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이승만, 강대국 위주 '외교전'에 혈혈단신 홀로 맞서"일본의 침략주의 원망하기 전에, '자립정신 부족' 반성해야"
  • ▲ 16일, 이주천 원광대학교 교수(이승만포럼 공동대표)가 '이승만과 러일전쟁'에 대한 강연을 하며 이승만의 중국(청), 러시아, 일본 등에 대한 평가와 대한민국 전쟁 방지를 위한 [워시나리오]를 강조했다. ⓒ뉴데일리 정상윤 사진기자
    ▲ 16일, 이주천 원광대학교 교수(이승만포럼 공동대표)가 '이승만과 러일전쟁'에 대한 강연을 하며 이승만의 중국(청), 러시아, 일본 등에 대한 평가와 대한민국 전쟁 방지를 위한 [워시나리오]를 강조했다. ⓒ뉴데일리 정상윤 사진기자

     

    이승만 건국대통령이 [독립정신]을 통해 제시한 러일전쟁에 대한 원인분석과 해결책 등을 살펴보면, 당시 청년 애국지사 이승만이 나라의 자주와 독립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절절히 알 수 있다.

    -이주천 원광대학교 교수, 이승만포럼 공동대표

     

    러일전쟁이 발발한지 올해로 110주년을 맞은 가운데, 이승만 건국대통령이 청년 시절에 쓴 [독립정신]을 통해, 러일전쟁의 원인과 한반도를 둘러싼 세계 정황을 이해해 보는 시간이 마련됐다.

    지난 16일 오후 서울 중구 정동제일교회 아펜젤러 홀에서 열린 [제44회 이승만포럼]에서는 이주천 원광대학교 교수가 발표자로 나서 [이승만과 러일전쟁]을 주제로, △[독립정신]을 통해서 본 이승만의 러일전쟁 △이승만의 분석과 해결책 △농락당한 이승만의 처녀외교 등을 강연했다.

    특히, 이주천 원광대학교 교수는 러일전쟁에 따른 한반도 위기와 이를 극복하기 위한 청년 이승만의 분투의 역사를 강조했다.

    [세계 0차대전]이라고도 불리는 러일전쟁은, 1904부터 1905년까지 만주와 한국의 지배권을 두고 러시아와 일본이 벌인 전쟁이다.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 한국은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했고 결국 주권을 상실했다.  

    잠시 이주천 교수의 설명을 빌어, '이승만의 청년기'로 돌아가보자.

    러일전쟁 발발 한 해 전인 1903년, 청년 이승만은 한성감옥에 수감돼 동료죄수들을 위한 교육교화사업 일환으로 영한사전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청년 이승만은 이듬해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한가하게 사전편찬에 매달릴 때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나라의 자주와 독립을 지키는 것이 목숨보다 소중하다]는 것을 국민들에게 일깨우기 위해 [독립정신]을 6개월만에 펴내게 된다.

    [독립정신]에서 청년 이승만은 러일전쟁으로 나라의 존망이 위태로워진 원인이 자립정신 부족에 있다고 분석했다.

    러시아의 영토확장 야욕과 일본의 침략주의를 원망하기 전에, 자립정신이 부족해 스스로의 문제를 처리하지 못하고 외세(청나라)를 끌어들인 결과라는 것이다. 

    또 이승만은 "고종이 민비(명성황후) 시해 이후 선택한 '아관파천'이야말로 결정적인 정치적 패착"이라고 아쉬워했다.

    러시아와 일본의 대결구도 속에서,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1년간이나 피신한 것이 러시아와 일본에 정치적 차별을 두게됐고, 결국 한국이 [중립노선] 견지에 실패해 주권 상실의 기회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아울러 이승만은 청일전쟁과 동학농민운동 이후 찾아온 [잃어버린 10년]의 암흑기 동안, 한국은 주권국가 기틀마련을 위한 △군사력 증강 △인재등용 △부패 관료 척결 △법치주의 확립 △부국강병 등에 실패하면서 스스로 주권상실을 막을 여력도 갖추지 못했다고 한탄했다.

    청년 이승만은 이 같은 원인 분석에 그치지 않고 이를 타개하기 위한 해결책도 제시했다.

    첫째, 러시아와 일본을 공평하게 대해 어느 한 나라에 이권을 주는 것이 아닌, 모든 나라가 접근할 수 있는 [통상지]의 개방을 주장했다.

    둘째, 일본의 영향력을 벗어나기 위한 장기대책으로 백성들에 대한 학문 장려와 정신교육에 힘써 지식과 신의로 세계의 신뢰를 얻어 그들이 먼저 도움을 줄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야한다고 강조했다.  

    이승만의 이 같은 구국적 성찰은 안타깝게도 고종과 조정대신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다.

    고종과 조선황실이 한국 주권과 독립을 위해 선택한 최후 방안은, 미국에 의존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항명파동으로 한성감옥에 있던 이승만은 고종과 조정대신에게 영어에 능통하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구국의 사명을 품고 대미외교를 위해 태평양을 건너게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맞게된다.

    이주천 교수는 이승만 건국대통령이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1858.10.27 ~ 1919.1.6.) 미국 대통령을 만나 면담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이승만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감행한 처녀외교는 사실상 농락당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카츠라-태프트 밀약]이 이를 반증하고 있다. 이를 통해 이승만은 세계평화라는 미명하에 저질러지는 강대국 위주의 세력균형정책이 약소국에 얼마나 많은 피해와 희생을 강요하는지를 몸소 체득했다. 그러나 이승만 개인적으로 봤을 때, 이것은 후일 그의 대미외교에 커다란 자산이 됐다.

    나라의 주권을 되찾겠다는 일념 하나로 태평양을 건넜던 청년 이승만이었지만, 강대국 위주 세력균형정책과 약육강식의 세계 정치를 맨몸으로 맞닥뜨리며 약소국의 서러움을 견뎌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청년 이승만의 '외교 도전기'를 자세히 소개한 이주천 교수는 "비록 러일전쟁은 '역사적 과거'가 됐지만,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고 역설했다.

    지금도 대한민국이 북한과 이념적-군사적 대립을 이어가고 있고,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들이 자국 위주의 세력균형정책으로 전쟁 발발 위험이 항시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주천 교수는 "이같은 불리한 여건에 놓인 대한민국은 약육강식의 세계정세 속에서 전쟁을 감행하는 게 아닌, 전쟁을 방지하기 위한 [워 시나리오] 준비를 서둘러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다음은 이주천 원광대학교 교수의 강연 전문이다.

     
    I. 문제의 제기

    올해는 러일전쟁 110주년이 되는 해이다. 러일전쟁이 우리에게 중대한 이유는 전쟁의 와중에서 한반도는 일본군에 의해 완전히 점령당하게 되고 이후한국은 일본의 보호국이 되면서 한국의 주권을 상실하게 된 한국의 운명을 결정지어버린 전쟁이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러일전쟁은 20세기 동북아의 세력균형을 뒤집어버린 세계사적 의미를 지닌 전쟁이었기에 2005년도 일본에서 열린 두 차례의 러일전쟁 국제학술대회에서는 ‘영차대전’으로 명명함이 바람직하다는 견해도 나왔다. 그 이유는 1차대전에서 등장한 기관총을 위시한 신병기는 물론이고 철조망의 참호전이나 대규모 포위전술, 육전과 해전의 상호결합 등 향후 세계대전에서 선보인 각종 전략전술이 이때 이미 나타났기 때문이다. 또한 영국과 미국 등 해양세력의 이해를 대변한 일본과 대륙세력인 러시아, 독일, 프랑스가 만주와 한반도의 이권을 놓고 대립한 제국주의 전쟁으로서 1차 세계대전의 서막을 알리는 전초전 성격이 농후했다.

    우리의 경우, 러일전쟁에 대한 연구는 소홀히 취급되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다행히 봄에 한국러시아학회에서 러일전쟁 110주년기념 학술대회가 한번 조촐하게 열렸지만, 이것을 제외하고는 한국사나 동양사학회에서 학술대회를 연다거나 학자들에게 특집을 위한 원고청탁을 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진도 앞바다에서 발생한 세월호 참사 보도에 여념이 없는 언론방송의 태도도 마찬가지다. 러일전쟁을 재음미하고 주권상실의 교훈을 찾아보려고 몸부림치는 특집방송 한 편을 본 적이 없었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본 글의 목적은 당시 불과 30세 안팎이었던 청년 애국지사 이승만의 입장과 시각을 통해서 러일전쟁이 발발했을 당시의 한반도 정황을 이해해 보고 또 이승만의 대미외교가 어떻게 실패로 끝나면서 나라가 왜 어떻게 망해갔는가를 되돌아보면서 데 있다.

    II. <독립정신>을 통해서 본 이승만의 러일전쟁

    1904년 2월 8일, 러일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1875년생인 이승만은 만 29세로 한창 나라를 위해 일할 나이였지만 불행하게도 감옥에 있었다. 이승만은 1899년 1월에 체포되어 1904년 8월까지 만 5년 7개월간 한성감옥에서 옥살이를 했다. 그가 투옥된 이유는 매일신문과 제국신문 등을 통해 고종황제의 보수정권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독립협회-만민공동회의 총대위원으로서 극렬한 반정부 데모를 조직, 선동했기 때문이다. 이승만이 직접적으로 투옥된 계기는 고종황제를 퇴위시키고 그 대신 의화군을 신왕으로 옹립하여 일본에 망명중인 개혁정치인 박영효를 영입하여 새로운 내각을 조직, 개혁정치를 시도하려는 음모에 가담했기 때문이다. 그는 탈옥미수혐의가 추가되어 종신형을 선고 받았다.

    감옥에 있는 동안에도 애국청년지사 이승만은 애국활동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승만은 성경책을 자주 읽으면서 기독교신앙을 접하게 되고 도서관을 만들어 동료죄수들에 대한 교육교화사업을 병행하였다. 1903년 초 영어교육의 대중적 파급의 중요성을 인식한 이승만은 영한사전을 만드는 일에 착수하였지만 작업도중 러일전쟁이 터졌다. 이승만은 한가하게 사전편찬에 매달릴 때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사전편찬 작업을 중단하였고, <독립정신>이란 책을 저술하기 시작했는데 시작한 지 6개월 만에 탈고했다. 이는 나라의 자주와 독립을 지키는 것은 목숨보다 소중히 여겨야한다는 점을 국민들에게 일깨우기 위한 목적이었다. 이 책의 내용의 대부분은 그가 옥중에서 꾸준히 제국신문에 투고했던 논설이었다. 이승만의 처녀작 독립정신은 1910년 3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국판으로 출간되었다.

    <독립정신>은 총 52편으로 편집되었는데, 러시아와 관련된 글은 모두 10편(29편, 30편, 39편, 41편, 43편, 44편, 45편, 46편, 48편, 49편)으로 결코 적은 비중이 아니다. 여기서 궁금한 점은 중국(청), 러시아, 일본에 대한 이승만의 인식이 어떻게 진행되었는가 이다. 청은 미련하고 우매한 곰으로 보았으며, 러시아는 처음부터 야욕의 나라로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굶주린 호랑이로 보았으며, 동양 3국 중에서 근대화에  가장 앞서가면서 서양문명을 배우고 흉내 낸 일본은 원숭이로 보았으니 처음에는 일본을 부러워하면서 동시에 우호적으로 바라보다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겪으면서 경계심을 가지게 되는 점이 러시아에 대한 태도와 사뭇 다르다.

    이승만은 서양열강들을 검토하면서 처음부터 러시아를 경계하였다. 이승만의 혐로(嫌露)-공로(恐露)사상(Rossophobia)은 19세기 후반기에 서유럽 외교관들 사이에서 널리 퍼진 러시아에 대한 인식을 공유한 것이다. 이승만의 대러시아 인식은 피터대제의 유언장을 입수하면서 시작된다. 그 유언장은 1857년 주러시아 프랑스공사가 입수하였다가 소실(燒失)했는데, 미국 측이 1896년에 다시 입수하여 공개한 것이었다. 이승만의 혐로-공로사상은 독립정신의 후반부 도처에 표출시키고 있으며, 이러한 그의 대러시아 인식은 나중에 그의 반공사상으로 연결되었다(유영익, 이승만연구, 48-53).
      이승만에게 러시아는 허기에 주린 호랑이였다. 그는 근대화를 추구했던 피터대제 이후 러시아의 역사를 분석하면서 러시아 문화에서 야만적 요소를 경계하고 동진정책을 추진한 동기가 부동항 획득에 있음을 간파하였다. 그리고 러시아의 동방진출을 “서방에서 막은 물이 동양으로 넘치게 되었으니, 위급하다”고 진단한다. “아직도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깜깜한 밤중에 있던 아시아는 허기에 주린 호랑이 같은 러시아에게 먹음직한 고깃덩어리로 보였다.”(212. 29편, 러시아의 음흉한 마수(魔手)에서). 그런데 “청나라와 우리나라는 러시아의 야욕을 제대로 경계하지 못하고 매우 위태로운 지경에 처하고 말았다. 우리나라 관리들은 청나라가 러시아에 대항하지 못하는데, 어찌 우리가 러시아에 대항하겠느냐고 생각했다.”(213).

    이승만은 러일전쟁의 원인이 일본이 아니라 우선 러시아가 요동반도를 침범한 것에 있다고 보았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청으로부터 막대한 배상금으로 은 2억만 냥과 요동지방을 차지했는데, 러시아가 독일, 프랑스와 협력하여 일본에게 요동을 다시 청에 반환하라고 요구했고(3국간섭), 여기에 일본이 굴복하면서 요동을 청에 반환하는 대신 일본은 현금 1억만 냥과 대만을 차지하였다. 청나라는 러시아에 고맙게 생각하여 요동을 통과하는 철도건설을 허락하니 철도는 블라디보스톡에서 만주를 지나 요동반도 끝에 있는 여순까지 이르는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연결되었다.

    이승만은 러일전쟁의 원인을 크게 두 가지로 보았다.
    첫째로, 러시아는 철도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만주에 군대를 주둔한 것이다. 이것으로 러일전쟁의 씨앗이 뿌려진 것이다.(39편, 러시아가 요동반도를 침공함, 260-261). 러시아는 의화단의 난으로 10개국이 북경을 점령하자 그 이후 청과 강화조약을 체결한 후 각국 군대는 물러갔지만, 유독 러시아 군대는 철병을 거절하고 만주 전체를 점령하였다. 러시아는 청과의 협약에 따라 만주지방을 관통하여 여순에 이르는 철도를 수비할 군대를 주둔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둘째로, 러시아는 만주뿐만이 아니라 한반도 이북에 대한 야욕을 포기하지 않았다.  실제로 러시아는 조선의 서북지방도 침범하여 그들의 영향력을 행사했다. 조선 정부의 허가를 받아서 서북해변에 벌목하는 구실에 내세워 수백 명의 군인들을 민간복장으로 들여보내기도 했다. 1903년 5월에는 용암포에 상륙하여 포대를 구축하고, 압록강변에 군대 주둔지를 설치하고, 마을에 들어가 노략질을 일삼았다.

    이승만은 일본의 대응책과 전쟁준비를 러시아에 대한 반발로 이해하였다. 러시아는 일본의 반발을 대수롭게 여기고 단독전쟁으로 일본을 쉽게 이길 것으로 오판하였다. 러시아의 오만한 태도는 갈수록 심해졌는데, 39도선 대동강 남북으로 한 한반도에 대한 분할의사까지 내비친다. 조선정부는 전쟁의 소문이 무성한 가운데, 러시아 공사관만 바라볼 뿐 조금도 걱정하지 않고 있었다.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은 고종의 지나치게 러시아에 쏠린 정책을 강하게 비판한다. “우리나라도 중립을 선언하였으나, 이미 은밀히 러시아를 끌어들였으니 어떻게 중립을 보장받을 수 있겠는가?”(41편, 러일전쟁의 원인, 277).

    이승만은 민비 살해사건 이후의 한반도 정황을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1895년 민비(명성황후)가 미우라 공사와 사무라이들에 의해, 무참히 살해된 다음 해, 고종이 그의 왕실 식구들과 함께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친일파는 모두 제거되고 친노파가 득세하면서 실질적인 권력을 잡고 있었고, 부산 절영도에 러시아 군함들이 쓸 석탄 보관시설을 만들고, 러시아 장교들과 고문관들을 초빙하여 조선의 재정과 군사업무를 맡기게 되었다. 그 대가로 조선은 러시아에 이권을 넘겼다. 일본에 대한 반감이 더욱 커졌고, 조선에서 영향력을 상실한 일본은 조선에 점차 무리한 요구를 했고, 이에 조선의 러시아 의존이 더욱 심화되었다. 이에 따라 러시아는 조선에 더 많은 것을 요구했다. 백성들은 황실이 무엇을 양보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관리들은 그들의 안위와 이익에만 급급하여 비밀협상에 의해 우리 영토와 권리를 러시아에 넘겨주었던 것이다.”(44편, 러일전쟁 이전의 러시아와 일본의 정세, 300). 러시아인들의 행동으로 판단한 바, “용암포, 북부지방의 섬들과 해안지방의 벌목권, 러시아에 근접한 국경도시 경흥의 전보선 부설권” 등을 획득하였다.(44편, 러일전쟁 이전의 러시아와 일본의 정세, 300). 서구 열강도 덩달아서 러시아에 준하는 이권을 달라고 요구했다.

    이승만은 세계여론이 일본에게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러일전쟁 이전의 국제정세에서 날로 욱일승천하는 러시아의 오만함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동양에서도 그 세력을 막으려면 일본의 힘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형성되었다. 그래서 세계여론이 일본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가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승만은 1902년에 체결된 영일동맹을 러시아의 팽창을 막고자 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영국과 일본은 청과 조선에게 러시아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야한다고 누누이 권유했으나, 별 소득이 없었다.
      이승만이 제시한 해결책은 “(특정 지역에 대해 특정 나라에) 이권을 주는 것이 아니라, 모든 나라가 접근할 수 있는 통상지로 개방하는 것”이었으나, 러시아가 암암리에 압력을 넣어서 그런 선언을 하지 못하도록 했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가장 불만을 가진 세력은 일본이었다. 이승만은 러일전쟁의 원인에서 러시아가 더 큰 책임이 있다고 간주했다. “당시 일본은 만한문제에서 협상을 하고 있었지만, 러시아는 협상에는 관심이 없고 군사력만 키웠다”(301)고 간주했다.

    러일전쟁이 발발한 후, 이승만은 자국의 외교관들을 보호하겠다는 명목으로 들어 온 각국 군대가 벌인 추악한 행태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각국 군인들이 한성에 들어와 돌아다니며 온갖 행패를 저질렀다. 특히 러시아 군인들의 만행이 심하여 민가에 들어가 부녀자들 겁탈하기도 하고, 길거리에서 장옷 쓴 여인을 몇 사람이 붙들고 억지로 입 맞추기도 하고, 심지어 죽동 네거리에서는 러시아 군인 네 명이 한 여인을 겁탈하려 하자 사람들이 이를 말리려다가 그들이 칼을 휘두르자 달아났다.”(302).

    러일전쟁 발발 직후, 국제정보에 대한 백성들의 무지와 변란에 대한 고종정부의 무책을 개탄한다. “백성들이 무지하면 무슨 변란이 다가오는 지 상관하지 않고, 자기들만 안전하면 모든 것이 태평한 것으로 여기게 된다. 당시 대한제국에서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외국 군함이 어디로 오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가 외국 군인들의 행태가 심해지자 비로소 전쟁이 나지 않을까 우려했다. 그러나 집권세력은 러시아를 믿는바 있어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위 사람들이 걱정하지 않는 것을 보고 백성들도 곧 안정을 되찾았다. 이 때 정부에서 비밀리에 3천명의 러시아군대의 파병을 요청한바, 마침 일본 해군이 러시아에 보내는 문서를 탈취하여 그 내용이 각국 신문에 보도되어 망신을 샀고 사람들은 정부의 한심한 행동에 분통을 터트렸다.”(302-303).
     
    III. 이승만의 분석과 해결책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고종은 전시 중립을 외쳤지만, 일본공사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일본공사는 “중립이란 그것을 유지할 힘이 있을 때 가능한데 조선은 그런 힘이 없다”고 주장했다. 한성은 하루 만에 일본군에 의해 무단 점령되었다. 왜 한국은 이토록 어려운 지경에 빠졌나? 러일전쟁 발발 당시 이승만이 내린 분석의 결론은 자립정신의 부족과 동학운동-청일전쟁의 와중에서 추진된 갑오개혁의 실패에 있었다.
    첫째, 러일전쟁으로 인해 나라의 존망이 위태로워진 원인은 러시아나 일본의 침략주의를 원망하기 이전에 자립정신이 부족했기에 즉 ‘자업자득’으로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일본으로 말하면, 그들은 우리나라의 독립을 확실하게 하고자 30년 가까이 청나라와 협상하며, 우리나라와 조약을 맺은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를 해칠 의도가 없는 것은 분명했던 듯하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 문제를 처리하여 해결하지 못하고 청나라를 끌어들여 결국은 청일전쟁이 일어나게 했다.”(48편, 청나라, 일본, 러시아가 우리나라에 끼친 해악, 331).

    "러시아로 말하자면, 원래부터 동양과 서양에 걸쳐 영토를 확장하려는 야욕은 있었지만, 우리가 문제를 스스로 잘 해결해 나갈 때에는 감히 불순한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에게 지원을 요청하여 그들에게 내정에 간섭할 기회를 주자 이것을 기화로 우리나라의 영토와 주권을 침해하려 하면서 지금의 전쟁(러일전쟁을 지칭)으로 비화하였다.”(332).

    둘째, 주권상실을 막을 마지막 기회는 민비(명성황후)의 시해이후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한 아관파천(1896-97) 이후 조선왕실이 개혁을 할 수 있는가의 여부였다. 이승만은 고종의 정치행위에 아쉬움을 토로한다. “황제폐하께서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신 후에 하지 못한 것이 있다. 당시는 러시아와 일본이 서로 다투고 있는 시기였다. 우리는 우리군대로 황실을 철저히 보호하고, 정부와 백성들이 합심협력하여 국가의 기강을 높여 공정한 사람에게 나라 일을 맡기고, 탐욕과 포학함을 없애고, 법률을 정비하여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적용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 대책을 세웠어야 했다. 또한 러시아와 일본을 공평하게 대하여 국권을 온전히 보존하여 어느 나라도 우리의 내정에 간섭하지 못하게 했어야 했다.”(336).
      청일전쟁과 동학농민운동 이후 각종 개혁이 실패했던 역사가들이 언급한 ‘잃어버린 10년’을 거론한 것이다. 정리하면, ①군사력 증강, ②인재등용, ③부패한 관료와 탐관오리 척결, ④법치주의 확립, ⑤부국강병책 추진 등 다섯 가지로 요약된다. 30세가 채 안된 약관의 나이에 이미 이승만은 국제정세에 해박한 지식이 축적돼 있었으며, 그것은 영어에 능통하여 외국인 외교관들과 선교사들을 접촉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셋째로, 이승만이 제시한 해결책은 “(특정 지역에 대해 특정 나라에) 이권을 주는 것이 아니라, 모든 나라가 접근할 수 있는 통상지로 개방하는 것”이었으나, 고종은 외교의 중심을 잡지 못하고 지나치게 러시아에 의존하여 내정간섭을 불러왔으며, 다른 열강들의 불평에 의해 또 다른 이권을 넘겨버리고 말았다.

    넷째로, 러일전쟁 이후 이승만은 장기대책을 생각한다. 즉 일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것이지만, 하루아침에 급히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니므로, 오직 학문을 장려하고 정신교육에 힘써서 우리 백성들의 지식과 신의가 세계에 알려져, 모든 나라가 우리의 친구가 되어 우리를 도와주게 되도록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50편, 일본정부의 의도를 파헤친다, 343).
    그러나 이승만의 이런 구국적 성찰이 고종과 조정대신들에게 전달되지 못했다. 고종의 대외정책은 한국의 주권과 독립을 미국에 의존하는 것이었다. 물에 빠졌을 때,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것처럼, 최후의 방안이었다. 러시아가 일본에 의외의 참패를 당했으니, 조선왕실을 1882년 조미통상조약을 체결한 미국에 의존하는 것 이외에 방안은 없었다. 이승만은 영어가 능통하다는 것이 조정대신에게 알려져서 결국 태평양을 건넜다. 그러나 태평양 넘어 이승만을 기다린 것은 약육강식의 정글법칙이 작동하는 국제무대의 냉혹한 권력정치였다.


    IV. 농락당한 이승만의 처녀외교

    한성감옥에서 풀려난 이승만은 1904년 10월에 개설된 상동청년학원의 교장으로 갔다가 11월 4일 미국으로 갔다. 전쟁으로 인해 풍전등화와 같은 운명에 처한 나라가 이승만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일본의 침략이 날이 갈수록 노골화되는 상황에 처한 상태에서 고종은 개혁파 충신 민영환과 한규설의 권유에 의해 ‘영어 잘하는’ 이승만을 미국에 밀파하여 1882년 조미통상조약을 체결한 미국의 거중조정을 약속받기로 결정했다. 이승만이 서울을 떠나기 전 고종은 직접 이승만을 알현하여 밀명을 하명하려했으나, 고종을 존경하지 않는 이승만의 거절로 인해 이루어지지 못했다.
    난생 처음 태평양을 횡단한 이승만은 1904년 11월 29일에 하와이에 도착하여 윤병구 목사를 위시하여 교포들의 환영을 받았다.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 시카고를 거쳐 12월 31일에 비로소 워싱턴에 도착하여 여장을 풀었다. 이승만은 곧 주미공사관을 찾아가서 자기 사행에 대한 협조를 부탁하였다. 그리고나서 친한파 의원 딘스모어(Hugh A. Dinsmore)를 접촉, 국무장관 헤이와의 면담을 서둘렀다. 다음해 1905년 이승만은 2월 20일, 딘스모어 의원과 함께 헤이(John M. Hay) 국무장관을 30분간 만났다. 그의 나이 30세의 일이다. 헤이는 이 자리에서 “미국이 한국에 대한 조약상의 의무를 다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헤이는 7월 1일 사망하고 말았다.

    이승만은 5개월 후 8월 4일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을 면담하였다. 한 달 전 루즈벨트 대통령은 뉴햄프셔주의 포츠머스 군항에서 자신의 중재로 러일강화회의가 열린다고 발표하였다. 동시에 자신의 심복인 육군장관 태프트를 일본을 방문하게 하여 동북아시아 문제를 일본과 협의하도록 지시하였다. 마침 태프트는 하와이에 들렀는데 하와이 한국교포들은 윤병구 목사와 이승만을 강화회의에 파견할 대표로 선발하고 미 대통령에게 청원할 청원서를 채택했다. 윤병구는 태프트에게서 루즈벨트에게 자기와 이승만을 소개할 소개장을 받아내는데 성공했다. 청원서 내용에서 “고종의 사신이 아니라 8,000명 하와이 교포들의 대표라고 자처하고 조국에 있는 1,200만의 백성들의 민의를 대변한다”고 주장하였으며, 또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자행한 각종 침략행위와 배신행위를 규탄하고 미 대통령이 조미조약의 정신에 입각하여 한국의 독립을 지켜주기를 바란다”고 호소하였다.
    이승만은 하계 백악관이라 불리는 뉴욕 롱아일랜드의 오이스터 베이(Oyster Bay)에 머무는 루즈벨트를 찾아갔다. 이승만은 루즈벨트에게 청원서를 제출하고 “언제든지 기회있는 대로 한미조약을 돌아보아 이 불쌍한 나라의 위태함을 건져주기 바란다”고 부탁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중에서 한국대표를 만난 루즈벨트는 “사안이 워낙 중대하므로 정식 외교채널을 통해 이 청원서를 제출하면 자기는 이것을 강화회의에 내놓겠다”고 말했다. 윤병구와 이승만은 그날 밤 기차를 타고 워싱턴의 한국공사관으로 가서 김윤정을 붙들고 필요한 조치를 취해 줄 것을 간청했다. 그러나 김윤정은 자기는 본국의 훈령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의 요구를 받아줄 수 없다고 딱 잡아뗐다. 결국 하와이교포들의 청원서는 국무부에 제출하지 못하고 死文書가 되고 말았다. 이승만은 김윤정의 배신행위로 인해 대미외교가 실패했다고 통탄했고 일본 측으로부터 매수를 당했다고 추정했지만, 대미외교의 실패의 보다 근본원인은 다른 곳에 있었다. 그 당시 미국의 동아시아정책은 한국의 독립에 무관심했으며 일본에 한국을 위탁하기로 이미 결정이 나 있었던 것이다.

    호놀룰루에서 윤병구와 이승만에게 루즈벨트 앞으로 소개장을 써 준 태프트 육군장관은 7월 27일에 일본 동경에서 수상 카츠라를 만나서 한국과 필리핀 등 동양문제를 논의한 후 소위 ‘카츠라-태프트 밀약’을 체결하였다. 루즈벨트는 이 밀약을 7월 31일에 추인하였다. 이 밀약은 일본이 장차 미국의 식민지인 필리핀을 공격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일본이 군사력을 동원하여 조선에 대해서 종주권을 수립하는 것(보호국화)을 허용한다는 내용이었다. 즉 루즈벨트는 윤병구와 이승만을 만나기 전에 이미 일본이 욕심내는 조선의 보호국화를 승인해 준 것이다.
    그 당시 이승만은 루즈벨트가 구사한 막후에서 흥정이 오고간 이중외교의 실체를 알 겨를이 없었다. 이승만이 루즈벨트의 외교에 철저히 농락당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1924년 미 존스홉킨스대학(Johns Hopkins University)의 외교사가 덴네트(Tyler Dennett)에 의해 ‘카츠라-태프트 밀약’이 폭로되기까지 무려 20년에 가까운 오랜 세월이 걸렸다. 비록 이승만의 처녀외교는 참담한 실패로 끝났지만 이승만 개인으로 볼 때, 소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승만은 세계평화라는 미명하에 저질러지는 강대국 위주의 세력균형정책이 약소국에 얼마나 많은 피해와 희생을 강요하는지를 몸소 체득하였으며 이것은 후일 그의 대미외교에 커다란 자산이 되었다.

    참고자료
    이승만, 풀어쓴 독립정신.
    유영익, 이승만의 삶과 꿈.
    유영익 편, 이승만 연구.
    정병준, 1905년 윤병구, 이승만의 시어도어 루즈벨트 면담추진의 과정과 그 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