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再犯 간첩행위자 두번째 사면 때 文在寅은 민정수석

    노무현 정부시절 성완종 두 차례 사면, 당시 문재인은 청와대 민정수석‧비서실장

    정리/김필재   

    사망한 성완종 前 경남기업 회장이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새정련) 대표가 청와대에 있을 당시 두 번의 특별사면을 받았던 일이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이번 게이트가 여당을 넘어 야당(노무현 정부 시절)으로 옮겨가고 있다. 
  • ▲ <채널에이> 보도 캡쳐
    ▲ <채널에이> 보도 캡쳐
    성 전 회장은 노무현 정부 시절 두 차례에 걸쳐 사면을 받았다. 그는 2004년 자유민주연합(자민련)에 불법 정치자금 16억 원을 제공한 혐의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으나 2005년 5월 첫 번째 사면(석가탄신일)을 받았다.

    2007년 11월에도 ‘행담도 개발 비리사건’에 연관되어 징역 6개월,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았으나, 같은 해 12월(임기 마지막 특별사면) 또다시 사면을 받았다. 문재인 새정련 대표는 성 전 회장의 첫 번째 특사 때 청와대 민정수석, 두 번째 특사 때는 청와대 비서실장이었다.

    새누리당 박대출 대변인은 13일 오후 서면 브리핑을 통해 성완종 회장의 두 차례 특별사면과 관련해 “‘특별한 특별사면’의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 대변인은 “한 정권에서 한 사람을 두 번씩이나 혜택을 주었다. 한번은 형 확정 9개월 만에, 또 한번은 형 확정 한달여만에 혜태을 주었다”며 “두 번째 혜택을 줄 때는 비공개로 ‘몰래 혜택’을 주었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김영록 새정치연합 수석대변인은 반박 브리핑을 통해 “새누리당이 최악의 친박 권력형 게이트를 물타기하기 위해서 故 성완종 前 회장의 참여정부 때 사면을 두고 근거 없는 특혜의혹을 제기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김 대변인은 “2005년 사면은 대선자금 및 지방선거와 관련한 대사면으로, 與野 인사들이 일괄 대상이었다”며 “성 전 회장은 2002년 5월 자민련 김종필 총재의 부탁을 받고 16억을 자민련 사무부총장에게 전달한 일에 대해 자민련의 의견을 반영하여 사면 대상에 포함된 것'이라고 해명했다.

    그는 이어 “성 전 회장이 사면을 받은 2008년 1월1일은,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된 직후였다”면서 “성 전 회장은 특별 사면된 당일 이명박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자문위원에 곧바로 위촉됐다. 사면되는 첫 날, 이명박 인수위에 들어가기로 돼 있는 인사를 참여정부가 특별히 봐 줄 근거가 없다”고 반박했다. 김 대변인은 또 “새누리당이 ‘차떼기 정당’에서 ‘잡아떼기 정당’이 되더니, 이제 ‘덮어씌우기 정당’이 되어가는 것 같다'며 새누리당을 비난했다. 

    황교안 법무부 장관은 13일 국회에서 열린 정치분야 對정부질문에서 김성태 새누리당 의원이 “실형까지 받은 사람이 한 정부에서 두 번이나 특사를 받는 건 대단히 이례적인 일 아니냐”고 묻자 “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황 장관은 이어 김 의원이 “이런 경우는 (이때까지) 몇 번이나 있었느냐”고 하자 “사면이 거듭되는 일은 많지 않다”고 답변했다.

    실제 경남기업 비리를 수사해온 검찰은 2007년 12월 노무현 정부의 마지막 특별사면이 결정되기 전 경남기업 계좌에서 5000만~1억 원의 돈이 빠져나간 정황을 포착했다. 당초 검찰은 성 전 회장을 구속하면 사면 로비 의혹을 수사할 계획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간첩 혐의자를 광복절 특사로 풀어준 左派정권
    당시 문재인은 대통령 비서실 민정수석비서관 

    검찰 통계에 따르면 북한정권을 이롭게 한 간첩 등 對共사범(대부분이 국보법 위반자)에 대해 김대중 정권은 2892명을 사면하고, 노무현 정권은 646명을 사면했다.
  • ▲ <채널에이> 보도 캡쳐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간 3538명의 국가파괴 범죄 전력자들이 풀려난 것이다. 사면통계는, 잔형집행면제, 감형, 형선고실효, 복권 및 형집행정지 등이 포함된 수치이다. 

이들 중 상당수는 자중하기는커녕 정치권, 從北단체 등에 들어가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대중과 노무현 정권이 간첩 등 국가반역 범죄자들을 사면하여 한국을 左傾化시킨 사례중 대표적인 인물이 민경우이다. 刑期(형기)를 반밖에 살지 않은 간첩 행위자를 두 번이나 사면복권시킨 경우이다. 

그는 1997년 3월부터 利敵단체 범민련남측본부의 사무처장으로 활동하며, 같은 해 6월(김영삼 정부 시절) 국보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어 3년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김대중 집권 시절인 1999년 8월 광복절 특사로 출소했다.

민경우는 이후 다시금 범민련 남측본부의 사무처장으로 복귀했다가 ‘통일연대’ 사무처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2003년 12월, 그는 북한과의 회합-통신(2001~2002년 기간. 출소후) 혐의로 또 구속되어 2005년 5월 징역 3년6개월에 자격정지 3년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적용 법조문은 국보법상 간첩-회합통신-자진지원-금품수수-찬양고무죄(罪)였다.

대법원이 확정한 민경우의 간첩활동은 반(反)국가단체인 조총련의 대남(對南)공작원 박용(朴勇, 범민련 공동사무국 상근 부총장, 조총련 정치국 부장)의 지령과 활동자금을 받아 국가기밀을 탐지, 수집, 전달했다는 것이다.

민경우는 그러나 2005년 8월 광복절 특사로 다시금 풀려났다.
노무현 정권이 민경우에게 ‘형(刑) 집행 면제 특별 사면 및 복권’까지 해준 것이다. 

그는 출소 후 활발한 글쓰기 및 강연 활동을 벌이고 있다.
문재인 새정련 대표는 민경우가 풀려난 시기에 청와대에서 대통령 비서실 민정수석비서관으로
재직(기간: 2005년1월~2006년 5월) 중이었다. 민정수석은 사면 업무에 관련 있는 직책이다.

민경우는 출소 후 북한을 자유롭게 방문하며 북한을 美化하는 주장을 펴왔다. 

그는 2005년 해 10월8일부터 10일간 ‘겨레하나’의 ‘광복60년기념平壤문화유적참관단’으로 북한을 방문한 뒤 ‘겨레하나’기관지에 다음과 같은 기행문을 실었다.

“북이 세상과 닫혀 있고, 가난하다고 말하는 것은 미국이나 선진부국의 입장에서 본 북의 한쪽 모습이다. 사물의 다른 쪽에서 북을 보게 되면 가난하지만 존엄(尊嚴)과 긍지(矜持)를 중히 여기는 북의 또 다른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런 면에서 보면 평양은 세상으로부터 많이 열려져 있다”

그는 특사로 풀려난 이후인 2005년 11월28일 <진보정치>기고문에서 “경제적 궁핍에 시달리면서도 북이 잘했던 것은 지도부와 대다수 중하부 대중이 결집하여 고통을 폭넓게 분담함으로써 아프리카 등에서 보여지는 대참사를 막아낼 수 있었다는 점”이라며 “그런 면에서 북 지도부는 효율적이고 도덕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다”고 주장했다. 

민경우는 또 같은 해 9월24일 <시민의 신문>인터뷰에서 “북에서는 핵을 미국에 자위적인 수단으로서 민족자주권으로 생각한다. 이를 남측에서 뭐라고 문제 삼을 수는 없다”며 북한 정권의 핵개발을 옹호했다.  

정리/김필재(조갑제닷컴) spooner1@hanmail.net

[관련기사] 민경우가 스스로 밝힌 '내가 간첩이 된 이유'
'나는 北의 통일정책을 상당부분 지지한다'
2012년 1월17일자 보도
  
최근 한국사회의 ‘안철수 쏠림 현상’을 분석한 저서를 낸 민경우(閔庚宇) 前범민련남측본부 사무처장은 2004년 옥중(獄中)기고문을 통해 자신이 왜 간첩이 됐는지를 밝혔던 인물이다.

閔씨는 2004년 7월7일 인터넷 매체 <민중의 소리> 기고문(제목: 「나는 간첩인가?」)에서 “40살이 된 지금까지 마르크스주의나 연방제, 주한미군 철수 등의 사상과 노선을 갖고 있는 것이 내가 간첩이 된 이유일까?”라며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는 자신이 “고 3때부터 무작정 Marx(마르크스)에 대해 알고 싶었다. 84년에 대학에 입학해 당시의 학생들처럼 전두환 정권에 반대하는 데모에 참가했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러 차례 연행되었다가 훈방되고 실제 구속되어 형을 살기도 했다. 86년 무렵부터 학생운동권에는 반미와 통일문제가 급부상했다. 80년 광주학살에 미국이 직간접적으로 개입한 증거는 비교적 뚜렷했다. 그 시간 이후로 나는 반미주의자가 되었다. 비슷한 시기부터 나는 북의 주체사상이나 통일정책 등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철학적 소양이 부족해서 주체사상에 대해서는 무어라 말할 처지가 못 되지만 공안기관은 나를 골수 주사파쯤으로 분류할 것이다. 나는 북의 통일정책을 상당부분 지지한다.”

그는 이어 자신이 몸담았던 利敵단체 범민련에 대해 “조국통일에 뜻이 있으면 남북해외 민족 구성원 모두에게 문호를 열어놓고 있다”면서 “범민련이 북의 조종을 받는 단체라고 규정하지만 통일운동의 입장에서 북한 동포와 대화-접촉하는 것은 당연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는 “묘한 것은 북에서 남파된 오리지널 간첩은 몇 명 없거나 아예 감옥에 오지 않는다”면서 “90년대 후반 발생한 간첩 사건의 대부분은 나처럼 북한과 적당히 연관된 ‘사이비 간첩’”이라고 덧붙였다.

“나는 일본의 범민련 조직을 통해 범민련 북측조직과 200번쯤 전화-팩스-이메일로 연락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농민, 노동자, 재야 운동가들이 북을 방문하고 북의 동포들이 남을 방문했다. 그러나 정작 나는 한 번도 북에 가보지 못했고 북한 사람을 만나본 일도 없다...(중략) 나는 2003.12.1 또다시 연행되어 2004.5.24 1심 재판에서 간첩이라고 판결 받았다. 2심, 대법원에서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閔씨는 “우리(범민련)는 서울시내에 사무실을 두고 공개적으로 북과 접촉하고 협력하고자 했다”면서 “무엇이 잘못되었는가?...(중략) 어제 만남이 함께 공을 차는 것이었다면 오늘은 일본의 역사왜곡을 규탄하고 내일은 미국의 만행에 대해 함께 목소리를 합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옥중기고> 마지막에 “나는 민족의 자주를 위해 함께 싸우고 싶다”고 밝힌 뒤 “아마도 이게 내가 간첩이 된 핵심적인 이유일 것”이라고 밝혔다. 

김필재(조갑제닷컴) spooner1@hanmail.net

[조갑제닷컴=뉴데일리 특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