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술 마시던 유우성, 어떻게 중국 자주 드나드냐 묻자"회령시 보위부 요구 들어주면 쉽게 중국여권 낼수 있다" 답해한국서 만나자 황급히 발걸음 옮겨 '회령 유가강 맞구나' 확신
  • ▲ 피고인 유우성씨(왼쪽)가 지난 12일 오후 참고인 조사를 마치고 서초동 서울고검을 나서고 있다.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피고인 유우성씨(왼쪽)가 지난 12일 오후 참고인 조사를 마치고 서초동 서울고검을 나서고 있다.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최근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한 서울 공무원 간첩 사건의 주인공 유우성은 내가 탈북 하기 전 살던 북한 국경도시 회령시에서 유별난 인연으로 알게 된 화교(북한에서 살면서 중국 국적을 가진 한족)출신의 20대의 젊은 청년이었다. 말이 별로 없고 사람들에게 곁을 잘 주지 않던 유가강이 대한민국을 들었다 놓는 그런 인물로 등장하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2000년대 초기 나는 회령에서 중국과 무역업을 시작했다. 중국과 무역업을 한다는 것은 중국의 상품 가격을 알고 물자를 내오는 날자와 시간을 정해야 하기 때문에 핸드폰이 없으면 무역이 불가능한 일이었다.

    핸드폰은 아무도 모르게 썼다. 그 당시 북한에서 핸드폰을 남에게 쓰게 한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이 없었다. 핸드폰 사용에 대한 북한 사법당국의 금지령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북한 보위부에서는 핸드폰을 가지고 있거나 사용하는 것은 반국가 행위와 같이 취급했다. 핸드폰 주인뿐 아니라 핸드폰을 판사람, 한 번이고 두 번이고 사용한 사람이라면 죽기를 각오해야 했다.

    그래도 가장 가까웠던 친구 한 사람인 박원철(가명)과 그의 아내 최순옥(가명)은 내가 핸드폰을 갖고 있는 것을 알았다. 그의 집 아파트에서 중국과 전화통화가 잘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중국과 전화를 할 일이 있으면 박원철의 집에서 전화를 했다. 그만큼 신변의 위험까지도 각오해야 하는 일을 박원철네 집에서 허물없이 할 수 있은 것은 인간적으로 가까워서이다.

    박원철의 아내 최순옥은 나의 아내와 어릴 때 부터 한 마을에서 태어나 학교를 함께 다닌 동창생이었다. 친구 박원철의 아내 최순옥(회령시 동 담당 병원의사)은 유가강과 회령시 병원에서 함께 근무하고 있었다. 당시 유가강은 청진 의학대학에 통신(일하면서 자체로 대학 공부를 하는 제도)을 보며 회령시 병원에 준의사(의사가 되기 전 직책)로 근무하고 있었다. 최순옥은 유가강이 화교인 까닭에 생활적으로 신세를 많이 지고 또 그와 같은 병원에 근무하다 보니 그들 사이도 어지간히 가까운 모양이었다.

    2001년 봄이라고 생각된다. 하루는 최순옥이 "유가강이 중국으로 전화 할 일이 있어 그러니 핸드폰을 사용하게 하면 전화비를 넣어 주겠다"고 했다. 북한에서 핸드폰 전화비는 중국에서 넣어 주어야 사용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북한에서는 그 당시 국경 지역에서만 중국과 핸드폰을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핸드폰 기지국도 중국에 있었다.

    무역을 갓 시작한 나로서는 전화비를 자주 넣어 달라고 중국에 부탁하기 몹시 부담스러운 때여서 전화비를 넣어 주겠다는 이야기에 귀가 솔깃해졌다. 전화비를 넣기 힘든 때라 유가강이 중국 전화를 몇 번하고 위안화 100원을 전화비로 넣는 것도 괜찮은 장사였다. 전화비 위안화 100원을 넣으며 전화를 자주 하지 않는 때어서 3개월 정도를 쓰곤 했다.

    그러나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핸드폰을 사용하다 보위부에 나에게 핸드폰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큰일"이라고 하자 최순옥은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유가강이 회령시 보위부 사람들을 잘 알기 때문에 단속을 당해도 문제가 없다는 것이었다.

    회령시 성천동 담당 보위부 지도원은 유가강의 집에 제집 드나들 듯이 했고 회령시 보위부에서도 유가강의 모습을 여러 번 보아온 나로서는 최순옥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특히 유가강과 함께 최순옥의 집에서 전화를 하고나서 소주를 한잔 함께 한적도 있었다. 그때 나는 유가강에게 어떻게 중국에 자주 합법적으로 드나들 수 있는가 물었더니 웃으며 이렇게 말한 적도 있다.

    "회령시 보위부의 요구를 들어주면
    쉽게 중국여권을 낼수 있기 때문에
    자주 중국에 들어갈 수 있다."


    친구 박원철과 아내 최순옥이 장담하고 또 그들과 가까운 사이라 내가 그들의 요구를 무시하면 이상한 일이 벌어질 것 같아 들어주기로 했다.

    2002년 12월이라고 생각된다. 한번은 회령천 가까이 있는 회령인민위원회에 근무하고 있는 친구의 아파트 집에서 핸드폰으로 전화를 하다 북한 국가보위부 전파탐지국 사람들에게 체포된 적이 있었다. 그 사람들은 평양 국가보위부에 적을 두고 국경지역에 주재하고 있으면서 중국과 한국으로 오가는 핸드폰 전파를 탐지하거나 추적하여 범인을 잡아내는 임무를 맞아 수행하는 사람들이다.

    그들도 회령시 어느 장소가 핸드폰 통화가 되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지역에 전파 탐지국 요원들이 차를 타고 대기하고 있다가 핸드폰 전파가 들어오면 차로 이동하여 급습한다. 핸드폰 통화를 5분 이상 하면 안되었다.

    그날 중국과 통화가 조금 길어져 10가량 했는데 그만 국가보위부 전파 탐지국 사람들이 내가 전화를 하고 있던 집 문을 부스고 들어오는 바람에 붙잡히고 말았다. 그 일로 1주일 가량 회령시 보위부에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 중국에서 물자를 내오는 일로 핸드폰을 사용한 것이 밝혀졌다.

    나의 직업이 무역기관 책임자인 관계로 평양 본사에서 많은 도움을 받아 다행히 벌금 40만원을 물고 삼성 핸드폰을 빼앗기고 나서야 풀려났었다. 그때 유가강이 전화했던 전화번호가 그 핸드폰에 남아있어 일이 난처하게 되었다. 핸드폰에 찍혀 있는 전화번호의 출처를 대라며 곤욕을 치루는 과정에 유가강이 중국에 전화 했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때 유가강이 보위부에 끌려가 엄청난 처벌을 받을 줄 알았는데 아무 일 없는 것을 보고 확실히 보위부와 가까운 사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알게 되었다. 다른 일반 사람들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유가강과 나는 핸드폰으로 중국과 전화를 하면서 잘 아는 사이가 되었다.

    나는 북한을 떠나지 않으면 안될 기막힌 사연이 있었다. 나의 친구가 중국에 갔다 오겠다고 하여 보내준 것이 그가 한국으로 도주를 하는 바람에 국가 보위부에 발각 되면 수용소에 끌려갈 판이었다. 북한에서는 한국행을 도와준 사람은 무조건 공개처형 아니면 수용소에 넣어버리는 것을 나는 너무 잘 알고 있었기에 앞뒤 생각 할 겨를도 없이 북한을 급하게 떠나게 되었다.

    2006년 10월 하나원을 나와 정부로부터 서울 송파구 거여2동 임대 아파트에 배정받아 그곳에서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해 11월 중순 경이라고 생각된다. 어느 날 오후 5시경 밖에서 일을 보고 4층에 있는 집으로 올라가려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사람들을 보던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 하지 않을 수 없었다. 4년전 북한에서 중국으로 갔다고 하던 유가강이 나의 앞을 지나 가는 것이었다.

    탈북하기 전인 2003년 봄 그의 아버지가 하는 "유가강이 중국으로 영원히 살려고 들어갔다"고 해서 유가강을 다시는 볼수 없으리라 했던 나는 뜻밖에 한국에서 그를 만나게 될 줄이야 꿈에도 생각을 못 했다. 사라져 가는 유가강의 뒤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면서 '내가 잘못 보지 않았나.' 보고 또 보아도 분명이 내가 알던 북한 회령의 유가강이었다. 며칠 동안은 서나 앉으나 그의 생각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믿어지지 않았다. 유가강의 집은 북한 회령에서 잘 살고 돈이 많기로 소문난 집인데 한국에 돈 벌러 왔다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무엇 때문에, 어떻게 한국에 왔을까? 세상에 똑같이 생긴 사람도 있다는데…'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얼마 후 다시 유가강을 보게 되었다. 단지 아파트 보도 블록에서 만났을 때 나는 유가강에게 북한 회령에서 오지 않았는가 물어보았다. 그런데 그는 이렇다 할 아무런 대꾸 한마디 없이 나를 쳐다보더니 황급히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었다. 그를 지나쳐 보내고 나서 나는 '회령의 유가강이 맞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생명을 담보로 해야 하는 핸드폰 사용을 함께한 내가 유가강을 몰라 볼 수 없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유가강이 나를 피할까. 수수께끼 같은 의혹을 떨쳐버릴 수 없던 나는 유가강이 어디서 사는지 알아 볼 생각을 해보았다. 이후에도 그와 한 아파트에서 사는 까닭에 자주 만날 수 있었다.

    한번은 내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고 유가강이 올라갔다. 내가 살고 있던 아파트는 복도식으로 되어 있어 올려다보면 사람이 집을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나는 엘리베이터를 나오자마자 그가 어디로 가는지 밖에서 지켜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유가강이 내가 살던 집의 위층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한 달 정도 지나 나는 우편 배달을 해볼 생각으로 9인승 스타렉스 승합차를 할부로 구입했다. 어느 날 아파트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집으로 올라가려는데 유가강이 웬 여성과 대우자동차인 마티즈 같은 디자인의 빨강색 경차를 타고는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인 2006년 12월 관계 기관에 유가강의 행적에 대해 알리고 추적해 보라고 이야기 했었다.

    2008년 5월 나는 마포구 OO동으로 이사를 하면서 유가강을 다시는 보지 못했다. 그로부터 6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어느 날, 탈북자로 위장한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이 언론에 보도 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나는 최근에 북한에서 유가강을 알게 되어 지나온 과정을 짧게 돌이켜 보았다. 북한에서 부러운 것 없이 살던 유가강이 왜 중국으로 건너갔으며 중국에서 한국으로 탈북자 행세를 해가며 온 이유는 무엇일까.

    유가강이 탈북민들과 단체들의 명단을 북한 보위부에 넘긴 것이 사실인지…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마땅히 법에 따라 처벌을 받아야 할 것이다. 자유를 찾아 한국으로 왔다고 하는 그가 증언한 이야기를 들어보며 여러가지 개인적 생각을 해보게 된다.

    유가강을 처음 한국에서 만났을 때 관계기관이 나와 함께 '북한 쪽의 아는 사람들을 통해 그의 정체를 알아보았으면 이번과 같은 황당한 일이 없었을 텐데…' 하는 생각을 여러 번 해보았다. 나는 유가강의 사건을 놓고 그를 옹호하는 일부 사람들이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여론을 악의적인 목적으로 이용하는 것을 보면서 씁쓸한 생각을 금할 수 없다.

    수백만의 북한 동포들이 독재자의 칼에 맞아 쓰러져가도 입 한번 뻥긋 안 하고 외면하던 사람들이 수사가 마무리되기도 전에 살판났다며 왜 호들갑을 떨고 있는지 모르겠다. 문제는 유가강이 북한 보위부 임무를 받은 간첩인가 아닌가를 규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유가강 사건의 본질을 다른 곳으로 끌고가서 자신들의 불순한 정치적 목적과 이해관계에 이용하려는 일부 정치 장사꾼들과 사람들은 이번 사건을 국가안보를 총괄하는 국정원을 해체시키고 무력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으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섬뜻한 생각이 들곤 한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북한 지령을 받지 않고서야 백주에 한나라의 안보를 총괄하는 기관을 뒤집어 놓으려고 난리를 부릴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사법기관의 수사가 올바른 방향에서 진행되어 이번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이 어느 특정 기관이나 사람들을 흠집내고 파면시키려는 정치적인 목적에 악용하지 말았으면 하는 생각이다.

    정부와 국민들은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을 이용하여 어부지리를 얻고 정치적인 목적을 이루어 보려는 그 어떤 행위도 단호히 배격하고 유가강 사건을 공정하게 수사하여 법과 원칙에 따라 처리 하였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