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 한인2세 윌버트 최, 대한민국 표창 줘야 마땅마우나라리 병원, 정부 차원 감사패 전달해야…

  • 1960년 4월19일 혁명, 자유당 정권이 이기붕 부통령 당선을 위해 감행한 부정선거에 항거한 혁명. 이승만 대통령은 부정선거에 직접 개입하지 않았지만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스스로 하야(下野)했다. 

    1960년 4월26일 하야한 이승만은 조지워싱턴大 학사, 하버드大 정치학 석사, 프린스턴大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1913년 2월3일부터 25년간 생활했던 하와이로 1960년 5월29일 출국했다. 

    이화장을 나서던 이승만 부부의 손에는 옷가방 2개와 타자기 뿐 그 어떤 것도 없었다. 누가봐도 잠시 집을 비우는 모양새였다. 실제로 이승만은 주변 이웃들에게도 "한달이면 돌아올 테니 집을 잘 봐줘요"라고 말했을 정도. 과거 이승만이 하와이에서 활동했던 시절, 그를 알던 한인 2세 '윌버트 최(Wilbert Choi)'가 비행기는 물론 숙소, 생활비까지 준비해 이승만 부부를 맞았다. 

    최씨의 배려로 몸은 편안했지만 짧은 시간 머물 것이라고 생각했던 이승만의 예상과 달리 길어진 하와이 생활은 고국에 대한 그리움으로 변했다. 게다가 무일푼으로 하와이에 온 이승만 부부는 최씨에게 계속 신세를 지는 게 미안하기도 했다. 

    이승만은 극구 사양하는 최씨에게 이화장을 넘긴다는 계약서를 써서 주기도 했다. 1962년 9월11일 서울 이화동 1번지 이화장을 양도했다. 불편한 마음의 짐을 덜기 위해 쓴 계약서는 현재 법적 효력은 없다. 한인 3세인 최씨의 아들과 딸은 단 한번도 이화장에 대한 권리를 주장한 바 없다. 

    잠깐 떠나온 여행이 1년이 넘었다. 1961년 11월22일 하와이를 방문한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이승만을 찾아보지 않았다. 그리고 1962년 3월17일 귀국을 열망하던 이승만의 귀국을 박정희는 허용하지 않았다. 좌절한 이승만은 1962년 3월21일 쓰러졌다. 그리고 마우나라니 요양원에 입원했다.      

    요양원에서 3년, 1965년 7월19일 이승만은 결국, 눈을 감았다. 그리고 1965년 7월23일 그립고 그리웠던 고국의 품에 감은 눈으로 안겼다. 마우나라니 요양원은 치료비는 물론 입원비까지 받지 않았다. 

    대한제국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국민에게 주권이 있는 자유민주주의 공화국을 주장했던 청년 이승만. 그는 훗날 공산주의의 허울뿐인 달콤함에 마비된 국제사회에 유일한 반공주의자로 성장한다. 외로운 현인(賢人), 이승만은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1960년 4월26일까지 대한민국을 지켰다. 

    대한민국의 위인은 타향에서 숨을 거뒀고 그가 이룩한 업적, 대한민국에서 번영을 누리는 2014년 4월19일의 우리는 아직도 그에게 느껴야 할 미안함을 모른다. 그리고 이승만의 마지막을 지켜준 하와이 이민 2세들에게 마땅히 표해야 할 감사함도 역시 모른다.

    늦지 않았다. 다만 '미안하다'는 말과 '감사하다'는 말은 대한민국 정부가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이다. 기자는 그게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4·19의 숭고(崇高)한 정신을 존중해 책임을 지고 떠난 이승만을 높이 평가하는 게 대한민국 국민의 예의라고 생각한다. 

    [뉴데일리=윤희성 기자 ndy@newdail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