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讀後記:
    이래서 좌익들이 교학사 교과서를 죽이려 했구나!


    좌편향 교과서를 읽다가 교학사 교과서를 읽으니

  • 사막을 헤매다가 오아시스를 발견한 느낌이었다.

    趙甲濟    
      
    사막 속의 오아시스
        
       5種의 좌편향 교과서(금성, 두산동아, 미래엔, 비상교육, 천재교육)를 읽으면 머리가 아프다. 경험자가 많은 한국 現代史를 비틀고, 침 뱉고, 날조한 것이 뻔히 보이는데도 직업적 의무로 읽어야 하는 것은 일종의 고문이다.
    그런 상태에서 교학사 교과서를 읽으니 사막을 헤매다가 오아시스를 발견한 느낌이었다.
    정신적 독극물을 마신 학생들에게 이 책은 解毒劑(해독제)가 될 것이다.
    5種의 교과서가 지닌 문제들을 교학사는 대부분 해결해주기 때문이다.

    2014년부터 새로 사용되는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분석팀(김광동 박사 등)이, 8種 중 교학사만을 안심하고 쓸 수 있는 책이라고 결론 내린 이유도 여기에 있다.
    反대한민국적 좌파 세력이 들고 일어나 거짓선동으로 이 교과서를 죽이려 하였던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 책이, '최단기간에 최소의 人命희생으로 최대의 성공'을 이룬, 기적과 逆轉의 드라마인 대한민국의 영광된 현대사를 충실하게 전달하려고 노력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승만의 '정읍 발언' 정확하게 해설
     
       교학사 305쪽은 좌익들이 남북 분단의 원인이라고 몰아가는, 李承晩(이승만)의 井邑(정읍) 발언에 대하여 前後 사정을 정확하게 전달한다.
      <단독 정부 수립 활동과 좌익의 방해: 미·소 공동 위원회가 지리멸렬하게 진행되는 것을 보면서 1946년 6월에 이승만은 통일 정부의 수립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순회 연설 중 정읍에서 남한만의 임시정부 수립 필요성에 대한 입장을 발표하였다. 북한에서는 이미 1946년2월에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구성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12월에 미국으로 건너가 남한 임시정부 수립의 필요성과 공산주의에 대한 경각심을 고취시켰다.>
       이어서 이 책은 좌편향 교과서가 숨긴 좌익의 반역성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이승만이 반공적 단독 정부 수립을 위해 활동하는 사이 좌익 세력은 남한을 공산화하기 위해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들은 활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위조지폐까지 발행하였다(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이어서 조선 공산당은 1946년 가을부터 총파업을 하였다. 1946년에는 대구 10·1 사건 같은 무장 봉기를 일으키는 등 미군정과 정면 대치 상황으로 갔다.>
      정판사 사건은 미 군정이 조선공산당(남로당의 前身)을 불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대구폭동은 공산주의 세력이 폭력 노선으로 전환, 同族(동족)을 학살하기 시작한 최초의 사건으로 현대사 기술에서 뺄 수 없는 비중을 지녔다. 좌편향 교과서들은 좌익에 불리한 두 사건을 묵살하였다. 교학사 교과서도 대구폭동을 ‘대구 10·1 사건 같은 무장 봉기를 일으키는 등’이라고 기술하는 잘못을 범했다. ‘10·1 사건’은 애매하다. ‘대구폭동’이 맞다. ‘무장봉기’는 틀렸고 ‘무장반란’이 맞다. ‘봉기’는 의로운 궐기라는 뜻이 內在(내재)되어 있으므로 敵과 惡인 공산당에 대하여는 쓸 수 없다.
     
       여순 14연대 반란 사건 기술
      
       좌편향 교과서는 여수 순천 주둔 14연대 반란 사건도 주체를 흐리고, 국군에 의한 양민 학살만 있었던 것처럼 쓰는데 교학사는 정확하다.
       <제주도의 봉기를 해결하기 위하여 정부가 여수 주둔 14연대에 진압 명령을 내렸으나, 14연대 내의 남로당계 좌익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들은 여수를 장악하고 인민 재판소를 설치하여 우익 인사들을 살해하였다. 반란은 순천 지역까지 확대되었고 수많은 인명 피해가 있었다(여수·순천10·19사건). 이후 반란군은 지리산으로 들어가 게릴라전을 계속하였다. 남한 정부의 수립을 전후하여 남로당 지도부는 월북하였다.>
       위의 문장에서 ‘남한 정부의 수립'은 ’대한민국 건국‘으로 바꾸어야 하는데, 좌경화된 교육부가 이를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교학사는 정판사 사건과 대구폭동에 대하여는 305쪽 옆 난에 별도의 설명을 붙였다.
     
      <● 조선 정판사 위조 지폐 사건 보도(동아일보, 1946. 7. 30.)
      조선 공산당 사무실이 조선정판사 건물에 있었는데, 조선공산당은 이를 활용하여 대규모로 위조지폐를 발행하고 활동 자금으로 사용하였다. 이것이 미군정에 의하여 발각되어 조선 공산당 간부를 구속하고 박헌영에 대하여 체포령을 내렸다. 조선 공산당은 이에 대항하여 역공세를 취하여 총파업과 폭동을 일으켰다.
      ● 대구 10·1사건
      조선 공산당의 지시에 따라 파업을 벌이던 중 대구에서 폭력 시위가 발생하였다. 이를 해산 하는 과정에서 시위자 한 명이 경찰의 유탄에 의해 사망하자 시위는 폭동으로 변하였다. 시위 군중들은 대구 경찰서를 점거하여 무기를 약탈한 후 수십 명의 경찰과 그 가족들을 살해하였다. 폭동은 전국적으로 번져 수백 명의 사망자와 수만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스탈린의 北 정권 수립 지시문 공개
     
       좌편향 교과서는 分斷(분단)의 책임을 미국과 李承晩(이승만) 세력에 덮어씌우려고 소련과 북한에 불리한 史實(사실)은 은폐하였다. 대표적인 게 스탈린의 정권수립 지시문이다.

    소련 붕괴 후 공개된 이 자료는, 스탈린이 1945년 9월에 이미 북한지역에 사회주의 독재 정권을 세우려는 결심을 하였으므로, 군사분계선인 38도선이 금단의 선으로 고착되고, 남한이 공산화되지 않는 한 남북한에 이념이 다른 두 정권이 들어선다는 것은 기정사실이 되었음을 증명한 결정적 史料(사료)이다.
    교학사는 306쪽에서 이 자료를 공개, 분단 책임을 정확하게 썼다.

      <북한에서의 정권 수립 과정: 소련은 북한에서 1945년 8월25일부터 군정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9월에 스탈린은 북한에 부르주아 민주 정권의 수립을 지시하였다. 지시의 요점은 인민 민주주의 운동을 통하여 공산화의 길을 북한이 밟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북한은 각 행정 단위에서 인민 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이어서 중앙 행정부격인 북조선 행정 10국이 조직 되었다. 1946년 2월에는 북조선 임시 인민 위원회를 구성하여 사실상의 정권을 수립하였다. 1947년 2월에는 북조선 인민 위원회를 구성하였고, 1947년 6월에는 김일성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세우겠다고 언명하였다.
      ● 인민 민주주의 운동: 공산주의를 실현하는 데 있어서 사회적 조건이 충분하지 않은 나라에서는 일단 부르주아지와 연합하여 부르주아 민주 정권을 구축하되 정치적 실권을 공산주의자들이 장악하는 형태의 운동을 말한다.>
     
       김구의 실패한 남북협상 지적
     
       좌편향 교과서는 김구와 김규식의 남북협상을 美化 일변도로 소개하지만
    교학사는 실패한 이유를 설명한다(307).
      <남한에서의 정부 수립과 유엔: 김구는 4월20일, 김규식은 4월22일에 평양에 도착하였다. 평양에서는 전조선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가 이미 4월14일부터 개최되고 있었다. 연석회의는 4월23일 단독 선거 반대와 미·소 양군의 동시 철수를 요구하였으나, 이는 김일성이 작성한 안을 가결하는 회의였다. 김구와 김규식은 김일성으로부터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5월5일 서울로 돌아왔다. 김구는 북한이 남한 송전을 계속하는 문제를 협의하였다고 발표하였으나 북한은 5월14일 남한 송전을 중단하였다.>
     
       교학사는 대한민국 건국의 의미도 성실하게 적었다.
       <1948년 5월 국회가 개원되었고, 이승만이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7월17일 제정된 제헌 헌법은 정치, 경제, 사회에 있어서 자유 민주주의를 기본 이념으로 하였다. 또한, 대통령 중심제와 3권 분립을 통하여 제도적으로 민주화가 이루어지도록 하였다. 제헌 국회는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대통령에 취임한 이승만은 정부를 구성하여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선포하였다. 이로써 대한민국 정부는 미군정으로부터 통치권을 인수하고 유엔으로부터 승인받은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었다. 북한은 1948년 9월9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 공화국을 수립하여 김일성을 수상으로 선출하였다. 분단의 책임이 남한에 있는 것처럼 하려고 남한 정부보다 20여 일 늦게 정권 수립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북한 정권은 유엔의 승인을 받을 수 없었다.>
     
       6·25 남침의 책임 소재 정확히 밝혀
     
       6·25 전쟁에 대한 교학사의 기술도 확정된 사실과 부합할 뿐 아니라 스탈린, 모택동, 김일성의 전쟁 책임을 정확하게 지적하였다. 전쟁의 피해자인 대한민국 학생들에게 6·25 전쟁을 가르치려면 眞僞(진위)-善惡(선악) 분별을 명확하게 해줘야 한다. 교학사는 311페이지에서 <김일성의 오판: 소련의 이 같은 적화 전략을 부추긴 것은 북한의 김일성이었다. 북한은 나름대로 상황을 낙관하고 있었다>고 적었다.
      <북한에서는 우익 세력을 모두 제거하고 공산 정권을 수립하였고, 남한의 정부는 자유 민주주의 체제의 약점으로 인하여 좌익 세력들이 언제나 사회를 교란할 수 있는 조건이 조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김일성은 전쟁이 일어나면 남한의 인민은 폭동과 총파업으로 군대의 전투력을 마비시키고, 반란을 통하여 배후를 공격하면서 짧은 시간 내에 남한 정부를 전복하여 한반도 전역을 통일할 수 있다고 보았다.
      
       312페이지에서 교학사는 6·25 남침을, <김일성이 주도하고, 스탈린이 승인했으며, 마오쩌둥이 지원한 전쟁>이라고 정확하게 정의하였다. 좌편향 교과서들이 묵살하는 미국 트루먼 대통령의 역할도 명시하였다.
      <트루먼 대통령은 남침 소식을 보고받고 즉각 침략을 저지하고자 하였다. 6월25일에 바로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가 소집되어 침략을 비난하는 결의안을 채택하였고, 27일에는 무력 개입을 결정하였다. 바로 그날 트루먼 대통령은 미 공군과 해군의 파견을 지시하였는데, 유엔군의 全병력 중 미군이 88%에 달했다. 6·25 전쟁은 유엔군이나 공산군 양측에 엄청난 인명 피해를 초래하였다. 국군 약 15만 명과 미군 3만7천 명을 비롯하여 기타 참전국 군인 2,500명 정도가 사망하였다. 북한군 약 30만 명, 중국군 약 14만 명, 소련군 약 300명이 전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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