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응환(趙應環, 31년생, 서귀포시 안덕면 대평리)
    2012. 11. 13. 증언

    조응환은 가파리가 고향이다. 대평리(옛 창천 2구, 서 난드르)는 해녀였던 어머니 정호양의 고향이다. 가파초교에서 4학년을 다니다 안덕초교에 편입하여 졸업(15회)했다. 그의 아버지 조봉규는 5형제 중 막내로 일본 대마도에서 그의 형들과 함께 가파도와 안덕면 일대 출신 해녀들을 관리했다. 대마도에 있는 큰 아버지집을 일컬어 조씨집 산천으로 불릴 만큼 대마도에서 터를 잡았었다. 방송인 조응방과는 6촌 관계이다.

    47년 6년 담임은 감산리 출신 김영순 교사였고 3‧ 1절 행사는 안덕초교생 450여명이 주류를 이뤘다. 화순 길거리를 시위했었다. 48년 대정중에 입학했다. 대평 출신 입학자는 양원협, 이두천 등 그를 포함 4명이었다. 사계 해수욕장을 거쳐 걸어서는 4~5참 거리여서 모슬포 상모에서 자취했었다. 4‧ 3으로 휴학되면서 그도 학교를 그만두게 됐다.

    200가구의 대평리는 슬기로운 마을이다. 대평리에서 똑똑한 청년 7~8명이 남로당 좌익 활동을 했다. 시국이 불안해지자 마을 유지들은 걱정하다 정두석이 앞장 서 배를 임대해 청년들을 태우고 일본으로 떠났다. 이들 청년들이 마을에 남았다면 산에서 배반하였다며 죽이든가 경찰이 좌익 활동을 하였다고 총살시켰을 것이다. 그 여파는 확대되어 마을이 온전치 못했을 것이다. 정두석은 일본 오사카에서 냉장고, 재봉틀 등 가전제품의 겉을 페인트로 도장(塗裝)하는 회사를 경영했다. 오사카 5대 제주도민회장을 맡을 정도로 자수성가한 기업인이기도 하다. 오사카~제주 간 항로를 연 도민회장이다. 정두석의 밀항 때는 안덕지서 고덕진 지서주임과 협의, 경찰이 암암리에 묵인해줬다는 이야기가 있다. 

    조응환도 72년 새마을지도자, 73년 이장을 할 때 감산~대평 간 도로를 개설하면서 수천만 원 대의 개인 빚을 져 일본으로 갔을 때 정두석 회사에서 일했다. 88년 자수하여 귀국할 때까지 일해 빚을 갚고 밭을 사 재산을 일궜다. 마을 어촌계장과 노인회장도 지냈다.

    대평리는 마을 북쪽에 우뚝 솟은 군산이 창천1구의 영향을 가로막은 지리적인 이유외도 유지들의 지혜로움이 마을 구했다. 잠수기선을 운영하던 강문협 부친은 자경대원들에게 떡국을 자주 먹여 떡국을 먹기 위해서라도 보초를 서겠다고 자원할 정도였다. 당시 이장인 양원부 부친(양원수 화순 도의원 형)도 지서 경찰과 토벌대원들에게 극진한 대접을 하여 관계가 친밀했다. 폭도들도 습격했다가는 탈출로가 없어 습격하지 못했다. 때문에 마을 안에서 희생자는 없다. 다만 군산 남쪽에 풀어 놓은 말을 보러갔다가 중문지서로 끌려가 48년 12월 7일 총살된 장문종(44)이 유일하다. 그도 안덕지서로 갔다면 자경대원이었기에 무사했을 것이었다.

    조응환은 호적으로 두 살 밑이 돼 53년 4월부터 신병훈련을 3개월 받고 휴전이 됐을 때 일등병이 됐고 29사단 창설요원이 됐다. 29사단 2연대 중화기 중대에서 수색중대로 옮겨 오성산 전방 분계선에서 근무했다. 휴가 때도 칼빈총을 휴대하고 제주에 왔었다. 조천 와흘 출신 임완성은 같이 입대하고 같은 소대에서 근무했다. 58년 4월 일등중사(하사)로 만 5년 만에 제대했다.
    대평리에서 5‧ 10선거는 치러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