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선고와 모진 고문에도, ‘민주주의 건국 혁명’ 꿈 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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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남의 건국 정신은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기독교 국가, 반공국가, 국민국가, 한미동맹이 그것이다.

    1898년 이승만은 민주주의 혁명에 참여했다.
    이 사건으로 청년 이승만은 사형선고를 받고 한성감옥에 수감돼 끔찍한 고문을 당했다.

    이 박사의 일기를 보면 한성감옥에서 고문을 당하는 꿈을 꿨다는 내용이 있다. 우남은 50세가 넘어서도 23살에 당한 고문의 악몽을 잊지 못했다. 그만큼 당시 고문은 잔인했다.

    고문에 심신이 지친 이승만은 위안을 삼고자 성경을 읽었다. 조선의 왕족이고 조선 최고의 청년 정치인으로 주목 받았던 그는, 기독교인이 되던 그날 감옥에서 “오 하나님 조국을 구원해 주옵소서, 나의 영혼을 구원해 주옵소서”라고 외쳤다.

    그가 올린 기도는 “감옥에서 내보내 주옵소서”가 아니라, 이 나라를 구원해 달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신앙을 왜 가질까.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 누구나 그렇다. 그러나 이것은 종교의 본질이라고 할 수 없다. 이승만은 참다운 신앙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보여줬다.

  • 이승만은 조국을 구원하는 길을 기독교 국가에서 찾았다. 그리고 이승만은 조국 대한민국이 반공국가로 거듭나길 원했다.

    당시 러시아에는 붉은 왕조가 나타났다. 전 세계가 공산주의들의 선동에 넘어갔다.

    공산주의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그림이 있다. 바로 세계적인 화가 피카소가 그린 그림이다. 전쟁에 나선 군인이 여자와 아이들을 마구 죽이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이 그림은 다름아닌 6.25전쟁을 그린 그림이다. 제국주의자인 미국 군인들이 조선 민중을 파리 잡듯이 죽였다는 것이다. 피카소는 유명한 반미주의자였다. 죽을 때까지 공산당원이기도 했다.

    97년 한국 경제가 휘청했던 바로 그 사건, IMF사태를 기억하시는가? IMF 창설의 미국 측 책임자였던 덱스터 화이트가 소련 첩자였다는 사실이 나중에 밝혀졌다. 유엔 창설의 주역이었던 미 국무부 고위 관료 엘저 히스도 마찬가지였다. 나중에 엘저 히스가 죽고 나서 소련에 기밀 문서를 보고했던 간첩의 동선과 똑같다는 점 때문에 이 같은 사실이 드러났다.

  • ▲ 파블로 피카소 1951년 作 '한국에서의 학살' ⓒ이호 목사 제공
    ▲ 파블로 피카소 1951년 作 '한국에서의 학살' ⓒ이호 목사 제공

     

    이런 사람들이 스스로 공산주의자가 되고 소련 공산당을 위해 스파이 노릇을 할 만큼 공산주의는 전 세계 지식인들을 사로 잡았었다.

    이럴 때 인류 최초로 반공 연설을 하신 분이 바로 이승만 대통령이다. 공산주의는 자유를 주지 않는 사상이기 때문에 반드시 망한다는 게 이승만 대통령의 지론이었다.

    탈북한 동포들에게 남녘에서 살게 된 것 중 뭐가 제일 좋은지를 물으면 자유를 줘서 고맙다고 말한다. 그 중에서도 은행에서 '돈 찾는 자유'를 거론하곤 한다.

    북한에서는 은행에 들어간 돈을 찾을지 말지를 공산당이 결정한다. 반면, 우리는 은행에 있는 1백원을 찾는 것을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바로 이승만 대통령이 세운 나라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북한은 신년사에서 당이 결정한 대로 행동하자고 말했다. 그게 북한이다. 북한은 모든 것을 당이 결정한다. 이 때문에 이승만 박사는 “공산주의는 안 된다”고 단언했다.

  • ▲ 파블로 피카소 1951년 作 '한국에서의 학살' ⓒ이호 목사 제공

    공산주의는 귀신이다. 자기나라 국민들을 굶겨 죽이면서 핵폭탄을 만드는 귀신, 그것이 공산주의의 실체다.

    공산주의 사라지기 직전, 고르바초프는 자본주의에게 졌다고 인정했다. 소련의 붕괴는 이승만 박사께서 100년 앞을 내다본 예언자이었음을 보여준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국민국가다.

    예전에는 양반이 쓰는 갓이 있었고, 백정이 쓰는 패랭이 모자가 있었다. 그런데 이 때문에 폭동이 일어났다. 백정이 장가갈 때 양반 갓을 쓰고 장가가다 걸려서 양반이 백정을 모두 해치려고 했다. 이승만은 이런 악습을 타파하고 평등의 나라를 건설했다.

    이승만은 조선인들은 위대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조선을 식민지로 만든 일본은 이승만이 위대하다 했던 조선 백성들을 상놈이라고 폄하했다. 그렇게 우리의 기운을 눌렀다. 재주를 펼칠 기회도 주지 않았다. 그래서 이승만은 양반·상놈 차별을 없애고, 모두가 나라의 주인인 국민국가를 만들고자 했다.

  • ▲ 파블로 피카소 1951년 作 '한국에서의 학살' ⓒ이호 목사 제공

    차별을 없애기 위해, 누가나 평등하게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이승만은 토지개혁을 했다. 상놈은 고생해도 입에 풀칠하기조차 어려우니 먹고살 만한 배경을 만들어 주고자 했다, 토지개혁을 통해 우리 역사상 최초로 머슴이 없어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승만은 교육혁명을 강조했다. 1913년 하와이에 만든 한인학원은 남녀공학이었다. ‘남녀차별을 없애겠다’는 그의 신념이 이런 개혁을 이끌어냈다. 이승만의 시대를 앞서간 교육이 있었기 때문에 미국보다 먼저 여자 대통령이 나왔다.

    우리는 한미동맹 국가다. 6.25 전쟁을 도와준 미국이지만,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국익에 반한다고 판단되면 미국과도 맞섰다.

    대표적인 사건이 반공포로 석방이다. 이승만은 미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국군을 통해 반공포로를 석방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때 풀려난 반공포로들은 이승만의 사진을 들고 나왔다.

  • ▲ 파블로 피카소 1951년 作 '한국에서의 학살' ⓒ이호 목사 제공

    이처럼 이승만은 한다면 했다. 우리를 지켜준 미국이지만,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서는 미국과도 맞서 싸웠다.

    이렇게 당당한, 한다면 하는 이승만 대통령이 있었기에 우리는 전쟁에서 이길 수 있었다. 6.25가 위대한 승리인 이유는 부대 단위로 항복한 역사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위대한 국군 뒤에는 국가와 국민을 가장 먼저 생각하는 대통령이 있었다. 당시 이승만은 국군에게 ‘우리 동포를 구출하라, 그렇지 않으면 자결하라’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이승만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가 바로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이다.

    이 조약을 통해 미군이 한국에 주둔했고, 한국은 북한과 공산주의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1954년 한미동맹 이전 이 땅에서는 청일전쟁, 러일전쟁. 중일전쟁 등의 전쟁이 연이어 벌어졌다. 그야말로 폭발 직전이었다. 하지만 한미동맹 이후 전쟁은 없었다.

    한미동맹을 계기로 한국은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었고, 세력의 균형을 이룬 동북아는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됐다. 이것이 이승만의 업적이다.

  • ▲ 파블로 피카소 1951년 作 '한국에서의 학살' ⓒ이호 목사 제공


    돌아다니다 보면, 이승만을 욕하는 분들이 있다. 그러면 난 두 가지 질문을 한다. “약소국 지도자로 강대국을 향해 한말을 다한 사람이 과연 있느냐?”, “우리 역사 속에 민족의 번영과 동북아의 평화를 가져온 사람이 또 있느냐?” 이런 질문을 하면 그 누구도 반문을 하지 못한다.

    이승만 박사는 한다면 하는 결단력으로 우리나라를 이만큼 만들었는데, 지금은 종북세력이 나라를 어지럽히고 있다.

    5천년 역사 속에서 1천 번이나 침략을 당한 나라가 지금은 평화를 누리고 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평화는 이승만 대통령이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종북세력 때문에 우리가 누리는 평화는 아직 미완성이다.
    이승만이 주창한 ‘민주주의 건국 혁명’을 이뤄나가야 한다. 이를 위해 투쟁해야 한다. 우리 모두 애국해서 건국 혁명을 만들어가는 데, 남은 모든 노력을 다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