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월남’의 판박이가 되고 마는가?
    40년 전 어느 대학생의 글을 보며....

    이 덕 기 / 자유기고가 
  • “4월은 잔인한 달”... 정말로 그 때는 그랬다.

    요즈음이야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철저·교묘하게 이용(?)하여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파괴하려는 시위와 난장판들이 서울 중심가에서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그 때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염원’하는 시위가, 시내 중심가도 아닌 대학가에서 주로 벌어졌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지도 못했다.

    “관악(서울대를 지칭)에 봄이 왔다”는 이야기들이 전해지면, “아! 민주화 투쟁이 시작되는구나” 이렇게 알아들었다. 시위 중 연행·구속된 학생, 모의(謀議)하다 잡힌 학생들도 많았다.

    그러니 봄은 왔으되 봄이 아니였고(春來不似春), 늘 추웠다. 

    지금으로부터 꼭 40년 전(前)인 1975년. 대학가 개강과 동시에 관악으로부터 봄바람이 불었고,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대학가는 장기간 휴업에 들어간다.

    그런데, 대학가 휴업의 와중에 저 인도차이나 반도(半島)에서 엄청난 소식이 들려온다.

    1973년 1월 조인된 평화협정을 무시하고 공산 월맹군이 자유월남을 무력으로 침범하여, 전면전을 개시한지 50일 만인 1975년 4월 30일 자유월남의 수도 사이공이 함락되었다.

    결국 자유월남은 이 지구상에서 사라지게 된다.

    남북 대치 상황에서 이 소식은 너무나 큰 충격이였다.
이어서 5월 13일 악명(?) 높은 ‘긴급조치 9호’가 발령된다.

혹자는 대한민국이 ‘민주주의의 암흑기’에 들어선 사건이었다고 말한다.

당시 우리네 대학생들은 ‘입조심’과 함께, ‘머리카락 조심’도 아주 큰 일 가운데 하나였다.

장발(長髮) 단속이 더욱 요란해졌기 때문이다.

당시의 상황에 대해 어떤 이들은 ‘유신독재 강화 속셈’을 말하지만, 또 다른 이들 중에는 ‘공산주의 세력의 팽창과 자유월남의 패망’을 연결시키기도 한다.

‘10월 유신’과 이어지는 ‘긴급조치’의 의도와 저의, 그리고 타당성·정당성 여부에 대한 논쟁은 뒤로 미루고, 한편의 짧은 글을 소개하고자 한다. 

아래는 군 복무중 월남전 참전 후에 제대 복학한 한 학생의 글이다.

모(某) 대학신문 기자였던 그가 그해 6월, 장기간 휴업으로 배운 것도 없이 기말고사를 준비해야 할 시점에 ‘기자 칼럼’으로 썼다. 아마 그때쯤 ‘보트피플’ 소식들도 들려왔던 것으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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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 친구 『후에』 =

    월남서 한국군이 철수한지도 만 2년. 결국은 공산치하에 들어갔다.

    나는 『후에』라는 젊은 월남 친구를 알고 있다.

    나 이외에도 그를 알고 있는 우리 전우들은 많이 있다.

    그는 키가 작고 우리말을 잘하는, 그 외에 또 읽으며 쓸줄도 아는 그는, 월남군 중사다.

    내가 처음 그를 대했을 때 상당히 놀라움을 금치 못했던 것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우리 사무실에서 우리의 신문을 줄줄 읽어내려가던 그, 처음 그는 나 같은 사람들이 의례 물어보던 평범한 질문에 거침없이 대답해 내려간다.

    “언제 이렇게 우리말을 배웠습니까?” “한국말 어렵지 않아요.” 내가 그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읽을 수 있는 책과 신문.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후에, 무슨 책을 원하지?”

    결국 집(한국)으로부터 온 조그만 소포 안에는 잡지 몇 권과 유행가요집 2권, 이것은 그에게 최고의 선물이었던 것이다. 그는 남진 노래와 나훈아 노래를 좋아 했나 보다.

    그 다음 날 나의 사무실에 찾아와 책을 보며 노래를 부르던 일, 그리고 시내를 안내 받던 일.

    지난해 12월 그에게서 온 마지막 편지, “(생략)... 어머니 곁에 있고 싶어요. 그러나 마음대로
    갈 수가 없어요. 1년에 두 번밖에, 아직도 제대는 멀었습니다...” 그 뒤부터 그의 주위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조차 오늘까지 모르고 지내왔다.

    그들은 너무나 많은 날을 전쟁에 시달려 왔다. 오직 평화만을 위하여 허구헌 날을 전쟁에 시달려 온 것이다. 그렇게 되어 무감각이라는 것을 낳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오직 전쟁만이 끝나면 평화가 오는 것으로 그들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이도 보였다.

    공산화가 된 이즈음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그가 무사하고 다시 연락이 될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 뿐이다. 북괴의 남침 위협을 받고 있는 우리는 이러한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선 오직 확고한 정신 자세와 자주 국방만이 있을 뿐이다.

    나라 없는 민족의 설움을 우리는 보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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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글을 쓴 학생, 아니 대한민국의 대학생 대부분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원했고, 그 대열에 동참하려 했다.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희한한 기구의 대의원(統代)들이 체육관에서 대통령을 선출했는데, 당시에는 중학생 또래들 조차도 “에이, 이게 무슨 민주주의야...”하며 비아냥거렸다. 어려서부터 ‘자유민주주의’를 배웠고, 제대로 된 적은 없지만 그래도 봐 왔던 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코 북녘의 독재정권을 대안(代案)으로 여기지는 않았다.

    대한민국의 경제 부흥을 확신하면서 자주국방에 동의했다. “싸우면서 일한다!”에 일체감을 보인 것이다. 물론 예나 지금이나, 뭐든지 무조건 반대하는 세력은 항시 있어 왔다. 

    월남전을 경험했고, 연구한 많은 이들은 자유월남의 패망은 자멸(自滅)이라고 말한다.

    만고(萬古)의 진리지만, 한 나라의 멸망은 외침(外侵)보다는 내부의 분열로 시작된다.

    현재의 대한민국이 1970년대의 자유월남과 판박이라고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아만 간다.

    북녘 세습독재정권, 그리고 그들과 영혼의 2인3각을 맺는 꼭두각시들의 화전양면전술과 통일전선이 그대로 먹히고 있다.
  • 요즈음 광화문에서 벌어지는 노랗고 붉은 머리띠의 난장판에 대해 “저게 무슨 자유민주주의야...”라고 비아냥거릴 중학생이 있을까? 우리는 후세(後世)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업보(業報)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가 없다.

    이 땅에 ‘대한민국 『후에』’가 생기지 않게 요행(僥倖)이나 바래야 할까 보다.

     <더  끼>


    # 후  기 : 그 시절 조국 대한민국의 자유와 민주화를 위해 ‘순수한 열정’을 바친 분들이 많다. 상상하기 어려운 고초를 겪으신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러한 분들 대부분은 그 시절을 용서했다.  큰 보상도 바라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분들이야 말로 대한민국 또 하나의 기적(자유민주주의 발전)을 이룬 중심이다.

    헌데, 입으로는 ‘민주화’를 외치면서도 내심 북한의 독재자를 숭모했거나, 정치적 야심을 갖고 있었던 이들은 후일(後日)에 악착같이 ‘민주화 유공자’라 하여 보상(국민의 세금이다)을 받아냈다. 그리고 자신들의 진심을 속인 대가로 높은 자리를 누리거나 아주 잘 먹고 잘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