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중 ‘수송기로 1,000명 피란’ 전쟁고아의 아버지로 불려
  • ▲ 이승만 대통령은 헤스 중령이 한국 근무기간 동안 세운 공적을 치하하며 은성무공훈장과 대한민국 공군 조종사 휘장을 수여했다. ⓒ공군
    ▲ 이승만 대통령은 헤스 중령이 한국 근무기간 동안 세운 공적을 치하하며 은성무공훈장과 대한민국 공군 조종사 휘장을 수여했다. ⓒ공군

    6·25 전쟁 항공전의 영웅, 전쟁고아의 아버지였던 딘 헤스(Dean E·Hess) 대령이 3월 3일(화) 오전 1시(美 오하이오 주 현지시각)에 향년 98세로 별세했다.

    헤스 대령은 6·25 전쟁 발발 직후부터 1년간 250여 차례나 출격해 북한군과 직접 맞섰던 전투조종사였을 뿐 아니라, F-51 무스탕기 조종 교육을 통해 항공작전의 불모지였던 초창기 한국 공군을 비약적으로 성장시켰다.

    2차대전 당시 프랑스 전선에서 P-47 전투기 조종사로 활약 후 전역했던 헤스 대령은 6·25 전쟁이 발발하자 자유수호와 세계평화를 위해 다시 현역으로 복귀하기를 결심하고 美 공군 전투조종사로 지원했다.

    1950년 6월 중순 美 극동 공군사령부에 배속된 헤스 대령은 당시 한국정부의 요청으로 美 공군에서 지원한 F-51전투기 10대를 한국공군에 인도하기 위해 창설된 美 제6146 기지부대의 부대장으로 임명돼 대한민국 공군 건설 작전(바우트 원, Bout One : Building a South Korean Air Force) 임무는 물론, 250여회를 직접 출격하며 6·25 전쟁 초기 항공작전을 주도했다.

    당시 전쟁에 참전한 미 공군조종사는 100회 출격을 하면 비전투지역인 일본이나 미국으로 전출됐던 것을 감안하면 그의 헌신을 가늠할 수 있다. 당시 헤스 대령의 전용기인 F-51D 무스탕 18번기에는 ‘信念의 鳥人(신념의 조인)’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으며, 이는 헤스 대령의 좌우명인 ‘By Faith, I Fly’를 옮긴 것으로 대한민국 공군 조종사의 기상을 상징하게 됐다.

  • ▲ 6.25 전쟁 당시, 딘 헤스대령이 조종했던 F-51 전투기.ⓒ공군
    ▲ 6.25 전쟁 당시, 딘 헤스대령이 조종했던 F-51 전투기.ⓒ공군

    (헤스 대령의 F-51D 무스탕 전투기 기장이던 한국 공군 정비사 최원문 일등상사에게 ‘By Faith, I Fly’의 한글 번역을 부탁해 ‘信念의 鳥人’이란 글귀를 써 넣었다.

    이는 후에 1982년 강용구 작사·윤정모 작곡의 ‘신념의 조인’이란 동명의 군가와 1975년 발표된 최문화 작사·작곡의 ‘필승 공군’이라는 군가에서도 등장한다.) 한편, 헤스 대령은 1951년 1․4후퇴 당시 중공군이 내려오자 미 공군 군목(軍牧)이던 러셀 블레이즈델 대령과 함께 1000여명의 전쟁고아를 서울에서 제주도로 수송하는데도 기여했다.

    당시 공군의 지휘부를 적극적으로 설득해 무려 15대의 C-54 수송기를 전쟁고아 후송작전에 투입해 무사히 피신시켰고, 이는 미 공군 전사에도 비중있게 기록돼 미 국립공군박물관에서도 소개되고 있다. 그는 이후에도 수시로 방한해 고아들을 돌보며 전쟁고아의 아버지로 불리기 시작했다.

    특히 6.25 전쟁 당시의 경험을 쓴 그의 책 ‘전송가(Battle hymn)’는 유명한 영화배우 록 허드슨(Hudson)이 주연을 맡은 동명(同名)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평소, “조국을 위해 미군이 감히 나서지 못하는 작전도 수행하려는 한국 공군의 불굴의 용기에 감명받았다.”고 6.25 당시 소회를 밝혔던 그는, “한국이 통일되는 것을 볼 때까지 살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이루진 못했지만, ‘신념의 조인’으로 대한민국 공군사에 길이 남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