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창기(金昌琪, 30년생, 서귀포시 안덕면 덕수리)
    2012. 11. 13. 증언

    김창기는 4년제 덕수간이학교를 나와 5학년 때 보성초교에 편입, 해방되는 해인 45년, 16살에 보성초교를 졸업했다. 마을에서 12명이 함께 보성초교를 다녔으나 대정중에 진학은 5명뿐이다. 대정중 2년 때 3‧ 1시위에 참가했다. 덕수리 청년들은 참가가 없었다. 후일 이승진 교사가 공산당의 우두머리인 김달삼인 것을 뒤늦게 알았다.

    김창기는 대정중에 다니는 안덕면 출신들의 왕초였다. 당시 대정중에는 대정은 물론 중문, 한경에서 진학했다. 한경의 왕초는 문도철(전 제주도청 국장), 중문은 김문호(전 제주지검 수사과장), 대정은 황승삼(후일 면의원)이었다. 출신 지역별 기와 세 싸움이 심했다.

    어느 날 대정의 황승삼과 힘겨루기가 불가피해졌다. 김창기는 단단히 벼르고 힘으로 대결할 결심이었다. 왠 일일까 황승삼은 ‘다음에 하자’고 항복하고 말았다. 학련이 조직돼 1대 위원장은 덕수리 출신 1년 선배 김원흥이고 2대는 송창도였다. 2학년 2학기 때 학련 위원장 선출을 앞둬 김창기는 안덕의 대표선수로 위원장에 나섰다. 표 점검 결과 당선은 확실한 것으로 분석됐다.

    선거 종반전 때 선배 김원흥이 위원장을 하기보다 학생 기강확립을 위해서는 절대적인 권한과 일을 하는 감찰부장을 맡도록 하라고 권유하고는 김창기가 기권했다고 발표했다. 위원장은 문도철이가 됐다. 학련 사무실은 전 경찰서 서쪽 전 우체국 옆에 있었다.

    좌익 학생들도 많았으나 김창기의 안중에는 좌익이 보이지 않았다. 좌우익 충돌은 없었다고 한다. 그가 주도한 것은 20살 위의 학생도 있었으나 나이 많은 학생들은 학생활동에 관여하지 않았고 나이 18세가 주류를 이루면서 그가 리더가 된 것이다.

    4‧ 3으로 학교가 휴학되자 김창기는 학련 안덕면 파견대장, 학련 안덕면분회장이 됐다. 안덕면 학련 소속은 30여명. 현재 화순초교 앞 개인집에 본부를 두고 화순에서 잘난 체하는 청년 2명을 사상의심자로 본부에 불려 들여 취조하고 볼기짝도 때렸다.

    그러나 이튿날 풀어줬다. 학련은 군경 토벌대와 함께 세 차례나 토벌에 나서기도 했다. 창천 위쪽 한라산 계곡일대에서 수색하던 중 150m 앞에서 누군가 도망치는 것을 발견하고 추격했다. 그 폭도는 계곡 굴 속 아지트로 숨어버렸다. 그 굴속을 향해 총을 쏘기도 하고 연기를 피워댔지만 날이 컴컴한 8시가 지나도 움직임이 없어 철수하기도 했다. 

    대정중을 졸업하고 3년제 5기 초등교원양성소 입소 시험을 치렀다. 대정중 졸업생 37명이 지원해, 3명이 합격했는데 김창기가 김문호, 이기호와 같이 합격했다. 합격자 65명 중에는 여자가 20여명이나 됐다.

    6‧ 25가 나면서 남자는 이철희 등 2~3명을 빼고는 거의 해병대 등을 지원했다. 김창기도 해병대를 지원, 신체검사를 받기도 했지만 50년 9월 1일 육군으로 입대 11사단 20연대 소속이 됐다. 제주북초교에서 20일간 하사관 학교 교육도 받고 LST를 타 삼랑진으로 가 군 편성 때 그는 3대대 12중대 화기부대(박격포)원이 됐다.

    광주 서석초등교에서 주둔한 1주일 후 영광, 고성 등지로 토벌에 나섰다. 고창에선 부녀자들이 인민군들에게 주먹밥을 해 먹이려고 가마솥에 밥이 가득한 것을 보았다. 영광에서는 시계포, 포목, 양복점 등 모슬포 정도의 상가가 형성돼 있었는데 남자는 모두 도망쳐 버려 가게에는 사람이 없었다.

    마음먹으면 시계도, 양복 등도 모두 가질 수 있었다. 지휘관이 ‘돈에 욕심을 부리다간 죽는다’고 경고하기까지 했다. 그때 여자들이 칼빈 총을 반으로 줄여 허리춤에 감추어 찼다가 접근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고창 주둔 이틀 째 주둔지 앞 논밭에서 사계출신 임세0가 총에 맞아 죽은 시신이 발견됐다. 300여 가구 마을을 수색했지만 남자란 1명도 보이지 않았고 20여 가구의 집을 불태우는 것으로 분을 삭였다.

    광주 무등산 전투 때였다. 1개 소대가 포복으로 2km쯤 올라갔을 때 폭발음이 들렸고 오른쪽 팔에 박격포탄이 박혔다. 7명이 부상했다. 광주시립병원에서 한 달간 치료를 받고 원대 복귀한 뒤 3일 후 중학졸업자는 나오도록 했다. 7명이 나서자 헌병대원으로 특채됐다.

    대구 김천을 거쳐 포항과 최전방인 강원도 고성 등지에서 낙오선(후퇴선)을 이탈하는 장병을 단속하고 치안을 담당하는 임무를 6개월여 밤낮으로 했다. 1‧ 4후퇴 때는 민간인을 후방으로 철수시키는 일도 했다. 부상이 도져 51년 12월 의병제대했다. 지금도 날이 궂을 때는 팔이 쑤신다.

    52년 2월 안덕면 부녀회 임원 등 8명으로 선무공작단이 구성됐다. 김창기가 단장이 되어 연설을 도맡고 서귀포 효돈에서 한경면 신창까지 순회하며 연극공연을 했다. 4월 8일 고문옥 안덕면 부면장(후일 면장)이 김창기에게 수고했다며 이력서를 내면 면서기로 채용하겠다고 말했다.

    고 면장은 이력서를 보더니 이력서를 찢어버리며 교사가 되라고 했다. 관덕정에 있던 학무과를 찾았다. 그곳에는 6학년 담임 교사였던 문무경 선생이 있었는데 찾아 간 날 강원도로 출장을 가고 자리에 없어 메모만 남기고 돌아왔다. 출장에서 돌아온 문 선생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성산면 면 소재지 학교로 발령을 내겠다는 것이다. 김창기는 외지로 가는 것보다 고향 근처를 희망했고 5월 1일자로 덕수초교로 발령이 났다. 덕수초교는 교장과 교사 3명이 근무, 복식 수업을 하고 있었다. 김창기는 3학년과 6학년을 맡아 가르쳤다.

    당시 교사의 퇴근시간은 오후 5시였다. 김창기는 퇴근시간을 넘기고 오후 6시쯤까지 6학년 학생과 수업을 하고 있을 때 누군가 교실 문을 두드렸다. 김황수 남제주군 학무과장이다. 김 과장은 김창기의 어깨를 두드리며 ‘착하다’고 말하고 희망지를 말하도록 했다. 큰 학교인 사계초교를 희망하자 그곳으로 발령이 났다. 2년째 되던 해 5학년 담임을 맡고 오후 늦게 애들 3~4명과 함께 수업자료인 차트를 만들고 있을 때 교실을 돌아보던 오만택 장학사가 이 모습을 발견했다. 오 장학사는 추자출신 박흥남 교장에게 표창을 상신토록 지시하고 돌아갔고 김창기는 문교부장관상을 받았다. 이듬해는 6학년 담임을 맡았다.

    1년 후 안덕중의 장학생 선발 때 1~5등까지 사계초교가 차지하고 면소재지 안덕초교(교장 좌봉두)는 6등으로 떨어졌다. 좌 교장이 화를 내고 김창기를 자기 학교로 끌어오려 했으나 박 교장이 반대로 무산됐다. 다음해는 다른 교사가 6학년을 맡았는데 결과는 5등에 그쳤다. 박 교장은 그에게 다시 6학년을 맡도록 부탁했다. 그가 6학년을 맡은 뒷 해, 결과는 다시 1~3등을 차지하는 기록을 세웠다.

    보성초교 교감이었을 때 윤00 장학사와 식사하던 중 윤 장학사가 100만원을 갖고 오면 교장을 시켜준다는 말을 하자 음식상을 엎고 말았다. 때문에 교장 승진이 늦어져 91년 9월 뒤늦게 무릉초교 교장이 됐다. 98년 8월 보성초교 교장을 끝으로 교직을 떠났다. 동백장 훈장을 받았다.

    덕수리에서 폭도로 입산한 사람은 없다. 다만 남로당 활동의 두목은 일본에서 중학을 나와 똑똑했던 김00(27), 김00(24) 형제와 한학으로 뛰어났던 송00(30대) 등 3명이다. 이웃집에 살던 송00(19)는 6‧ 25후 군대를 가서 행방불명이 된 것으로 4‧ 3과 무관한 인물이다.

    폭도들의 습격은 4차례나 된다. 48년 12월 6일 폭도들이 대대적으로 덕수리를 습격, 이에 철창으로 맞서 싸우던 자경대원 송기원(57), 송경윤(31) 등 9명이 살해되고 식량을 빼앗아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