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그의 흰머리였다. 하기야 이제 우리는 더 이상 20대 청년이 아니었다. 어느새 40대 중반의 중년이 되었던 것이다. 정말 묻고 싶은 말이 많았다. “본명은 뭐죠?” “지금은 무슨 일을 하고 계시나요?” 아니 가장 하고 싶었던 질문은 “아직도 주체사상에 대한 신념을 버리지 않고 있습니까?”였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도 내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던 것 같았다. 그러나 우리 두 사람은 서로 앉아서 커피만 홀짝거리고 있었다. 어색한 긴 침묵이 계속됐다.

     “건강하시죠?” 어색함을 참지 못한 필자가 말을 꺼냈다.
     “요즘 체중이 불어서, 매주 토요일 등산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약 30분 동안 등산 이야기만 한 채, 헤어졌다. 서로 본명도, 어디 사는지도, 그리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묻지 않은 채. 지금 생각하면, 조금 후회가 된다. 그 흔한 휴대폰 전화번호라도 알아 두었다가, 소주나 한 잔 하자고 할 것을. 그리고 한번 마음을 열고 진지한 대화를 나눠 볼 것을.

    그와의 만남은 회상의 날개를 1983년으로 돌려놓았다. 1983년 서울대 사회대에 입학한 필자는 그야말로 꿈에 부풀어 있었다. 우선 어려운 입시경쟁을 뚫고 원하던 대학, 원하던 학과에 입학했다는 점에서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도 상당했다. 부모님은 물론, 가까운 친지들도 모두 함께 기뻐했다. 아버님은 어른 앞에서 술을 배워야 한다면서, 직접 소주를 따라 주셨으며, 어머님은 백화점으로 데리고 가서 고급 양복을 한 벌 사 주셨다. 여러 친척 어른들로부터 용돈도 푸짐하게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비교적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고생하지 않고 자란 전형적 ‘범생이’ 출신인 필자가 소위 ‘급진 과격 운동권 학생’이 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상상할 수 없었다.

    대학생활이 이상하게 될 것이라는 조짐을 처음 접한 것은 ‘대학생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때였다. 어떻게 하면 대학생활을 보람되게 보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훌륭한 교수님들과 선배님들의 조언을 들을 수 있을 것이라는 필자의 소박한 착각(?)은 처음부터 여지없지 무너졌다. 오리엔테이션은 시작부터 비걱거렸다. 행사에 참가하려는 일부 선배들(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이들은 ‘운동권’이었다!)과 이들의 참여를 저지하려는 이른바 소위 ‘보직 교직원’들 간의 충돌. 곱게 공부만 열심히 하고 살아왔던 필자에게는 진풍경이 아닐 수 없었다.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할 말이 있다면, 하게 해 주면 될 것이고, 또 못하게 하면 그만 두지 나이 많은 교직원들에게 삿대질하며 덤비는 선배들. 양자 모두 이해가 되지 않았다. 더욱 가관인 것은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내용이었다. 수강신청 방법 등, 가장 기초적인 대학생활 안내를 제외하고는, 모두 처음부터 끝까지 “운동권 선배를 조심하라”는 내용이었다. 왜 조심해야 하는지에 대한 내용은 매우 빈약했다. 그저 “그런 선배 잘못 만나면 인생 조진다”는 식이었다. 그저 강조한 내용은 “술 잘 사주는 선배, 인생문제 상담해 주는 선배, 이러저러한 책을 추천하는 선배” 등을 조심하라는 것이었다.

    아무튼 1983년 3월 꿈에 그리던 대학생활이 시작됐다. 그런데 대학생활에 대한 환상이 깨어지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우선 학과 수업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름대로 많은 기대와 왕성한 지식욕을 가지고 있었던 필자는 당시 열심히 공부하겠다고 굳은 결심을 한 상태였다. 그리고 대한민국 최고 석학들인 교수님들에 대한 기대도 대단했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는 수업 몇 번 참석하면서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필자가 사회대에 입학한 것은 사회현상에 대해 이해해 보겠다는 다소 야무지면서도 건방진 욕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1학년 교양과목 내용들은 실망스러운 것들이었다. 예를 들어보자. 경제학의 경우, 필자가 1학년 교양에서 배우고 싶었던 것은 “경제란 무엇이며, 경제가 사회현상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그리고 각종 경제현상에 대한 기초적 이해” 등등 이었다. 그런데 교수님은 그저 수요공급 곡선을 그리면서, 이것이 시험문제에 나올 것이라고 강조할 뿐이었다. 수요공급 곡선은 고등학교 정치경제 시간에 대입 학력고사를 준비하면서 신물 나게 그렸던 곡선들이었다. 다시 반복한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고등학교 당시 “그러한 도표들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물어 보았을 때, 선생님이 씩 웃으시면서 하셨던 말씀이 생각났다. “그냥 외워! 그리고 의미 같은 것은 대학교가서 물어 봐! 지금 급한 것은 대학 합격이야!” 그때 아무런 불만이 없었다. 조금만 참으면, 대학가서 배울 것인데, 지금 서두를 필요 없으며, 지금은 그저 학력고사를 잘 치루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학에서 배우는 내용도 마찬가지였다. 경제학이 전공이 아닌 필자로서는 몇 가지 경제 법칙이나 도표를 암기하는 것보다는 그 내용과 의미, 그리고 전체 사회와 경제현상의 연관관계를 이해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강의는 경제학 원론에 나오는 법칙과 도표 몇 가지를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돼서, 그나마 많은 휴강과 결강 때문에 겨우 교과서 제2장도 못 마치고 끝났던 것이다. 

    필자가 특정 교수를 비난하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당시 왕성한 호기심과 지식욕에 가득 차 있던 많은 대학 신입생들을 대학 정규과정에서 소위 ‘지하대학’으로 내 몬 것에는 무성의한 교양 과목 강좌들도 크게 기여했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었던 것이다. 사실 정치학 개론이나, 사회학 개론 등도 별반 차이가 없었다. 교재에 나온 몇 가지 학설이나 법칙을 설명할 뿐, 그러한 것들이 어떻게 사회에 적용되는지, 그리고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 지를 설명해 주지 않았다. 그 결과 학교 수업에 대해 실망하게 되고, 1학기가 지나갈 때쯤에는 학교 공부에 대한 열의가 완전히 식어 버렸던 것이다.

    이러한 학교 공부에 대한 실망은 흉흉한 캠퍼스 분위기로 더욱 강화됐다. 당시 유행하던 군가에 패러디에서 개사해서 부르던 노래가 있다.

     “장미꽃 만발한 아크로폴리스, 쇠창살 둘러친 면학의 도서관...”

    아크로폴리스란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 토론이 이뤄졌던 광장의 이름을 본 따서 지은 서울대 도서관 앞 광장 이름인데, 이곳에서의 집회를 막기 위해, 장미를 심었던 것을 풍자한 것이었다. 그리고 시위 주동자가 도서관 창문을 열고 유인물을 뿌린 뒤, 밧줄을 타고 내려와 시위를 주동하는 것을 방지하게 위해 도서관 창문을 쇠창살로 막아 놓았던 것이다. 당시 소위 ‘고공’이라는 시위기법이 유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공’이란 시위 주동자가 건물 옥상 등에서 유인물을 살포하여, 시위를 개시한 뒤, 경찰이 체포하려고 하면, 밧줄을 타고 내려가 밑에 집결해 있던 시위대에 합류하는 시위 방식을 일컫는 말이었다. 지상에서 그냥 시위를 시작하면, 미리 잠복해 있던 사복경찰이 덮쳐서, “학우여!”라는 말에 “학”소리 밖에 내지 못한 채, 체포되는 경우도 있었을 정도로 시위가 철저히 봉쇄되고 있었기 때문에 고안된 방식이다. 또 그냥 옥상 등에서 구호만 외칠 경우에는 시위대가 구경꾼으로 전락할 경우가 많을 뿐만 아니라, 또 결국은 경찰이 체포를 시도하기 때문에 높은 곳에서 선동을 시작해서 밧줄 타고 내려가 시위를 이끄는 방식을 도입한 것이다.

    범생이였던 필자는 데모 따위는 절대로 안한다고 결심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오리엔테이션에서 주의하라던 유형의 선배들과도 일정정도 거리를 두고 있었으며, 학과 수업에 열심히 출석했을 뿐만 아니라, 교수님들이 읽으라는 참고도서도 몽땅 사서 열심히 읽었다. 그러나 우선 도서관에 가기가 싫었다. 혹시 설마 하는 분들도 계실지 모른다. 그러나 1983년 당시, 도서관에는 사복경찰이 상주하고 있었다. 아무리 사복을 입었다고 해도, 그가 경찰인지 학생인지는 금세 눈에 띄었다. 아니 경찰의 감시를 받으며, 공부하다니... 심지어 무료한 일부 사복 전경들이 도서관 복도에 분필로 원을 그려놓고 동전 던져 따먹기 게임을 하는 모습도 종종 눈에 들어왔다. 나중에 풍문인 것으로 밝혀졌지만... 사복경찰이 학교 캠퍼스 안에서 여학생을 성폭행했다는 소문도 들려왔다. 점점 학교가기가 싫어졌다.