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성호 중앙대학교 교수 ⓒ 바른사회시민회의 제공
    ▲ 이성호 중앙대학교 교수 ⓒ 바른사회시민회의 제공

    서울시 교육감은 자사고 폐지를 위한 명분을 구축해 나가는 듯 보인다. 시급히 수행해야 할 중요한 교육과제들이 산적해 있을 텐데 취임 즉시 전체 고등학교의 3%를 넘지 못하는 자사고를 표적 삼아 물의를 일으키는 저의가 무엇인지 자못 궁금하다.

    이해를 돕기 위해 다소 혼란스럽게 사용되는 용어들에 대해 간략히 설명하기로 한다. 현재 2300개가 넘는 우리나라의 고등학교는 크게 일반계와 전문계로 나누어진다.

    일반계에는 대부분의 일반고등학교, 민족사관고등학교와 같은 자립형사립고등학교, 자율형사립고등학교, 그리고 개방형자율고등학교 등이 있고, 전문계에는 과거의 실업학교에 해당하는 전문계고등학교, 과학고등학교, 외국어고등학교, 대안학교와 같은 특성화고등학교 등이 있다.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자사고는 자율형사립고등학교로서, 자립형사립고에 비해 숫자는 많으나 자율권이 범위가 크게 제한된다. 자사고와 유사한 개방형자율고는 자사고와 유사한 성격의 공립학교라고 보면 된다.

    자사고의 학생선발권을 옹호하는 이제까지의 논의는 대부분 하향식 평준화의 방지, 교육의 질적 향상, 수월성의 제고 등에 관한 것들이었다.

    즉, 학업성취도가 상위권인 학생들을 중심으로 자사고를 운영함으로써, 교조적 평등지상주의의 폐단을 시정하고 학력증진을 도모하여 국가경쟁력을 제고하자는 실용주의적인 주장들이 주류를 이루어 왔다.


    교육수요자의 학교선택권과 자사고

    결론적으로 말해, 서울시 교육감이 지향하는 자사고의 폐지는 학부모와 학생들의 학교선택권을 부정하는 것이다. 자사고의 명시적인 설립취지는 단위학교의 자율권의 보장이지만, 자율권보다 더 궁극적인 목적은 교육수요자들의 학교선택권을 확대하는데 있다.

    선택권의 확대를 위해 학생의 구성과 교과과정의 운영 면에서 다채로운 학교들이 존재해야 하며 이것이 바로 교육의 다양성이다. 교육의 다양성은 개별 학교의 자율성을 전제로 한다.

    일반적으로 학교의 자율성은 학생선발, 교육프로그램의 운영, 그리고 재정에 관한 융통성과 탄력성을 의미한다. 학교의 자율성이 제한되면, 학교가 제공하는 교육은 획일화되고 이렇게 되면 학부모나 학생의 입장에서는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어지는 것이다.

    결국 학교의 자율권은 교육수요자들의 다양한 선택을 위한 전제조건이다. 그리고 이러한 선택권은 헌법에 의해 보장된 교육권의 중요한 부분이다.

    대한민국 헌법 31조에 의하면 우리나라 국민들은 능력에 따라 균등한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 그리고 교육기본법 3조와 12조는 각각 적성과 능력에 따라 교육 받을 권리와 학습자의 개성을 존중하고 있다. 또한 교육기본법 13조에서는 자녀 아동의 교육에 관한 학부모의 권리를 포괄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교육권은 학생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필요로 하고 자신에게 적합한 학습을 할 수 있는 권리고, 학부모의 입장에서는 학교 선택권, 교육내용 선택권 등이라고 해석될 수 있다.

    우리나라는 교육에 엄청난 예산과 재원을 투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타 선진국들과 비교해 볼 때 공교육에 대한 만족도가 상당히 낮은 편이다. 연간 국내총생산의 3%에 육박하는 20조원 정도가 사교육시장에 투입되고 수 조원이 해외유학 내지는 연수비용으로 지출되는 현상들은 공교육에 대한 불신과 불만의 증거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같은 공교육에 대한 불만의 가장 큰 원인은 학부모와 학생들의 교육선택권이 제한된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최근 필자가 행한 연구에 의하면, 20여개 선진국을 대상으로 실시한 학교선택권에 대한 조사에서 우리나라는 최하위를 차지하고 있다. 달리 말해, 우리의 교육수요자들은 평준화를 기본적인 틀로 설정하고 있는 학교교육제도 하에서 지극히 제한된 선택권을 행사하고 있을 뿐이다.

    2010년 서울 지역을 필두로 도입된 자사고제도는 이렇게 제한 받는 학교선택권을 다소나마 확대하기위한 교육정책이었다.

    즉, 소정의 심사를 통해 선별된 사립학교들에게 학생 선발, 교육과정 운영, 재정 등 크게 3가지 분야에서의 자율권을 허용하여 여타 일반고와의 차별화를 유도함으로써, 교육수요자들의 학교선택의 폭을 넓히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자사고는 출발 전부터 학생선발과정이 이념적이고 정치적인 논란에 휩싸이며 자율권을 점차로 상실해왔다.

    현행 교육부의 방침에 따르자면, 자사고는 재정 면에서 학생의 부담이 일반고의 3배를 넘지 못하게 되어 있다. 그나마 일반고에 지급되는 정부보조금도 없다. 지난 이명박 정부 하에서는 자사고 선발 대상을 중학교 내신 상위 50%로 제한하는 미미한 운신의 폭을 허용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운신의 폭이 아니라 학교의 존립 자체가 일개 교육감에 의해 위협을 받고 있다. 한 마디로 이는 교육선택권에 대한 부정이다.

    한편, 서울시 교육감은 이렇듯 선택권을 부정하면서 좌파 진영의 교육감에 의해 탄생된 ‘혁신학교’에 대해서만은 선택권을 인정하는 일종의 자가당착을 어찌 설명할 것인가?

    특히 자사고는 중앙이나 지방정부로부터 아무런 재정지원을 받지 못하는 반면, 혁신학교는 일개교당 2억원 정도를 지원받는다는 점에서 오히려 혁신학교가 재정적 부담이 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와 아울러, 좌파 교육감들은 자사고가 입시위주의 교육을 한다고 하는데, 자사고보다 입시성적이 좋은 외고나 과고에 대해서는 일체의 언급이 없고 오직 자사고만을 표적으로 삼아 공격하는 저의가 무엇인지도 궁금하다. 그리고, 현재와 같이 고교졸업생의 90%정도가 대학에 진학하는 상황에서 고교교육이 진학을 위한 준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지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


    관주도로부터의 탈피

    서울시 교육감의 자사고 폐지 추진은 관주도 교육행정의 전형이다.

    우리의 전통사회에서는 관학의 설립과 운영을 통해 국가가 학교교육의 설치는 물론, 교육재정, 수업활동, 교원인사 등 교육에 관한 광범위한 사안들을 직접 관리하고 감독하였다. 중앙집권적이고 관료주의적인 교육행정은 조선이 일제에 병합됨으로써 더욱 고착화되었다.

    박정희 정권 역시 반공이라는 국시의 구현과 경제번영이라는 과업의 달성을 기치로 내걸면서 학교제도와 교육의 내용 등을 통제하였다.

    그 후 전두환, 노태우 정권에서 교육에 대한 국가의 독점은 계속되었으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권에서도 이러한 현상은 본질적으로 변화되지 않았다.

    현재 서울시 교육감이 추진하고 있는 자사고의 폐지 역시 관주도 교육행정의 연장선상에서 볼 수 있다.

    공교육의 영역에서 관의 역할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도가 지나치다.

    사립학교들은 이름만 사립일 뿐 교육과정의 선정, 운영, 학생선발 등 거의 모든 측면에서 중앙 혹은 지방정부의 통제와 감독을 받는다.

    더욱이 이들의 재정자립도는 지극히 빈약하여 이들 학교의 교원에 대한 인건비는 대부분 국민의 세금으로 충당되고 있는 실정이다.

    관주도형 교육행정체제의 가장 심각한 문제점은 관의 독선과 오만이다. 국가는 목적이 아닌 기능이며 더욱이 절대적인 선의 기준은 될 수 없다. 국가주도형 교육행정체제에서 관료들은 자칫 ‘國家無誤設’ 혹은 ‘官僚無誤設’이라는 환상에 빠지기 쉽다.

    지나치게 관주도적인 규제와 간섭을 완화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교육계의 관료들은 ‘학교를 믿을 수 없다’라고 응답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교육 현실에서는 관료들만이 신뢰할 수 있는 집단이라는 뜻인가? 이야말로 전형적으로 후진국형 관의 오만과 편견이다. 우리 사회에서 관은 사회적 신뢰나 전문성을 독점하고 있는 집단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공교육이 철저히 관에 의해 주도되는 중국에서는 학생선발, 재정, 교육과정 운영 등에서 완전한 자율을 누리는 사립학교의 비중이 과도할 정도로 커지고 있다.

    영국, 미국, 프랑스 같은 선진국에서는 정부의 통제와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립학교들이 전체 공교육의 약 10%에서 15%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이제는 우리의 교육도 정부의 주도와 감독 위주의 후진성에서 벗어나야 한다. 자사고와 같은 사립학교들을 활성화함으로써 관 중심의 획일성과 경직성에서 탈피하여 창의성과 다양성을 지향해야 한다.

    사립학교라고 해서 무조건 등록금이 비싼 ‘부자들을 위한 학교’가 아니라는 것은 선진국의 예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종교단체나 자선단체 혹은 독지가들에 의해 운영되는 사립학교들은 ‘귀족학교’일 필요는 없다.

    오히려 사립학교의 활성화를 통해 우리의 공교육체제를 더욱 유연하고 탄력 있게 만들 수 있을 뿐 아니라, 공립학교와 사립학교 간의 경쟁과 협력을 통해 국가교육의 수준을 한 차원 높일 수 있다.

    그리고, 자사고의 경우에서와 같이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계층은 교육에 대한 비용을 자비로 부담하게 하고, 이로 인해 절감되는 국고를 일반공립학교의 질적 개선에 투여하는 방안은 교육의 불평등을 해소하는 ‘교육적 이익의 재분배 (redistribution of educational benefit)’가 될 수도 있다.


    다양성을 지향하는 교육

    자사고의 중요한 존립취지는 다양성 있는 교육이다. 개성 있는 건학이념이나 교육목적을 구현하기 위한 자사고도 중요하지만, 학생들의 특기나 적성 그리고 장래의 진로 혹은 지역적 특수성과 학부모들의 특색 있는 수요를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자사고의 출현도 바람직하다.

    자사고를 그 목적이나 기능 면에서 다양화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면 학생선발의 기준 또한 다양화될 것이고, 자사고를 입시학원이나 귀족학교로 매도하는 목소리나 학교 간의 서열화에 대한 논쟁은 물론, 자사고로 인한 사교육에 대한 우려도 잠재울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소위 특수목적고는 바로 이러한 취지하에 도입 된 제도이지만, 사회의 일각에서 설립취지와는 달리 입시준비를 위한 장소로 변질되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필자는 자사고의 범위를 보다 광역화하여 현재의 특목고나 특성화고는 물론 전문계고의 일부까지도 포괄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즉, 자사고를 보다 다양화함으로써, 고교를 졸업하고 바로 산업현장에 투입되는 학생들, 일반 고교의 체제나 제도 속에서 적응하기 어려운 학생들, 언어나 과학 혹은 예체능 방면에 특출한 재능과 적성을 가진 학생들 등을 위한 다채로운 교육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

    한편, 아무리 기준이 다양화 된다고 하더라도 모든 선발은 평등의 문제와 직결될 수 있다. 어떤 사회에서건 불평등은 불가피한 현실이다. 그러나 그 불평등이 용인되기 위해서는 사회적 혜택에서 소외된 계층(socially disadvantaged groups)에 대해 보상장치가 마련되어야 한다.

    즉, 재능 있는 빈곤층 자녀들에게도 소위 엘리트 교육의 기회가 부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실시하고 있는 대학입학 농어촌전형 혹은 사회적 약자계층에 대한 자사고나 특목고의 특례입학 등이 이와 유사한 장치라고 볼 수 있는데,

    이처럼 입학에 대한 특전을 부여하는 제도보다는 이들에 대한 보충지도를 통해 저소득계층 학생들의 학력을 증진시키는 방안이 더욱 합리적이라고 사료된다.

    실제로 뉴욕시는 필기전형으로 학생들을 선발하는 소수의 공립특목고를 운영하고 있으며 매우 우수한 성적을 가진 학생들만 이 학교에 입학할 수 있다.

    그런데 저소득층 자녀들에 대한 배려로 이들에게 입학의 특전을 주는 대신, 이들 중 일부를 선발하여 방학을 이용해 양질의 입시준비교육을 무상으로 제공하고 있다.

    실제로 적지 않은 수의 빈곤계층 학생들이 이런 경로를 거쳐 뉴욕시의 특목고에 입학하는데 학생들의 실력도 향상시키고 자존심도 지켜준다는 측면에서 의미가 큰 제도라고 본다. 

    요약컨대 자사고의 핵심은, 자율을 바탕으로 학교교육의 다양성을 증진시킴으로써 교육수요자들의 선택권을 확대해 주고 관주도의 경직성을 극복할 수 있다는 데에 있다.

    그런데 일개 교육감이 자사고에 대한 일부 부정적인 여론을 등에 업고 개교된 지 몇 년 되지도 않는 학교들의 폐지를 추진한다는 것은 교육적으로 대단히 부적절한 조치라고 사료된다. 간이 요식업소들에 대한 존폐도 이처럼 졸속하게 결정되지는 않을 것이리라.

    공공의 정책은 두 가지 효용을 지닌다. 하나는 대중적인 요구에 부응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대중성에 관계없이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다.

    교육감은 정치인이 아니다. 교육감에게 필요한 것은 대중적 인기가 아닌, 나라의 장래를 위한 비전을 제시하고 그에 일관된 교육정책을 펴가는 리더십(leadership)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