약 40%는 1년 이내에 상환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동독 대외무역부 차관 겸 외환 총책임자인 샬크 골로드코브스키는 서독의 기사당(SCU) 당수 프란츠 요셉 슈트라우스에게 서방은행의 차관을 서독 정부가 주선하고 보증을 서 줄 것을 요청했다. 동독이 서독 정계에서 가장 보수적이고 강력한 반공주의자였던 슈트라우스에게 직접 접근한 것은 그의 이해 없이는 일이 성사되기 어렵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슈트라우스는 사전 접촉에서 협상 개시의 조건으로 동서독 국경에서의 여행 규제 완화와 총격 사살 금지 등을 요구했다. 실제로 양측의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동독측의 여행수속 절차가 대폭 간소화되고 총격 사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본격 회담에서는 서독측에서 독일정책 담당 주무 부처인 총리실의 예닝거 장관이 참여했다.
       이같은 과정을 거쳐 1983년과 1984년 두 차례에 걸쳐 각각 10억 마르크와 9억5천만 마르크의 차관이 동독에 제공됐다. 금리와 상환 기간 등 차관조건은 당시 유럽 금융시장에서 적용되던 통상 수준으로 특혜는 아니었다. 또 서독은 국내의 자본 시장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차관 금액 전액을 유럽內 서독 은행 지점들을 통해 유럽 자본시장에서 조달했다. 서독 정부의 예산 부담도 전혀 없었다.
       차관 제공이 결정 난 후인 1983년 9월 동독측은 슈트라우스에게 국경 지대에 설치된 자동발사 장치를 제거하겠다고 통보한 후, 5만4천 개의 「SM-70 자동발사 장치」와 잔여 지뢰들을 제거했다. 대신 동독은 전자 감시 장치를 설치함으로써 양독 경계선상의 살벌함을 대폭 줄였다.
      
       화해 앞서 내부 체제부터 가다듬어
      
       1984년 차관 제공후 동독이 서독에 취한 주요 화해 조치는 11가지에 달했다. 동독인들의 서독 방문 허가 조건을 완화하고, 서독 체류 기간 한도를 30일에서 60일로 늘렸다. 서독인들의 동독 방문 허용 기간도 30일에서 45일로 늘리고, 동독 방문시 한 사람이 의무적으로 동독 마르크로 바꿔야 하는 서독 마르크의 액수도 25마르크에서 15마르크로 낮췄다. 이러한 조치들이 동서독간 인적 왕래를 확대시켰음은 물론이다.

       한국은 북한에 15만여 t의 비료를 무상으로 공급하고, 금강산 관광및 개발 대가로 9억4천여만 달러를 현금으로 지급하는 대신 북한으로부터 어떤 화해 조치를 얻어내고 있는가.

       서독 사민당의 브란트 정부는 동독과의 화해정책을 본격화하고 있던 1972년 1월 브란트 연방총리와 각 주의 총리들이 참석한 회의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공동 결의안을 채택했다.
       『서독 기본법을 부정하는 활동을 하는 사람은 공직에 임용될 수 없다. 反헌법적인 목표를 추구하는 단체에 가입한 자들은, 단체 가입 사실 자체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찬성하고 있다고 볼 수 없도록 의구심을 불러 일으키기 때문에 서독 정부는 이런 자들의 공직 임용을 배제할 수 있다』
       결의안은 反헌법적인 단체의 기준에대해서는 명확히 언급하지 않고, 그 판단을 헌법수호청(Verfassungsschutz)에 위임했다. 이 때문에 정부 각 기관은 공무원을 임용할 때 반드시 反헌법적 단체 소속 여부와 활동 등에 관해 신원 조회를 해야 했다.

       이 결의안은 서독 各 주별로 취해지고 있던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행정 규제에 대해 통일적인 기준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서독 공산당(KPD)은 1956년 위헌 판결을 받아 해산되고 3천여 명의 당원들이 구속됐으나, 1968년 기본 政綱(정강)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명시하지 않는 등 보다 온건한 모습으로 탈바꿈해 DKP라는 이름으로 再창당했다. 서독 정부는 DKP를 다시 해산시키지는 않았으나 그 활동을 정밀 관찰하고 당원들의 공직 임용을 금지시키는 등의 제한을 가한 것이다. 사민당이 동독과의 화해정책 추진과 함께 이같은 결의안을 마련한 데에는 「東方政策이 공산주의자들로부터 이용만 당한다」는 보수 정당들로부터의 비난을 무마하기 위한 의도도 작용했지만, 근본적으로는 동독과의 본격적인 대화와 교류에 앞서 내부 체제를 가다듬는 의미라고 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는 對北 햇볕정책이 북한의 외투를 벗기기 전에 한국의 對北 경각심부터 허물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과거 서독의 東方政策과 현재의 한국 햇볕정책을 평면적으로 비교할 수는 없다.
    당시 동서독과 지금의 남북한은 내부 체제, 분단상황, 국제 환경 등에서 너무나 차이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단 관리를 통해 통일에 이르기까지의 정책이 어떤 목표와 원칙을 가져야 할 것인가에 있어서는 독일과 한국이 크게 다를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현대 인류사에서 가장 평화적이고 성공적인 통일을 이룬 독일의 경우는 우리가 자주 들춰보아야 할 「참고서」임에 틀림없다.
       서독 헌법재판소의 다음과 같은 판결은 지금의 한국 정부가 되새겨 볼 만한 금언이다.
       『서독의 모든 헌법기관은 국가 통일의 재성취를 정치 목표로서 견지하여야 하며, 이 목표 달성을 위해 노력할 정치적 의무를 가지고 있다. 통일을 좌절시키는 어떤 일도 시도해서는 안된다. 대내적으로는 언제나 경각심을 갖고 통일문제를 추진해 나가야 하며, 대외적으로는 이를 끈기 있게 대변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