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주하지도 않았던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오자 나치와 손잡아…냉전 때는 공산당과 동맹
  • 행사에 참석해 환호하는 네오나치 조직원들. ⓒ어딕션 인포 화면캡쳐
    ▲ 행사에 참석해 환호하는 네오나치 조직원들. ⓒ어딕션 인포 화면캡쳐

    “일부 세력의 테러를 보고 이슬람과 무슬림(이슬람교도)을 비난하는 것은 네오 나치나 다름없다. 심각한 인종차별 행위다.”


    국내 언론에서도 자주 나오는 이야기다. 정말일까.

    여기서 한 가지 질문.

    국내 언론은 왜 무슬림 근본주의와 나치의 관계, 그리고 이들이 유대인에 대해 ‘종교청소’를 시도했던 일에 대해서는 거의 말을 않는 걸까.

    한국 사회에서는 관심 밖인 중동의 역사를 살펴보면 무슬림 근본주의 세력은 20세기 초반부터 최악의 전체주의 집단과 ‘동맹 관계’를 맺어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히틀러의 절친한 친구’ 하즈 아민 알 후세이니

  • 1941년 히틀러와 만나 '유대인 말살정책'을 논의하는 하즈 아민 알 후세이니. ⓒ해외 전쟁사 관련 사이트 캡쳐
    ▲ 1941년 히틀러와 만나 '유대인 말살정책'을 논의하는 하즈 아민 알 후세이니. ⓒ해외 전쟁사 관련 사이트 캡쳐

    2차 세계대전의 역사를 잘 아는 사람들은 들어본 이름 ‘하즈 아민 알 후세이니’.

    1차 대전 이후 팔레스타인 지역의 아랍인들을 이끌었던 지도자였던 하즈 아민 알 후세이니는 2차 대전 동안 히틀러의 나치 독일과 손을 잡았다. 팔레스타인 땅에서 유대인을 몰아내겠다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였다.

    하즈 아민 알 후세이니는 1942년부터 2차 대전이 끝날 때까지 독일에 머무르며, 나치의 선전선동 방송을 맡았다.

    하즈 아민 알 후세이니는 2차 대전 기간 중 나치 방송에 출연해 무슬림들을 향해 “적(유대인)에 대항해 추축국(독일, 이탈리아, 일본)과 함께 싸우자”고 선동하는가 하면, “유대인들을 찾아내는 족족 죽여라. 이것이 알라와 역사와 아랍을 위한 것이고 기쁘게 하는 일”이라며, 유대인 학살을 부추겼다.

    전쟁이 끝난 뒤 그는 연합군에 체포됐다. 이때 영국 정부는 “그를 석방하면 안 된다”고 했지만, 프랑스 정부는 그가 “나치에 단순가담했다”고 판단해 팔레스타인으로 돌려 보낸다. 

    팔레스타인에서 다시 세력을 모은 하즈 아민 알 후세이니는 1948년 무슬림들에게 “유대인을 모조리 말살하라”며 ‘지하드(聖戰)’를 선포했다.

    이를 시작으로 결국 1948년 이스라엘-아랍 간의 전쟁이 터졌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승리하자 하즈 아민 알 후세이니는 이집트로 망명, 나중에 수십 년 동안 이스라엘과 싸우게 되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세우게 된다.

    하즈 아민 알 후세이니가 히틀러의 나치 정권과 얼마나 돈독했으며, 단지 선전선동이 아니라 유대인들과 이교도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보여주는 역사적 자료는 무수히 많다.

    하즈 아민 알 후세이니는 2차 대전 발발을 전후로 해 히틀러와 그의 측근들을 만나며 ‘유대인 말살’을 촉구했다. 일설에는 유대인, 집시, 동성애자,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 수백만 명을 학살한 ‘홀로코스트(인종청소정책)’가 그의 제안에서 나온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이슬람의 주요 성지(聖地) 예루살렘의 최고 종교지도자(그랜드 무프티)였던 하즈 아민 알 후세이니의 영향력은 매우 컸다. 보스니아, 아제르바이잔 등에서 그의 선전선동에 따라 나치 군대에 입대하고, 나치와 함께 사람들을 학살한 사람 수가 수만 명에 달했다.

    그럼에도 ‘무슬림 근본주의자’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하즈 아민 알 후세이니는 자기 민족의 독립을 위해 싸운 지도자로서 어쩔 수 없이 부역했다”는 논리를 내세우고 있다. 


    하즈 아민 알 후세이니가 등장하게 된 배경

  • 나치 SS친위대를 사열하는 하즈 아민 알 후세이니. ⓒ해외 전쟁사 관련 사이트 캡쳐
    ▲ 나치 SS친위대를 사열하는 하즈 아민 알 후세이니. ⓒ해외 전쟁사 관련 사이트 캡쳐

    하즈 아민 알 후세이니가 등장할 때의 상황을 살펴보면, 그는 ‘민족 지도자’라기보다는 중동 무슬림 지도자라 불러야 맞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 전선은 ‘참호’에서 시작해 ‘참호’에서 끝나는 상황이었던 반면 아프리카에서는 ‘제국주의’를 표방하는 유럽 열강들 간의 영토 쟁탈전이 치열했다.

    1차 세계대전 중인 1915년 영국은 중동 지역에서 오스만투르크를 격파하기 위해 아랍인들에게 협조를 구한다. 이때 나온 것이 ‘맥마흔 선언’이다. 영국은 이걸로는 모자랐는지 1917년에는 로스차일드 경이 이끌던 세계 유대인 사회를 향해 “오스만투르크를 격파하게 도와주면 유대인 국가를 건설해 주겠다”는 ‘벨푸어 선언’도 내놓는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영국과 프랑스는 오스만투르크를 격파, 터키를 제외한 중동지역을 분할 통치하게 되는데, 이때 영국은 ‘맥마흔 선언’도, ‘벨푸어 선언’도 지키지 않는다.

    영국과 프랑스는 오스만투르크로부터 빼앗은 아랍 지역을 이라크, 시리아, 남(南)시리아, 레바논으로 나눠 통치한다. 이 가운데 남시리아가 바로 현재의 팔레스타인 땅이다.

    윈스턴 처칠은 이곳을 요르단 강을 경계선으로 해서 다시 동서로 나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동쪽은 요르단 왕국이 되고, 서쪽은 지금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자치지역이 된다.

    영국으로부터 배신을 당한 아랍인과 유대인은 전혀 다른 선택을 했다. 유대인은 다시 한 번 영국과 손을 잡고 독일, 이탈리아 등과 싸우게 된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왕립 켄트 연대’다.

    반면 아랍인은 독일 나치, 이탈리아 파시스트와 손을 잡고 ‘인종청소’를 주장하게 된다. 그 핵심인물이 앞서 말한 하즈 아민 알 후세이니와 아랍 부족장들이다.

    하즈 아민 알 후세이니는 자신이 가진 ‘종교 지도자의 권위’를 십분 활용해 중동의 무슬림들이 나치와 손을 잡고 ‘유대인들을 멸종시킬 것’을 주창한다. ‘알라의 뜻’을 내세운 그의 주장 앞에 무슬림들은 거리낌 없이 유대인 학살에 나서게 된다. 


    나치와 손잡았던 중동 무슬림 국가들
    냉전 오자 공산주의로 갈아 타


    2차 대전이 끝난 뒤 유엔은 영국이 통치했던 팔레스타인 땅을 아랍 종족과 유대인에게 분할해 각각 독립국을 만들면 어떻겠느냐는 방안을 제시한다. 가장 논란이 심한 예루살렘 지역은 유엔이 관할하는 공동 관리지역으로 만든다는 아이디어도 들어 있었다.

    유대인 대부분은 이 제안을 환영했다. 반면 하즈 아민 알 후세이니를 중심으로 뭉친 아랍 종족은 격렬히 반대한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팔레스타인 독립국 건국이 아니라 지구상에서 유대인을 멸종시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유엔의 제안은 허사가 됐고,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 단독으로 독립국을 건국한다. 이때에 맞춰 아랍 연합군의 공격으로 1차 중동전쟁이 일어난다. 이후 1956년, 1967년, 1973년에도 아랍 연합군과 이스라엘 간의 중동전쟁이 터진다.

    1956년 2차 중동전쟁 당시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이집트의 나세르는 소련의 동맹이 된다. 나세르는 수에즈 운하 국유화를 선포한 뒤 영국과 프랑스의 공격을 받는다. 이스라엘은 이때 영국, 프랑스와 함께 이집트를 공격, 시나이 반도를 빼앗는다.

    1967년 3차 중동전쟁은 이스라엘이 자신들을 공격하는 무슬림 테러조직의 근거지 시리아를 폭격하면서부터 터졌다. 이때 이집트가 ‘아랍의 결속’을 목표로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이다. 전쟁은 요르단, 이라크로까지 번졌다. 이때 이스라엘은 시나이 반도의 남은 곳은 물론 골란 고원, 요르단강 서안 지역까지 빼앗아 버린다.

    1973년 4차 중동전쟁은 이스라엘의 명절인 욤 키푸르에 맞춰 이집트가 선제공격을 하면서 시작됐다. 곧이어 시리아도 이스라엘로 진격했다. 이스라엘은 전쟁 발발 이틀 만에 17개 여단을 잃었다. 이때 이스라엘은 이집트-시리아에 의해 멸망할 뻔 했지만, 중동에서 소련의 영향력 확대를 우려한 미국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되살아난다.

  • 20세기 팔레스타인 땅의 변화. 아랍이 이스라엘과 전쟁을 벌일 때마다 팔레스타인 땅은 점점 줄어들었다. ⓒ'타임 오브 오스트' 화면 캡쳐
    ▲ 20세기 팔레스타인 땅의 변화. 아랍이 이스라엘과 전쟁을 벌일 때마다 팔레스타인 땅은 점점 줄어들었다. ⓒ'타임 오브 오스트' 화면 캡쳐

    이 4번의 전쟁에서 중요한 부분은 소련의 역할이다. 이스라엘과 주로 싸웠던 이집트, 시리아는 소련의 중요한 동맹국이었다. 사용했던 무기도 소련제였다. 특히 시리아는 지금까지도 러시아는 물론 북한, 중국과 긴밀한 동맹 관계를 맺고 있다.

    여기서 중요하게 봐야 할 부분이 바로 ‘바트 당(아랍 사회주의 재건당)’이다.

    1940년 시리아의 지식인 미셸 아플라크가 창설한 ‘바트 당’의 목표는 ‘서방 제국주의 격퇴를 통한 아랍의 통일’이다. 즉 무슬림 근본주의의 목표인 아랍의 종교적 통일과 사회주의의 체제 혁명을 적절히 혼합해 만든 정당이었다. 냉전 질서에서 이들이 소련과 동맹을 맺는 것은 당연해 보였다.

    이런 ‘바트 당’은 시리아를 시작으로 이라크, 요르단, 예멘, 팔레스타인, 수단, 모리타니 등에도 생겼다. 그 덕분인지 냉전 직후부터 시작된 중동·아프리카 무슬림과 소련의 우호 관계는 수십 년 동안 지속됐다.

    이집트는 조금 달랐다. 이스라엘과의 전쟁을 주도한 이집트의 경우에는 왕정 붕괴 이후 ‘바트 당’과 같은 목표를 내세워 집권한 낫세르가 소련과 손을 잡았다. 낫세르 정권과 소련의 동맹관계는 사다트 집권 이후 잠깐 흔들렸지만, 전반적인 우호관계는 1981년 무바라크가 집권할 때까지 이어졌다. 


    한국에서는 말하지 않는
    이슬람 근본주의와 공산혁명론의 공통점
     


    21세기 중동은 각 국가별로 다른 집권층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들 나라를 지배하는 이념은 ‘무슬림에 의한 중동 통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앞서 언급한 사이드 쿠틉과 무슬림 형제단이 추구하는 이념은 중동 무슬림, 그 중에서도 수니파 살라피스트를 관통하는 정치적 목표다.

    이들의 ‘언어’를 제대로 해석하면, 수니파 무슬림이 추구하는 세상은 ‘무슬림의, 무슬림에 의한, 무슬림을 위한 사회’다. 여기에 다른 종교를 가졌거나 무신론자가 끼어들 여지는 없다.

    이런 수니파 무슬림의 진면목에서 ‘종교’라는 표현만 벗겨 버리면, 가장 비슷한 정치이념이 바로 공산주의다.

    공산주의는 “진정한 사회발전 단계인 공산주의로 가기 위해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수니파 무슬림이 말하는 “알라께서 원하시는, 샤리아로 통치되는 자유로운 세상”과 크게 다를 게 없다.

  • 이슬람 율법을 법률 대신 적용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시위대. 아랍? 아니다. 유럽이다. ⓒ美이슬람 감시 단체 홈페이지 캡쳐
    ▲ 이슬람 율법을 법률 대신 적용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시위대. 아랍? 아니다. 유럽이다. ⓒ美이슬람 감시 단체 홈페이지 캡쳐

    다른 이념과의 공존, 타인과 나의 다름을 부정하고, 내가 하는 것은 옳지만 남이 하는 것은 그르고, 세상 모든 사람이 내 뜻과 같아야 한다고 강요한다는 점에서 수니파 살라피스트와 공산주의 혁명론자는 비슷한 점이 매우 많다. 심지어 수니파 살라피스트와 공산주의 혁명론자가 서로를 ‘멸종시켜야 할 적’이라고 본다는 것도 똑같다.

    현재 한국 언론의 대부분, 특히 ‘자칭 진보언론들’ 가운데 다수가 이슬람을 가리켜 ‘평화와 공존의 종교’라고 부르고, 공산주의 체제 혁명을 꿈꾸는 세력들은 ‘진보진영’이라고 표현한다.

    이런 부류의 언론들은 수니파 살라피스트가 위험하다고 경고하거나, “무슬림은 정치적 이념”이라고 말하면 ‘제노포비아’ ‘개신교 광신도’ ‘서방 언론의 왜곡에 빠진 자’라고 비판한다. 그 반대의 경우에는 ‘진보적이고 문화상대주의에 충실하다’고 불러준다. 

    그런가.

    자신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타인의 모든 자유-생명을 포함한-를 구속하고 권리를 빼앗고 폭력을 행사하는 이념이 진정 ‘평화와 공존’이고 ‘사회의 진보’라고 생각하는 언론을 믿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