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극기를 지킨 건국 대통령, 이승만
  • ▲ 이현표.
    ▲ 이현표.

    이현표 /뉴데일리 논설위원, 전 워싱턴 한국문화원장

1. 이승만, 태극기로 무장한 혁명가

태극기 계도와 계승의 선각자들

태극기의 소중함을 조선인들에게 처음 일깨워준 인물이 서재필(1864~1951)이었다면,
태극기가 우리민족의 상징으로 오늘에까지 면면히 이어지는데 적극 기여한 인물은 이승만(1875~1965)이라고 할 수 있다. (사진 1)
  • ▲ 사진 1: 이승만과 서재필(워싱턴 DC, 1921년)
    ▲ 사진 1: 이승만과 서재필(워싱턴 DC, 1921년)
    서재필은 과거(문과)에 합격했지만, 무인(武人)의 풍모와 기질을 타고난 인물이었다. 
    약 180cm의 신장과 단단한 체격, 단호하고 올곧은 성격의 그는 일본에서 군사교육을 받을 때도 일제 장교들에게 당당했다. 1884년 갑신정변 때 탐관오리들의 처단을 주도함으로써 역적으로 몰린 그는 미국으로 망명했지만, 조선에 남은 가족의 최후는 처참했다. 

    부모·아내·형은 자살했고, 동생은 처형됐으며, 두 살배기 아들은 굶어죽었다.
    조선왕조 500년은 그런 잔혹한 전제정치로 지속돼온 것이다.
    1895년 말, 11년 만에 귀국한 서재필은 미국시민이었고, 그의 국기는 성조기였다. 

    서재필은 가련한 조선인들이 더 이상 자신과 가족처럼 폭정의 희생양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소명의식과 조선이 외세로부터 간섭과 침탈을 받지 않는 자주독립국가, 자유와 정의가 구현되는 민주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이를 위해서 그는 조선인에게 미국인처럼 나라의 주인의식을 갖고, 국가의 상징인 국기를 공경해야한다고 주창하고 다녔다.  

    이런 서재필의 정치적인 신념을 가장 잘 이해하고, 평생 태극기를 공경하며 살았던 인물이 있다. 바로 대한민국의 건국 대통령 이승만이다.
    서재필보다 11세 아래인 그는 여섯 살 때 천자문을 줄줄 외웠고,
    다음과 같은 한시(漢詩)도 지었다. 

    風無手 搖樹木(풍무수 요수목) 
    바람은 손이 없어도 나무를 흔들고,
    月無足 橫蒼空(월무족 횡창공)
    달은 발이 없어도 하늘을 건넌다.

    소년이 이런 시를 쓸 수 있었던 것은 시재(詩才)가 있었기 때문이지만,
    노력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는 거문고를 배우고 싶었지만 글공부에 지장을 받을까봐 참을 정도로 공부벌레였으며,
     1887년(13세)부터 과거제도가 폐지된 1894년까지 시험을 치렀다.
    그러나 낙방의 연속이었다. (사진 2)

  • ▲ 사진 2: 청년 이승만
    ▲ 사진 2: 청년 이승만
    정치적인 자유사상에 홀린 이승만    
    이승만은 1895년 5월 배재학당의 대학부 영어과에 입학했다.
    그해 말 귀국한 서재필은 이듬해 5월부터 배재학당에서 세계지리·역사·정치학을 가르쳤다.

    이승만은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배재학당에 영어를 배우기 위해서 입학했는데, 영어보다 훨씬 중요한 것을 배웠다.
    그것은 정치적 자유라는 사상이었는데, 너무나 혁명적인 것이었다.
    우리나라도 그 같은 정치적 원칙을 따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했다.”
     (이정식, <독립투사 서재필>, 219-220쪽) 

    여기서 혁명적이라는 단어는 이승만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는 문인(文人)의 풍모를 타고 났다. 신장은 165cm로 크지 않았고, 체격도 당당한 편이 아니었다. 생김새도 그랬다. 그러나 그의 내면에는 혁명가의 기질이 자리하고 있었다.
    정치적 자유라는 마법에 홀린 그는 어느 군인도 감히 흉내 못 낼 배짱, 욕심, 승부욕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는 칼과 총으로 싸우는 지휘관이 아니라, 태극기로 무장하고 머리로 지휘하는 지도자였다.
    그에게 태극기는 대한제국이요, 대한민국임시정부요, 대한민국이었다.
    그의 태극기 사랑을 담은 사진들만을 단행본으로 엮는다하더라도, 10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자료집이 될 것이다. 
    특히 6.25전쟁 직후 피란지에서 총이 아닌 태극기를 들고 촬영한 사진,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 당선자에게 휴전을 반대한다는 표시로
    태극기를 선물하는 사진(사진 3) 등은 태극기의 상징성이 최고로 승화된 역사적 사료들이다. 
  • ▲ 사진 3: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태극기를 선물하는 이승만 대통령
    ▲ 사진 3: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태극기를 선물하는 이승만 대통령
    배재학당 졸업식의 스타

    1897년 7월 8일, 서울 장안의 화제는 조선 최초의 대학졸업식이었다.
    장차 조선을 이끌어 나갈 배재학당 대학부 학생들이 2년간의 신학문 공부를 모두 마치는 행사였다. 장마철인데도 이날은 비가 멎었다. 많은 태극기와 상록수로 장식된 서울 정동의 감리교회에서 치러진 졸업식에는 조선정부 각료 중 1명을 빼고는 모두 참석했으며, 주조선미국공사, 영국총영사 등 약 600여명의 축하객이 모였다. 

    우리 근대사 연구에 매우 귀중한 영문잡지 <Korean Repository>(한국휘보) 1897년 7월호는
     ‘배재학당의 졸업식’이란 제목으로 이날 행사를 논설로 크게 다뤘다.
    존스(George Jones) 목사가 집필한 글의 요지는 아래와 같다. 

    “오후 3시가 약간 지나 배재학당 교장 아펜젤러 목사가 ‘복의 근원 강림하사’라는 찬송가를
    한글로 부르자고 제안하는 것으로 졸업식이 시작됐다.
    첫번째 프로그램은 한문학과 학생 50여명 중에서 3명이 나와 한문교과서를 암송하는 것이었다.  

    이날의 메인 프로그램은 영어과 학생들의 몫이었다.
    신흥우가 ‘Somebody's Mother’(누군가의 어머니: 미국여류시인 메리 브라인의 시)를 영어로
    읊은 다음, 학생들이 노래를 불렀다.
     이어 송언용이 ‘The Charge of the Light Brigade’(경기병대의 돌격: 영국 기병대의 러시아 군영 돌파)라는 시를 낭독했다.

    이날 가장 야심찬 프로그램은 이승만의 독창적인 영어 연설이었다.
    졸업생 대표 이승만은 ‘조선의 독립’이란 주제를 택했는데,
    이는 조선 최초의 대학졸업식에 걸맞은 것이었다.
    나라가 독립되어야만, 현재 교육을 받고 있는 이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이날 졸업식 전체 행사 중에 청중들에게 가장 생기를 불어넣었던 활력소는
     “독립이란 진정하고, 영구적이며, 지속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이승만의 주장이었다.
    그의 영어 말투는 훌륭했고, 그는 거침없이 감정을 표출했으며, 발음은 분명하고 명확했다.

    행사는 주 조선 미국공사의 연설, ‘서구문명을 동양이 받아들여야할 시점인가’라는 주제 토론,
    ‘독립가’ 독창, 서재필의 연설, ‘애국가’ 합창, 리셉션 등 저녁 8시까지 계속되었다.
    이날 학위증은 수여되지 않았으나, 졸업생들은 교장과 교사들의 서명이 담긴 졸업증서를
    조만간 받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
    (Korean Repository, 1897년 7월호, 271~274쪽) (사진 4)

  • ▲ 사진 4: Korean Repository, 1897년 7월호 배재학당 졸업식 기사
    ▲ 사진 4: Korean Repository, 1897년 7월호 배재학당 졸업식 기사
    2. <독립정신>의 키워드: 태극기

    언론인에서 혁명가로
     
    배재학당에서 미국인 선교사와 서재필 등에게 자유와 정의 그리고 평등 등 근대적 정치사상을
    배운 청년 이승만. 그는 우리나라에 미국식 민주주의제도를 정착시켜야 한다는 사상을 갖게 되었고, 이를 말과 글로 실천하는 활동에 뛰어들었다.
    이는 당시 시대상황에서 자칫하면 역적으로 몰려 자신은 물론 가족의 목숨까지도 위태로운 혁명적이고 위험천만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당장 황제에게 물러나라는 캠페인을 벌인 것은 아니었다.
    우선 독립협회 회원으로 만민공동회 등 대중 집회 연설을 통해서 나라 곳곳에 뿌리박힌 외세 지향적이고 백성을 착취하는 탐관오리들의 비행을 규탄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또한 독립신문을 모방하여 창간된 <매일신문>과 <뎨국신문>에
    정부 비판적인 글과 국민계몽의 글을 실었다.

    특히 이승만은 태극기를 제호에 배치한 <뎨국신문>(제국신문)의 주필로서 신랄한 필봉을 휘둘렀다.
    1898년 8월 10일 창간된 순한글 일간지 <뎨국신문>은 독립신문보다 인기가 있었고,
    한일병탄때(1910)까지 발간된 신문이다. 그는 옥중에서도 27개월이나 이 신문에 기사를 썼다. 

    이승만은 1899년 1월 황제폐위 음모에 가담한 혐의로 구금되었는데,
    주시경(1876-1914, 한글학자)이 건네준 권총을 소지하고 동료들과 탈출했다가 실패했다.
    권총을 발사한 동료 1명은 사형, 발사하지 않은 이승만은 곤장 100대와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7개월 동안 10kg의 형틀을 목에 쓰고 소나 말과 같은 가혹한 취급을 받았다. (사진 5)

    혹자는 이승만이 이런 극한상황에서 기독교에 귀의했음을 강조하지만,
    그보다 더 주목할 부문은 그가 감옥에서 태극기로 무장한 혁명가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1904년 6월 옥중에서 탈고한 [독립정신]이란 책은 이를 증명해준다.
    (이승만은 5년 7개월간 수감되었다가 1904년 8월 출소했음)
    순 한글로 쓰인 [독립정신]의 원고는 옥중동지 박용만(朴容萬)이 비밀리에 미국으로 가져가
    유학중인 이승만에게 전달하여 1910년 3월 로스앤젤레스에서 출판했다.
    1917년에는 많은 사진이 첨가된 재판(再版)이 발간됐다. 

  • ▲ 사진 5: 한성감옥 종신죄수 이승만
    ▲ 사진 5: 한성감옥 종신죄수 이승만
    태극기는 자주 독립의 무기 

    [독립정신]의 서문에 이승만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무릇 우리나라에서 중등(中等) 이상 사람이나 어느 정도 한문을 안다는 사람은
    거의 다 썩고 물이 들어서 바랄 것이 없다. 그들 주변 사람도 다 그 기운을 받아 마찬가지다.
     (중략) 내가 진정 바라는 바는 무식하고 천하며 어리고 약한 형제자매들이 가장 많이 이 책을 읽고 기운이 솟아 책에서 얻은 바를 실천하고 다른 사람들을 인도해주는 것이다. 이렇게 인심이 나날이 변하고 풍속이 고쳐지고 아래로부터 변해서
    썩은 데서 싹이 나고
    죽은 데서 살아나기 바란다.” 

    이승만은 이 책에서 정치를 전제정치, 입헌군주정치, 민주정치로 구분하고, 민주정치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즉, 미국, 프랑스 등 몇몇 부강한 나라들의 민주정치란 백성의, 백성을 위한, 백성에 의한 원칙에 따라 정부를 세우는 정치라면서, 이들 나라에서는 백성이 정부를 자기 집처럼 생각하며, 관리들은 백성을 주인처럼 섬기고 보호하며 돕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 국민들에게 무엇보다 긴급한 일은 모두가 자기와 나라의 권리를 스스로 알고 보호할만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국가가 처한 위기 상황을 서로 전파해서 대한제국의 자유와 독립을 나 혼자라도 지키겠다고 결심해야함을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우리 2천만 동포 중 1천9백9십9만9천9백9십9명 모두가 머리를 숙이거나 살해된 후라도, 나 하나는 태극기를 받들어 머리를 높이 들고 앞으로 나아가기를 맹세합시다!
    한 걸음도 뒤로 물러서지 않고 나아갈 것을 각각 마음속에 맹세하고, 다시 맹세하고, 천만번 맹세합시다!”
    (독립정신, 1917년 재판, 196-197쪽)

     후세의 행복 위해 태극기를 지켜야

    무엇보다도 이승만은 [독립정신]에서 민초들에게 후손을 위해 목숨을 던질 각오로 
    자주와 독립의 상징인 태극기를 지켜야 함을 아래와 같이 역설했다. 

    “국기를 소중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한다. 국기라 하는 것은 그 나라 국민과 영토를 대표하는 것이다. 비록 전쟁 중이라도 어느 나라 국기가 꽂힌 곳은 사람이나 물건이나 그 나라의 보호를 받는다. 

    따라서 다른 나라가 사전에 아무 연락이나 허락없이 그 앞을 향해서 총을 쏘지 못하는데, 만일 그렇게 하면 적국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이는 자기 어머니 혹은 아버지에게 말이나 행동이 어긋나는 행위를 하는 자에 대해서 어린 아이까지도 제 목숨을 다하여 기필코 명예를 되찾으려는 것과 같다. 

    이런 까닭에 국기가 가는 곳은 남이 감히 무례함을 범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이 외국에 다니다가 바다에서나 육지에서 자기 나라 국기를 보면, 어린 아이가 잃었던 부모를 만난 것처럼 반가운 마음에 곧 눈물을 흘리게 된다. 

    사람이 국기를 이렇듯 사랑하기 때문에 몇천명 몇만명씩 다투어 나아가 영광스러운 피를 흘리고 목숨을 던져 그 밑에 속한 국민과 영토와 재산을 안전하게 보호함으로써 나라가 태평하고 안락한 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 복을 받는 사람들은 죽은 사람의 공적에 대해 감동하여 눈물을 흘려 영광을 나타낸다. 또한 그 후손들은 자기 조상들이 피를 흘려 잡아놓은 기초를 보배처럼 자랑스런 유산으로 삼아서 털끝만큼이라도 손해가 있으면, 곧 자기의 생명을 던져 보호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도 조상들이 이런 보배로운 기초를 이처럼 값지게 마련하였던들 오늘날 우리도 남들과 같이 무궁한 복을 누리며, 우리 태극국기(태극기)를 사랑할 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였기 때문에 원한이 맺히게 된 것을 깊이깊이 깨달아 우리들의 구구한(변변치 못한) 목숨을 귀중하게 버려서 우리 후손들이 즐거운 세상을 보게 함이 마땅하다고 하겠다. 

    이렇게 작정한 후에는 누구든지 국권에 손해가 되는 일이나 말을 하는 자는 친형제간이라도 곧 나의 원수로 여겨 하나의 하늘아래 머리를 두지 않기로 다짐해야만 할 것이다. 지금 세상에는 이것이 제일 큰 의리요, 참 충성의 근본이므로 저마다 이 뜻을 알고 행동으로 옮겨야 할 것이다.”
    (독립정신, 219-221쪽) (사진 6)

  • ▲ 사진 6: <독립정신> (1917년 재판 220쪽)
    ▲ 사진 6: <독립정신> (1917년 재판 220쪽)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 태극기와 이승만
    1910년 일제의 잔혹한 무력식민통치의 시작으로 한반도 전역이 짙은 암흑에 덮여 있는 동안,
    우리 겨레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염원은 오직 독립이었다.
    당시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이승만은 프린스턴 대학의 은사였던
    우드로 윌슨(Thomas Woodrow Wilson, 1856 -1924)이
    마침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유력하다는 사실을 알고 그의 유세에 적극 참가했다. 
    제자 이승만을 아꼈던 프린스턴대학 총장 윌슨은 1912년 6월 25일 볼티모어에서 개최된
    전당대회에서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다.
    이 전당대회에서  민주당은 세계 50개국 국기로 디자인한 홍보용 손수건을 제작하여
    참석자들에게 선물했다.
    이 손수건에는 가장 눈에 띄는 우측 상단에 태극기가 자리 잡고 있다. 
    어떻게 우리나라 태극기가 이 전당대회의 홍보물에 등장했을까?
    그것은 이승만의 노력의 결실이었다. 그는 전당대회 전에 윌슨과 접촉했으며, 전당대회에도 참석했다. (사진 7-8) 윌슨은 1912년 11월 미국 대통령에 당선됐다. 
  • ▲ 사진 7.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 선출 전당대회(1912)
    ▲ 사진 7.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 선출 전당대회(1912)
     
  • ▲ 사진 8: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 선출 전당대회 홍보용 손수건 (1912년 제작, 위 오른쪽에 태극기)
    ▲ 사진 8: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 선출 전당대회 홍보용 손수건 (1912년 제작, 위 오른쪽에 태극기)
    3. 대한민국 임시정부 태극기와 이승만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태극기

    3.1독립운동의 태극기 시위는 일제의 잔혹한 총검 앞에 소기의 목표를 이루지는 못했다.
    그러나 1) 전 세계에 우리 민족의 독립을 위한 열망을 과시했으며,
     2) 민족적으로는 독립 쟁취를 위한 단결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하여
    임시정부가 세워지게 했다는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1919년 4월 전후로 한성임시정부(국내), 대한국민회의(시베리아), 임시정부(상하이)가 각각 수립됐으나, 자칫하면 이들 망명정부들의 항일 활동이 갈등과 분란을 야기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안창호(安昌浩)등 우국지사들의 활약으로 상하이에 그해 9월 통합임시정부가 수립됨으로써 민족 단결의 구심점이 마련되었던 것이다. 

    태극기를 계승한 대한민국 통합임시정부는 온갖 시련을 겪으면서도
    1945년 8월 조국이 해방될 때까지 26년 동안이나 독립운동 추진의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이는 세계 근대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사례이자 우리 민족의 자랑이다. 

    임시정부에는 해외에서 활약하던 우국지사들과 3.1독립운동 이후에 새로 망명한 인사들이 모여들었으며, 비록 망명정부이기는 했지만, 의정원이라는 입법기관과 국무원이라는 행정기관을 갖춘 민주적인 정부였다. 

    임시정부는 당초 내각제를 택하고 미국에 망명중인 이승만 박사를 국무총리로 선출했으며,
    통합임시정부는 그를 대통령으로 추대했다.
    당시 그는 국내외에서 가장 명망이 높았던 민족지도자였으며,
    일제는 그의 목에 당시로서는 엄청난 액수인 미화 30만 달러의 현상금을 걸었다.
    이는 이승만이 일본인들에게 얼마나 두려운 존재였는지를 짐작케 해준다.  

    일제의 체포와 암살의 목표였던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최고책임자로 선출된 지 1년 반 만인
    1920년 12월 8일 상하이에 도착했다.
    3층 옥상에 태극기가 휘날리는 임시정부에 발을 디딘 이승만 대통령은 감개무량했으며,
     1921년 1월 1일 임시정부요인들과 신년축하식을 가졌다. (사진 9)
    그는 약 5개월 간 중국에 체류하다가 다시 미국으로 귀환했다. 

  • ▲ 사진 9: 이승만 대통령과 상하이 임시정부 요인들 (1921년)
    ▲ 사진 9: 이승만 대통령과 상하이 임시정부 요인들 (1921년)
    3.1독립운동이 국내에서의 태극기 시위였다면, 임시정부 수립은 해외에서 본격적인 태극기 시위를 전개함으로써 대한민국의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한민족의 결의를 전 세계에 엄숙히 선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임시정부의 활동과는 별도로 3.1운동 직후 만주지역에서는 태극기를 앞세운 독립군의 항일무력투쟁이 본격화됐다. 1920년 5월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봉오동 전투, 1920년 10월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청산리 전투에서 독립군은 일본군을 대파했다. 독립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는 독립군의 피묻은 태극기는 보는이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미국 우정국의 자유수호 우표
    1919년 9월 11일 상하이에 통합임시정부가 세워지기 전인 1919년 4월 한성임시정부의 수립을 해외에 알린 인물이 있다. 바로 대한민국 독립의 은인인 영국의 매켄지 기자다.
    그의 저서 <Korea’s Fight for Freedom>(1920, 자유를 위한 한국의 투쟁)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1919년 4월 23일 한국인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한국의 13도에서 각각 1명씩 정당하게 선출된 대표들이 서울에 모였다. 이들은 일제 경찰의 감시가 삼엄한 가운데 헌법을 만들고, 공화국을 수립했다. 
    청년개혁가로 19세기 말 외세로부터 독립을 보전하기 위해서 무능한 정부의 전복을 꾀하다가 장기간 옥고를 치른 이승만 박사가 초대 대통령(역주: 공식명칭은 집정관 총재)으로 선출되었다. 미국에 체류 중인 이 박사는 즉시 워싱턴DC에 본부를 설치하고, 자국민의 이익을 대변하는 캠페인을 전개했다. 
    이 새로운 공화국 정부는 외교적으로 승인을 받지 못했지만, 정부 조직을 활용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많았다. 초대 내각에는 구한말 개혁운동에 참여했던 저명한 인물들이 포함되었다. 국무총리 이동휘, 외무총장 박용만, 내무총장 이동녕, 군무총장 노백린, 재무총장 이시영, 법무총장 신규식, 학무총장 김규식 등이다. 
    새로운 공화국의 임시헌법은 민주적이고 진보적이었다.” (<Korea’s Fight for Freedom>, 303-304쪽)
    매켄지는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우리 의병의 활동, 3.1독립운동, 그리고 우리 임시정부의 수립을 세계 최초로 책자를 통해서 알린 인물이다. 특히 위 글에서 보듯이 그는 이승만 박사가 독립운동의 중추적인 인물이라는 사실에 주목했다. 
    이승만 박사는 미국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활발한 외교활동을 펼쳤는데,
    그중에서 태극기를 통한 홍보도 큰 몫을 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의 하나는 1944년 미국 우정국이 발행한 ‘태극기 우표’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자유를 박탈당한 유럽 12개 국가의 국기를 주제로 우표를 발행키로 했다. 
    그런데 이승만 박사를 정점으로 한 구미위원회(The Korea Commission)의 항일운동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면서, 비유럽국가로는 유일하게 대한민국의 태극기도 미국 우정국이 발행한 ‘자유수호우표’에 포함되었다.
    이승만이 자신의 이름을 영문과 한글로 서명한 ‘태극기 우표’ 봉투(사진 10)와 ‘이승만’이라고 서명한 ‘태극기 우표’(사진 11)는 국가의 상징을 활용한 그의 집요한 홍보활동의 단면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 ▲ 사진 10: 이승만 박사의 영문과 한글 친필서명이 있는 태극기 우표 봉투
    ▲ 사진 10: 이승만 박사의 영문과 한글 친필서명이 있는 태극기 우표 봉투
     
  • ▲ 사진 11: 이승만 박사의 한글 친필서명이 있는 태극기 우표
    ▲ 사진 11: 이승만 박사의 한글 친필서명이 있는 태극기 우표
    4. 이념을 초월한 민족의 태극기
    레닌의 집회에 등장한 태극기
    1920년 7월 19일 소련 페트로그라드(현재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촬영된 태극기 사진엽서가 있다. 급진적인 마르크스주의자이며 소련 최초의 국가원수 레닌(1870-1924)의 연설 현장에 다른 나라 국기들은 찾기 힘들고, 왜 태극기만 돋보일까? (사진 12)
    이런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는 당시 시대상황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 ▲ 사진 12: 소련 페트로그라드에 휘날리는 태극기
    ▲ 사진 12: 소련 페트로그라드에 휘날리는 태극기
    1917년 2월 노동자와 군인들이 일으킨 혁명에 의해 러시아제국이 붕괴됐다. 
    러시아에는 임시정부가 세워졌으나, 거의 무정부상태나 다름없었다.
    그때 스위스에 망명 중이던 레닌 등 32명의 볼셰비키들이 독일제국의 황제 빌헬름 2세가 제공한 열차편으로 1917년 4월 16일 밤 페트로그라드에 도착했다. 

    참고로 빌헬름 2세는 1933년 태극기를 연구하여 <중국의 태극>이라는 주제로
    네덜란드에서 강연을 하고, 그 내용이 책자로 출판되었다고 밝힌바 있다. 

    러시아 도착 후 한때 위기를 맞았던 레닌은 1917년 10월 볼셰비키 혁명에 성공한 후
    소련을 수립했으며, 1923년에는 망치, 낫, 별이 선명한 붉은 국기를 만들었다.
    레닌은 10월 혁명 이전에 거사에 성공하면 제국주의 국가들, 특히 독일과 전쟁을 벌이겠다고
    공언했지만, 오히려 굴욕적인 조건을 받아들여 1918년 3월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도대체 레닌은 어떻게 혁명에 성공했으며, 그 후 제국주의자들과의 전쟁은커녕 굴욕적인 휴전을 맺었는지 의문을 가져볼 만하다. 2007년 12월 18일 독일의 유력 시사주간지 슈피겔(Spiegel)은 ‘레닌과 독일황제’라는 제목의 폭로기사를 실었다. 이념적으로 불구대천의 원수지간인 빌헬름 2세와 레닌이 1914년부터 유럽동부지역의 전쟁 종식을 위한 공동의 이해관계를 맺었으며, 오랫동안 빌헬름 2세가 레닌에게 돈, 무기, 운송수단을 지원했다는 것이다. 

    레닌이 혁명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 빌헬름 2세의 자금에 기인하며 레닌이 빌헬름 2세의 하수인이었다는 이 보도는 사실여부를 떠나, 소련사회주의자들의 실체를 폭로하고 있다.
    인류역사상 가장 독재적으로 경제를 독점하고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과정에서 무수한 내외국인을 무자비하게 살상했으며, 무력침략을 앞세워 공허한 세계공산화를 외치던 소련은 고작 74년을 지탱하다 1991년 붕괴하고 말았다.

    조선의 사회주의 수용

    레닌은 1919년 3월 2일 세계 적화를 위해 코민테른(Comintern: 국제공산주의연합)을 창설했다. 그런데 유럽에는 공산당 체제가 어렵다는 것을 알고는 아시아를 주목했다.
    우연의 일치일까? 코민테른의 창설날짜가 우리 민족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거족적인 3.1독립운동을 벌였던 다음날이라는 것이! 

    태극기 시위의 원인이 고종의 독살설이었든, 일제의 가혹한 탄압과 민족말살 정치에 대한 항거였든,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되었든, 혹은 소련혁명에 고무됐든, 독립이라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다. 힘 있고 체계적인 조직과 외교수단이 없었고, 일제에 의해 국내외 언로(言路)가 철저히 차단되었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일제의 총칼 앞에 무참히 쓰러지고, 사지가 절단되어도 의지할 곳이 없는 우리 민족의 좌절감은 어떠했을까? 좌절감은 겉 다르고 속 다른 레닌의 제스처를 받아들여 1920년을 기점으로 연해주, 만주 등의 독립운동가들의 일부가 소련의 사회주의로 기울어지기 시작했고, 한반도 안으로도 파급됐다. 

    1920년 7월 19일 페트로그라드 광장의 태극기는 이를 증명해주는 사진이나 다름없다.
    즉, 국내에서 더 이상 불가능한 태극기 시위를 러시아에서 하는 느낌을 자아낸다. 마치 레닌에게 한국의 독립을 지원해달라는 호소처럼! 그곳에는 조선사회주의자 박진순이 있었다.  

    이듬해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를 역임한 이동휘 등 3명이 레닌을 만나 경제적 지원을 약속받았다. 그러나 레닌의 지원금은 조선사회주의자들의 착복, 분쟁 및 싸움으로 번졌다.
    더구나 그때 러시아에서 태극기 시위를 벌였던 박진순을 비롯한 초기 조선의 사회주의자들은
    후일 소련정부에 의해서 비참하게 처단되거나 버림받는 비극적인 운명을 맞았다. 

    5. 광복과 남북한 공통의 태극기

    뉘우침 없는 항복

    1945년 8월 15일 정오, 일왕이 “(일본) 제국정부로 하여금 미국, 영국, 중국, 소련 등 4개국의
    공동선언을 수락하도록 하였다.”는 라디오 방송이 흘러나왔다. 우리가 일본의 무조건 항복이라고 부르는 방송이다.

    그런데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 지역에서 저지른 끔찍한 만행을
    진정으로 뉘우치는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일왕은 미국과 영국 두 나라에 대한 선전포고의 이유가 일본의 자존과 동아시아의 안정을 희망하였기 때문이지, 타국의 주권과 영토 침탈은 아니었다고 둘러댔다.   

    또한 일제의 장병, 공직자, 국민이 모두 용감하게 싸우고 최선을 다했음에도 전황이 불리해지고, 적이 잔학한 폭탄을 사용해 무고한 사람들까지 살상함으로써 민족의 멸망과 인류 문명의 파괴 위험이 있어 공동선언을 수락하는 것이라고 강변했다.

    그러면서 자손에게 나라가 자랑스럽고 불멸임을 확신시키고, 장래 부흥과 건설에 온 힘을 다하여 나라의 본모습의 진수를 널리 알리고, 세계의 흐름에 뒤처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자국 국민들에게 말했다.

    이런 후안무치한 자들에게 우리는 과거에 대한 반성과 회개를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잊지 말아야 한다! “다시 돌아오겠다.”며 쫓겨난 마지막 조선총독과 일본인들, 그리고
    패망에 즈음해 행한 일왕의 넋두리를!

    해방 직후의 남북한 태극기 

    광복! 이날 감격과 환희의 도가니 속에 태극기의 물결이 넘쳤다고 교과서와 각종 서적은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1945년 8월 15일 전후에 촬영된 감격과 환희가 넘치는 사진은 몇 장 보이지만,
    태극기의 물결이 넘치는 사진은 찾기 힘들다.
    도대체 이유가 무엇일까?
    미군 점령군이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까지는 일본군과 경찰이 무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미 점령군을 환영하는 우리 국민들이 일본군의 총격을 받아 사망하기도 했다.

    미국의 핵폭탄이 2번째로 일본에 투하되었던 1945년 8월 9일, 소련은 일제에 대한 선전포고를 했다. 소련군은 만주를 경유해서 우리나라 두만강의 국경을 넘어 북한으로 들어와 8월 22일에는 평양을 점령했다. 미군이 서울에 들어오기 17일 전에 이미 북한의 거의 전역을 손에 넣은 것이다.
    무엇이 그리 급했을까? 한반도 전체를 공산화하려는 속셈이었을 것이다.

    미군은 9월 8일 인천에 상륙했다. 우리나라에 잔류하던 일본군은 9월 9일 미군에 투항했고,
    총독은 파면됐다. 총독부 국기게양대에 꽂혔던 일장기는 내려지고, 성조기가 게양됐다.
    해방을 맞았지만 그날 총독부 국기게양대의 국기는 태극기가 아니었다.
    총독부 건물은 이후 이름이 미 군정청, 중앙청으로 바뀌었으며,
    그곳 국기게양대에 태극기가 휘날리기 시작한 것은 1946년 1월이었다.

    비록 국기게양대에는 태극기가 휘날리지 못했지만, 9월 8일 미 점령군의 도착 전후 거리에는
    태극기 물결이 넘쳤고, 1945년 10월 20일 이승만 박사 귀국 환영식처럼 공식행사 때에는
    국기게양대는 아니지만, 중앙청 건물의 전면에 태극기가 게양되었다. (사진 13)
  • ▲ 사진 13: 중앙청에서 개최된 이승만 박사 환영행사
    ▲ 사진 13: 중앙청에서 개최된 이승만 박사 환영행사
    북한에서도 마찬가지다. 소련군이 8월 평양을 점령할 때 휘날렸던 것은 태극기와 소련기였다.
    김일성은 1945년 10월 14일 그는 평양에서의 귀국 환영대회에 모습을 드러냈고,
    식장은 태극기와 소련기로 장식됐다. 
  • ▲ 사진 14: 동독에서 1948년 발간된 책자 <2 X KOREA>의 김일성
    ▲ 사진 14: 동독에서 1948년 발간된 책자 <2 X KOREA>의 김일성
    6. 태극기를 계승한 국가, 태극기를 배신한 왕조
    태극기를 계승한 대한민국
    1947년 11월 14일 유엔총회는 의미있는 결의를 했다.
    한반도를 독립시키기 위해서 남북한에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것이었다.
    남한은 이 결의를 따랐으나, 소련은 북한지역에서의 선거를 거부하고,
    유엔감시위원단의 입국도 금지했다. 한반도 분단은 이렇게 고착된 것이다.
    남한에서는 유엔결의에 따라 1948년 5월 10일 제헌의원 선출을 위한 총선거가 실시됐다.
    유엔감시위원단의 참관 하에 우리 민족 역사상 처음으로 국민이 국회의원을 직접 뽑는 민주선거였다.
     1948년 5월 31일 민의에 의해서 선출된 198명의 제헌의원들은 제1차 회의를 갖고,
    이승만을 초대 국회의장으로 선출했다. 
    1948년 7월 17일에는 헌법이 제정되었고, 7월 24일에는 의회에서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그리고 8월 15일에는 현재 경복궁 자리에 있던 중앙청에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음을 대내외에 공포했다. (사진 15) 
    대한민국 국기의 제정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인 1949년 1월 7일 문교부는 <국기제정위원회 구성준비위원회>를 소집했다. 위원회는 2월 3일 입법부, 사법부, 학계, 언론계, 미술계, 공공단체 등 각 분야에서 42인을 국기제정위원으로 위촉하고, 1949년 2월 7일 국기제정위원들은 중앙청에서 첫 회의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대다수의 위원들은 1) 일제 강점기에 우리 민족이 태극기로 뭉쳐 일제와 싸웠고,
    2) 수많은 애국선열들이 태극기를 휘날리다가 혹은 태극기를 지키기 위해서 순국했으며,
    3) 태극기는 한민족의 마음을 연결하는 단 하나의 상징이므로 새로 국기를 제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다수의 의견에 따라 국기의 제정보다는 기존 태극기 도형과 규격을 통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결론을 짓고, 국기제정위원회라는 명칭을 국기시정위원회(國旗是正委員會)로 변경했다. 
  • ▲ 사진 15. 대한민국 정부수립 선포식.
    ▲ 사진 15. 대한민국 정부수립 선포식.

    국기시정위원회는 모두 5개의 도안을 심의에 올렸으며, 1949년 2월 23일 12인으로 구성된 특별심사위원회에서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국기를 통과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