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규형 명지대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 교수.ⓒ 뉴데일리DB
    ▲ 강규형 명지대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 교수.ⓒ 뉴데일리DB

    프랑스의 대표적 지성 중 한 사람인 고(故) 프랑스와 퓌레(Furet)는 공산주의와 (나치주의를 포함한)파시즘을 다 같이 뿌리가 같은 전체주의로 해석하고, 이 두 사상을 함께 자유민주주의의 대척점(對蹠點)으로 보았다. 한나 아렌트(Arendt)나 리처드 파이프스(Pipes)같은 석학들의 주장도 비슷했다.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취약한 제도이다.
    그러나 인류가 지금까지 생각해낸 제도 중엔 가장 낫기에 잘 보호하고 가꿔야하는 체제이기도 하다.

    이 체제는 넓고 다양한 사상과 의견을 포용하고 있고 또 그래야만 하지만, 항간의 오해와는 달리 모든 사상을 포용해서는 안 되는 필연적 속성을 갖고 있다. 예를 들어 대의민주주의와 개인의 자유를 부정하는 극우 파시즘과 극좌 공산전체주의는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이기에 대한민국 헌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는 것이다.

    어제 헌법재판소의 역사적 결정은 바로 민주를 가장하고 악용하면서 자유민주주의의 전복을 도모하는 민주의 적에 대해 방위해야한다는 “방어적 민주주의”의 기제(기제)가 발동한 것이었다.

    서독의 연방헌법재판소도 이름만 바꾸고 나온 나치당의 후예인 “사회주의제국당”을 1952년에 위헌판결하고 해산결정을 내렸다. 서독은 나치체제의 죄책감을 앉고 살아야했기에 극우에는 단호하게 대응했지만 반대로 좌파의 사상과 정치활동에 대해선 매우 관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독 헌법재판소는 1956년엔 같은 논리로 공산당에게도 같은 판결을 적용했다.

    사실 한국에서 민주노동당이 출범했을 땐 진보정당에 매우 유리한 환경이 조성돼 있었다. 그러나 향후 민노당과 그 후신인 통합진보당은 호의적인 상황을 스스로 허물고 자신들에 대한 큰 기대를 저버리는 쪽으로만 나아갔다.

    통합진보당의 여러 죄악 중 하나는 역설적으로 한국에서 건전한 좌파정당과 사회민주주의의 기반을 뿌리 채 뽑아버렸다는 것이다. 민노당과 통진당에서 떨어져 나온 현재의 정의당 구성원들도 현 통진당 세력과 야합을 하면서 건전한 사회민주주의로의 길을 더 어렵게 만든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사회민주주의의 아버지 격인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Bernstein)의 천재성과 역사적 공로는 그가 사회주의의 옳은 길을 공산전체주의에서 분리시킨 데 있다. 자유민주주의 체제하에선 자유선거와 보통선거가 가능하기에 다수인 노동자들이 굳이 폭력혁명과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통하지 않고도 선거를 통해 집권할 수 있다는 것을 역설했기 때문이었다.

    이미 영국에선 1924년에 이런 사회민주주의적 플랫폼을 가진 노동당이 집권에 성공했고 이후 수많은 자기혁신과정을 통해 아직도 강력한 수권정당으로서 기능한다. 독일,프랑스 등의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의 좌파도 이런 사민주의의 길을 갈 기회가 여러 번 있었으나 결국은 베른슈타인의 길과는 정반대 길을 갔고, 화석화 된 통진당의 극좌적 종북주의때문에 좌파진영의 수권정당의 길은 점점 더 멀어져가고 있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주의 깊게 바라봐야할 다른 사안은 새정치연합의 대오각성 여부이다. “탱고를 추기위해선 두 사람이 필요하다”는 서양속담이 있다. 그동안 통진당과의 불건전한 연대를 통해 “탱고 춤판”을 거나하게 벌였던 행각에 대해 처절한 자기반성을 해야만 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

    새정련 의원과 당료 등 구성원 상당수가 아직도 “통진당스러운” 사고와 행동의 소유자들이기 때문이다. 새정연은 2012년 3월의 민주당 한명숙 대표와 통진당 이정희 공동대표의 공동선언문, 그리고 그 이후 통진당을 포함한 온갖 반(反)대한민국 세력들과 같이 진행한 “야권연대”와 “2013년 체제론”을 다시 한번 읽어보길 바란다. 그러고도 책임이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대한민국에서의 진보세력의 미래는 결코 “종북·반(反)대한민국 연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에서의 탈피에 있다는 것을 언제쯤 깨달을 것인가.

    강규형 명지대 교수(현대사).

    위 글은 2014년 12월 20일, 조선일보에 게재된 글을 전재한 것으로, 필자가 일부를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