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통진당 해산은 다양성 훼손이라고?
      
     좌파 매체들과 야당은 “헌재의 통진당 해산은 다양성, 다원성, 관용의 원리에 대한 훼손”이라고 일제히 비난하고 있다. 한 마디로 허울 좋고 가소로운 소리다.
     
     유럽에서 처음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굴러가기 시작했을 때
    콩도르세 같은 지식인은 그것이 이룩할 자유세상의 ‘양양한 앞길을 바라보며’
    장밋빛 낙관론을 구가했다.
     
     그러나 결과는 어땠나?
     두 차례의 세계대전, 나치즘, 파시즘, 볼셰비즘 등 좌, 우 전체주의의 폭력과 만행으로
    자유세상이 만신창이가 되었다.
    히틀러가 아우슈비츠에서 자행한 유태인 6백만 명 학살,

  • 스탈린이 카틴 숲속에서 자행한 폴란드 장교 1만 명 학살 앞에서,
    콩도르세는 그래도 계속 ‘양양한 앞길’을 노래할 수 있었을까?
 
 자유민주 체제는 그래서 새로운 결의 하나를 굳히게 되었다.
“자유체제를 파괴하는 자유만은 허용해선 안 되겠다”는 결의였다.
바로 ‘방어적 민주주의’라는 것이었다.
이 결의에 따라 자유체제 나라들은 네오 나치와 공산당 활동을
원천적으로 금지하는 법률들을 만들었다.

자유는 지켜야 자유이지, 잃으면 자유가 아니라는 각성이었다.
 
 그러자 근래에 와선 ‘다원주의자’라는 사람들이 이런 논리를 들고 나왔다.
“자유민주주주의만이 유일하고 포괄적인 원리일 수 없다.
자유주의적이지 않은(illiberal) 원리도 자유체제의 대등한 멤버십을 부여받아야 한다”.
 
이런 논리가 나온 배경에는 예컨대
이슬람 이민자들과 집시 같은 소수 그룹들의 문화적 정체성과 사회적 권익을 보호하려는
여망이 있었다. 이런 요구들에 대해선 자유주의 시민과 행정부와 사법부도 결코 인색하지 않다.
 
 그러나 자유체제가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 결사의 자유, 양심의 자유, 정치활동의 자유를 이용해 자유체제 안에서 세력을 키운 다음, 그 인프라 위에서 자유체제를 타도하려는 세력의 자유에
대해서만은 자유체제는 단호히 ‘노(no)'라고 말한다.
그것까지 관용했다가는 자유체제 자체가 없어질 판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경우도 자유민주 체제의 자유권(自由權)을 이용해
자유체제의 유력한 정치, 사회 세력으로 성장한 다음,
그 자유체제를 타도하려는 세력이 분명히 있다.

이들은 자유체제가 부여하는 온갖 혜택과 권익을 누리면서
겉으로는 민주, 민족, 민중, 평화, 통일, 정의 운운의 그럴듯한 간판을 내걸고서
뒤로는 “식민지 종속국 남한을 무장투쟁으로 해방시키는” 음모를 꾸몄다.
그러다가 그들은 꼼짝할 수 없는 증거를 잡혀 헌재 결정으로 해산되었다.
그러고서도 그들은 자기들의 죄상(罪狀)을 추호도 시인하지 않는다.
시인, 사과는 고사하고 다시 가투(街鬪)로 돌입하고 있다.
 
 이런 그들에 대해 대한민국의 제1야당이라면
마땅히 “당신들이 극좌 종북 노선으로 간 게 잘못이다”라고 일침을 놓아야 한다.
그러나 새민련 사람들은 하나 같이 다 “유권자의 선택에 맡겼어야 했다.”
"민주주의에서 정당해산이라니...“ “헌재가 잘못했다”는 투로 말하고 있다.
자기들이 통진당과 합세해서 야권 단일화를 한 탓으로 통진당을 왕창 키워준 데 대해
국민에게 사죄해야 마땅할 사람들이 여전히 그 따위 소리들이나 하고 있으니,
참 한심한 노릇이다. 대한민국 제1 야당이 어쩌다 저렇게까지 멀리 갔나?
 
 젊은 층과 일부 국민들은 알아야 한다.
 다양성은 극좌 전체주의에는 없다.
오직 자유민주주의 체제에만 있다.

단(但) 그 다양성엔 한계가 있다.
다양성 자체를 파괴하려는 자들만은
다양성의 공동체에 끼워줄 수 없다는 한계다.

통진당은 다양성을 빙자해 대한민국의 다양성의 체제에 파고들었다.
그리곤 그 체제를 타도하려 했다.
트로이의 목마를 타고 우리 성(城)에 들어와
우리의 다양성의 체제를 ‘혁명’ 하려 한 것이다.
따라서 그들을 다양성의 공동체로부터 추방하는 것은
'다양성의 체제' 수호를 위해 너무나 당연하다.
 
 이것을 헌재가 하지 말고 유권자가 하도록 내버려뒀어야 한다고 일부는 말한다.
그러나 헌재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외계인이 아니라
유권자가 “위헌정당이 있으면 해산시키기 위해” 만들어 놓은 장치다.
따라서 헌재의 결정은 곧 유권자의 결정이다.
직접민주주의를 하지 않는 한 이런 일을 포함해 모든 일은
헌법기관이 하는 것 아닌가?
그렇지 않고 매사를 국민이 직접 하는 나라가 세상에 어디 있나?
여기가 무슨 무정부주의 집단인 줄 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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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류근일 칼럼]-2014.12.30일자 전재

헌법재판소는 찬성 8, 반대 1로 통합진보당 해산을 결정했다.
이 결정에 61%의 여론이 "잘했다"고 호응했다. 대세였다.
그러나 "헌재가 잘못했다"고 한 반(反)대세의 역류(逆流) 또한 집요했다.
 "헌재 결정이 다양성을 훼손했다"는 것이다.
그런가?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다양성을 위해선 관용이 필수적인데 관용엔 한계가 있어야 하나 없어야 하나?
다시 말해 관용할 용의가 없는 불관용도 관용해야 하나?

예를 들어 자기들과 결혼하기를 거부했다고 해서 파키스탄 여성 100여 명을 학살한 탈레반을
다양성의 하나로 관용해야 하는가? 서방 기자들 목을 잘라 죽이는 IS도 관용할 수 있고 관용해야 하는가? 독재자 동상에 페인트를 뿌리려 한 주민을 공개 총살하고, 그의 삼족(三族)을 수용소에 가두는 것도 '다양성의 하나'로 쳐줘야 하는가? 그리고 그런 폭정을 추종해 대한민국을 깨부수려는 'RO 전사(戰士)'도 다양성의 하나로 방치해야 하는가?

일부 다문화주의자는 그런 불관용의 극치도 '내재적(內在的) 접근법'으로 이해해 줘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주장 중엔 자유주의자들이 충분히 공감할 만한 것도 물론 있다. 호주 원주민, 캐나다 퀘벡 주민, 영국 웨일스의 켈트족, 이슬람 이민자 같은 소수파의 문화적 독자성과 사회적 권익을 보호해주자는 주장 등이 그런 것이다.

그러나 자유주의자들이 도저히 공감할 수 없는 것도 있다.
 "다양성을 위해선 자유민주주의만을 국가 운영의 포괄적 원리로 삼아선 안 되고
'자유 없는(illiberal)' 민주주의도 그와 대등한 원리로 대접받아야 한다. …
 이를 위해 우리 헌법도 '자유'민주주의 간판을 떼고 '자유'를 삭제한 민주주의 간판을 달아야 한다" 어쩌고 하는 따위가 그것이다.

이런 종류의 다문화주의는 통진당의 위헌(違憲), 민주적 기본 질서 위배, '국가 기간 시설 폭파' 운운도 다양성의 하나로 관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해코지 원칙(harm principle)'을 무시한 억지다. 영국 사상가 존 스튜어트 밀은 남에게 해코지를 하지 않는 한 각자는 자기 이익을 추구할 자유가 있다고 했다. 해코지하는 자유는 관용할 수 없다는 뜻이다. 미국 철학자 존 롤스도 불관용의 위협이 관용의 체제를 위태롭게 할 때는 제약해야 한다고 했다. 영국 철학자 칼 포퍼는 아예 직설적으로 말했다. "불관용은 관용할 수 없다"고.

그렇다면 통진당은 대한민국을 해코지했나, 안 했나? 했다.
 증거가 있나? 있다. 헌재 심리 때 다 나왔다.
그 후로도 하태경 의원의 폭로대로라면 북한은 왕재산 간첩을 통해 '진보의 통합'과 '야권 연대'를 시종 지령했다. 왜? 대한민국의 다양성 체제를 자기들의 전체주의 체제로 변혁(해코지)하기 위해서였다. 이래서 "북한과 통진당이 먼저 다양성을 훼손(해코지)하려 했다"고 해야 맞지 "헌재가 먼저 다양성을 훼손(해코지)했다"고 말하면 그건 거꾸로다. 아니 적반하장(賊反荷杖)이다.

통진당 해산이라는 대세를 거스른 또 하나의 역류는
 "통진당에 대한 판단을 유권자의 선택에 맡겨야지 왜 헌재가 나섰느냐?"는 시비다.
무식하기 짝이 없는 소리다.
헌재가 유권자와는 무관하게 공중에서 추락한 외계인의 UFO라도 된다는 것인가?
대의제 민주국가에선 유권자가 매사 직접 결정하지 않고 자기들이 만든 헌법기관을 통해 간접적으로 결정한다. 헌재의 통진당 해산 결정은 따라서 유권자의 간접 결정이다.
이런 이치를 정말 몰라서 '유권자의 판단' 운운하는 건가, 아니면 알면서도 그러는 건가?

이런 궤변이 있을 줄 미리 알았던지 안창호·조용호 두 헌재 재판관은
통진당 해산 결정문에 이런 보충 의견을 남겼다.
 "맹자에 '피음사둔(詖淫邪遁)'이라는 말이 있다. 번지르르한 말 속에서 본질을 간파한다는 뜻이다. 가면과 참모습을 혼동하는 광장의 중우(衆愚), 기회주의 지식인과 언론인, 사이비 진보주의자, 인기 영합 정치인 등 '쓸모 있는 바보들'이 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이런 충고를 정작 겸허하게 경청해야 할 당사자들은 그러나 '철판 깔기'로 나오고 있다.
'원탁회의'인가 하는 데선 "통진당 부활…" 운운한 친구도 있었다.
 통진당을 왕창 키워준 '한명숙 민주당'도 사과 한마디 없다.
 새누리당 웰빙족(族)도 "우리가 너무 안일했다"는 자책 한마디 없다.

영화 '국제시장'의 한국인 세대는 위대했다.
 그러나 오늘의 여야 정치인 세대는 그들의 피와 땀과 눈물의 의미를 저버리고 있다.
그래서인가? 세모(歲暮)의 찬바람이 유난히 더 썰렁함을 안겨준다.
 
류근일 /뉴데일리 고문, 전 조선일보주필
류근일의 탐미주의 클럽(cafe.daum.net/aestheticismclu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